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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연구원

임진강 유역 삼국의 성곽과 관방체계

2018 경기문화재연구원·중부고고학회 학술대회



이 글은 ‘2018 경기문화재연구원·중부고고학회 학술대회 - 임진강 유역, 분단과 평화의 고고학'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임진강 유역 삼국의 성곽과 관방체계


심광주(토지주택박물관)


Ⅰ. 머리말

Ⅱ. 백제 성곽과 관방체계

Ⅲ. 고구려 성곽과 관방체계

Ⅳ. 신라 성곽과 관방체계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임진강은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한반도의 중부를 관통하며 흐르고 있다. 마식령산맥이 뻗어 내리는 백두대간의 두류산(1,324m)에서 발원한 임진강은 254㎞를 흘러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서 한강으로 합류된다. 남동부의 광주산맥, 북서부의 아호비령산맥, 북동부의 마식령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를 유역으로 하고 있으며 면적은 8,118㎞에 이른다.


‘산은 나누고 강은 합친다’고 하지만 임진강은 독특한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우리 역사상의 갈등기마다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구분하는 경계선 역할을 해왔다. 임진강의 양안에는 임진강이 용암대지 위에 만들어 놓은 15~20m에 달하는 거대한 천연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百里長城’이라고도 불리는 이 수직절벽은 임진강을 天惠의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하게 했다. 임진강이 샛강과 만나는 곳에는 여울목이 형성되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교통로가 형성되었다.


임진강을 건너는 교통로만 방어하면 적의 침략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으므로 여울목이나 나루터 인근에 성곽이 구축되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청나라의 기병을 막으려면 ‘천연의 垓子’인 임진강의 여울과 나루터를 지키는 것이 가장 훌륭하고 긴요한 방어책이라는 견해가 조정에서 무수히 거론된 것도 이와 같은 임진강의 지리적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1) 강변에 구축된 성들은 渡河하는 적을 저지하는 기능 외에 육상 교통로와 임진강의 수로를 보호하는 역할도 수행했다.2)


임진강 유역 삼국의 관방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진강 유역에 소재하는 성곽들에 대한 기초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이었던 임진강 유역은 오늘날에도 남과 북의 군사분계선이 지나고 있어 연천군 왕징면 이북지역으로는 접근 할 수 없는 실정이다. 향후 삭령, 안협, 이천에 이르는 임진강 상류지역의 성곽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 야 임진강 유역 삼국의 관방체계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진강 유역에서 확인된 성곽들의 축성법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다. 축성주체와 축성시기에 따라 축성법이 달랐으므로, 축성법을 통해 축성주체와 축성시기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축성 주체에 대한 구분없이 해당지역에 소재하는 모든 성곽과 교통로가 삼국시대에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상정하고 관방체계를 분석하는 것은 오히려 실제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게 할 수도 있다. 조사를 통하여 확인되는 그대로의 양상을 이해하는 것이 한정된 인력과 자원으로 국가를 경영해야 했던 당시의 실체적 상황에 좀 더 근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곽의 분포양상은 축성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대의 전쟁은 성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점령지역에 대한 관리도 성곽이 담당했다. 그러므로 국경인지, 주요 교통로인지, 아니면 도성이나 지방 행정의 중심지인지에 따라 성곽의 분포양상이 달랐다. 임진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백제, 고구려, 신라의 성곽 분포양상을 살펴보면 축성주체와 축성시기에 따라 임진강 유역이 어떻게 경영되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임진강 유역에 대한 국가별 점유시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가장 먼저 임진강 유역을 점유했던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는 475년이 그 하한이 된다. 고구려의 남진과 함께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게 된 임진강 유역은 553년 이후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에 따라,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신라가 120여 년간 대치하게 된다.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멸망 이후, 임진강 유역은 온전히 신라의 영토에 속했다. 임진강이 백제의 영역이었던 시점과 신라에서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시점은 적게는 76년에서 많게는 500년 이상의 시차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관방체계와 축성법은 서로 다른 것이지, 기술수준이라는 관점에서 비교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임진강 유역의 삼국시대 성곽 중 백제성은 육계토성, 월롱산성, 고모리산성 등이 조사되었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구체적인 양상이 확인된 것이 없다. 고구려성은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무등리1·2보루에 이르기까지 삼국의 성곽 중 가장 많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신라성은 오두산성과 칠중성, 대전리산성, 대모산성, 반월산성 정도지만 오두산성과 칠중성을 포함하여 임진강에 접한 신라성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조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발표는 이러한 지금까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임진강 유역의 백제, 고구려, 신라의 성곽을 중심으로 축성법과 관방체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Ⅱ. 백제 성곽와 관방체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 임진강 유역을 가장 먼저 차지한 것은 백제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조왕 13년(BC 6)에 백제의 강역은 이미 북으로는 浿河(예성강), 남으로는 熊川(안성천), 서쪽으로는 大海(서해), 동쪽으로는 走壤(춘천)에 이르렀다고 했다. 국가의 성립과정이나 고고학적인 증거를 고려할 때 온조왕대에 이렇게 넓은 지역을 확보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러나 연천 일대에서 확인되는 무기단식 적석총의 존재로 볼 때 비교적 이른 시기에 백제가 임진강 유역으로 진출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백제 초기 임진강 유역에는 靺鞨이나 樂浪의 侵入이 빈번했다. 이 시기 靺鞨로 지칭되는 東濊族들은 원산만 지역을 근거지로 하였는데 추가령구조곡에 형성된 古代 交通路를 따라 평강과 철원을 지나 임진강 한탄강 유역에 자주 등장했다. 백제에서는 이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칠중하와 功木達縣 등 적성과 연천 일원과 남한강과 북한강 상류 쪽에 주로 토성과 木柵 위주의 성을 쌓았다.


『삼국사기』에는 한성백제의 성곽명칭은 34개가 등장하며 축성된 성은 24개가 등장한다. 마수성·한산성·석두성·고목성·대두산성·탕정성·고사부리성·우곡성·북한산성·적현성·사도성·청목령성·관방성·쌍현성·사구성·한산하목책·병산책·독산책·구천책·웅 천책·사도성 옆의 두목책·청목령목책 등이다. 성곽의 수축기사도 2회의 위례성 수축을 비롯 하여 원산성·금현성 등 모두 7회에 이르고 있다. 이외에도 초축이나 수축기록 없이 성의 이름만 기록된 것은 우곡성·술천성·부현성·낭자곡성·석문성·독산성·수곡성·팔곤성·관미성·한산성·북성·남성 등이다. 성곽의 축성이나 수축기록은 한성백제기가 웅진·사비기보다 더 많이 등장한다. 이는 급격한 영토확장에 따라 성을 쌓고 관리하는데 국가의 역량이 집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성시기 백제의 성은 城과 柵으로 구분된다. 성의 명칭이 확인되는 34개 중에서 8개의 책이 등장하여 전체의 1/4 정도에 해당하는 성이 책으로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성백제기에 구축된 柵의 형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선후기 순조 11년(1811) 洪景來의 반군을 공격할 때의 내용을 담은 병풍그림인 ‘辛未定州城攻圍圖’에는 관군이 주둔하던 임시 營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통해 목책은 일정한 간격으로 굵은 나무기둥을 땅에 박고, 나무기둥 사이에는 목주를 연접하여 세우고, 내외벽의 중간에 橫木을 결구하여 고정시키는 형태로 추정된다.3)



그림1. 신미정주성공위도 중의 목책(조)


길성리 토성의 목책유구


백제의 목책도 이러한 구조와 유사할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최근의 발굴조사 사례를 보면 단순 목책이 아니라 어느 정도 토축부를 조성하고 목책을 설치하는 형태였음을 알게 되었다. 화성 吉城里土城은 화성군 향남면의 태봉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둘레는 2,311m로 매우 큰 규모이다.4) 중부고고학연구소에 의한 발굴 조사 결과 성벽은 기저부를 정지하고 성질이 다른 흙으로 交互盛土 방식으로 축조하였으며, 전형적인 판축기법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5) 그런데 토성벽의 높이가 1.2m 정도에 불과하며 토성벽의 상부에 0.9∼2m 간격으로 폭 0.7∼1.8m, 깊이 0.6∼1.2m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직경 20∼30㎝의 목주를 세워놓았음이 확인되었다. 이 목주는 목책유구로 추정되고 있다.6) 토성부는 목책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고 성곽방어의 주기능을 목책이 담당하고 있으므로 길성리토성은 토성이라기 보다는 목책성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길성리토성과 유사한 구조가 천안 백석동토성에서도 확인된다. 백석동토성은 표고 100m 내의 완경사 구릉지 정상부에 구축되었으며 전체 둘레는 260m이다. 지반을 정지하고 일정한 높이까지 성토다짐 후 굴광하여 130~150㎝ 간격으로 직경 20㎝ 내외의 목주를 세웠다. 이 유구를 영정주를 사용한 판축토성이라고 보았지만7) 성토 후 목주를 세우기 위해 굴광한 흔적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백석동토성 역시 목책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보고서는 간행되지 않았지만 최근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청주 석화리유구도 구릉 정상부 외곽을 감싸며 일정한 높이까지 성토다짐 후, 100~150㎝ 간격으로 목주를 박은 목책유구가 확인되어 동일한 기법으로 조성된 목책성으로 추정된다. 목주의 간격은 100㎝, 125㎝, 150㎝ 등 25㎝ 간격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목주를 세울 때도 임의로 박지 않고, 당시의 營造尺인 단위길이 25㎝인 南朝尺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2. 청주 석화리목책성

천안 백석동토성


최근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안성 도기동산성의 백제 목책은 지반을 계단식을 절토하고 기저에 1.5m 간격으로 1열의 목주를 세워서 고정한 후 성토다짐 하였음이 확인된다. 도기동산성은 길성리토성이나 석화리목책의 경우처럼 성토 후 굴광하지 않고, 목주를 세우고 성토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8) 목책에 토축이 보강되었다는 점은 동일하다.


이와 달리 대전 월평산성의 목책은 해발 130m 내외의 구릉 사면에서 확인되었다. 풍화암반을 방형으로 굴착하여 직경 1m, 깊이 1.1m 내외로 조성하고 직경 15~30㎝ 내외의 목주를 90㎝ 간격으로 배치하였음이 확인되었다.9) 완주 배매산 목책은 해발 123m 정도의 독립구릉 사면에서 확인되었다. 목책은 능선을 따라 폭 60㎝, 깊이 50㎝의 溝를 파낸후 70~100㎝ 간격으로 직경 30~50㎝의 구덩이를 파내어 목주를 세웠다. 출입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에는 별도의 문기둥을 세웠으며 목주공 바닥에는 할석을 받쳐 놓았다.10)


이러한 발굴조사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백제 목책의 구조적인 특징은 1열의 목책렬로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목책은 원지반을 정지하고 일정한 높이까지 성토 후 굴광하고 1m 내외의 간격으로 직경 25㎝ 내외의 목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보조목을 세워서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柵은 백제의 전시기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성을 쌓는 공력에 비하여 방어력은 상대적으로 높았던 효율적인 방어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명칭을 통한 입지를 살펴보면 柵은 병산책, 구천책, 청목령책, 탄현책 등 산이나 고갯마루에 주로 축성되었다. 城도 대두산성과 북한산성, 청목령성, 독산성, 한산성, 부현성, 적현성, 쌍현성 등 역시 산이나 고갯마루, 또는 강변에 접한 교통의 요충지에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의 명칭만 보더라도 이 시기에 축성된 대부분의 성·책들이 산에 의지하여 쌓은 山城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초기에 柵으로 만들어졌던 것이 후에 城으로 개축는 것으로 보아 책보다는 성이 안정적인 방어력을 담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漢山下木柵은 慰禮城으로, 禿山柵은 禿山城으로, 청목령목책이 청목령성으로, 熊川柵이 熊川城으로 개축되었다.


백제 초기에는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 역시 백제의 성장을 막기 위해 계속 압력을 가해 왔다. 낙랑이 직접 침략하기도 하고, 말갈을 부추겨 백제를 공격하게 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 七重河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도 이 시기이다.


겨울 10월 말갈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렸다.11)


임진강은 징파강, 구연강, 신지강, 칠중하, 호로하 등 위치에 따라 수 십 여 개의 이름이 있었다. 칠중하는 현재의 육계토성 부근의 임진강을 지칭한다. 당시 임진강변에 있었던 백제토성으로는 六溪土城이 있다. 육계토성은 임진강에서 수심이 낮아 주요 도하지점의 하나였던 가여울과 서쪽의 두지나루를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에 있었다.


