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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역사문화유산원
임진강 유역 삼국의 성곽과 관방체계
2018 경기문화재연구원·중부고고학회 학술대회
이 글은 ‘2018 경기문화재연구원·중부고고학회 학술대회 - 임진강 유역, 분단과 평화의 고고학'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
임진강 유역 삼국의 성곽과 관방체계
심광주(토지주택박물관)
Ⅰ. 머리말
Ⅱ. 백제 성곽과 관방체계
Ⅲ. 고구려 성곽과 관방체계
Ⅳ. 신라 성곽과 관방체계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임진강은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한반도의 중부를 관통하며 흐르고 있다. 마식령산맥이 뻗어 내리는 백두대간의 두류산(1,324m)에서 발원한 임진강은 254㎞를 흘러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서 한강으로 합류된다. 남동부의 광주산맥, 북서부의 아호비령산맥, 북동부의 마식령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를 유역으로 하고 있으며 면적은 8,118㎞에 이른다.
‘산은 나누고 강은 합친다’고 하지만 임진강은 독특한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우리 역사상의 갈등기마다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구분하는 경계선 역할을 해왔다. 임진강의 양안에는 임진강이 용암대지 위에 만들어 놓은 15~20m에 달하는 거대한 천연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百里長城’이라고도 불리는 이 수직절벽은 임진강을 天惠의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하게 했다. 임진강이 샛강과 만나는 곳에는 여울목이 형성되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교통로가 형성되었다.
임진강을 건너는 교통로만 방어하면 적의 침략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으므로 여울목이나 나루터 인근에 성곽이 구축되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청나라의 기병을 막으려면 ‘천연의 垓子’인 임진강의 여울과 나루터를 지키는 것이 가장 훌륭하고 긴요한 방어책이라는 견해가 조정에서 무수히 거론된 것도 이와 같은 임진강의 지리적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1) 강변에 구축된 성들은 渡河하는 적을 저지하는 기능 외에 육상 교통로와 임진강의 수로를 보호하는 역할도 수행했다.2)
임진강 유역 삼국의 관방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진강 유역에 소재하는 성곽들에 대한 기초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이었던 임진강 유역은 오늘날에도 남과 북의 군사분계선이 지나고 있어 연천군 왕징면 이북지역으로는 접근 할 수 없는 실정이다. 향후 삭령, 안협, 이천에 이르는 임진강 상류지역의 성곽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 야 임진강 유역 삼국의 관방체계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진강 유역에서 확인된 성곽들의 축성법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다. 축성주체와 축성시기에 따라 축성법이 달랐으므로, 축성법을 통해 축성주체와 축성시기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축성 주체에 대한 구분없이 해당지역에 소재하는 모든 성곽과 교통로가 삼국시대에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상정하고 관방체계를 분석하는 것은 오히려 실제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게 할 수도 있다. 조사를 통하여 확인되는 그대로의 양상을 이해하는 것이 한정된 인력과 자원으로 국가를 경영해야 했던 당시의 실체적 상황에 좀 더 근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곽의 분포양상은 축성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대의 전쟁은 성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점령지역에 대한 관리도 성곽이 담당했다. 그러므로 국경인지, 주요 교통로인지, 아니면 도성이나 지방 행정의 중심지인지에 따라 성곽의 분포양상이 달랐다. 임진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백제, 고구려, 신라의 성곽 분포양상을 살펴보면 축성주체와 축성시기에 따라 임진강 유역이 어떻게 경영되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임진강 유역에 대한 국가별 점유시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가장 먼저 임진강 유역을 점유했던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는 475년이 그 하한이 된다. 고구려의 남진과 함께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게 된 임진강 유역은 553년 이후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에 따라,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신라가 120여 년간 대치하게 된다.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멸망 이후, 임진강 유역은 온전히 신라의 영토에 속했다. 임진강이 백제의 영역이었던 시점과 신라에서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시점은 적게는 76년에서 많게는 500년 이상의 시차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관방체계와 축성법은 서로 다른 것이지, 기술수준이라는 관점에서 비교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임진강 유역의 삼국시대 성곽 중 백제성은 육계토성, 월롱산성, 고모리산성 등이 조사되었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구체적인 양상이 확인된 것이 없다. 고구려성은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무등리1·2보루에 이르기까지 삼국의 성곽 중 가장 많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신라성은 오두산성과 칠중성, 대전리산성, 대모산성, 반월산성 정도지만 오두산성과 칠중성을 포함하여 임진강에 접한 신라성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조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발표는 이러한 지금까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임진강 유역의 백제, 고구려, 신라의 성곽을 중심으로 축성법과 관방체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Ⅱ. 백제 성곽와 관방체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 임진강 유역을 가장 먼저 차지한 것은 백제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조왕 13년(BC 6)에 백제의 강역은 이미 북으로는 浿河(예성강), 남으로는 熊川(안성천), 서쪽으로는 大海(서해), 동쪽으로는 走壤(춘천)에 이르렀다고 했다. 국가의 성립과정이나 고고학적인 증거를 고려할 때 온조왕대에 이렇게 넓은 지역을 확보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러나 연천 일대에서 확인되는 무기단식 적석총의 존재로 볼 때 비교적 이른 시기에 백제가 임진강 유역으로 진출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백제 초기 임진강 유역에는 靺鞨이나 樂浪의 侵入이 빈번했다. 이 시기 靺鞨로 지칭되는 東濊族들은 원산만 지역을 근거지로 하였는데 추가령구조곡에 형성된 古代 交通路를 따라 평강과 철원을 지나 임진강 한탄강 유역에 자주 등장했다. 백제에서는 이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칠중하와 功木達縣 등 적성과 연천 일원과 남한강과 북한강 상류 쪽에 주로 토성과 木柵 위주의 성을 쌓았다.
