*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50년 넘게 읽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문학-현대-산문 분야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어령 지음, 문학사상사, 2008







50년 넘게 읽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장동석 - 뉴필로소퍼 편집장





책의 수명이 불과 일주일이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있다. 하루에도 셀 수 없는 책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일주일 안에 독자들의 눈길을 받지 못하면 곧바로 사라진다는 슬픈 자조일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한 권의 책이 50년 넘게 사랑받고 있다면, 그 책을 일러 ‘고전’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바로 그런 책이다. 1693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글들을 토대로 출간된 이 책 덕분에, 당시 20대 후반의 이어령은 “젊은이의 기수” “언어의 마술사” “단군 이래의 재인”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그만큼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통찰이 깊었다는 말이다. 당대의 평만 좋았던 것은 아니다. 이 책은 50년 넘는 세월 동안 한국과 한국인, 그들의 삶의 내밀한 풍경을 담아낸 고전으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여전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책 중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글은 책의 첫머리를 연 ‘지프차’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지프차에 동승해 시골길을 달리던 이어령에게 노부부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지프차에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 노부부의 “누렇게 들뜬 검버섯의 그 얼굴, 공포와 당혹스런 표정, 마치 가축처럼 둔한 몸짓으로 뒤뚱거리며 쫓겨갔던 그 뒷모습, (중략) 그리고 그 위급한 경황 속에서도 서로 놓지 않으려고 꼭 부여잡은 앙상한 두 손… 고무신짝을 집으려던 그 또 하나의 손… 떨리던 손”에서 그는 “한국인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천 년을 그렇게 살아온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뒷모습을 만난 것이다. 쫓기는 자의 뒷모습을”이라는 말에 담긴 한국인의 자화상은 다소 우울하다. 이런 이유로 비판도 제법 많다. 지프차 위에서 바라본, 즉 타자의 시선에서만 한국인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이어령의 인식은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짙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윷놀이의 비극성’이라는 글도 제법 흥미롭다. 그는 서양의 주사위와 비교하여 윷은 한국인, 나아가 동양적 특성을 드러내기에 적당하다고 강조한다. 주사위는 그것을 던지는 존재의 운명을 단 하나로서 결정한다. 반면 윷은 4개가 서로 포개져 던지는 존재의 운명을 결정한다. 주사위로 대표되는 서구에서 개인주의는 필연이다. 반면 우리는 4개, 아니 그 이상의 것들이 포개지면서 운명을 결정한다. 얽히고설킨 관계, 즉 공동체적인 삶의 양식을 오랫동안 고수해왔다는 것이다. 윷가락을 던지는 일에 흥겨워만 했지, 이 단순한 놀이에 이런 정서가 숨어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흥에 겨운 윷가락 던지는 소리에 우리 역사의 짙은 그늘이 존재하기도 한다. 윷놀이는 삼국시대부터 고유한 풍습이지만, 이어령이 보기에 윷놀이는 “파당이라는 서로의 연관된 운명의 형세 밑에서 권력과 행운의 득실극이 전개”된, 즉 피비린내 나는 패거리 문화의 반영이다. 앞서 달리는 말을 잡아야만 이기는 놀음, 그것에 때론 환호하고 때론 장탄식을 내뱉는다. 하지만 잡힌 말이 다시 등장해 자신을 잡은 말을 잡고, 이 줄기찬 먹이사슬을 무리 지음의 슬픔과 연결 짓는다. 지긋지긋한 윷판에서 몇 개의 지름길을 찾아 빨리 도망쳐 나가는 것이 유일한 승리가 되는 일, 그것은 우리 민족이 내쳐 달려온 역사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의 모순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글은 ‘끈의 사회’이다. 옛말에 “끈 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고립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연줄을 댈 수 없는 상황에 이른, 어쩌면 윷놀이에서도 드러난 당파적 요소가 여기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문제는 50년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한국 사회에서 끈에 대한 욕망을 줄어들지 않았다. 물론 혈연, 지연, 학연의 끈은 다소 줄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구축된 새로운 끈에 대한 천착은 갈수록 심해져,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처럼 “세상의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온갖 접속을 시도”한다. 세태는 변했지만, 이어령의 통찰이 유효한 이유다. 하지만 그 끈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어쩌면 미래가 없을 수도 있다. 이어령도 이 대목을 짚어낸다. 얽히고설키다 보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 안에서 ‘나’와 ‘너’를 구분하기도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표현했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반, 출간 40주년을 기념해 나온 개정판은 지난 세태의 변화 양상과 자신의 변화된 가치관을 문답 형식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그 문답에서 이어령은 ‘정자(亭子) 공간 시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정자 공간의 시점이란 이중성, 복합성, 쌍방향성같이 상호 간 교환 가능한 겹 시각을 나타내는 시점이다. 한국인에게 정자는 무욕망과 비소유의 공간이자, 사방으로 열려진 곳으로, 세태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그 정자를 작가는 현대인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기술과 접목시킨다. 인터넷, 인터랙티브, 인터페이스 등 요즘 각광받는 것들의 ‘INTER’가 바로 정자 공간 시점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한 방향으로만 직진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공간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니 사회와 기술은, 과거와 현재는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네트워크’ 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어령은 책 서두에 “우리들의 성장은 밤 속에서 그리고 폭풍 속에서 역리(逆理)의 거센 환경 속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먼저 아파해야 된다는 것, 그 아픔의 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책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내용의 전부”라고 이야기한다. 뼈아픈 통찰만이 우리를 성찰 내지 성장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때론 한국인의 삶에 대해 지나친 폄하가 있고, 그 원인은 지나차게 타자적 시각 때문이라는 비판이 없지 않지만, 이어령의 한국과 한국인의 삶에 대한 근원적이고 꾸준한 천착은 나름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런 점에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이어령이 평생 쌓아 올린 생각의 궤적의 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 50년 넘는 세월 동안 독자들에게 읽히는 데는 그만한 가치와 분명한 이유가 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축소지향의 일본인』

이어령 지음, 문학사상사, 2008


『한국인의 탄생』

최정운 지음, 미지북스, 2013


『아흔 즈음에』

김열규 지음, 휴머니스트, 2014 






장동석 - 뉴필로소퍼 편집장


출판평론가로 활동하며 〈출판저널〉편집장, 〈기획회의〉편집주간을 지냈고, 지금은 계간 철학잡지 〈뉴필로소퍼〉편집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살아 있는 도서관』 『금서의 재탄생』 『다른 생각의 탄생』이 있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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