육계토성은 임진강 남안의 낮은 구릉성 충적대지(해발20m)에 내성과 이를 둘러싼 외성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진 토성이었다. 평면 형태는 북동-남서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장타원형이다. 성의 둘레는 1,945m이며 성 내부에서는 凸자형 주거지와 呂자형 주거지 등 백제주거지에서 3 ∼4세기대를 중심으로 하는 다량의 백제유물과 고구려토기가 출토되었다.12)


그런데 靺鞨의 침입을 백제가 七重河에서 맞아 싸우던 시기에 과연 육계토성이 있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기록의 내용이나 육계토성에 대한 발굴 결과로 볼 때 말갈의 침입이 있었던 기원 전후 시기는 육계토성이 축성되기 이전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백제는 고이왕대에 이르러 경기도지역의 대부분을 백제의 권역에 포함하게 되었다. 근초고 왕대에는 황해도에서 경기·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을 확보하게 된다. 고구려의 남진으로 낙랑과 대방이 멸망함에 따라 4세기대에 백제는 드디어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 백제가 고구려와 공방을 벌이는 주요 전투지역은 雉壤城(황해도 배천), 水谷城(황해도 신계), 浿河(예성강) 등 예성강 이북지역의 황해도 일대이다. 심지어 백제는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한다.


이것은 4세기 대에는 백제의 국경이 예성강지역까지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임진강 유역은 이미 백제의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속하게 되었으므로 임진강 유역에서의 전투 록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임진강 유역에서 많은 백제성이 확인되지 않는 것도 아마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예성강 이북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 있어 칠중하와 호로하의 여울목은 중요한 교통로로 부각되었다. 따라서 한성-적성-치양, 수곡 등으로의 교통로가 개설된 이후 교통로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에서 육계토성이 구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漢城百濟 시기의 百濟城 중에는 고양 멱절산성과 포천 姑母里山城, 화성 疎勤山城 및 안성 望夷山城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파주 月籠山城과 의왕 慕洛山城에 대한 지표조사가 실시되어 구조적인 특징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경기도박물관과13) 중앙문화재 연구원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실시된 고양 멱절산 유적은 한강 북안의 해발 27m 지점에 위치하며 전체 둘레는 300m로 추정된다. 성벽은 풍화 암반을 굴착하거나 土堤를 조성하고 외벽에서 내벽쪽으로 황갈색 풍화암반토와 회색점질토를 交互盛土했다. 출토유물은 삼족기, 심발형토기, 장란형토기, 단경호 등이 출토되었으며 풍납토성 출토유물과의 비교를 통하여 멱절산 유적의 축성시기는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14)


姑母里山城은 포천시 소흘읍의 고모산(해발 386m)에 위치하며 전체 둘레 1,207m로 비교적 큰 규모의 백제성이다.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지표조사가 실시되고15) 최근 추정 동문지 구간에 대하여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16) 축성방법은 경사면을 삭토하고 상면을 성토하여 토루를 조성하였으며, 방어에 취약한 동벽구간은 할석으로 석축성벽을 조성하였는데 단과 열이 불규칙하고 성벽면이 정연하지 못하다. 고모리산성의 사용 시기는 출토유물을 근거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성 疎勤山城은 화성시 양감면의 소근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둘레는 629m이다. 경기도박물관에 의한 조사 결과 지반을 정지한 후 암반을 溝狀으로 길게 굴착하고, 사다리꼴로 설치한 영정주와 판목을 계속 이동시키면서 축조하였음이 확인되었으며, 출토유물을 근거로 5세기대 후반에서 6세기 초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7)


안성 望夷山城은 안성시 일중면의 망이산(해발 472m)에 구축되어 있으며, 전체 둘레 350m의 토성이다. 단국대학교박물관에 의한 발굴조사 결과 망이산성 성벽은 내부가 높고 외부가 낮은 지형을 이용하여 외측에 영정주와 판목을 설치하여 성토 후 이동시키며 토루를 쌓아올린 것으로 확인되었다.18)


경기도박물관에 의하여 지표조사가 이루어진 파주 월롱산성은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월롱산(해발 229m)에 위치하며 둘레는 1,315m에 달한다. 성벽에 대한 단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지만, 천연암벽을 이용하여 성토방식으로 축성하였으며, 일부 구간은 할석으로 성벽을 보강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9)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지표조사가 실시된 慕洛山城은 의왕시 오전동과 내손동 경계의 모락산(해발 385m)에 위치하며 전체 둘레는 878m이다. 성벽은 토축과 석축 또는 토석 혼축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노출된 석축성벽은 다듬지 않은 부정형의 할석으로 성벽을 구축하였으며 성벽 단면을 보면 성토된 土築部 내에 작은 할석이 일부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20)


육계토성이나, 월롱산성, 고모리산성, 모락산성, 망이산성, 소근산성 등 지금까지 조사가 이루어진 한성백제시기의 산성들은 비교적 규모도 크고, 위치로 보아 각 방면에서 도성으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 성들이다. 이 성들은 축성시점은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축성기법에서는 공통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 토성으로 구축되었거나 토성벽에 약간의 석축이 더해진 형태의 성곽이다. 토성의 축조기법도 削土와 盛土 중심의 단순한 토루에서 永定柱와 板木이 사용되는 보다 발전된 형태의 판축토성으로 발전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포천 고모리성이나 파주 월롱산성, 의왕 모락산성 등의 백제성에서는 일부 석축도 확인되지만 모두 가공하지 않은 할석을 사용하여 취약한 토성 구간을 보강한 형태이다. 백제 토성의 입지는 대체로 평지나 완경사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다. 도성의 규모는 3㎞ 내외이며, 산성의 경우는 둘레 300m의 보루 규모에서부터 2.3㎞까지 입지와 기능에 따라 다양한 규모의 성곽이 있었다.


성벽의 축조방식은 후대의 판축기법과 달리 여러 번의 공정에 의하여 성벽이 구축되었다. 축 공정은 풍납토성이나 소근산성, 망이산성처럼 중심에서 내외측으로 덧붙여 가는 방법과 길성리토성이나 증평 추성산성처럼 내측이나 외측에서부터 성벽을 덧붙여 나가는 방식이 확인된다. 성벽은 성질이 다른 흙을 交互盛土하였으며, 중심토루와 외피토루 간의 경계가 없거나 모호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성벽을 쌓을 지반은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하거나 계단상으로 정지하여 지반과 성벽의 마찰력을 높였다. 토성의 내부에서는 목주공과 석열, 基槽라 불리는 溝狀施設이 확인된다. 목주는 성토공정이나 미끌림 방지와 관련된 것이고, 석열로 성벽의 작업구간을 구획하였으며, 구상시설은 성벽이 움직이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敷葉工法은 토루나 제방의 하단에 식물유기체를 깔아 토층이 압력을 견디고 지반을 단단하게 하는 성토방법이다. 잎이 붙어 있는 나뭇가지를 깔면서 성토하는 방법은 동아시아의 고대 유적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토축공법으로 풍납토성과 부여나성 등 백제성곽 뿐 아니라 신라유적인 울산 약사동 제방유적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렇지만 한성백제 시기의 석축성으로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산성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21) 한성백제 시기의 석재 가공기술의 수준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풍납토성과 석촌동 고분군을 비롯한 백제 고분군들이다.


풍납토성은 성벽 내벽이 석축으로 마감이 되어있었음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성벽의 조성 양상을 보면 내벽은 부정형의 할석으로 막쌓기를 하고 강돌로 적심을 쌓아서 뒤채움 했다. 방형으로 가공된 석재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양상은 5세기대의 백제 토성으로 확인된 증평 추성산성도 마찬가지이다. 토성이지만 수구나 문구부 양쪽은 석재로 마감되었는데, 전혀 가공되지 않은 석재로 난층쌓기 했다.


한성백제 시기의 대형 구조물인 석촌동 적석총도 대부분 운모편암류의 지표에 노출된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2차가공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러한 증거자료는 한성백제 시기에는 아직 화강암이나 화강편마암 같은 단단한 석재를 잘라내어 가공하는 기술과 바른층쌓기로 정연하게 석축을 쌓는 기술이 아직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한성백제 시기에는 목책이나 성토 다짐한 토성 위주의 성곽이 구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Ⅲ. 고구려 성곽과 관방체계


고구려는 장수왕대에 이르러 북위와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남조와도 통교를 하는 등 안정된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다. 고구려군이 임진강 유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장수왕대이다. 475년 고구려는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고구려는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아산만에서 영일만에 이르는 지역까지 진출했다.


고구려의 남진시기 임진강 유역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매우 중요시되었다. 임진강 유역에는 고구려 본토와 새로 점령한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2개의 幹線道路가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평양과 한성을 이어주는 도로였으며, 다른 하나는 楸哥嶺構造谷을 따라 원산-한성으로 연결되는 도로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교통로상의 거점에 성곽을 구축했다. 평양-한성을 이어주는 간선도로상에는 瓠蘆古壘와 아미성을 구축했다. 이때의 호로고루는 아직 지상성벽이 구축되기 이전단계로서 목책이 구축되어 있었다. 아미성은 감악산의 동쪽 마차산과의 사이에 형성된 협곡을 방어할 수 있는 요충지의 해발 260m 지점에 구축된 산성이다. 성내에서는 붉은 색의 고구려 기와편과 토기편이 출토되었으며, 신라에서 개축을 하여 고구려 성벽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원산-한성을 이어주는 간선도로상에는 隱垈里城과 전곡리토성이 구축되었는데 성벽의 기저부와 중심부는 판축을 하고 성의 안팎에는 돌을 쌓은 특이한 형태의 토성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은대리성은 한탄강의 북안에 위치한 삼각형의 강안평지성으로서 성의 둘레는 1,005m로서 호로고루나 당포성에 비하여 규모는 크지만 성벽의 높이가 낮고 유구나 유물의 출토양상은 빈약한 편이다.


백제 漢城을 점령한 고구려는 이후 여세를 몰아 錦江 상류지역까지 진출하여 요새를 구축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고구려유물이 출토되는 성곽으로는 남성골산성과 월평동유적, 진천 대모산성 등이 있다. 한강 유역에서는 몽촌토성이 일시적으로 재활용되며, 한강 이북지역에는 아차산과 망우산, 사패산과 천보산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따라 다수의 보루를 구축했다. 아차산에는 홍련봉 1보루와 2보루, 아차산 1-4보루, 용마산 1·2보루, 망우산 1∼4보루, 시루봉보루, 봉화산보루, 상계동보루, 사패산 1·2보루, 천보산 2보루, 도락산 1∼8보루, 독바위보루, 태봉 보루에 이르기까지 20개 이상의 보루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교통로를 따라 線狀으로 배치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보루들은 군사작전을 위한 보급로 확보가 주목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공격과 방어를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하면서도 장기간의 전투시 보급로가 끊어지지 않도록 주요 길목을 통제하는 기능도 함께 수행했을 것이다. 평양이나 개성을 출발한 고구려군이 한강 유역의 보루들을 중간거점으로 하고 전략적 요충지의 곳곳에 보루를 구축하여 백제나 신라에 대한 신속한 공격이 가능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임진강 이남지역 고구려 성곽의 분포양상은 신라성곽의 분포양상과도 차이가 있다. 고구려 성곽과 상당부분 공간을 공유하는 경기도 지역의 신라 성곽은 대략 현재의 군단위 마다 1㎞ 이상의 대형 성곽이 1~2개 정도가 분포되어 있다. 大城 사이사이에는 둘레 300∼500m 정도의 보루가 배치되어 있다. 大城은 신라 군현의 치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22)


백제의 경우에도 성곽은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분산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고대사회에 있어서 성곽은 군사적인 기능 뿐 아니라 행정중심지로서의 기능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정기능을 포함하는 성곽은 면적인 분포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각각의 성곽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으므로 한 성을 중심으로 다른 성들은 방사상의 분포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성곽 분포양상의 차이는 임진강 이남지역에 대한 고구려 영역지배 형태가 신라나 백제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 고구려 성곽의 공통적인 築城工法은 ‘土芯石築工法’이라고 할 수 있다. 土芯石築工法 토축후 석축으로 마감하는 축성공법으로서 지금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홍련봉 1보루, 홍련봉 2보루, 아차산 3보루, 아차산 4보루, 시루봉보루, 용마산 2보루, 천보산 2보루, 무등리 2보루 등 남한지역 고구려 산성은 대부분 토심석축공법으로 구축되었음이 확인되었다.23)