『삼국사기』에는 한성백제의 성곽명칭은 34개가 등장하며 축성된 성은 24개가 등장한다. 마수성·한산성·석두성·고목성·대두산성·탕정성·고사부리성·우곡성·북한산성·적현성·사도성·청목령성·관방성·쌍현성·사구성·한산하목책·병산책·독산책·구천책·웅 천책·사도성 옆의 두목책·청목령목책 등이다. 성곽의 수축기사도 2회의 위례성 수축을 비롯 하여 원산성·금현성 등 모두 7회에 이르고 있다. 이외에도 초축이나 수축기록 없이 성의 이름만 기록된 것은 우곡성·술천성·부현성·낭자곡성·석문성·독산성·수곡성·팔곤성·관미성·한산성·북성·남성 등이다. 성곽의 축성이나 수축기록은 한성백제기가 웅진·사비기보다 더 많이 등장한다. 이는 급격한 영토확장에 따라 성을 쌓고 관리하는데 국가의 역량이 집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성시기 백제의 성은 城과 柵으로 구분된다. 성의 명칭이 확인되는 34개 중에서 8개의 책이 등장하여 전체의 1/4 정도에 해당하는 성이 책으로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성백제기에 구축된 柵의 형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선후기 순조 11년(1811) 洪景來의 반군을 공격할 때의 내용을 담은 병풍그림인 ‘辛未定州城攻圍圖’에는 관군이 주둔하던 임시 營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통해 목책은 일정한 간격으로 굵은 나무기둥을 땅에 박고, 나무기둥 사이에는 목주를 연접하여 세우고, 내외벽의 중간에 橫木을 결구하여 고정시키는 형태로 추정된다.3)
그림1. 신미정주성공위도 중의 목책(조) | 길성리 토성의 목책유구 |
백제의 목책도 이러한 구조와 유사할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최근의 발굴조사 사례를 보면 단순 목책이 아니라 어느 정도 토축부를 조성하고 목책을 설치하는 형태였음을 알게 되었다. 화성 吉城里土城은 화성군 향남면의 태봉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둘레는 2,311m로 매우 큰 규모이다.4) 중부고고학연구소에 의한 발굴 조사 결과 성벽은 기저부를 정지하고 성질이 다른 흙으로 交互盛土 방식으로 축조하였으며, 전형적인 판축기법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5) 그런데 토성벽의 높이가 1.2m 정도에 불과하며 토성벽의 상부에 0.9∼2m 간격으로 폭 0.7∼1.8m, 깊이 0.6∼1.2m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직경 20∼30㎝의 목주를 세워놓았음이 확인되었다. 이 목주는 목책유구로 추정되고 있다.6) 토성부는 목책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고 성곽방어의 주기능을 목책이 담당하고 있으므로 길성리토성은 토성이라기 보다는 목책성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길성리토성과 유사한 구조가 천안 백석동토성에서도 확인된다. 백석동토성은 표고 100m 내의 완경사 구릉지 정상부에 구축되었으며 전체 둘레는 260m이다. 지반을 정지하고 일정한 높이까지 성토다짐 후 굴광하여 130~150㎝ 간격으로 직경 20㎝ 내외의 목주를 세웠다. 이 유구를 영정주를 사용한 판축토성이라고 보았지만7) 성토 후 목주를 세우기 위해 굴광한 흔적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백석동토성 역시 목책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보고서는 간행되지 않았지만 최근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청주 석화리유구도 구릉 정상부 외곽을 감싸며 일정한 높이까지 성토다짐 후, 100~150㎝ 간격으로 목주를 박은 목책유구가 확인되어 동일한 기법으로 조성된 목책성으로 추정된다. 목주의 간격은 100㎝, 125㎝, 150㎝ 등 25㎝ 간격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목주를 세울 때도 임의로 박지 않고, 당시의 營造尺인 단위길이 25㎝인 南朝尺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2. 청주 석화리목책성 | 천안 백석동토성 |
최근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안성 도기동산성의 백제 목책은 지반을 계단식을 절토하고 기저에 1.5m 간격으로 1열의 목주를 세워서 고정한 후 성토다짐 하였음이 확인된다. 도기동산성은 길성리토성이나 석화리목책의 경우처럼 성토 후 굴광하지 않고, 목주를 세우고 성토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8) 목책에 토축이 보강되었다는 점은 동일하다.
이와 달리 대전 월평산성의 목책은 해발 130m 내외의 구릉 사면에서 확인되었다. 풍화암반을 방형으로 굴착하여 직경 1m, 깊이 1.1m 내외로 조성하고 직경 15~30㎝ 내외의 목주를 90㎝ 간격으로 배치하였음이 확인되었다.9) 완주 배매산 목책은 해발 123m 정도의 독립구릉 사면에서 확인되었다. 목책은 능선을 따라 폭 60㎝, 깊이 50㎝의 溝를 파낸후 70~100㎝ 간격으로 직경 30~50㎝의 구덩이를 파내어 목주를 세웠다. 출입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에는 별도의 문기둥을 세웠으며 목주공 바닥에는 할석을 받쳐 놓았다.10)
이러한 발굴조사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백제 목책의 구조적인 특징은 1열의 목책렬로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목책은 원지반을 정지하고 일정한 높이까지 성토 후 굴광하고 1m 내외의 간격으로 직경 25㎝ 내외의 목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보조목을 세워서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柵은 백제의 전시기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성을 쌓는 공력에 비하여 방어력은 상대적으로 높았던 효율적인 방어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명칭을 통한 입지를 살펴보면 柵은 병산책, 구천책, 청목령책, 탄현책 등 산이나 고갯마루에 주로 축성되었다. 城도 대두산성과 북한산성, 청목령성, 독산성, 한산성, 부현성, 적현성, 쌍현성 등 역시 산이나 고갯마루, 또는 강변에 접한 교통의 요충지에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의 명칭만 보더라도 이 시기에 축성된 대부분의 성·책들이 산에 의지하여 쌓은 山城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초기에 柵으로 만들어졌던 것이 후에 城으로 개축는 것으로 보아 책보다는 성이 안정적인 방어력을 담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漢山下木柵은 慰禮城으로, 禿山柵은 禿山城으로, 청목령목책이 청목령성으로, 熊川柵이 熊川城으로 개축되었다.
백제 초기에는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 역시 백제의 성장을 막기 위해 계속 압력을 가해 왔다. 낙랑이 직접 침략하기도 하고, 말갈을 부추겨 백제를 공격하게 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 七重河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도 이 시기이다.
겨울 10월 말갈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렸다.11)
임진강은 징파강, 구연강, 신지강, 칠중하, 호로하 등 위치에 따라 수 십 여 개의 이름이 있었다. 칠중하는 현재의 육계토성 부근의 임진강을 지칭한다. 당시 임진강변에 있었던 백제토성으로는 六溪土城이 있다. 육계토성은 임진강에서 수심이 낮아 주요 도하지점의 하나였던 가여울과 서쪽의 두지나루를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에 있었다.
육계토성은 임진강 남안의 낮은 구릉성 충적대지(해발20m)에 내성과 이를 둘러싼 외성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진 토성이었다. 평면 형태는 북동-남서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장타원형이다. 성의 둘레는 1,945m이며 성 내부에서는 凸자형 주거지와 呂자형 주거지 등 백제주거지에서 3 ∼4세기대를 중심으로 하는 다량의 백제유물과 고구려토기가 출토되었다.12)
그런데 靺鞨의 침입을 백제가 七重河에서 맞아 싸우던 시기에 과연 육계토성이 있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기록의 내용이나 육계토성에 대한 발굴 결과로 볼 때 말갈의 침입이 있었던 기원 전후 시기는 육계토성이 축성되기 이전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백제는 고이왕대에 이르러 경기도지역의 대부분을 백제의 권역에 포함하게 되었다. 근초고 왕대에는 황해도에서 경기·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을 확보하게 된다. 고구려의 남진으로 낙랑과 대방이 멸망함에 따라 4세기대에 백제는 드디어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 백제가 고구려와 공방을 벌이는 주요 전투지역은 雉壤城(황해도 배천), 水谷城(황해도 신계), 浿河(예성강) 등 예성강 이북지역의 황해도 일대이다. 심지어 백제는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한다.
