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내 시의 기반은 대지다

문학-현대-운문 분야 『꽃속에 피가 흐른다』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꽃속에 피가 흐른다』

김남주 지음, 염무웅 엮음, 창비, 2004








내 시의 기반은 대지다 


황규관 - 시인




김남주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일단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다시 1980년대의 복판으로 성큼 들어가는 일이다. 김남주는 1979년 10월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9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김남주의 시는 감옥 생활에서 절정이었다. 도리어 감옥에서 풀려난 후로는 시에서 힘과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인 자신도 그것을 알았는지 “차라리 어둡고 괴로운 시절”(「근황」)에 그나마 자신은 쓸모가 있었다고 한탄하기까지 했다. 김남주가 석방되고 난 이후에 한국 사회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김남주 개인이 느끼기에 감옥에 들어가기 전과 감옥에서의 시간 그리고 출옥 이후의 시간에 큰 낙차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김남주가 감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적’은 오늘날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있다. 따라서 김남주의 ‘칼’과 ‘피’ 그 자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김남주의 시를 오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김남주의 시 전체가 하나의 정치적 ‘에티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과감히 시적 양식을 포기할 만큼 자신의 시가 민중의 무기로 쓰이길 바랐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자신의 시가 “호사가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나는 나의 시가」) 거부했다. 그렇기 때문에 김남주의 시에서, 이를테면 이분법적인 경직성만 읽게 된다면 그의 시를 잘못 읽게 되는 것이다.


문학 제도 내부에서 김남주의 시를 잊고 싶은 이유는 김남주의 시를 비평할 만한 마땅한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김남주의 시는 분석의 도구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그의 데뷔작인 「잿더미」를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그가 시적 양식을 구축하는 데 무능했던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유명한 테제를 빌린다면, 그동안의 시가 세계를 관조하고 해석하는 데 그친 반면, 김남주의 시는 세계를 아예 직접 바꾸려고 했을 뿐이다. 시인의 직선적이고도 선명한 현실 인식은 그렇게 탄생했고 어쩔 수 없이 언어 자체가 ‘칼’이 되어야 했다. 떠도는 말에 의하면 그가 직접 들었다는 칼은 단지 그의 시에 대한 메타포가 아니다. 도리어 그의 시가 칼의 연장이었다.


감옥 생활 중 자신의 정치적 패배를 몇몇 작품에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은 그가 가진 현실에 대한 관념 자체를 수정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김남주는 철저하게 리얼리스트이길 바랐다. 또 언제나 ‘대지’라는 물질성 위에 서고자 했다. 「다시 시에 대하여」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시의 기반은 대지다/ 그 위를 찍어내리는 곡괭이와 삽의 노동이고/ 노동의 열매를 지키기 위한 피투성이 싸움이다” 김남주가 바랐던 세계, 즉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은 그래서 백면서생의 것이 아니다. 그의 삶 자체가 근대화의 가속화로 해체되고 있던 농촌의 복판에 있었고, 농촌을 떠나서 장시간·저임금 노동자가 되어야 했던 “형제들”과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이 책의 발문을 쓴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김남주에게서 받은 1974년 12월 31일의 편지를 소개하고 있다. “형은 읍내에서 장사하다 망쪼들어 서울로 내뺐습니다. 여동생 둘이 있는데 둘 다 서울로 보따리를 쌌습니다. 큰것은 어떤 녀석과 결혼한다고 돈을 달라는 편지가 오고, 작은 것은 어느 음식점에 있다고, 춥다면서 다시 집에 오고 싶은데 허하여주십사고 편지질입니다.” 김남주 자신이 근대화로 해체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집안에서는 그에게 잔뜩 기대를 걸고 “식구마다 논밭 팔아/ 대학까지 갈쳐” 놓았지만 결국 시인은 “들쑥날쑥 경찰이나 불러들이고/ 허구헌날 방구석에 처박혀/ 그 알량한 글이나”(「아우를 위하여」) 쓰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김남주는 군사독재 권력이 강제하는 현실에 저항하는 길로 들어서는데, 그의 시 전체는 점점 더 서슬 퍼런 ‘칼’이 되었다. 김남주의 시에서 강력한 정치적 ‘에티카’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든 ‘칼’은 적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여지없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정치적·도덕적 당위만 반복하는 작품들 것 같지만, 김남주는 감옥에서 외국 시와 역사를 공부하면서 느낀 자신만의 사상을 가지고 시를 썼다. 이 사상이 그를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게 했다. 그 “사상의 거처”는 “노동의 대지”(「사상의 거처」)였기 때문이다. 김남주의 시는 대지에서 출발했으며 대지로 돌아가려 는 몸부림이다. 출옥 후 강화도로 터전을 옮겨 “노동의 대지에 뿌리를”(「노동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내리려 했던 것도 그 실천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오늘날 김남주의 시를 다시 읽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것은 한 대지적 인간이 대지를 파괴하는 역사와 처절하게 싸운 시적 기록을 살펴본다는 의미일 것이다. 김남주의 시에 담긴 정치적 메시지를 그대로 읽으면 김남주의 시는 적잖이 노후화된 것으로 읽히겠지만, 잃어버린 대지를 찾으려는 정치적 몸부림으로 읽으면 우리는 김남주의 시를 새로이 읽을 수 있는 폭넓은 입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근대화는, 다른 제3세계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외세와 군사독재권력의 압력으로 진행되었다. 외세와 군사독재 정권이 강제한 자본의 축적은 농촌 공동체의 해체를 비극화했다.


자본의 축적이란 농민에게서 대지를 빼앗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거기에 외세와 군사독재 권력이 더해지고 민족의 분단이 가시철조망처럼 얹어졌으니 그 속도와 강도를 감내해내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김남주는 수탈이 시작되는 시점에 태어났고 그것이 가속화되던 시간 속에서 시를 썼다. 그만큼 그런 역사적 시간을 산 시인도 드물 것이다. 이것을 충분히 감안하고 읽을 때 우리는 온전히 김남주의 고통이 마냥 옛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옥중에서 쓴 시가 한동안 정리 없이 출간되었고, 김남주의 정본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염무웅이라는 편집자가 옥중 생활 전부터 시인의 시를 받아서 자신이 주관하는 잡지에 실었다. 시인과 교감을 통해 누구보다 그의 내면에 근접하려고 노력했던 편집자가 펴낸 이 책은, 김남주의 시를 간결하게 그러나 핵심을 향하여 우리를 인도한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하인리히 하이네 외 지음, 김남주 옮김, 푸른숲, 2018


『김남주 평전』

김삼웅 지음, 꽃자리, 2016


『김남주 산문 전집』

김남주 지음, 맹문재 엮음, 푸른사상, 2015







황규관 - 시인


전태일문학상을 받고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강을 버린 세계에서 살아가기』『리얼리스트 김수영』이 있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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