특히 최근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무등리 2보루에서는 한 겹으로 덧붙여 쌓아 마감한 석축성벽 내에 일정한 간격으로 영정주가 犧牲木으로 남아있었던 흔적이 분명하게 확인되었다.24) 홍련봉 1보루에서는 석축성벽이 일부 유실된 구간에 대한 조사 결과 석축성벽이 연접되는 구간의 안쪽에서 토축부를 조성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영정주공이 매우 크고 깊게 조성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영정주가 내부의 토축부를 축조하는데 필요한 거푸집의 기능뿐만 아니라 土築部를 지탱시켜 주는 構造體로도 기능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경우 토심석축공법으로 쌓은 성벽은 편축식 성벽으로 구축된데 비하여, 2013년 발굴조사가 재개된 홍련봉 2보루는 내벽도 石築으로 마감하였음이 확인되었다.25) 석축부가 붕괴된 구간에서 확인되는 양상을 토대로 홍련봉 2보루의 축성법을 파악해 보면, 토축으로 구축할 내벽과 외벽구간 너비 만큼 영정주를 벌려서 세우고, 영정주와 영정주를 횡장목으로 연결한 후 협판을 대고 판축으로 영정주 내부의 토축부를 먼저 조성했다. 이후에 영정주와 횡장목은 그대로 둔 채 협판만 제거하고, 외벽과 내벽을 석축으로 마감했다. 토축 후 석축성벽을 쌓을 때에는 일반적인 석축성을 쌓을 때처럼 비계목을 설치하였음이 석축 외벽 基底部를 따라가며 남아있는 주열을 통해 확인된다. 또한 석축 후에는 석축부의 바깥쪽에 일정한 높이까지 흙다짐을 하여 외벽을 보강했다.



그림3. 무등리 2보루 영정주

홍련봉 2보루 영정주와 횡장목

홍련봉 2보루 영정주


따라서 토축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땅속에 깊이 박은 영정주공이 확인되며 토축부의 종단면에는 홍련봉 2보루와 부소산성 북문지구간처럼 횡장목공이 확인된다. 또한 외벽마감을 한 석축성벽 앞쪽과, 석축성벽 바깥쪽 기저부에서는 목주열이 확인되며, 석축내부의 토축부는 자연상태에서는 유지될 수 없는 70∼80°의 경사각을 유지하고 있다.


土芯石築工法의 核心은 토축부에 있다. 석축부는 면석과 한단이나 두단 정도의 뒤채움으로 이루어지므로, 석축을 먼저 쌓고 토축부를 조성하게 되면 토압에 밀려서 석축이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먼저 토축부를 완성하고 난 이후에 석축으로 마감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구려 성을 발굴하게 되면 최정상부에서 목주열이 확인되고, 체성벽의 중간부분과 석축성벽의 하단부에서 목주열이 확인된다. 이것을 목책이 있었다가 석축성으로 개축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지만26) 이는 토심석축성벽의 축조공정에 대한 이해 부족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제1보루에서 확인되는 정상부의 주공열 역시 목책이 아니라 정상부에 설치되었던 永定柱孔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27)


임진강 유역에서부터 한강 유역에 이르는 교통로상에 집중적으로 보루를 구축하며 거점을 확보하였던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을 맞아 본격적인 저항을 할 겨를도 없이 임진강 유역까지 후퇴하게 된다. 고구려군이 신라와 백제의 공격에 적절한 대응을 취하지 못하고 죽령이북에서 임진강 이남지역까지 500여 리의 땅을 손쉽게 내어주고 임진강 유역에 방어선을 구축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고구려의 대내외적인 여건과 임진강 유역의 자연지리적인 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6세기 중엽 고구려는 귀족사이의 내분과 서북쪽 국경방면에 출현한 돌궐에 의한 압력 때문에 남쪽에까지 힘을 기울일 겨를이 없었다. 임진강 이남지역에 구축하였던 고구려 방어시설이 교통로 확보를 목적으로 한 堡壘 위주의 소규모 군사시설들이어서 방어력에 한계가 있었던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고구려는 신라의 한강유역전역에 대한 지배를 인정하게 되며, 이로 인해 진평왕 이후 고구려 滅亡 때까지 120여 년 동안 서북지역에서 신라와 고구려는 임진강을 경계로 국경이 나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가 임진강을 국경으로 삼은 것은 임진강이 적은 인원으로도 많은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임진강·한탄강 유역에 형성되어 있는 현무암 절벽이 천연의 성벽기능을 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많은 적의 침입을 능히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임진강의 高浪浦에서부터 하류지역은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感潮區間으로서 강심이 넓고, 수량이 많아 쉽게 渡江이 어려운 것도 방어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런데 임진강에는 샛강이 흘러드는 구간마다 石壁 사이에 통로가 형성되고, 샛강이 운반해온 모래와 자갈이 쌓이면서 넓은 여울목이 형성되어 많은 인원이 짧은 시간에 강을 건널 수 있는 교통로가 형성 되어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이러한 도강지점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하여 기존에 있던 성곽들을 재정 비하고 새로운 성곽을 구축하여 국경방어를 강화했다.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성곽은 임진강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분포되어 있다. 가장 하류쪽에는 덕진산성이 있다. 덕진산성이 있는 곳은 하중도인 초평도가 있어 강을 건너기 수월한 곳이다. 덕진산성에서 동쪽을 바라다 보이는 동파리에도 보루가 있다. 동파리보루에서는 다량의 고구려기와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덕진산성  동파리보루는 임진나루나 초평도를 건너 임진강을 도하하여 장단-개성으로 가는 길목을 방어하는 중요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4. 한강과 임진강 유역 고구려 성곽분포도


동파리보루에서 동북쪽으로 7㎞ 지점에는 두루봉보루가 있으며 이곳에서 4㎞ 동북쪽에 호 로고루가 있다. 호로고루는 感潮區間의 상류에 있으며 호로탄에 접해있다. 호로탄은 말을 타고 渡涉 할 수 있는 여울목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임진강을 건너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다. 기마부대를 포함한 육상군이라면 평양을 출발하여 개성-장단을 거쳐 임진나루로 도강하기보다는 약간 우회하더라도 호로고루 앞의 호로탄을 건너 양주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이 최단거리에 해당된다. 호로고루에서는 平山이나 兔山으로 갈 수 있다.


당포성은 호로고루에서 동북쪽으로 12㎞ 지점에 있다. 당포성 앞의 당개나루는 하적성에서 마전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였다. 당포성은 북쪽으로 삭령, 서쪽으로 금천과 개성으로 연결되는 길목이었으며 강을 건너면 어유지리를 통하여 감악산을 우회하여 양주에 이를 수 있어 매우 중요한 대 신라 공격로의 하나로 이용되었다.


당포성에서 동쪽으로 3㎞ 지점에는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도감포가 있다. 이 곳에서 동쪽으로 4㎞ 지점에는 은대리성이 있다. 은대리성 앞은 마여울이라 하여 한탄강을 건너는 여울목이다. 은대리성에서 서북쪽으로 마탄이나 유연진을 건너면 무등리보루에 이른다.


은대리성의 동쪽 1㎞ 지점에 전곡리토성이 있다. 전곡리토성 앞쪽의 한여울은 동두천에서 전곡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이다. 한편 도감포에서 북쪽으로 7㎞ 지점에는 무등리 1,2보루와 우정리성이 있다. 이곳은 유연진이라 하였는데 한국전쟁 당시 화이트교라 부른 임진강을 건너는 중요한 다리가 있다. 무등리보루에서 북쪽으로 2㎞ 지점에는 고성산보루가 있다. 무등리보루에서는 임진강을 다시 건너지 않고 兔山-新溪-瑞興으로 갈 수 있다.


무등리보루는 임진강 유역에서 민통선으로 인하여 조사가 가능한 최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강 상류쪽으로 올라가며 더 많은 고구려 성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 6세기 중엽 이후 신라가 임진강 유역으로 진출하며 임진강의 남안에는 임진강 북안의 고구려성에 대응하는 지점에 많은 신라성이 구축되었다. 고지도를 보면 이곳에서 임진강 상류쪽으로 이어지는 삭령, 안협, 이천에 이르기까지 신라성으로 추정되는 성곽들이 분포되어 있음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임진강 양안에서 고구려 성곽은 북안에서만 확인된다. 이는 임진강의 북안에서 남쪽으로부터의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성곽이 구축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성곽은 주요 교통을 통제할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곽이 위치하는 곳은 대부분 도강이 용이한 지점들이다. 따라서 임진강 북안의 고구려 성들은 고구려의 국경을 방어하기 위하여 구축된 성들이며 전연방어체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탄강 북안에 구축된 은대리성이나 전곡리토성은 이 시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되므로, 당시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도감포 상류지점 부터 고구려의 국경선은 한탄강이 아니라 임진강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호로고루의 경우에는 당초 목책이 구축되어 있었던 방어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성 내부를 평탄하게 조성하고 높이 10m에 길이 90m에 달하는 동벽을 쌓아 방어력을 보강하는 등 대규모 土木工事를 시행했다. 성 내부에는 창고와 병영을 구축하였는데 연화문 와당과 치미, 착고기와를 사용한 붉은색의 기와건물에 건물바닥에는 전돌까지 깔아놓은 수준 높은 건물이 확인되어 호로고루가 고구려 남쪽의 국경을 총괄하는 사령부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최근의 발굴조사에서는 성내에서 전투시 병사들의 공격을 신호하던 ‘相鼓’라는 명문이 새겨진 토제북이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시기 고구려의 축성공법을 보면 산성은 土芯石築工法을 유지하였지만 새로 구축된 평지성에서는 산성에 비하여 좀 더 복잡한 축조공법이 확인된다. 평지성 중 호로고루나 당포성은 고구려가 임진강 이북으로 후퇴한 이후 새롭게 구축된 성벽이지만, 은대리성은 나머지 두 성보다 이른 시기에 구축되었으며 고구려가 임진강 유역으로 후퇴하면서 신라의 영역에 속하게되어 6세기 중엽 이후에는 閉城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호로고루나 당포성은 고구려가 임진강 이북지역으로 후퇴한 후 국경방어를 위하여 발달된 고구려의 축성공법으로 새롭게 구축한 성벽으로 추정된다. 성벽의 기저부와 중심부는 판축을 하고 기저부 판축토 위에 내벽과 외벽을 돌로 쌓고, 版築土 위에 쌓은 體城壁의 바깥쪽에는 판축부 하단에서부터 보축성벽을 쌓아 체성벽의 중간부분까지 덮이도록 하였으며 보축성벽의 중간부분까지는 다시 점토를 다져서 보강했다.


최근 호로고루 4차발굴 조사과정에서 호로고루 동벽의 일부를 해체조사한 결과28) 보축성벽 안쪽에서 체성벽과 체성벽 하단부의 地臺石 외면에 185㎝ 간격으로 놓여있는 확돌이 확인되었다. 확돌은 직경 25㎝, 깊이 7㎝ 정도로 바닥이 평평하게 홈을 파놓은 것인데 석축성벽을 쌓기 위해 세운 나무기둥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확돌은 연천 당포성에서도 확인 된바 있다. 그런데 체성벽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체성벽 안쪽 1.2m 지점에서 또 한 겹의 중간 벽이 노출되었다. 이 성벽은 체성벽보다는 부정형의 성돌이 사용되었으며 이곳에서 기둥홈이 확인되었다. 기둥홈의 너비와 깊이는 25㎝ 정도이며, 기둥홈의 간격은 215㎝였다. 기둥홈의 내벽과 측벽은 성돌이 안쪽으로 밀려 약간 무질서한 모습을 보이지만 기본적인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동벽 완성 후에도 성벽 안의 나무기둥은 그대로 있었으며, 나무기둥이 부식되면서 기둥홈에 약간의 변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둥홈의 하단부는 기저부 판축토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무기둥을 세우고 일정 높이까지 판축하여 고정시킨 후 나무기둥을 기준으로 石築城壁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호로고루성벽에서 확인된 기둥홈은 평양의 대성산성과 당포성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대성산성의 소문봉 부근에서 확인된 기둥홈은 체성벽 안쪽 3.2m 지점의 중간벽에 1.5∼2m 간격으로 설치되었으며, 너비와 깊이가 20㎝였다. 당포성에서 확인된 기둥홈은 1.7∼1.8m 간격으로 설치되었으며, 기둥홈의 하단부에는 직경 31㎝, 깊이 7㎝ 정도의 홈이 파인 확돌이 놓여 있었다.