이것은 4세기 대에는 백제의 국경이 예성강지역까지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임진강 유역은 이미 백제의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속하게 되었으므로 임진강 유역에서의 전투 록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임진강 유역에서 많은 백제성이 확인되지 않는 것도 아마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예성강 이북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 있어 칠중하와 호로하의 여울목은 중요한 교통로로 부각되었다. 따라서 한성-적성-치양, 수곡 등으로의 교통로가 개설된 이후 교통로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에서 육계토성이 구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漢城百濟 시기의 百濟城 중에는 고양 멱절산성과 포천 姑母里山城, 화성 疎勤山城 및 안성 望夷山城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파주 月籠山城과 의왕 慕洛山城에 대한 지표조사가 실시되어 구조적인 특징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경기도박물관과13) 중앙문화재 연구원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실시된 고양 멱절산 유적은 한강 북안의 해발 27m 지점에 위치하며 전체 둘레는 300m로 추정된다. 성벽은 풍화 암반을 굴착하거나 土堤를 조성하고 외벽에서 내벽쪽으로 황갈색 풍화암반토와 회색점질토를 交互盛土했다. 출토유물은 삼족기, 심발형토기, 장란형토기, 단경호 등이 출토되었으며 풍납토성 출토유물과의 비교를 통하여 멱절산 유적의 축성시기는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14)
姑母里山城은 포천시 소흘읍의 고모산(해발 386m)에 위치하며 전체 둘레 1,207m로 비교적 큰 규모의 백제성이다.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지표조사가 실시되고15) 최근 추정 동문지 구간에 대하여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16) 축성방법은 경사면을 삭토하고 상면을 성토하여 토루를 조성하였으며, 방어에 취약한 동벽구간은 할석으로 석축성벽을 조성하였는데 단과 열이 불규칙하고 성벽면이 정연하지 못하다. 고모리산성의 사용 시기는 출토유물을 근거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성 疎勤山城은 화성시 양감면의 소근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둘레는 629m이다. 경기도박물관에 의한 조사 결과 지반을 정지한 후 암반을 溝狀으로 길게 굴착하고, 사다리꼴로 설치한 영정주와 판목을 계속 이동시키면서 축조하였음이 확인되었으며, 출토유물을 근거로 5세기대 후반에서 6세기 초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7)
안성 望夷山城은 안성시 일중면의 망이산(해발 472m)에 구축되어 있으며, 전체 둘레 350m의 토성이다. 단국대학교박물관에 의한 발굴조사 결과 망이산성 성벽은 내부가 높고 외부가 낮은 지형을 이용하여 외측에 영정주와 판목을 설치하여 성토 후 이동시키며 토루를 쌓아올린 것으로 확인되었다.18)
경기도박물관에 의하여 지표조사가 이루어진 파주 월롱산성은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월롱산(해발 229m)에 위치하며 둘레는 1,315m에 달한다. 성벽에 대한 단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지만, 천연암벽을 이용하여 성토방식으로 축성하였으며, 일부 구간은 할석으로 성벽을 보강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9)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지표조사가 실시된 慕洛山城은 의왕시 오전동과 내손동 경계의 모락산(해발 385m)에 위치하며 전체 둘레는 878m이다. 성벽은 토축과 석축 또는 토석 혼축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노출된 석축성벽은 다듬지 않은 부정형의 할석으로 성벽을 구축하였으며 성벽 단면을 보면 성토된 土築部 내에 작은 할석이 일부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20)
육계토성이나, 월롱산성, 고모리산성, 모락산성, 망이산성, 소근산성 등 지금까지 조사가 이루어진 한성백제시기의 산성들은 비교적 규모도 크고, 위치로 보아 각 방면에서 도성으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 성들이다. 이 성들은 축성시점은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축성기법에서는 공통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 토성으로 구축되었거나 토성벽에 약간의 석축이 더해진 형태의 성곽이다. 토성의 축조기법도 削土와 盛土 중심의 단순한 토루에서 永定柱와 板木이 사용되는 보다 발전된 형태의 판축토성으로 발전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포천 고모리성이나 파주 월롱산성, 의왕 모락산성 등의 백제성에서는 일부 석축도 확인되지만 모두 가공하지 않은 할석을 사용하여 취약한 토성 구간을 보강한 형태이다. 백제 토성의 입지는 대체로 평지나 완경사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다. 도성의 규모는 3㎞ 내외이며, 산성의 경우는 둘레 300m의 보루 규모에서부터 2.3㎞까지 입지와 기능에 따라 다양한 규모의 성곽이 있었다.
성벽의 축조방식은 후대의 판축기법과 달리 여러 번의 공정에 의하여 성벽이 구축되었다. 축 공정은 풍납토성이나 소근산성, 망이산성처럼 중심에서 내외측으로 덧붙여 가는 방법과 길성리토성이나 증평 추성산성처럼 내측이나 외측에서부터 성벽을 덧붙여 나가는 방식이 확인된다. 성벽은 성질이 다른 흙을 交互盛土하였으며, 중심토루와 외피토루 간의 경계가 없거나 모호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성벽을 쌓을 지반은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하거나 계단상으로 정지하여 지반과 성벽의 마찰력을 높였다. 토성의 내부에서는 목주공과 석열, 基槽라 불리는 溝狀施設이 확인된다. 목주는 성토공정이나 미끌림 방지와 관련된 것이고, 석열로 성벽의 작업구간을 구획하였으며, 구상시설은 성벽이 움직이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敷葉工法은 토루나 제방의 하단에 식물유기체를 깔아 토층이 압력을 견디고 지반을 단단하게 하는 성토방법이다. 잎이 붙어 있는 나뭇가지를 깔면서 성토하는 방법은 동아시아의 고대 유적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토축공법으로 풍납토성과 부여나성 등 백제성곽 뿐 아니라 신라유적인 울산 약사동 제방유적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렇지만 한성백제 시기의 석축성으로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산성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21) 한성백제 시기의 석재 가공기술의 수준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풍납토성과 석촌동 고분군을 비롯한 백제 고분군들이다.
풍납토성은 성벽 내벽이 석축으로 마감이 되어있었음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성벽의 조성 양상을 보면 내벽은 부정형의 할석으로 막쌓기를 하고 강돌로 적심을 쌓아서 뒤채움 했다. 방형으로 가공된 석재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양상은 5세기대의 백제 토성으로 확인된 증평 추성산성도 마찬가지이다. 토성이지만 수구나 문구부 양쪽은 석재로 마감되었는데, 전혀 가공되지 않은 석재로 난층쌓기 했다.
한성백제 시기의 대형 구조물인 석촌동 적석총도 대부분 운모편암류의 지표에 노출된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2차가공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러한 증거자료는 한성백제 시기에는 아직 화강암이나 화강편마암 같은 단단한 석재를 잘라내어 가공하는 기술과 바른층쌓기로 정연하게 석축을 쌓는 기술이 아직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한성백제 시기에는 목책이나 성토 다짐한 토성 위주의 성곽이 구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Ⅲ. 고구려 성곽과 관방체계
고구려는 장수왕대에 이르러 북위와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남조와도 통교를 하는 등 안정된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다. 고구려군이 임진강 유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장수왕대이다. 475년 고구려는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고구려는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아산만에서 영일만에 이르는 지역까지 진출했다.
