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피로의 새로운 의미를 찾다

사회 분야 『피로사회』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피로의 새로운 의미를 찾다


장동석 - 뉴필로소퍼 편집장





건강보조제 광고에 빠지지 않는 홍보 문구는 아마도 ‘피로야 가라!’가 아닐까 싶다. 확대 해석해 보면 그만큼 많은 사람이 ‘피로’를 달고 산다는 이야기일 터이다. 월요병을 앓는 직장인들, 경기침체에 한숨짓는 자영업자들 등등 일일이 그 피로의 양상을 나열하기도 어려운 시절이다. 무한경쟁 사회가 도래하면서 현대인의 피로는 누적될 뿐 경감되지 않는다. 버티기 힘든 사람들은 단순 호소를 넘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세계 자살률 1위라는 슬픈 지표를 보면, 피로는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는 사회 전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이 일련의 메커니즘을, 나아가 그것을 슬기롭게 재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일러주는 책이다. 현대인이 피로에 짓눌릴 수밖에 없는 원인은 여러 가지겠지만, 한병철의 주장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성과주의’가 그 주된 원인이다. 한국만 놓고 보자. 1990년대 후반 IMF는 한국 사회의 모든 도식을 바꾸어 놓았다. 평생직장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단어가 되었고, 그 자리를 비집고 무한경쟁이라는 무시무시한 개념이 들어섰다. 무한경쟁 시대의 인간은 스스로의 발전을 추동하는 존재가 아니다. 현대사회의 인간은 발전을 요구당하는 존재들이다. IMF 직후 출간된 책들을 기억하는가. 파워포인트를 남보다 조금 더 잘하면 생존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관계의 기술을 하나라도 더 습득하면 생존할 수 있는 것처럼 부추기는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베스트셀러 목록이 그랬다는 건, 발전을 위한 스스로의 의미 부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요구를 당했다는 증거인 셈이다.


결과는 어땠는가. 파워포인트 기술 하나 더 안다고, 인간관계 잘한다고 평생직장이 허락되었던가. 결과는 처절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수많은 스펙이 있음에도 변변한 직장을 구하기 어렵다. 물론 이런 사회의 변화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20세기 중반까지 세계는 “냉전”으로 대변되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였다. 더불어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폭력적으로 작용한 “규율사회”였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는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또한 “할 수 있다”는 말이 지상 최대의 가치를 지닌 사회로 변모했다. 이른바 “긍정의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한병철은 이 긍정의 사회를 일러 “성과사회”라고 명명한다. 이 사회의 유일한 규율은 “성공”이며, 성공을 위해서 강조된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Yes, we can!)이기 때문이다. 얼핏 듣기에 20세기 후반의 변화는 모든 것이 가능한, 그야말로 가능성의 시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문제는 ‘오용’ 혹은 ‘남용’이다. 성공이 유일한 규율이 되면서 긍정성은 과잉으로 귀결되었다. 공동체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누구도 내게 삶의 원칙을 강요하지 않는 시대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말하면 남들에게 보여줄 성과를 내고 또 성공하기 위해 자신을 혹사한다. 옛 성현의 말에 ‘만족할 줄 알면 항상 즐겁다’고 했지만, 인간이 어디 그런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은 요즘 말로 ‘오바’하게 되고, 결국 심신은 피로해질 수밖에 없다. 성과를 통해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던 자아는 피로와 함께 좌절감을 경험하게 된다. 현대사회에 우울증이 만연하는 이유다. 한병철의 말이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한병철은 이 악순환을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가 낳은 결과물로 본다. 인간의 욕망이 끝없음을 간파한 자본주의 시스템은 성과보다 더 큰 성과, 그것보다 더욱더 큰 성과를 올리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망을 끝없이 부추기면서 자본주의 전체의 생산성을 극대화한다. 문제는 성공 주체인 내가 나를 착취한다는 사실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성공을 위해 뛰는 시대에, 내가 주체로서 누군가를 좌지우지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러니 흔한 말로 나를 ‘쥐어짜야만’ 한다. 나를 쥐어짜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나에 대한 무한한 자유는 결국 피로를 누적시키고, 좌절케 하며, 우울증을 낳는다. 이를 적나라하게 지적한 한병철의 말은 무섭기까지 하다.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무한한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한병철은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착취자입니다”라는 현대사회의 문제점만 지적하고 책을 끝맺지 않는다. 세상만사가 처절하게 무너진 바로 그곳에서 다시 딛고 일어서야 하듯, 한병철은 피로-좌절감-우울증으로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말한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피로의 개념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다. 아니 새롭게 인식한다기보다 “피로가 가진 또 다른 측면”을 부각시킨다는 표현이 옳을 듯하다. 한병철은 성과사회의 과잉활동과 과잉자극에 맞서기 위해서는 “사색적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휴식” 등등이 필요한데, 피로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피로는 우선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한다. 과도한 의미부여 아니냐고 타박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피로의 순간, 즉 좌절감과 우울증의 극단에서 발생을 조금만 전환하면 새로운 인식도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욕망의 억제는 “긍정적 정신으로 충만한 자아의 성과주의적 집착을 완화하는 효과도 있다. 성과주의적 집착에서 벗어나는 순간 주변이 하나둘 보일 것이고, 그렇게 발견한 주변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이 일어난다. 그 관계 회복은 새로운 삶을 추동하는 “영감”마저 선사한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한 번도 예외 없이, 사람들을 그 시스템의 톱니바퀴로 만드는 일에 실패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한병철의 주장이 나름 유의미한 것은 피로가 우리를 자기 착취로 내몰고 있다는 점, 거기서 현대인은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도록 돕는다는 사실이다. 그 인식의 토대 위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벼릴 수 있지 않겠는가. 벼려야 할 덕목이 단 한 가지는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경쟁을 위한 실력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주저앉은 자리에서 내처 더 눌러앉는 것일 수도 있다. 결국 우리 모두가 한 인격으로서 자아를 지녔다는 것, 하여 새로운 삶은 나가는 방법 또한 그 자아의 결실이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 책은 그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동녘, 2012


『위험사회』

울리히 벡 지음, 홍성태 옮김, 새물결, 2006






장동석 - 뉴필로소퍼 편집장



출판평론가로 활동하며 〈출판저널〉편집장, 〈기획회의〉편집주간을 지냈고, 지금은 계간 철학잡지 〈뉴필로소퍼〉편집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살아 있는 도서관』 『금서의 재탄생』 『다른 생각의 탄생』이 있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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