그림5. 호로고루 동벽-보축성벽과 체성벽

호로고루 동벽-중간벽 기둥홈

호로고루 동벽-확돌과 기둥홈


기둥홈의 기능에 대해서는 지하수의 壓力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구축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며29) 성벽을 구축하기 위한 木柱의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과 木柱를 활용하여 投石機나 쇠뇌 등을 설치하기 위한 특수시설일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30) 그러나 호로고루와 당포성에서 중간벽과 기둥홈이 발견됨으로써 고구려 성벽의 기둥홈은 축성공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목주는 기둥홈이 확인된 성벽 안쪽에서도 확인되는데, 이는 목주의 기능이 단순히 석축을 쌓기 위한 가설목의 기능 뿐 아니라 석축을 견고하게 유지시켜 주는 構 造體로도 기능하였음을 말해준다.31)


그림6. 평양 대성산성 중간벽 기둥홈

당포성 기둥홈

당포성 가설목 모식도


당포성에서 확인된 것처럼 기저부의 판축토 위에 가로, 세로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기둥을 세운 후 각각의 나무기둥을 연결하여 구획을 나누고 그 사이에 성돌을 채워 넣었다. 이것은 견고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석축성벽의 내벽을 쌓는 기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호로고루에서는 기둥홈이 있는 성벽면 바깥에 다시 한 겹의 외벽을 쌓아서 마감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따 서 외벽 안쪽에 조잡한 느낌이 들도록 쌓은 당포성 성벽도 정연하게 다듬은 돌로 외벽을 덧붙여 쌓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호로고루와 당포성은 첨단 축성공법으로 구축한 고구려 성곽으로서 우리나라의 토목·건축기술사적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강 유역을 포함한 경기도지역의 고구려 관방체계에 대하여 복합적이고 체계적인 면적인 방어체계를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32) 이 견해는 고구려가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성을 배후 거점성으로 하여 천보산맥 일원에 중간기지를 설정하고, 한강 유역을 전진기지로 하고 남진을 계속하여 금강상류까지 진출했다가 551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으며 임진강 유역의 배후거점성은 고구려 멸망당시까지 사용되었으며, 임진강에서 양주일대에 이르는 개개의 교통로를 설정하고 고구려가 치밀한 평면계획 하에 복합적인 방어체계가 있었던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개개 성곽들의 축성과 사용기간이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근거 자료에 입각하기보다는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상황론에 입각하고 있어 실체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33)


경기도지역의 고구려성곽은 경기도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영역적 지배를 보여준다는 견해도 있다.34) 475년 한성함락 이후 고구려는 몽촌토성을 거점으로 하여 남진을 계속하여 한강유역에 대한 영역화를 시도하였으며, 이후 백제의 한강유역 수복 노력이 강화되면서 500년을 전후 한 시점에 몽촌토성을 비롯한 한강 이남의 고구려 군은 한강 이북으로 철수하여 한강 북안과 아차산 일원에 방어용 보루를 구축했다고 했다.


몽촌토성과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성곽이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고고학적 분석에 기초한 이러한 견해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경우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동성왕대와 무령왕대의 한성경영 기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인데 동성왕대의 한성은 차령 이남이라는 견해를 차용하고 있다. 또한 무령왕대의 한성경영 기사를 받아들이면, 고구려와 백제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장기간 대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무령왕대 초기에 대고구려 공세를 통하여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고구려군은 한강 북안으로 철수하였으며, 한강 이남지역에 대한 백제 활동의 제약은 적어졌으나 한강유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경영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35)


그러나 6세기 초반 한강 이북지역으로 고구려가 후퇴했다고 하더라도, 무령왕대와 성왕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가 501년에는 수곡성(신계)을 시작으로하여 고목성(연천), 장령성, 횡악(횡성), 가불성(가평) 등지에서 진행되고, 523년의 패수(예성강) 전투와, 529년 오곡(황해도 서흥) 등 경기도북부 지역과 황해도 지역에서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진행되는 전투에 대한 설명을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또한 475년부터 500년 전후까지 25년 정도 몽촌토성을 거점으로 하여 주둔하던 고구려군이 한강이북으로 철수하여 아차산 일대의 보루를 축조하였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한강 이남지역과 한강 이북지역 고구려 성곽의 축성방법이나 유물의 형태적 변화 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이처럼 남한지역의 고구려 성곽들의 축성과 경영방법에 대한 명쾌한 이해가 어려운 것은 고고학적인 증거와 삼국사기의 기록내용을 논리적으로 결합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연천 호로고루 2차 발굴조사에서 이 문제와 관련한 중요한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호로고루에 처음부터 석축성벽이 구축된 것이 아니라 석축성벽 이전에 목책시설이 있었음을 명확하게 밝혀내게 된 것이다. 이미 호로고루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에서도 동벽단면의 판축 구간내에서 고구려토기편이 확인되어, 고구려가 이곳을 장악한 후 초기에는 석축성벽과 瓦家가 없었지만 木柵 등 초보적인 형태의 방어시설을 구축하였으며, 이후 전략적인 필요에 의하여 여러동의 와가를 건축함과 동시에 판축부와 석축부 그리고 보축부를 포함한 동벽 전체가 한꺼번에 구축된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36) 그런데 이러한 예측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2차 발굴 조사에서 층위적으로 입증되었다. 이 증거는 지금까지 남한 지역에서 확인된 고구려 성곽의 축성시기와 분포양상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37)


호로고루의 목책은 동벽 안쪽에 동벽과 거의 평행하도록 구축되었으며 목책공은 170∼200㎝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목책이 구축되었을 당시에는 성 내부 지형이 현재처럼 평탄하지 않았으며, 목책관련 유구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석축성벽 관련 유구에서 출토되는 유물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목책 관련된 유구에서는 기와는 전혀 출토되지 않았으며, 토기류는 기종이 비교적 단순하고 토기의 구연부는 거의 수직에 가깝게 외반하며 구순부가 납작하게 마무리된 자배기 형태의 토기와 직구단경호의 어깨부분에 점열문과 파상문이 돌아가는 토기들이다. 이에 비하여 석축성벽 관련 유구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기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토기류는 자배기와 옹, 완, 합, 이형토기 등 기종이나 기형이 매우 다양하고, 토기 구연부의 처리나 문양의 유무, 동체의 형태 등에서 목책단계와 분명한 차이가 확인된다.


호로고루의 목책은 남성골산성이나 안성 도기동산성과 구조적으로 유사하고 출토유물을 고려하더라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같은 유형의 유물들이 고성산보루와 은대리성, 전곡리토성, 몽촌토성 등에서 확인되고 있어 남한지역 고구려 성곽에 대한 시기별 설정이 가능하다.


문제는 호로고루에 대규모 토목공사가 시행되고, 지상건축물이 구축되며, 석축성벽이 구축되는 시점이 구체적으로 언제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한강 이북지역에 고구려성곽이 구축 되는 시점에 임진강 유역에는 어떠한 형태로 방어시스템이 구축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중요 사안이다. 즉 아차산 일대에 성곽이 구축될 당시 임진강 유역도 이미 방어시스템이 정비되어 한강유역의 고구려 성에 대한 배후거점성의 역할을 했는지 아니면,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이후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방어시스템이 전면적으로 재편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자료가 된다.


이것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는 역시 성내에서 출토되는 유물이다. 목책단계의 유구에서 확인되는 토기편의 경우 몽촌토성과 마찬가지로 D형보다 A형이나 B형의 구연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에 비하여 동벽단면에서 출토되는 토기구연부의 대부분은 D형으로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성곽 출토유물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성내부에 낮은 곳은 2m 이상 판축을 통한 성토가 이루어지고 구축되는 지상건물지에서는 다량의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 기와는 제작기법상 한강유역의 홍련봉 1보루나 가락동 5호분에서 출토된 기와와 비교할 때 귀접이가 등장하고 문양구성이 다양해지는 등 한강유역의 고구려기와에 비하여 제작기법이 발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호로고루의 수축과 석축성벽이 축조되는 시점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하게 되는 6세기 중엽 이후라고 판단하고 있다.38) 임진강이 국경하천의 기능을 하게되면서, 임진강 북안에 있던 성들 중 일부는 개축하였지만, 국경을 따라가며 다수의 새로운 성곽이 구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7. 고구려토기 구연부 형태 구분


남한의 고구려 유적은 대략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Ⅰ기는 장수왕대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된 유적들이다. 이 시기 유적의 상한은 고구려의 남진이 이루어지는 5세기 후반을 넘지 못하지만 하한은 Ⅱ기의 유적으로 교체될 때까지이다. 고봉산보루, 은대리성, 호로고루의 목책단계, 몽촌토성, 안성 도기동산성, 남성골산성, 월평동유적 등이 이 시기의 유적에 해당한다. 특징적인 방어시설로는 목책이 주로 구축되었다. 은대리성은 토성처럼 보이지만 동벽에는 석축을 부가한 성벽도 확인되어 정연하지 않지만 석축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전곡리토성도 은대리성과 축성기법이 유사하며, 동쪽구간에서는 2열의 목책열이 확인되었다.


호로고루에서는 동벽 안쪽에서 선행하는 목책유구가 확인되었다. 몽촌토성에는 별도의 방어 시설을 구축하지 않고 기존의 백제 토성을 그대로 활용했다. 안성 도기동산성에서도 둘레 2㎞ 달하며 5m 간격으로 2열의 목책열이 확인되었다. 남성골 산성에서는 4m 간격을 유지하는 2열의 목책이 구축되어 있었으며, 대전 월평동유적에서도 2열의 목책열이 확인되었다.39) 이 시기의 성곽들이 대부분 목책으로 구축된 것은 축성기술의 부재로 인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이미 발달된 석축성벽을 구축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축성목적과 인력이나 시간 등 축성 환경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40)


그리고 이 Ⅰ기 유적의 존속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금강 상류에 구축되었던 남성골산성은 출토되는 유물도 6세기 중엽을 중심으로 하는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성곽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차이가 있다. 입지적으로 백제 웅진성과의 거리가 24㎞ 밖에 안되며, 주변에 아차산 일대처럼 고구려 성곽이 밀집분포되어 있지도 않은 실정이다. 또한 대전 월평동유적의 경우도 출토유물이 빈약하고 유적 내에서 6세기 초 중엽 백제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41) 따라서 고구려가 기세를 몰아서 금강 상류지역의 백제 영역 깊숙한 곳까지 남진을 하였지만 백제 영역 내에서의 존속기간은 길지 않았으며, 몇 년 이내 백제에 함락 당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고구려 국경을 따라가며 국경방어를 위한 별도의 성곽이 구축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대략 산맥이나 하천 등 자연지형을 따라 한시적이나마 경계가 구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지리지의 고구려 군현명은 고구려가 남하하여 점령했던 지역을 고구려의 군현에 포함시키고 고구려 군현명을 부여하고 간접적으로 지배하였을 뿐 군현단위로 중앙관료를 파견하고 조세수취가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영토적 지배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백제나 신라와의 국경 뿐만 아니라 죽령에서 한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에도 백제와 신라로부터 영토를 방어할 수 있는 대규모 방어성이 구축되지 않았으며 행정적 지배의 근간이 되는 성곽의 면적인 분포양상도 확인되지 않는다. 조사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고구려가 금강 상류에서 임진강 유역에 이르는 교통로를 중심으로 한 선상의 방어체계를 구축했다고 하는 것은 점령지역을 영토적으로 지배할 의사가 없었거나 그럴 수 있는 여력이 없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42)


Ⅱ기는 한강유역에서 양주 일대에 구축되는 고구려 유적들이다. 상한은 6세기 초이며 하한은 551년이다. 이 시기의 유적은 매우 정형화된 석축성곽이 주류를 이룬다. 공간적으로는 한강 이북지역부터 임진강 이남지역이며, 아차산일대와 양주일대의 고구려 성곽이 여기에 포함된다. 지금까지 남한지역에서 확인된 고구려 성곽 중 가장 많은 숫자가 여기에 속한다.43)


규모는 크지 않지만 대략 500m 정도 간격으로 밀집 분포되어 있는 이 시기의 고구려 성곽은 축성을 위한 평탄면의 조성과 성벽, 치, 배수시설, 집수시설, 온돌, 벽체, 성벽 위의 목책시설 등 복잡하고 입체적인 시설들이 정형화된 설계시방서에 따라 구축된 것처럼 보인다. 성벽은 토축부를 판축공법으로 먼저 구축하고 얇은 석축으로 마감하였으며 성벽에는 다수의 치를 배치하여 성벽의 안정성을 보강했다. 성 내부에는 거미줄같은 배수망과 함께 암반을 방형으로 굴착하고 내부에 점토를 다져 방수처리한 집수시설과 함께 ‘ㄱ’자형 외고래 온돌과 벽체시설, 그리고 치 앞에 다시 석축단을 쌓아 올려 사다리를 놓아야 출입할 수 있는 이중치를 가진 출입시설 등이 있다.