고구려의 남진시기 임진강 유역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매우 중요시되었다. 임진강 유역에는 고구려 본토와 새로 점령한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2개의 幹線道路가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평양과 한성을 이어주는 도로였으며, 다른 하나는 楸哥嶺構造谷을 따라 원산-한성으로 연결되는 도로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교통로상의 거점에 성곽을 구축했다. 평양-한성을 이어주는 간선도로상에는 瓠蘆古壘와 아미성을 구축했다. 이때의 호로고루는 아직 지상성벽이 구축되기 이전단계로서 목책이 구축되어 있었다. 아미성은 감악산의 동쪽 마차산과의 사이에 형성된 협곡을 방어할 수 있는 요충지의 해발 260m 지점에 구축된 산성이다. 성내에서는 붉은 색의 고구려 기와편과 토기편이 출토되었으며, 신라에서 개축을 하여 고구려 성벽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원산-한성을 이어주는 간선도로상에는 隱垈里城과 전곡리토성이 구축되었는데 성벽의 기저부와 중심부는 판축을 하고 성의 안팎에는 돌을 쌓은 특이한 형태의 토성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은대리성은 한탄강의 북안에 위치한 삼각형의 강안평지성으로서 성의 둘레는 1,005m로서 호로고루나 당포성에 비하여 규모는 크지만 성벽의 높이가 낮고 유구나 유물의 출토양상은 빈약한 편이다.
백제 漢城을 점령한 고구려는 이후 여세를 몰아 錦江 상류지역까지 진출하여 요새를 구축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고구려유물이 출토되는 성곽으로는 남성골산성과 월평동유적, 진천 대모산성 등이 있다. 한강 유역에서는 몽촌토성이 일시적으로 재활용되며, 한강 이북지역에는 아차산과 망우산, 사패산과 천보산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따라 다수의 보루를 구축했다. 아차산에는 홍련봉 1보루와 2보루, 아차산 1-4보루, 용마산 1·2보루, 망우산 1∼4보루, 시루봉보루, 봉화산보루, 상계동보루, 사패산 1·2보루, 천보산 2보루, 도락산 1∼8보루, 독바위보루, 태봉 보루에 이르기까지 20개 이상의 보루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교통로를 따라 線狀으로 배치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보루들은 군사작전을 위한 보급로 확보가 주목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공격과 방어를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하면서도 장기간의 전투시 보급로가 끊어지지 않도록 주요 길목을 통제하는 기능도 함께 수행했을 것이다. 평양이나 개성을 출발한 고구려군이 한강 유역의 보루들을 중간거점으로 하고 전략적 요충지의 곳곳에 보루를 구축하여 백제나 신라에 대한 신속한 공격이 가능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임진강 이남지역 고구려 성곽의 분포양상은 신라성곽의 분포양상과도 차이가 있다. 고구려 성곽과 상당부분 공간을 공유하는 경기도 지역의 신라 성곽은 대략 현재의 군단위 마다 1㎞ 이상의 대형 성곽이 1~2개 정도가 분포되어 있다. 大城 사이사이에는 둘레 300∼500m 정도의 보루가 배치되어 있다. 大城은 신라 군현의 치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22)
백제의 경우에도 성곽은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분산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고대사회에 있어서 성곽은 군사적인 기능 뿐 아니라 행정중심지로서의 기능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정기능을 포함하는 성곽은 면적인 분포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각각의 성곽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으므로 한 성을 중심으로 다른 성들은 방사상의 분포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성곽 분포양상의 차이는 임진강 이남지역에 대한 고구려 영역지배 형태가 신라나 백제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 고구려 성곽의 공통적인 築城工法은 ‘土芯石築工法’이라고 할 수 있다. 土芯石築工法 토축후 석축으로 마감하는 축성공법으로서 지금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홍련봉 1보루, 홍련봉 2보루, 아차산 3보루, 아차산 4보루, 시루봉보루, 용마산 2보루, 천보산 2보루, 무등리 2보루 등 남한지역 고구려 산성은 대부분 토심석축공법으로 구축되었음이 확인되었다.23)
특히 최근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무등리 2보루에서는 한 겹으로 덧붙여 쌓아 마감한 석축성벽 내에 일정한 간격으로 영정주가 犧牲木으로 남아있었던 흔적이 분명하게 확인되었다.24) 홍련봉 1보루에서는 석축성벽이 일부 유실된 구간에 대한 조사 결과 석축성벽이 연접되는 구간의 안쪽에서 토축부를 조성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영정주공이 매우 크고 깊게 조성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영정주가 내부의 토축부를 축조하는데 필요한 거푸집의 기능뿐만 아니라 土築部를 지탱시켜 주는 構造體로도 기능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경우 토심석축공법으로 쌓은 성벽은 편축식 성벽으로 구축된데 비하여, 2013년 발굴조사가 재개된 홍련봉 2보루는 내벽도 石築으로 마감하였음이 확인되었다.25) 석축부가 붕괴된 구간에서 확인되는 양상을 토대로 홍련봉 2보루의 축성법을 파악해 보면, 토축으로 구축할 내벽과 외벽구간 너비 만큼 영정주를 벌려서 세우고, 영정주와 영정주를 횡장목으로 연결한 후 협판을 대고 판축으로 영정주 내부의 토축부를 먼저 조성했다. 이후에 영정주와 횡장목은 그대로 둔 채 협판만 제거하고, 외벽과 내벽을 석축으로 마감했다. 토축 후 석축성벽을 쌓을 때에는 일반적인 석축성을 쌓을 때처럼 비계목을 설치하였음이 석축 외벽 基底部를 따라가며 남아있는 주열을 통해 확인된다. 또한 석축 후에는 석축부의 바깥쪽에 일정한 높이까지 흙다짐을 하여 외벽을 보강했다.
그림3. 무등리 2보루 영정주 | 홍련봉 2보루 영정주와 횡장목 | 홍련봉 2보루 영정주 |
따라서 토축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땅속에 깊이 박은 영정주공이 확인되며 토축부의 종단면에는 홍련봉 2보루와 부소산성 북문지구간처럼 횡장목공이 확인된다. 또한 외벽마감을 한 석축성벽 앞쪽과, 석축성벽 바깥쪽 기저부에서는 목주열이 확인되며, 석축내부의 토축부는 자연상태에서는 유지될 수 없는 70∼80°의 경사각을 유지하고 있다.