Ⅱ기의 유적 중에는 홍련봉 1보루와 홍련봉 2보루, 용마산 2보루, 아차산 3보루, 아차산 4보루, 시루봉보루, 천보산 2보루, 태봉산보루 등이 발굴되었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유적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와 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고구려의 문화상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홍련봉 1보루에서는 이 시기의 유적 중 유일하게 연화문 와당과 고구려기와편이 출토되었다. Ⅱ기 유적의 정확한 구축시점에 대하여 출토토기의 편년적 분석자료와 홍련봉 2보루에서 출토된 520년 으로 추정되는 庚子명 명문토기를 근거로 6세기 초로 추론하는 견해가 있다.44) 이 시기 고구려는 한강하류지역을 영역적으로 지배하였고, 그 중심거점은 남평양으로 비정되는 중랑천변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강 북안의 거점성으로 추정하는 중랑천변 일대가 이미 택지로 개발되어 고고학적인 자료를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조선시대 사복시 목장이 설치되었던 저습지가 많은 지역으로서 고구려의 남평양관련 성곽이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방어시설도 없고 고고학적인 증거도 전혀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중랑천 일대에 남평양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別都가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성곽의 축성을 단순히 한강 이남지역 고구려 군의 철수라는 관점에서 보게 되면, 한강 이남지역과 차별화되는 정형화된 성곽의 구축이나 기와건축물의 등장, 토기형태의 계기적 변화 등을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Ⅰ기와 Ⅱ기는 계기적인 연속성 보다는 같은 기술적 전통에서 유래하였지만 새로운 기술자 집단에 의하여 구축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토성이나 목책에서 석축성으로 변화된 축성기술 뿐만 아니라 기와나 토기제작기술에 있어서도 분명한 차이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Ⅰ기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건축부재인 기와가 제작되고, Ⅱ기의 토기는 Ⅰ기에 비하여 토기의 기형이 다양화되며, 토기의 두께가 얇아지고 경질화되는 경향 을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시간성도 어느 정도 반영해 주지만 부대의 교체나 전문인력 보강과 같은 인적인 교체에 의한 차이가 주된 이유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도성지역으로부터 최신의 축성기술과 토기, 기와제작기술자들이 한강유역의 방어와 교통로 확보를 위하여 추가로 파병되는 군대에 포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Ⅱ기 성곽의 구축은 Ⅰ기 성곽 중 금강상류지역 등 전진배치되었던 성곽들이 함락된데 따른 보강조치로서, 한강 이북지역의 교통로상에 집중적으로 배치됨으로서 한강 이남지역에 대한 공력과 방어가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어시스템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힘을 가지고 속공을 할 때에는 매우 유용하고 관리상의 경제성과 효율성이 있지만, 방어에는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성곽들이 방사상으로 배치될 경우 한성이 공략당하더라도 주변 성들이 배후를 공격하거나 지원이 가능하지만, 이처럼 남-북으로 긴 선상방어체계 하에서는 대규모 적의 공격에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고구려는 6세기 중엽까지는 강력한 정치적·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점령지역을 백제와 신라의 견제로부터 어느 정도 지켜낼 수 있었지만 내우외환으로 인하여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되자45) 551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죽령 서북의 500리 땅을 빼앗기게 되었다.46)


Ⅲ기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이후 임진강 유역에 새롭게 구축되거나 재정비되는 성곽들이다. 상한은 6세기 중엽이며, 하한은 임진강 유역을 나당 연합군이 차지하게 되는 7세기 후반까지 존속했다. 호로고루의 석축성 단계, 두루봉보루, 당포성, 덕진산성, 무등리 1보루, 무등리 2보루 등이 이 시기 유적에 해당된다.


호로고루나 당포성처럼 석축성과 토성의 장점을 결합한 고구려 특유의 정형화된 강안 평지성이 구축되며, 임진강을 건너는 주요 교통로를 주변에 성곽이 석축성이 구축되며, 성내에 기와를 사용한 지상건물 구축이 일반화되었다. 기와가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곳은 호로고루와 당포성, 무등리 1보루, 동파리보루이다. 무등리 1보루와 호로고루에서는 다량의 탄화곡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한탄강북안에 구축된 은대리성이나 전곡리토성은 이 시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되므로, 당시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도감포 상류지점 부터는 고구려의 국경선은 한탄강이 아니라 임진강을 중심으로 하여 재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종심형의 선형방어체계를 구축하였던 임진강 이남지역과 달리 임진강 일대에는 동-서 방향으로 강의 북안을 따라 전연방어체계를 구성하여 대규모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비록 임진강 북안의 고구려 성들도 1㎞ 미만의 소규모에 속하는 성들이지만, 배후의 거점성들과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120여 년 동안 방어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47)


Ⅳ. 신라 성곽과 관방체계


임진강 유역으로 진출한 新羅는 임진강 이북의 고구려 성곽에 대응되는 성곽을 임진강 이남 지역에 구축했다. 임진강의 입구이자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되는 지점에는 烏頭山城을 구축하고, 연이어서 봉서산성, 파평산성, 이잔미성, 칠중성, 옥계토성, 대전리산성 등 둘레 1㎞ 내외의 대형산성을 약 5~10㎞ 간격을 유지하며 방사상으로 구축했다. 대성 사이의 중요한 교통로에는 100~500m 내외의 성을 배치하여 국경방어 시스템을 완비해 나갔다.


551년 고구려가 요동쪽에 침입한 돌궐의 공격에 집중하는 사이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게 죽령 이북지역과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임진강 유역으로 후퇴한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切齒腐心하며 기회를 엿보게 된다. 598년 수나라의 공격을 물리친 고구려는 603년 드디어 장군 고승을 보내어 신라의 북한산성을 치도록 한다.


14년(603)(가을 8월에) 왕은 장군 高勝을 보내 신라의 北漢山城을 쳤다. 신라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漢水를 건너오니, 성안에서는 북치고 소리지르며 서로 호응했다. (고)승은 저들이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므로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났다.48)


고구려의 공격에 대응하여 신라는 북한산성의 군사들과 함께 진평왕이 몸소 군사 1만명을 이끌고 협공을 하여 성공적으로 막아내게 된다. 이때 고구려가 공격한 북한산성은 현재의 阿且 山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라 북한산성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도록 중요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북한산성과 한강을 건너는 신라 군사들이 서로 북치고 소리치며 호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아차산성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北漢’이라는 명문이 쓰여진 기와가 여러 점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아차산성은 고구려가 백제 한성을 공략할 때 개로왕을 죽인 阿旦城으로도 추정되고 있는데 일부성벽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현존하는 석축성은 현문식 성문과 보축이 확인되는 전형적인 신라성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북한산성 전투에 고구려의 온달이 참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陽岡王(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신라가 우리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리석은 이 신하를 불초하다 하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했다.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과 죽령 이서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하고, 나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 아래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흐르는 화살에 맞아 넘어져서 죽었다. 장사를 행하려 하였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했다. 드디어 들어서 장사지냈는데 대왕이 듣고 몹시 슬퍼했다.49)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단양 영춘의 온달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50) 그러나 영양왕의 재위기간인 590년부터 618년 중 611년 이후는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신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며, 이 기간 동안 고구려의 신라침공 기사는 603년의 북한산성과 608년 신라의 북쪽변경습격과 우명산성 공략기사 등 3건이다. 그중 두 건은 모두 성공한 전투였던 반면 유일한 패배는 북한산성 전투였다. 따라서 온달이 참전하여 패전하게 된 전투는 북한산성 전투일 가능성이 크며, 북한산성은 백제의 阿旦城으로 불리던 지역이므로 고구려 본기에도 아단성으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1) 수나라와의 전쟁 이후 고구려는 638년 칠중성 공격을 감행했다.

7년(638)년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 칠중성을 침범하니 백성이 놀라 혼란해져 산골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하여 그들을 안도케 했다. 11월에 고구려군사와 칠중성 밖에서 싸워서 이겼다.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52)

21년(638) 겨울 10월에 신라의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략했다. 신라의 장군 알천이 막으므로 칠중성 밖에서 싸웠는데 우리군사가 졌다.53)

이 기록에 의하면 638년 고구려가 침입할 당시 신라는 이미 칠중성을 비롯하여 임진강 이남 지역에 대한 방어시스템이 거의 완비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칠중성은 배후에 감악산이 있고 전방에는 임진강 유역이 넓게 조망되는 해발 168m의 중성산에 구축된 성곽이다. 현재 남아 노출된 성벽을 보면 현문성문과 보축성벽을 구비한 성벽이 잘 남아 있다. 신라는 칠중성을 구축하고 국경지역에 대한 주민 이주정책을 실시하여 유사시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림8. 한강과 임진강 유역 신라성곽 분포도


이러한 방어시스템으로 인하여 칠중성에서 벌어진 고구려와의 전투는 신라는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이후 30여 년 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갈등은 더욱 높아지고, 당나라 세력까지 한반도에 개입하면서 이후 40여 년 간 삼국은 지루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었다.

660년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공격하자 고구려는 신라의 배후에 해당하는 칠중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고구려의 공격에 대하여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짧게 기록되어 있다.

(660년) 11월 1일에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여 군주 필부가 전사했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7년조)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하여 『삼국사기』열전 필부전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필부는 신라의 사량부 사람인데 아버지는 아찬 존대이다. 태종대왕이 백제, 고구려, 말갈이 서로 가까워져 침탈을 함께 꾀하자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인재로서 그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자를 구하였는데 필부를 칠중성의 현령으로 삼았다. 이해는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하기 한해 전인데 신라는 이미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침공은 나당연합군이 백제수도를 공격한 3개월 후인 660년 10월에 감행되었다. 고구려군은 군사를 출통시켜 칠중성을 포위했다. 이때 출통한 고구려군의 숫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칠중성의 규모가 700m 정도이므로 최소한 1만명 이상의 고구려 군사가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칠중성 공격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문맥상으로는 고구려군이 칠중성을 공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661년 고구려는 북한산성에 대한 2차 공격을 감행하지만 자연재해로 인하여 실패한다. 그 이후 어느 시점에 칠중성은 다시 신라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김유신이 평양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군대에 군량미를 전달하러 갈 때에 칠중성은 여전히 신라의 수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임술년(문무왕2년, 662) 정월 23일 칠중하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감히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배에 오르지 않자 유신이 말하기를 여러분이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이곳에 왔는가? 하고는 스스로 먼저 배에 올라 건너니 여러 장군과 병졸이 따라서 강을 건너 고구려 강역 안에 들어갔다. 고구려인이 큰길에서 지킬 것을 염려하여 험하고 좁은 길로 행군하여 산양에 이르렀다.54)

문무왕 2년(662) 정월 김유신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에 원정 온 당군에 군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수레 2천 여 량에 식량을 싣고 평양으로 향했다. 정월 18일에는 풍수촌에 묵고 23일에는 칠중하를 지나 산양에 도착하였으며, 이현이란 곳에서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였다. 2월 1일에는 평양에서 3만 6천 여 보 떨어진 장새에 도달하였으며, 6일에는 양오라는 곳에 이르러 당군에게 군량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신라로 돌아올 때에는 추격해온 고구려군에게 瓠蘆河에서 공격당했다. 김유신 부대는 칠중하로부터 장새현을 거쳐 평양에 갔다가 호로하로 돌아왔음이 분명한데 칠중하와 장새현 사이의 예상 이동로는 칠중성에서 북쪽으로 임진강을 건너 황해북도 토산군, 신계군 등의 산악지대를 경유하는 코스였을 것이다.