土芯石築工法의 核心은 토축부에 있다. 석축부는 면석과 한단이나 두단 정도의 뒤채움으로 이루어지므로, 석축을 먼저 쌓고 토축부를 조성하게 되면 토압에 밀려서 석축이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먼저 토축부를 완성하고 난 이후에 석축으로 마감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구려 성을 발굴하게 되면 최정상부에서 목주열이 확인되고, 체성벽의 중간부분과 석축성벽의 하단부에서 목주열이 확인된다. 이것을 목책이 있었다가 석축성으로 개축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지만26) 이는 토심석축성벽의 축조공정에 대한 이해 부족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제1보루에서 확인되는 정상부의 주공열 역시 목책이 아니라 정상부에 설치되었던 永定柱孔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27)
임진강 유역에서부터 한강 유역에 이르는 교통로상에 집중적으로 보루를 구축하며 거점을 확보하였던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을 맞아 본격적인 저항을 할 겨를도 없이 임진강 유역까지 후퇴하게 된다. 고구려군이 신라와 백제의 공격에 적절한 대응을 취하지 못하고 죽령이북에서 임진강 이남지역까지 500여 리의 땅을 손쉽게 내어주고 임진강 유역에 방어선을 구축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고구려의 대내외적인 여건과 임진강 유역의 자연지리적인 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6세기 중엽 고구려는 귀족사이의 내분과 서북쪽 국경방면에 출현한 돌궐에 의한 압력 때문에 남쪽에까지 힘을 기울일 겨를이 없었다. 임진강 이남지역에 구축하였던 고구려 방어시설이 교통로 확보를 목적으로 한 堡壘 위주의 소규모 군사시설들이어서 방어력에 한계가 있었던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고구려는 신라의 한강유역전역에 대한 지배를 인정하게 되며, 이로 인해 진평왕 이후 고구려 滅亡 때까지 120여 년 동안 서북지역에서 신라와 고구려는 임진강을 경계로 국경이 나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가 임진강을 국경으로 삼은 것은 임진강이 적은 인원으로도 많은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임진강·한탄강 유역에 형성되어 있는 현무암 절벽이 천연의 성벽기능을 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많은 적의 침입을 능히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임진강의 高浪浦에서부터 하류지역은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感潮區間으로서 강심이 넓고, 수량이 많아 쉽게 渡江이 어려운 것도 방어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런데 임진강에는 샛강이 흘러드는 구간마다 石壁 사이에 통로가 형성되고, 샛강이 운반해온 모래와 자갈이 쌓이면서 넓은 여울목이 형성되어 많은 인원이 짧은 시간에 강을 건널 수 있는 교통로가 형성 되어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이러한 도강지점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하여 기존에 있던 성곽들을 재정 비하고 새로운 성곽을 구축하여 국경방어를 강화했다.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성곽은 임진강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분포되어 있다. 가장 하류쪽에는 덕진산성이 있다. 덕진산성이 있는 곳은 하중도인 초평도가 있어 강을 건너기 수월한 곳이다. 덕진산성에서 동쪽을 바라다 보이는 동파리에도 보루가 있다. 동파리보루에서는 다량의 고구려기와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덕진산성 동파리보루는 임진나루나 초평도를 건너 임진강을 도하하여 장단-개성으로 가는 길목을 방어하는 중요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4. 한강과 임진강 유역 고구려 성곽분포도 |
동파리보루에서 동북쪽으로 7㎞ 지점에는 두루봉보루가 있으며 이곳에서 4㎞ 동북쪽에 호 로고루가 있다. 호로고루는 感潮區間의 상류에 있으며 호로탄에 접해있다. 호로탄은 말을 타고 渡涉 할 수 있는 여울목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임진강을 건너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다. 기마부대를 포함한 육상군이라면 평양을 출발하여 개성-장단을 거쳐 임진나루로 도강하기보다는 약간 우회하더라도 호로고루 앞의 호로탄을 건너 양주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이 최단거리에 해당된다. 호로고루에서는 平山이나 兔山으로 갈 수 있다.
당포성은 호로고루에서 동북쪽으로 12㎞ 지점에 있다. 당포성 앞의 당개나루는 하적성에서 마전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였다. 당포성은 북쪽으로 삭령, 서쪽으로 금천과 개성으로 연결되는 길목이었으며 강을 건너면 어유지리를 통하여 감악산을 우회하여 양주에 이를 수 있어 매우 중요한 대 신라 공격로의 하나로 이용되었다.
당포성에서 동쪽으로 3㎞ 지점에는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도감포가 있다. 이 곳에서 동쪽으로 4㎞ 지점에는 은대리성이 있다. 은대리성 앞은 마여울이라 하여 한탄강을 건너는 여울목이다. 은대리성에서 서북쪽으로 마탄이나 유연진을 건너면 무등리보루에 이른다.
은대리성의 동쪽 1㎞ 지점에 전곡리토성이 있다. 전곡리토성 앞쪽의 한여울은 동두천에서 전곡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이다. 한편 도감포에서 북쪽으로 7㎞ 지점에는 무등리 1,2보루와 우정리성이 있다. 이곳은 유연진이라 하였는데 한국전쟁 당시 화이트교라 부른 임진강을 건너는 중요한 다리가 있다. 무등리보루에서 북쪽으로 2㎞ 지점에는 고성산보루가 있다. 무등리보루에서는 임진강을 다시 건너지 않고 兔山-新溪-瑞興으로 갈 수 있다.
무등리보루는 임진강 유역에서 민통선으로 인하여 조사가 가능한 최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강 상류쪽으로 올라가며 더 많은 고구려 성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 6세기 중엽 이후 신라가 임진강 유역으로 진출하며 임진강의 남안에는 임진강 북안의 고구려성에 대응하는 지점에 많은 신라성이 구축되었다. 고지도를 보면 이곳에서 임진강 상류쪽으로 이어지는 삭령, 안협, 이천에 이르기까지 신라성으로 추정되는 성곽들이 분포되어 있음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임진강 양안에서 고구려 성곽은 북안에서만 확인된다. 이는 임진강의 북안에서 남쪽으로부터의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성곽이 구축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성곽은 주요 교통을 통제할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곽이 위치하는 곳은 대부분 도강이 용이한 지점들이다. 따라서 임진강 북안의 고구려 성들은 고구려의 국경을 방어하기 위하여 구축된 성들이며 전연방어체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탄강 북안에 구축된 은대리성이나 전곡리토성은 이 시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되므로, 당시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도감포 상류지점 부터 고구려의 국경선은 한탄강이 아니라 임진강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호로고루의 경우에는 당초 목책이 구축되어 있었던 방어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성 내부를 평탄하게 조성하고 높이 10m에 길이 90m에 달하는 동벽을 쌓아 방어력을 보강하는 등 대규모 土木工事를 시행했다. 성 내부에는 창고와 병영을 구축하였는데 연화문 와당과 치미, 착고기와를 사용한 붉은색의 기와건물에 건물바닥에는 전돌까지 깔아놓은 수준 높은 건물이 확인되어 호로고루가 고구려 남쪽의 국경을 총괄하는 사령부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최근의 발굴조사에서는 성내에서 전투시 병사들의 공격을 신호하던 ‘相鼓’라는 명문이 새겨진 토제북이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시기 고구려의 축성공법을 보면 산성은 土芯石築工法을 유지하였지만 새로 구축된 평지성에서는 산성에 비하여 좀 더 복잡한 축조공법이 확인된다. 평지성 중 호로고루나 당포성은 고구려가 임진강 이북으로 후퇴한 이후 새롭게 구축된 성벽이지만, 은대리성은 나머지 두 성보다
이른 시기에 구축되었으며 고구려가 임진강 유역으로 후퇴하면서 신라의 영역에 속하게되어
6세기 중엽 이후에는 閉城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호로고루나 당포성은 고구려가 임진강 이북지역으로 후퇴한 후 국경방어를 위하여 발달된 고구려의 축성공법으로 새롭게 구축한 성벽으로 추정된다. 성벽의 기저부와 중심부는 판축을 하고 기저부 판축토 위에 내벽과 외벽을 돌로 쌓고, 版築土 위에 쌓은 體城壁의 바깥쪽에는 판축부 하단에서부터 보축성벽을 쌓아 체성벽의 중간부분까지 덮이도록 하였으며 보축성벽의 중간부분까지는 다시 점토를 다져서 보강했다.
최근 호로고루 4차발굴 조사과정에서 호로고루 동벽의 일부를 해체조사한 결과28) 보축성벽 안쪽에서 체성벽과 체성벽 하단부의 地臺石 외면에 185㎝ 간격으로 놓여있는 확돌이 확인되었다. 확돌은 직경 25㎝, 깊이 7㎝ 정도로 바닥이 평평하게 홈을 파놓은 것인데 석축성벽을 쌓기 위해 세운 나무기둥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확돌은 연천 당포성에서도 확인 된바 있다. 그런데 체성벽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체성벽 안쪽 1.2m 지점에서 또 한 겹의 중간 벽이 노출되었다. 이 성벽은 체성벽보다는 부정형의 성돌이 사용되었으며 이곳에서 기둥홈이 확인되었다. 기둥홈의 너비와 깊이는 25㎝ 정도이며, 기둥홈의 간격은 215㎝였다. 기둥홈의 내벽과 측벽은 성돌이 안쪽으로 밀려 약간 무질서한 모습을 보이지만 기본적인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동벽 완성 후에도 성벽 안의 나무기둥은 그대로 있었으며, 나무기둥이 부식되면서 기둥홈에 약간의 변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둥홈의 하단부는 기저부 판축토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무기둥을 세우고 일정 높이까지 판축하여 고정시킨 후 나무기둥을 기준으로 石築城壁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호로고루성벽에서 확인된 기둥홈은 평양의 대성산성과 당포성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대성산성의 소문봉 부근에서 확인된 기둥홈은 체성벽 안쪽 3.2m 지점의 중간벽에 1.5∼2m 간격으로 설치되었으며, 너비와 깊이가 20㎝였다. 당포성에서 확인된 기둥홈은 1.7∼1.8m 간격으로 설치되었으며, 기둥홈의 하단부에는 직경 31㎝, 깊이 7㎝ 정도의 홈이 파인 확돌이 놓여 있었다.
그림5. 호로고루 동벽-보축성벽과 체성벽 | 호로고루 동벽-중간벽 기둥홈 | 호로고루 동벽-확돌과 기둥홈 |
기둥홈의 기능에 대해서는 지하수의 壓力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구축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며29) 성벽을 구축하기 위한 木柱의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과 木柱를 활용하여 投石機나 쇠뇌 등을 설치하기 위한 특수시설일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30) 그러나 호로고루와 당포성에서 중간벽과 기둥홈이 발견됨으로써 고구려 성벽의 기둥홈은 축성공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목주는 기둥홈이 확인된 성벽 안쪽에서도 확인되는데, 이는 목주의 기능이 단순히 석축을 쌓기 위한 가설목의 기능 뿐 아니라 석축을 견고하게 유지시켜 주는 構 造體로도 기능하였음을 말해준다.31)
그림6. 평양 대성산성 중간벽 기둥홈 | 당포성 기둥홈 | 당포성 가설목 모식도 |
당포성에서 확인된 것처럼 기저부의 판축토 위에 가로, 세로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기둥을 세운 후 각각의 나무기둥을 연결하여 구획을 나누고 그 사이에 성돌을 채워 넣었다. 이것은 견고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석축성벽의 내벽을 쌓는 기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호로고루에서는 기둥홈이 있는 성벽면 바깥에 다시 한 겹의 외벽을 쌓아서 마감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따 서 외벽 안쪽에 조잡한 느낌이 들도록 쌓은 당포성 성벽도 정연하게 다듬은 돌로 외벽을 덧붙여 쌓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호로고루와 당포성은 첨단 축성공법으로 구축한 고구려 성곽으로서 우리나라의 토목·건축기술사적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강 유역을 포함한 경기도지역의 고구려 관방체계에 대하여 복합적이고 체계적인 면적인 방어체계를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32) 이 견해는 고구려가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성을 배후 거점성으로 하여 천보산맥 일원에 중간기지를 설정하고, 한강 유역을 전진기지로 하고 남진을 계속하여 금강상류까지 진출했다가 551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으며 임진강 유역의 배후거점성은 고구려 멸망당시까지 사용되었으며, 임진강에서 양주일대에 이르는 개개의 교통로를 설정하고 고구려가 치밀한 평면계획 하에 복합적인 방어체계가 있었던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개개 성곽들의 축성과 사용기간이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근거 자료에 입각하기보다는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상황론에 입각하고 있어 실체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33)
경기도지역의 고구려성곽은 경기도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영역적 지배를 보여준다는 견해도 있다.34) 475년 한성함락 이후 고구려는 몽촌토성을 거점으로 하여 남진을 계속하여 한강유역에 대한 영역화를 시도하였으며, 이후 백제의 한강유역 수복 노력이 강화되면서 500년을 전후 한 시점에 몽촌토성을 비롯한 한강 이남의 고구려 군은 한강 이북으로 철수하여 한강 북안과 아차산 일원에 방어용 보루를 구축했다고 했다.
몽촌토성과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성곽이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고고학적 분석에 기초한 이러한 견해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경우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동성왕대와 무령왕대의 한성경영 기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인데 동성왕대의 한성은 차령 이남이라는 견해를 차용하고 있다. 또한 무령왕대의 한성경영 기사를 받아들이면, 고구려와 백제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장기간 대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무령왕대 초기에 대고구려 공세를 통하여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고구려군은 한강 북안으로 철수하였으며, 한강 이남지역에 대한 백제 활동의 제약은 적어졌으나 한강유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경영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35)
그러나 6세기 초반 한강 이북지역으로 고구려가 후퇴했다고 하더라도, 무령왕대와 성왕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가 501년에는 수곡성(신계)을 시작으로하여 고목성(연천), 장령성, 횡악(횡성), 가불성(가평) 등지에서 진행되고, 523년의 패수(예성강) 전투와, 529년 오곡(황해도 서흥) 등 경기도북부 지역과 황해도 지역에서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진행되는 전투에 대한 설명을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또한 475년부터 500년 전후까지 25년 정도 몽촌토성을 거점으로 하여 주둔하던 고구려군이 한강이북으로 철수하여 아차산 일대의 보루를 축조하였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한강 이남지역과 한강 이북지역 고구려 성곽의 축성방법이나 유물의 형태적 변화 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이처럼 남한지역의 고구려 성곽들의 축성과 경영방법에 대한 명쾌한 이해가 어려운 것은 고고학적인 증거와 삼국사기의 기록내용을 논리적으로 결합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연천 호로고루 2차 발굴조사에서 이 문제와 관련한 중요한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호로고루에 처음부터 석축성벽이 구축된 것이 아니라 석축성벽 이전에 목책시설이 있었음을 명확하게 밝혀내게 된 것이다. 이미 호로고루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에서도 동벽단면의 판축 구간내에서 고구려토기편이 확인되어, 고구려가 이곳을 장악한 후 초기에는 석축성벽과 瓦家가 없었지만 木柵 등 초보적인 형태의 방어시설을 구축하였으며, 이후 전략적인 필요에 의하여 여러동의 와가를 건축함과 동시에 판축부와 석축부 그리고 보축부를 포함한 동벽 전체가 한꺼번에 구축된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36) 그런데 이러한 예측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2차 발굴 조사에서 층위적으로 입증되었다. 이 증거는 지금까지 남한 지역에서 확인된 고구려 성곽의 축성시기와 분포양상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37)
호로고루의 목책은 동벽 안쪽에 동벽과 거의 평행하도록 구축되었으며 목책공은 170∼200㎝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목책이 구축되었을 당시에는 성 내부 지형이 현재처럼 평탄하지 않았으며, 목책관련 유구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석축성벽 관련 유구에서 출토되는 유물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목책 관련된 유구에서는 기와는 전혀 출토되지 않았으며, 토기류는 기종이 비교적 단순하고 토기의 구연부는 거의 수직에 가깝게 외반하며 구순부가 납작하게 마무리된 자배기 형태의 토기와 직구단경호의 어깨부분에 점열문과 파상문이 돌아가는 토기들이다. 이에 비하여 석축성벽 관련 유구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기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토기류는 자배기와 옹, 완, 합, 이형토기 등 기종이나 기형이 매우 다양하고, 토기 구연부의 처리나 문양의 유무, 동체의 형태 등에서 목책단계와 분명한 차이가 확인된다.