이 기록내용으로 보면 김유신은 경주를 출발하여 임진강 이남지역까지는 별다른 무리가 없이 이동하였는데 임진강을 건너면서 군사들의 동요가 일어났고, 김유신의 독려로 강을 건너 험한지역을 택하여 평양까지 군량미를 전달했다. 그런데 662년 이후 667년 사이에 몇 년 동안 칠중성은 고구려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이는 答薛仁貴書에 수록된 다음의 내용에서 유추가 가능하다.

건봉2년(667)에 이르러 대총관 영국공이 요동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저는 한성주에 가서 군사를 국경으로 보내 모이게 하였습니다. 신라 군사가 단독으로 쳐들어가서는 안되겠기에 먼저 정탐을 세 번이나 보내고 배를 계속해서 띄워 대군의 동정을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정탐이 돌아와 모두 말하기를 대군이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말하였으므로 우선 고구려 칠중성을 쳐서 길을 뚫고 대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을 막 깨뜨리려고 할 때 영공의 사인 강심이 와서 대총관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 군사는 성을 공격할 필요 없이 빨리 평양으로 와 군량을 공급하고 와서 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행렬이 수곡성에 이르렀을 때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 군사도 역시 곧 빠져나왔습니다.55)

현존하는 경기도 지역의 성곽중 대다수가 이 시기에 쌓은 성들이다. 하남 이성산성을 비롯하여, 서울 아차산성, 양천 고성, 인천 계양산성, 양주 대모산성, 포천 반월산성, 이천 설봉산성, 이천 설성산성, 파주 오두산성, 고양 행주산성, 김포 수안산성 등도 모두 이 시기에 쌓은 성들 이다. 신라는 470년 三年山城 축성 시점을 전후한 시기에 완성된 형태의 새로운 축성공법을 도입하여, 신라 영역확장과 함께 6~7세기에 전국에 많은 비슷한 유형의 성곽을 건축했다. 이 시기 신라의 축성기법은 고구려나 백제와 전혀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夾築式이 全面石築 성벽을 구축했다. 體城壁의 단면은 기저부가 넓고 위가 좁은 사다리꼴 모양이며, 내벽과 외벽을 갖춘 협축식 성벽으로 구축하였으며 내벽과 외벽 사이에는 길쭉 한 뒤채움돌을 치밀하게 물리도록 하여 성벽의 견고성을 더했다. 성벽 기저부에 암반이 노출될 경우 바닥을 층단식으로 정지하고 성벽을 쌓았으며, 내벽 안쪽과 경사면 사이는 점토로 충진하였지만 성벽은 점토를 충진하지 않고 돌로만 쌓는 건식쌓기를 했다.56)

둘째, 補築城壁을 쌓아 체성벽을 보강했다. 체성벽을 전면석축으로 견고하게 쌓더라도 성벽이 높아지면, 성벽 내부의 橫壓力이 작용하여 성벽의 붕괴 위험도 커지게 되므로, 체성벽 외부에 다시 보강용 성벽을 쌓아 구조적으로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했다. 보축성벽의 높이와 형태는 산성의 입지여건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가 확인되며, 보축성벽의 외부에는 다시 점토로 보강하여 쌓는 경우가 많이 있다.

셋째, 片巖係 석재를 장방형으로 가공한 성돌을 사용했다. 성돌의 재료는 節理가 발달하여 결을 따라 잘라내기 용이한 堆積巖이나 화강편마암 같은 變成巖 종류를 주로 활용했다. 암괴에서 결을 따라 잘라낸 석재를 2차 가공하여 장방형이나 세장방형으로 가공하여 면석으로 사용하고, 뒤채움돌은 마름모꼴이나 부정형으로 가공하여 면석과 서로 맞물리도록 했다. 축성에 이처럼 가공된 성돌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성벽을 견고하면서도 높게 쌓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한 축성배경에는 다수의 숙련된 築城技術者 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懸門式 城門을 축조했다. 신라성은 개거식이 일반적인 백제성이나 고구려성과 달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 성문을 구축했다. 이것은 성곽에서 성문이 가장 취약하기 때문인데, 신라성은 방어력을 높기기 위하여 사용상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구축한 독특한 형태의 성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문의 위치도 진입하기 용이한 능선이나 계곡부보다는 능선에서 약간 벗어난 지점에 설치하여 적의 공격을 최대한 방어할 수 있도록 했다.

다섯째, 독특한 형태의 水口를 설치했다. 신라식 석축성벽은 기본적으로 건식쌓기에 해당하므로 일상적인 雨水는 성벽으로 자연스럽게 배출되는 구조지만, 많은 양의 물이 배출되도록 성벽에 별도의 수구를 설치했다. 수구는 기본적으로 성벽을 통과하여 밖으로 배출되도록 하였으며, 위치에 따라 외벽의 하단, 중단, 상단식 수구가 있으며 형태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사다리꼴이나 삼각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성벽 중 현문식 성문을 설치한 문구부의 위치가 가장 낮으므로, 문지 바닥에도 수구를 설치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섯째는 築城의 立地와 規模다. 이 시기의 신라 성들은 대체로 海拔高度나 比高가 100∼200m 정도인 높지 않은 입지를 택하고 있으며, 대략 5㎞ 정도 거리마다 둘레 1㎞ 내외의 성곽을 배치하여 治所城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따라서 산성이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가 되었으므로 성내에는 기와가 사용된 많은 초석건물이 확인되며, 성곽주변에는 산성 운영주체와 관련한 古墳群이 분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라성곽들은 축성기술상의 특징을 어떻게 공유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 해답은 기술자 집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성을 쌓기 위해서는 지형을 선정하고 설계도를 작성하며, 축성의 절차를 계획하고 인력동원과 예산확보 등 아주 복잡한 공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복잡한 공사를 단기간 동안 완수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자집단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축성이 이루어지던 시기가 대부분 전쟁 기간 중이었음을 감안하면 민간인보다는 군인들에 의하여 축성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신라군의 편제 속에 축성기술자로 구성된 공병부대가 있었을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職官志를 통하여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하다.

경기도지역은 한산주에 속해 있었고 한산주에는 직할부대인 漢山停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산정의 예하부대로는 軍師幢 - 大匠尺幢 - 步騎幢 - 黑衣長槍未步幢 - 三千幢 등이 있었으며, 弓尺과 만보당이 있었다. 흑의장창미보당은 기병에 대응하는 장창부대로 추정되며, 궁척은 활(弓)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 만보당은 도끼와 방패를 사용하는 보병부대로 추정된다.57) 대장 척당은 〈南山新城碑〉에 匠尺이 축성기술자로 나오는 것을 고려하면 축성을 전담했던 工兵部隊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장척당의 군사적인 편제와 부대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당 수의 축성기술자들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다.58)

특히 석축성에서 築城時期와 築城集團의 차이를 반영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성돌이다. 축성집단이 보유하고 있는 採石과 성돌 加功技術에 따라 사용 가능한 암석의 종류가 달라지고 石材 가공기술 수준에 따라 성돌의 크기와 형태에서 차이가 나게 되기 때문이다. 사용된 성돌이 지상에 노출되어 풍화된 상태의 露頭石인지 아니면 땅속에 묻혀 있었던 深石인지, 운모가 다량으로 함유된 軟巖인지 아니면 화강암 계통의 硬巖인지, 변성을 받아 節理가 발달한 편마암이나 퇴적암지 아니면 변성되지 않은 火成巖인지 하는 것은 채석기술의 발달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사항이다. 일반적으로 석공기술의 발달은 露頭石→深石으로, 軟巖→硬巖으로, 片巖→火成巖으로의 경향성을 보여주며 이는 어느 정도의 시간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석재 가공기술의 마지막 단계는 아마도 모스경도 7에 해당할 정도로 단단하고 節理가 발달하지 않아 쉽게 잘라내기 힘든 덩어리 암석인 花崗巖일 것이다.59)

또한 석가공 작업은 매우 힘든 일이고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는 만큼 석축성을 쌓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의 전문 인력 중에서도 石匠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한다. 기록이 남아있는 華城을 예로 들면 축성에 동원된 1,821명의 匠人 중 石匠의 숫자가 642명으로 전체 축성 전문 인력의 35%에 달하고 있다.60)

이러한 현상은 삼국시대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둘레 5㎞인 화성을 기준으로 둘레 1㎞ 내외의 산성을 구축하려면 최소한 150명 이상의 石匠이 참여했을 것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은 축성을 위한 石加功 기술이 특수한 일부 계층의 기술이 아니라 많은 匠人들이 공유하는 그 집단의 보편적 기술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佛像이나 佛塔, 무덤 등 특별한 의미와 기능이 있는 건축물이나 소수의 숙련된 장인만 있으면 제작 가능한 石造物에서 발달된 石加功 기술이 확인된다고 해서, 그 기술이 곧바로 축성에 적용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보다는 王宮이나 寺刹, 官衙 등 해당시기 일정한 위계를 가지는 대규모 건축물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된 石加功 기술 사례가 확인되어야 한다. 石造物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급증하게 되어야 기술력을 갖춘 전문 인력이 量産되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 최소한 수백명의 石匠인력을 필요로 하는 산성 축성에도 발달된 석가공 기술이 적용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자 당은 당초 浿河(대동강) 이남지역을 신라에게 주겠다고한 신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백제와 고구려 고지에 각각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두어 직접 지배하려 했다. 심지어 당은 신라까지도 그들의 영토로 편입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신라는 이에 대하여 문무왕 10년(670년)부터 백제 고지를 신라 영토로 편입시키는 군사작전에 돌입하는 한편, 고구려 부흥운동을 후원하면서 당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신라는 적극적으로 선제공격을 하여 671년 당군이 점령하고 있던 泗泌城을 함락시키고 백제 옛 땅을 회복하는 한편, 당과의 전면전에 대비하여 방어력이 우수한 산성 축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672년 한산주에 晝長城(남한산성)을 쌓고, 673년에는 서형산성과 북형산성을 증축하였으며, 국원성과 소문성, 이산성, 주양성, 주잠성, 만흥사산성, 골쟁현성 등 도성 주변과 각주의 전략적 요충지에 산성을 새로 쌓거나 수축했다.

675년 신라는 당나라 薛仁貴의 보급부대를 泉城(오두산성)에서 격파하고, 李謹行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買肖城에서 물리침으로서 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 이남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당시 평양성을 함락하고 평양지역에서부터 남하하기 시작한 당과 신라의 전투에서 예성강이남지역으로 후퇴하여 임진강유역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이루어졌다. 항복하지 않은 고구려군 역시 임진강 유역에서 당나라와 접전을 벌였는데 대표적인 전투가 瓠蘆河 전투이다.

계유년(673) 여름 윤5월에 연산도 총관 대장군이 이근행이 호로하에서 우리나라 군사들을 깨뜨리고 수천명을 사로잡으니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신라로 달아났다.61)

이때 전투가 벌어진 호로하는 적성 건너편 호로고루가 있는 부근의 임진강을 지칭한다. 이곳 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이곳이 평양에서부터 한강유역으로 가는 최단 간선도로상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때 고구려군은 호로고루에 배수진을 치고 당군과 전투를 벌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호로고루는 남쪽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기는 유리하지만 북쪽으로부터의 적을 방어 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당나라군대에 패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수천명의 고구려 병사가 포로가 되고 나머지 병사들은 임진강을 건너 칠중성으로 도망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675)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의 군사는 돌아가고 조칙으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경략케 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을 에워 쌌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소수 유동이 전사했다.62)

673년 호로고루를 공취하여 임진강 이북지역을 장악한 당군은 2년 뒤인 675년 대대적으로 병력을 증원하여 신라의 공격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675년 2월 유인궤가 이끄는 당군이 칠중성을 공격했다. 이후 유인궤는 귀국하고 이근행은 安東鎭撫大使로 삼아 거란·말갈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략하게 했다. 이근행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임진강 상류쪽으로 이동하여 매초성에 주둔하게 했다.

그 당시 매초성에 주둔하고 있던 이근행의 20만 군대는 군량미와 군마의 보급을 필요로 했다. 이에 본국에서는 육로를 통한 긴 보급로대신 해로를 통한 군수물자 보급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보급선단의 이끄는 수장은 설인귀였으며 길잡이로는 신라인 풍훈을 이용했다.