호로고루의 목책은 남성골산성이나 안성 도기동산성과 구조적으로 유사하고 출토유물을 고려하더라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같은 유형의 유물들이 고성산보루와 은대리성, 전곡리토성, 몽촌토성 등에서 확인되고 있어 남한지역 고구려 성곽에 대한 시기별 설정이 가능하다.
문제는 호로고루에 대규모 토목공사가 시행되고, 지상건축물이 구축되며, 석축성벽이 구축되는 시점이 구체적으로 언제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한강 이북지역에 고구려성곽이 구축
되는 시점에 임진강 유역에는 어떠한 형태로 방어시스템이 구축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중요 사안이다. 즉 아차산 일대에 성곽이 구축될 당시 임진강 유역도 이미 방어시스템이
정비되어 한강유역의 고구려 성에 대한 배후거점성의 역할을 했는지 아니면,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이후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방어시스템이 전면적으로 재편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자료가 된다.
이것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는 역시 성내에서 출토되는 유물이다. 목책단계의 유구에서 확인되는 토기편의 경우 몽촌토성과 마찬가지로 D형보다 A형이나 B형의 구연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에 비하여 동벽단면에서 출토되는 토기구연부의 대부분은 D형으로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성곽 출토유물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성내부에 낮은 곳은 2m 이상 판축을 통한 성토가 이루어지고 구축되는 지상건물지에서는 다량의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 기와는 제작기법상 한강유역의 홍련봉 1보루나 가락동 5호분에서 출토된 기와와 비교할 때 귀접이가 등장하고 문양구성이 다양해지는 등 한강유역의 고구려기와에 비하여 제작기법이 발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호로고루의 수축과 석축성벽이 축조되는 시점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하게 되는 6세기 중엽 이후라고 판단하고 있다.38) 임진강이 국경하천의 기능을 하게되면서, 임진강 북안에 있던 성들 중 일부는 개축하였지만, 국경을 따라가며 다수의 새로운 성곽이 구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7. 고구려토기 구연부 형태 구분 |
남한의 고구려 유적은 대략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Ⅰ기는 장수왕대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된 유적들이다. 이 시기 유적의 상한은 고구려의 남진이 이루어지는 5세기 후반을 넘지 못하지만 하한은 Ⅱ기의 유적으로 교체될 때까지이다. 고봉산보루, 은대리성, 호로고루의 목책단계, 몽촌토성, 안성 도기동산성, 남성골산성, 월평동유적 등이 이 시기의 유적에 해당한다. 특징적인 방어시설로는 목책이 주로 구축되었다. 은대리성은 토성처럼 보이지만 동벽에는 석축을 부가한 성벽도 확인되어 정연하지 않지만 석축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전곡리토성도 은대리성과 축성기법이 유사하며, 동쪽구간에서는 2열의 목책열이 확인되었다.
호로고루에서는 동벽 안쪽에서 선행하는 목책유구가 확인되었다. 몽촌토성에는 별도의 방어 시설을 구축하지 않고 기존의 백제 토성을 그대로 활용했다. 안성 도기동산성에서도 둘레 2㎞ 달하며 5m 간격으로 2열의 목책열이 확인되었다. 남성골 산성에서는 4m 간격을 유지하는 2열의 목책이 구축되어 있었으며, 대전 월평동유적에서도 2열의 목책열이 확인되었다.39) 이 시기의 성곽들이 대부분 목책으로 구축된 것은 축성기술의 부재로 인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이미 발달된 석축성벽을 구축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축성목적과 인력이나 시간 등 축성 환경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40)
그리고 이 Ⅰ기 유적의 존속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금강 상류에 구축되었던 남성골산성은 출토되는 유물도 6세기 중엽을 중심으로 하는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성곽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차이가 있다. 입지적으로 백제 웅진성과의 거리가 24㎞ 밖에 안되며, 주변에 아차산 일대처럼 고구려 성곽이 밀집분포되어 있지도 않은 실정이다. 또한 대전 월평동유적의 경우도 출토유물이 빈약하고 유적 내에서 6세기 초 중엽 백제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41) 따라서 고구려가 기세를 몰아서 금강 상류지역의 백제 영역 깊숙한 곳까지 남진을 하였지만 백제 영역 내에서의 존속기간은 길지 않았으며, 몇 년 이내 백제에 함락 당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고구려 국경을 따라가며 국경방어를 위한 별도의 성곽이 구축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대략 산맥이나 하천 등 자연지형을 따라 한시적이나마 경계가 구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지리지의 고구려 군현명은 고구려가 남하하여 점령했던 지역을 고구려의
군현에 포함시키고 고구려 군현명을 부여하고 간접적으로 지배하였을 뿐 군현단위로 중앙관료를 파견하고 조세수취가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영토적 지배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백제나 신라와의 국경 뿐만 아니라 죽령에서 한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에도 백제와 신라로부터 영토를 방어할 수 있는 대규모 방어성이 구축되지 않았으며 행정적 지배의 근간이 되는 성곽의 면적인 분포양상도 확인되지 않는다. 조사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고구려가 금강
상류에서 임진강 유역에 이르는 교통로를 중심으로 한 선상의 방어체계를 구축했다고 하는 것은 점령지역을 영토적으로 지배할 의사가 없었거나 그럴 수 있는 여력이 없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42)
Ⅱ기는 한강유역에서 양주 일대에 구축되는 고구려 유적들이다. 상한은 6세기 초이며 하한은 551년이다. 이 시기의 유적은 매우 정형화된 석축성곽이 주류를 이룬다. 공간적으로는 한강 이북지역부터 임진강 이남지역이며, 아차산일대와 양주일대의 고구려 성곽이 여기에 포함된다. 지금까지 남한지역에서 확인된 고구려 성곽 중 가장 많은 숫자가 여기에 속한다.43)
규모는 크지 않지만 대략 500m 정도 간격으로 밀집 분포되어 있는 이 시기의 고구려 성곽은 축성을 위한 평탄면의 조성과 성벽, 치, 배수시설, 집수시설, 온돌, 벽체, 성벽 위의 목책시설 등 복잡하고 입체적인 시설들이 정형화된 설계시방서에 따라 구축된 것처럼 보인다. 성벽은 토축부를 판축공법으로 먼저 구축하고 얇은 석축으로 마감하였으며 성벽에는 다수의 치를 배치하여 성벽의 안정성을 보강했다. 성 내부에는 거미줄같은 배수망과 함께 암반을 방형으로 굴착하고 내부에 점토를 다져 방수처리한 집수시설과 함께 ‘ㄱ’자형 외고래 온돌과 벽체시설, 그리고 치 앞에 다시 석축단을 쌓아 올려 사다리를 놓아야 출입할 수 있는 이중치를 가진 출입시설 등이 있다.
Ⅱ기의 유적 중에는 홍련봉 1보루와 홍련봉 2보루, 용마산 2보루, 아차산 3보루, 아차산 4보루, 시루봉보루, 천보산 2보루, 태봉산보루 등이 발굴되었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유적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와 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고구려의 문화상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홍련봉 1보루에서는 이 시기의 유적 중 유일하게 연화문 와당과 고구려기와편이 출토되었다. Ⅱ기 유적의 정확한 구축시점에 대하여 출토토기의 편년적 분석자료와 홍련봉 2보루에서 출토된 520년 으로 추정되는 庚子명 명문토기를 근거로 6세기 초로 추론하는 견해가 있다.44) 이 시기 고구려는 한강하류지역을 영역적으로 지배하였고, 그 중심거점은 남평양으로 비정되는 중랑천변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강 북안의 거점성으로 추정하는 중랑천변 일대가 이미 택지로 개발되어 고고학적인 자료를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조선시대 사복시 목장이 설치되었던 저습지가 많은 지역으로서 고구려의 남평양관련 성곽이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방어시설도 없고 고고학적인 증거도 전혀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중랑천 일대에 남평양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別都가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성곽의 축성을 단순히 한강 이남지역 고구려 군의 철수라는 관점에서 보게 되면, 한강 이남지역과 차별화되는 정형화된 성곽의 구축이나 기와건축물의 등장, 토기형태의 계기적 변화 등을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Ⅰ기와 Ⅱ기는 계기적인 연속성 보다는 같은 기술적 전통에서 유래하였지만 새로운 기술자 집단에 의하여 구축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토성이나 목책에서 석축성으로 변화된 축성기술 뿐만 아니라 기와나 토기제작기술에 있어서도 분명한 차이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Ⅰ기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건축부재인 기와가 제작되고, Ⅱ기의 토기는 Ⅰ기에 비하여 토기의 기형이 다양화되며, 토기의 두께가 얇아지고 경질화되는 경향 을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시간성도 어느 정도 반영해 주지만 부대의 교체나 전문인력 보강과 같은 인적인 교체에 의한 차이가 주된 이유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도성지역으로부터 최신의 축성기술과 토기, 기와제작기술자들이 한강유역의 방어와 교통로 확보를 위하여 추가로 파병되는 군대에 포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Ⅱ기 성곽의 구축은 Ⅰ기 성곽 중 금강상류지역 등 전진배치되었던 성곽들이 함락된데 따른 보강조치로서, 한강 이북지역의 교통로상에 집중적으로 배치됨으로서 한강 이남지역에 대한 공력과 방어가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어시스템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힘을 가지고 속공을 할 때에는 매우 유용하고 관리상의 경제성과 효율성이 있지만, 방어에는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성곽들이 방사상으로 배치될 경우 한성이 공략당하더라도 주변 성들이 배후를 공격하거나 지원이 가능하지만, 이처럼 남-북으로 긴 선상방어체계 하에서는 대규모 적의 공격에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고구려는 6세기 중엽까지는 강력한 정치적·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점령지역을 백제와 신라의 견제로부터 어느 정도 지켜낼 수 있었지만 내우외환으로 인하여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되자45) 551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죽령 서북의 500리 땅을 빼앗기게 되었다.46)
Ⅲ기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이후 임진강 유역에 새롭게 구축되거나 재정비되는 성곽들이다. 상한은 6세기 중엽이며, 하한은 임진강 유역을 나당 연합군이 차지하게 되는 7세기 후반까지 존속했다. 호로고루의 석축성 단계, 두루봉보루, 당포성, 덕진산성, 무등리 1보루, 무등리 2보루 등이 이 시기 유적에 해당된다.
호로고루나 당포성처럼 석축성과 토성의 장점을 결합한 고구려 특유의 정형화된 강안 평지성이 구축되며, 임진강을 건너는 주요 교통로를 주변에 성곽이 석축성이 구축되며, 성내에 기와를 사용한 지상건물 구축이 일반화되었다. 기와가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곳은 호로고루와 당포성, 무등리 1보루, 동파리보루이다. 무등리 1보루와 호로고루에서는 다량의 탄화곡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한탄강북안에 구축된 은대리성이나 전곡리토성은 이 시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되므로, 당시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도감포 상류지점 부터는 고구려의 국경선은 한탄강이 아니라 임진강을 중심으로 하여 재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종심형의 선형방어체계를 구축하였던 임진강 이남지역과 달리 임진강 일대에는 동-서 방향으로 강의 북안을 따라 전연방어체계를 구성하여 대규모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비록 임진강 북안의 고구려 성들도 1㎞ 미만의 소규모에 속하는 성들이지만, 배후의 거점성들과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120여 년 동안 방어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47)
Ⅳ. 신라 성곽과 관방체계
임진강 유역으로 진출한 新羅는 임진강 이북의 고구려 성곽에 대응되는 성곽을 임진강 이남 지역에 구축했다. 임진강의 입구이자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되는 지점에는 烏頭山城을 구축하고, 연이어서 봉서산성, 파평산성, 이잔미성, 칠중성, 옥계토성, 대전리산성 등 둘레 1㎞ 내외의 대형산성을 약 5~10㎞ 간격을 유지하며 방사상으로 구축했다. 대성 사이의 중요한 교통로에는 100~500m 내외의 성을 배치하여 국경방어 시스템을 완비해 나갔다.
551년 고구려가 요동쪽에 침입한 돌궐의 공격에 집중하는 사이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게 죽령 이북지역과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임진강 유역으로 후퇴한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切齒腐心하며 기회를 엿보게 된다. 598년 수나라의 공격을 물리친 고구려는 603년 드디어 장군 고승을 보내어 신라의 북한산성을 치도록 한다.
14년(603)(가을 8월에) 왕은 장군 高勝을 보내 신라의 北漢山城을 쳤다. 신라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漢水를 건너오니, 성안에서는 북치고 소리지르며 서로 호응했다. (고)승은 저들이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므로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났다.48)
고구려의 공격에 대응하여 신라는 북한산성의 군사들과 함께 진평왕이 몸소 군사 1만명을 이끌고 협공을 하여 성공적으로 막아내게 된다. 이때 고구려가 공격한 북한산성은 현재의 阿且 山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라 북한산성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도록 중요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북한산성과 한강을 건너는 신라 군사들이 서로 북치고 소리치며 호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아차산성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北漢’이라는 명문이 쓰여진 기와가 여러 점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아차산성은 고구려가 백제 한성을 공략할 때 개로왕을 죽인 阿旦城으로도 추정되고 있는데 일부성벽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현존하는 석축성은 현문식 성문과 보축이 확인되는 전형적인 신라성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북한산성 전투에 고구려의 온달이 참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陽岡王(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신라가 우리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리석은 이 신하를 불초하다 하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했다.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과 죽령 이서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하고, 나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 아래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흐르는 화살에 맞아 넘어져서 죽었다. 장사를 행하려 하였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했다. 드디어 들어서 장사지냈는데 대왕이 듣고 몹시 슬퍼했다.49)
그림8. 한강과 임진강 유역 신라성곽 분포도 |
그림9.덕진산성-초축성벽과 수축성벽 | 덕진산성-수축성벽 내부초서벽 | 덕진산성-치구간의 수축성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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