가을 9월(675) 설인귀가 숙위학생 풍훈의 아버지 김진주가 본국에서 처형당한 것을 이용하여 풍훈을 이끌어 길잡이로 삼아 천성(泉城)을 쳐들어왔다. 우리의 장군 문훈 등이 맞아 싸워 이겨서 1천4백 명을 목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함에 전마 1천필을 얻었다. 29일에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쫒고 말 30,380필을 얻었으며 그 밖의 병기도 이만큼 되었다.63)

그러나 당시 신라는 당나라의 수도에서 유학하고 있던 유학생이나 유학승들에 의하여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적의 동태를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신라군은 설인귀의 군대를 천성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궤멸시키는 전과를 거두게 되었다. 천성은 백수성이라고도 했다.

泉城의 위치는 지금의 烏頭山城으로 추정된다. 오두산성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합수머리 지점의 해발 119m인 오두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의 둘레는 약 1,200m 정도이다. 통일동산건설과 관련하여 오두산성에 대한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오두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통일신라기의 유물로 확인되었다. 기와 중에는 泉자명 기와가 여러 점 출토되어 오두산성이 천성이었음을 입증해주는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했다.

천성전투에서 승리한 신라군은 곧바로 매초성을 공격했다. 그런데 수 만명의 신라군의 공격 앞에 20만이나 되는 이근행의 당군은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3만필의 말과 수많은 병장기를 버려두고 패주했다. 이 매초성 전투에는 석문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하여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던 김유신의 아들 원술랑도 참여하여 전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매초성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함으로써 나당 전쟁은 사실상 신라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당시 이근행의 20만 군이 주둔하였던 매초성의 위치에 대하여 양주 대모산성이라는견해와 연천 대전리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양주 대모산성은 양주 주내면 3번국도변의 해발 212.9m 대모산 정상부를 둘러싼 산성으로 둘레는 약 693m인데 한림대학교에 의한 발굴조사 결과 현문식 성문을 갖춘 신라 성으로 밝혀졌으나 규모가 협소하고, 배후에 대전리산성과 칠중성 등 신라산성들이 위치하여 보급로가 차단되거나 배후가 공격당할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반면 대전리산성은 북쪽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기 유리한 지점이지 남쪽으로의 진격을 위한 성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성의 규모는 양주 대모산성보다 협소하여 20만군이 주둔하기 어려운 상태다. 그리고 七重城에서 막힌 唐軍이 새로운 공격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전곡쪽으로 우회하여 3번국도를 따라 남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매초성의 위치는 전곡부근의 한탄강 이북지역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전곡 주변에는 현재 전곡리선사유적지를 감싸고 있는 둘레 2㎞ 규모의 전곡리토성이 있다. 선사유적지 전시관 설치공사시 절대된 성벽 단면을 보면 성벽의 구조가 은대리성처럼 판축토 위에 성내외부가 석축으로 구축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64)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결과를 보면 남동쪽 모서리 부근에서 2중의 고구려성벽 목책열이 확인된 바 있다. 전곡리토성이 매초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전곡리토성 일대는 袈裟坪이라고도 하는 넓은 벌판이지만, 비가 오면 진창 때문에 쉽게 움직일 수 없게 되므로, 많은 전마들이 진창에 빠져 움직이지 못할 때를 노려서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기 당과의 전쟁을 위하여 구축한 신라성곽은 기존의 신라성곽과는 구조적으로 전혀 다른 형태이다. 672년에 쌓은 주장성과 673년에 증축한 서형산성과 북형산성과 국원성, 소문성, 이산성, 주양성, 주잠성, 만흥사산성, 골쟁현성 등은 도성과 각주의 대표적인 산성으로 避難城으로 기능할 수 있는 대규모 산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중 대당전쟁을 위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이 晝長城이다. 당시 신라가 쌓은 주장성의 규모는 4,360보였는데 이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8㎞에 달하는데65) 이는 당시 신라가 쌓은 최대 규모의 석축산성이었다.

주장성의 입지는 일반적인 삼국시대의 산성입지와 전혀 다르다. 삼국시대의 성은 대부분 조망이 좋은 해발 100~200m 정도의 야트막한 산에 구축되는데 비하여 이곳은 해발 500m가 넘는 산꼭대기에 구축되었다. 漢山州의 治所城인 이성산성도 둘레 1.5㎞인데 주장성은 그보다 5배에 달할 정도로 대형으로 구축했다. 이러한 주장성의 입지와 규모는 삼국시대의 성보다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피난성의 축성의 입지와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병력의 규모로 볼 때 신라는 당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당시 신라가 총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은 대략 3만∼5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비하여 매초성에 주둔했던 당장 이근행이 이끈 군사의 규모는 무려 20만 명에 육박했다. 병력의 열세가 불가피했던 신라가 선택한 전술은 淸野入保 戰術이었다. 적의 군사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異國의 군대였으므로 군량미와 병력을 산성으로 옮기고 기회를 보아 적의 후방을 공격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거나 적이 스스로 물러갈 때까지 기다리는 지구전을 계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적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을 골라서 대규모의 성을 쌓고 성내에 군수물자를 비축했다.

그런데 주장성을 쌓는데 사용된 성돌은 현지에서 조달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운반하여 온 화강암 성돌이라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 일대의 기반암은 선캄브리아기의 흑운모편마암이나 화강편마암인 반면 주장성 축성에 사용된 성돌은 대부분 조립질의 화강암이며, 주장성에서 가장 가까운 화강암 산지도 직선거리로 10㎞ 정도인 아차산 일대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흑운모편마암이나 화강편마암 대신에 원거리에서 가져온 화강암 성돌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시루떡처럼 결을 이루고 있는 화강편마암은 결을 따라 쉽게 잘라낼 수 있지만 편마암 성돌은 뒷채움이 충분하지 못하거나 횡압력에 의한 剪斷破壞가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반면 화강암은 재질이 단단하여 다듬기가 힘들지만 더 견고하고 치밀한 성을 쌓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처럼 신라의 장인들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 편마암 대신 원거리에서 화강암 성돌을 운반하여 옥수수알 모양으로 하나하나 정교하게 가공하여 성을 쌓았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렇게 잘 다듬어진 주장성의 성돌은 이후 남한산성의 수축시 상당수가 재활용 되었다. 2005년 중원문화재연구원에서 북문과 동장대 사이에 있는 제4암문과 수구지 주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지표 아래 4m 깊이에서 주장성의 체성벽으로 추정되는 석축성벽과 배수시설이 확인된 바 있다.66)

성내에는 발달된 축성기술에 걸맞는 병영과 창고 등 각종 건물이 구축되었다. 그중 하나가 행궁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의 대형건물지이다. 하궐 앞마당의 지하 1m 깊이에서 확인된 이 건물지는 길이가 53.5m, 너비가 18m에 달하는 규모로 지금까지 산성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지 중 최대 규모이다. 또한 건물지에서는 기와 한 장의 무게가 20kg에 달하는 대형기와가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대형기와는 絲切하여 잘라낸 점토판 素地를 원통형 와통에 감은 후 단판고판으로 두드려서 성형을 하고, 와통에서 빼낸 후 내면에 찍힌 분할계선을 따라서 4매로 분할한 후 소성한 것으로 크기는 다르지만 일반적인 통일신라시대의 기와 제작기법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대형기와로 인한 엄청난 지붕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건물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발굴조사 결과 대형건물지는 지반이 침하되지 않도록 지하 2m 깊이까지 땅을 파내고 할석과 점토를 교대로 다지면서 쌓아 견고한 대지를 조성하였으며, 벽체의 두께를 2m 정도로 두껍게 하여 기둥에 가해지는 힘이 벽체로 분산되도록 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조선시대의 수축으로 인하여 전모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단편적인 결과만으로도 晝長城은 통일신라시대 토목·건축기술의 진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나당 전쟁시기에 신라는 이미 토목건축기술 측면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67)

羅唐戰爭의 승리로 신라는 浿河 이남 지역의 땅을 모두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지역만을 신라의 영토로 편입시켰을 뿐, 한동안 예성강 이북 지역으로는 진출하지 않았다. 당시 신라로서는 새로 영토로 편입된 백제 고지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신라는 임진강 북안의 고구려 성을 리모델링하여 사용했다. 호로고루성을 차지한 신라는 성내부의 불타버린 고구려의 건축폐기물들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던 수혈구덩이에 가져다가 버리고, 고구려유적의 터전위에 신라의 건축물을 새로 구축했다. 지상성벽인 동벽에는 무너진 고구려성벽을 재활용하기 보다는 고구려성벽 바깥에 새로운 성벽을 덧붙여 쌓았다.

신라가 예성강 이북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8세기 전반 성덕왕대부터였다. 발해가 세력을 확대하여 서로 국경을 맞닿게 되자, 신라는 발해의 남하에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성덕왕 12년(713) 개성을 쌓고, 성덕왕 17년(718)에는 발해의 침입에 대비하여 한산주 도독관 내의 여러 성을 쌓기도 했다.

발해가 남쪽으로 진출하여 신라와 동해안지역에서 국경이 맞닿은 것은 성덕왕 20년(721) 무렵이었다. 신라는 이미 그 이전부터 발해의 남하에 대비했다. 성덕왕 20년(721) 가을 7월에 何瑟羅 지역의 丁夫 2천 명을 징발하여 북쪽 국경에 長城을 쌓았으며, 효소왕 3년(733)에는 발해가 당을 침공하자 당의 요청으로 발해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였으나 가는 도중 추위로 인하여 회군했다. 당은 신라의 발해공격에 대한 보답으로 735년에 패강 이남의 영토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 이 지역에 대한 신라의 개척은 이를 계기로 본격화 되었다. 신라의 북방개척은 경덕왕 7년(748) 10개의 군·현을 설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성덕왕 3년(782)에는 왕이 한산주를 두루 돌며 살펴보고 浿江鎭이라는 강력한 군사기지를 구축했다.

신라는 경덕왕 21년(762)에 오곡·휴암·한성·장새·지성·덕곡 등 6곳에 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고, 그곳에 각각 태수를 파견했다. 성을 쌓은 지역은 황해도 서흥, 봉산, 재령, 해주 등지로 고구려의 휴암성, 대현산성, 장수산성, 수양산성이 있는 곳인데 이 때에 이르러 신라에 의하여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이후에도 이 지역에 대한 개척사업을 계속 전개하여 헌덕왕대에 取城郡(황주)과 그에 속하였던 土山縣(상원)·唐嶽縣(중화)·松峴縣(송현)을 더 설치했다. 『삼국사기』 지리지 한주 조에 나오는 28군과 49현은 바로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갖추어졌으며,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 이남지역을 모두 영토로 편입하게 되었다.

이 시기 新羅城郭의 특징은 호로고루와 최근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德津山城 및 이성산성 2 차성벽과 망이산성 석축성벽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호로고루에서 확인되는 신라성벽은 고구려 성벽 바깥쪽 보축성벽 보강토 위에서부터 완경사를 이루도록 고구려 체성벽에 덧붙여 쌓았다. 성벽의 석재는 인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 성돌이 아니라 최소한 2㎞ 이상 떨어진 곳에서 운반해 온 화강 편마암을 가공하여 성벽을 구축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는 임진강 이북지역으로 진출하여 축성에 참여한 신라의 장인들이 현무암을 가공하여 축성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양상은 덕진산성에서도 확인된다.

덕진산성은 최근 중부고고학연구소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고구려성을 확장하여 쌓은 신라성벽과 후에 개축된 성벽구조가 확인되었다.68) 이처럼 호로고루와 덕진산성에서 확인되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에 구축된 신라성벽의 축성기법에서 확인되는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사면에 기대어 쌓는 편축식 석축성벽이다. 호로고루 성벽은 기존의 고구려 성벽의 경사면에 기대어 덧붙여 쌓았으며, 덕진산성은 경사면에 기대어 성을 쌓거나 토성을 쌓듯이 내탁부를 먼저 조성한 후 석축을 쌓고 있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협축식 성벽을 기본으로 하던 축성기본 원칙이 어느 시점부터 변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견고하고 치밀함 보다는 축성의 용이성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안성 망이산성과 부소산 성내의 통일신라 성벽에서도 확인된다.

둘째, 체성벽에 덧대어 장방형 치를 만들었다. 호로고루와 당포성의 통일신라 성벽에서는 돌출부의 길이가 1m 정도이고 너비가 4~5m 정도의 장방형 치가 확인되었으며, 덕진산성에서도 체성벽에 덧붙여 쌓은 세장방형의 치가 특징을 보이고 있다.

셋째, 체성벽 기저부에는 지대석이 놓이고, 면석의 형태는 세장방형에서 정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으로 변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대석의 크기는 70∼90㎝ 너비에 두께 30㎝ 정도 크기로 체성벽에 비하여 1.5배 정도 큰 성돌이 사용되었으며, 뒤채움부토 삼국시대 신라 성벽이 기본적으로 기저부의 너비가 5m 정도인데 비하여 2m 안팍으로 좁아들어 석재의 사용량이 현저하게 감소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림9.덕진산성-초축성벽과 수축성벽

덕진산성-수축성벽 내부초서벽

덕진산성-치구간의 수축성벽


덕진산성 성벽은 8세기에서 9세기대에 대대적인 수축을 실시하여, 초축성벽 보축성벽의 바깥쪽에 새로운 성벽을 덧붙였음이 확인되었으며, 이 수축 성벽은 축성기법의 변화양상을 이해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修築된 성벽의 성돌은 화강암 성돌을 전면 가공한 성돌이 사용되었다. 성돌의 뒷길이가 길어지고 전체적인 형태가 사각추 형태를 띠고 있다. 석축성벽의 두께가 얇아지며 내탁식으로 축조되었다. 성벽은 높이가 낮아지며 개거식 성문이 구축되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각 주군현의 치소성을 정비하면서 많은 성곽을 새로 쌓거나 개축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의 축성기술에 백제와 고구려의 축성기술을 융합한 새로운 형태의 성곽이 등장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성곽은 편축식성벽, 대형 지대석, 낮은 성벽, 퇴물림쌓기로 인한 완만한 경사각, 등성시설, 개거식 성문 등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석재가공 기술의 발달로 화강암이나 현무암 등의 단단한 암석을 잘라내어 사각추형으로 정교하게 가공한 성돌도 등장하였다. 성곽 개축시에는 기존의 성벽을 해체하지 않고 성벽 바깥쪽에 새로운 성벽을 보축 성벽형태로 덧붙여 쌓는 방식도 통일신라시대 축성기법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기단석열을 배치하고 영정주와 협판이 사용된 정교한 판축공법으로 쌓은 토성도 많이 구축되었다. 화성 당성이나, 영월 계족산성처럼 기존의 성곽에 토성을 덧붙여 쌓아 확장하는 성곽도 확인된다. 서천 남산성이나 무안 봉대산성처럼 호서지역과 호남지역에는 구릉 정상부에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정교하게 가공한 성돌로 성벽을 쌓고, 개거식 문구부를 조성한 독특한 형태의 성곽도 많이 축성되었다. 9세기대에 주로 축성되는 이러한 형태의 성곽들은 지방 호족 세력의 등장시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Ⅴ. 맺음말

三國 중 임진강 유역을 가장 먼저 점유하였던 나라는 百濟였다. 4세기대의 백제는 평양지역 까지 진출할 정도로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수도 漢城으로 연결되는 길목마다 성곽을 구축하여 낙랑과 고구려·말갈 등의 침입에 대비했다. 5세기 후반까지 이 지역을 영토적으로 장악하였던 漢城時期 백제의 축성 기법은 木柵과 土城을 특징으로 했다. 목책은 병산책·독산책·구산책 등의 명칭이 등장한다. 길성리토성이나 천안 백석동토성, 안성 도기동산성 등의 사례를 볼 때 백제의 木柵은 1열의 목책열을 특징으로 하며, 축성대상지역을 정지후 일정한 높이로 성토 후 목책을 조성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土城은 風納土城과 夢村土城 등 한성백제의 都城을 비롯하여, 吉城里土城과 疎勤山城 등 외곽 山城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永定柱와 板木을 이동하며 흙을 쌓아올려 판축작업구간이 경사를 이루도록 하는 축성공법이 확인되었다.

한성백제 시기의 석축성 존재여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포천 고모리산성이나 파주 월롱산성, 의왕 모락산성 등의 예를 보면, 일부 취약한 성벽구간을 부정형 할석으로 보강하였을 뿐 장방형으로 가공한 성돌을 사용한 전형적인 石築山城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는 백제의 築城 匠人들이 土城과 木柵 중심의 원천 기술을 가지고 있었거나 石城을 쌓을 정도로 石加功 技術이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475년 장수왕이 이끄는 3만 명의 고구려 군대는 한성백제의 도성을 함락시키고, 이후 551년까지 이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고구려는 임진강에서 한강에 이르는 구간의 交通路에 일정한 둘레 100∼300m 규모의 堡壘를 쌓아 防禦體系를 구축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축성기법은 ‘土芯石築工法’이 주를 이루는데, 이는 版築技法으로 土築部를 먼저 조성하고 石築으로 마감하는 축성기법이다. 토심석축공법은 축성의 效率性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新工法으로서 고구려 都城이었던 國內城과 平壤 大城山城에도 적용된 발달된 축성공법이었다. 지금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홍련봉 1·2보루, 아차산 3·4보루, 용마산 2보루, 시루봉보루, 천보산 2보루, 무등리 2보루 등의 고구려 보루는 모두 이러한 土芯石築工法으로 構築되었음이 확인되었다.

551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의 공격에 밀려 임진강 이북지역으로 후퇴한 고구려는 국경지역의 성곽을 새롭게 정비하고 전연방어체제를 구축하여 이후 120여 년 동안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신라와 대치하게 된다. 이 시기 고구려는 호로고루와 당포성을 수축하게 되는데, 평지성 역시 토성과 석성의 축성기법을 결합한 복잡한 土木技術이 반영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판축공법으로 기저부와 성벽의 중심부는 토축을 하고 내외면은 산성과 마찬가지로 석축을 하였는데, 두꺼운 석축부를 효율적으로 쌓기 위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架構木을 설치하고 그 사이 사이에 성돌을 채웠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작업 工程의 결과로 중간벽에는 기둥홈과 확돌이 확인되며, 중간벽 바깥쪽에는 외벽과 보축성벽 및 보축성벽 보강토가 확인되고 있다.

6세기 중엽 임진강 유역으로 후퇴한 고구려의 뒤를 따라 임진강 이남지역을 장악한 신라는 고구려 성곽의 대응되는 지점에 성을 쌓고 방어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신라는 교통로를 따라 線的인 방어시스템을 구축했던 고구려와 달리, 放射狀으로 山城을 배치하여 面的인 방어시스템을 구축했다. 군현 단위마다 1㎞ 내외의 산성을 쌓아 治所城으로 삼고 군사와 행정을 주관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여 적의 침입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도록 했다. 경기도지역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하남 이성산성, 포천 반월산성, 이천 설봉산성, 이천 설성산성, 인천 계양산성, 서울 양천고성, 서울 아차산성, 김포 수안산성, 양주 대모산성 등은 모두 이 시기에 축성된 산성들이다.

이 시기의 新羅城들은 大匠尺幢이라고 하는 工兵部隊의 지휘 하에 구축되어 성의 입지나, 규모, 축성공법 등에서 공통적인 속성을 보이고 있어 築城 메뉴얼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산성은 전방의 시야가 넓게 열려있고 교통이 편리한 해발 100∼200m 정도의 구릉상에 쌓았으며, 성벽은 夾築式의 전면석축 공법으로 축조하여 견고함을 유지하도록 했다. 성돌은 節理가 발달한 편암계통의 석재를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매우 치밀하고 높은 성벽을 쌓았으며, 외벽 기저부에는 성벽을 보강하기 위하여 단면 삼각형의 補築城壁을 구축했다. 城門은 능선이나 곡간부를 피하여 만들었는데 사다리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懸門式城門을 구축했다. 성내의 우수배출을 위하여 곡간부쪽 성벽에는 성벽을 관통하는 수구를 만들었는데 단면 형태가 사다리꼴이나 삼각형이 되도록 했다.

670년 나당 전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신라는 군사적으로 우세한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하여 避難城 개념의 새로운 산성을 구축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산성이 주장성이다. 주장성은 기존의 산성입지와 달리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고지를 택하여 둘레 8㎞에 달하는 대규모 성을 쌓고, 장기간 농성할 수 있는 군수물자 비축을 위한 창고를 만들었다.

羅唐戰爭에서 신라가 승리하게 되고, 698년 발해가 건국된 이후 신라는 성덕왕 3년(782) 浿江鎭을 설치할 때까지 임진강 이북지역에 많은 성곽을 구축하게 된다. 이 시기 신라는 고구려 축성법의 영향과 함께 석재 가공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축성기법이 등장하게 된다. 이시기 축성기법의 축성시 석재의 사용량을 현저하게 줄일 수 있는 편축식 성벽과 성벽 기저부에 체성벽 성돌보다 큰 地臺石 사용이 일반화 된다는 점이다. 二聖山城 2차 성벽과 호로고루, 당포성, 덕진산성 2차 성벽처럼 기존 성곽을 수축하기 보다는 기존 성곽에 덧붙여 쌓아서 개축하는 양상이 일반화 된다. 성문은 불편한 현문식에서 출입이 용이한 開拒式으로 바뀌고, 보축성벽은 사라지며 성벽의 높이도 낮아지고 경사도 완만해진다. 성돌을 만드는 石材는 편암에서 화강암으로 바뀌며 성돌 하나 하나를 사각추 형태로 全面 加功하여 성벽은 방어력과 견고함 보다는 아름답고 화려한 외관에 치중하는 형태로 축성기법이 변화된다.


1) 김종혁, 2000, 「연천군의 역사지리」, 『연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66쪽.
2) 최영준, 1997, 『국토와 민족생활사』, 한길사, 131쪽.
3) 손영식, 2009, 『한국의 성곽』, 주류성, 216쪽.
4) 한신대학교 박물관, 2003, 『吉城里土城 -정밀지표조사 보고서』.
5) 李奕熙, 2013, 「한성백제기 토성의 축조기법」, 한신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33쪽.
6) 중부고고학연구소, 2013, 『화성 길성리토성』, 279~280쪽.
7) 이남석, 1998, 「천안 백석동 토성의 검토」, 『한국상고사학보』제28호, 한국상고사학회, 75~93쪽.
8) 김진영, 2017, 「안성 도기동산성의 발굴성과와 성벽구조에 대한 소고」, 『고구려발해연구』제58집, 76~77쪽.
9) 국립공주박물관, 1999, 『대전 월평동유적』.
10) 전북대학교박물관, 2002, 『배매산-완주 봉동읍 배수지 시설부지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264쪽.
11)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18년조.
12) 배기동·황소희·이한용, 1999, 『파주 주월리 유적 -96·97 한양대학교 조사지역』, 한양대학교박물관. 이인숙·김
     규상, 1999, 『파주 주월리 유적 -96·97 경기도박물관 조사지역』, 경기도박물관.
13) 경기도박물관, 2005, 『고양 멱절산유적 -긴급발굴조사 보고서』.
14) 중앙문화재연구원, 2014, 『고양 멱절산 유적(1차)』, 73~81쪽.
15) 박경식 외, 2001, 『포천 고모리산성 지표조사 보고서』,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16) 한백문화재연구원, 2017, 「포천 고모리산성 추정동문지 정비사업부지 내 유적 시굴 및 발굴조사 약보고서」.
17) 경기도박물관, 2012, 『소근산성』.
18) 단국대학교중앙박물관, 1996, 『望夷山城 發掘調査 報告書(1)』.
19) 경기도박물관, 2004, 『월롱산성』.
20) 세종대학교박물관, 2006, 『의왕 모락산성』.
21) 한성백제 시기의 석축산성 존재 유무에 대해서는 오랜기간동안 논쟁이 지속되어 왔다. 그 시발점은 단국대
     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이천 설봉산성, 설성산성, 포천 반월산성, 안성 죽주산성 등 경기도 일원의 산성들에
     대한 발굴 조사를 통하여 성벽 기저부다짐토와 성내에서 백제유물이 출토됨을 근거로 이 성들이 백제에 의
     하여 초축되었 음을 주장하여 왔다. 그러나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기저부에 섞여 들어간 유물들은 성벽 축성
     시점의 상한을 제 한할 뿐 축성시기나 축성집단과는 무관할 수 있다.(김영, 2010, 「경기지역 산성의 백제초
     축설 재고」, 고려대학 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뿐만 아니라 공히 4~5세기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반
     월산성, 설봉산성, 설성산 성 등의 석축산성과 포천 고모리산성, 고양 멱절산유적, 의왕 모락산성, 화성 소근
     산성 등의 축성기법의 기술적 위계가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이며, 도성인 풍납토성 내벽에는 왜 가공석이
     사용되지 않았는지 납득하기 어렵 다. 수혈건물에 기와를 올리지 않는 것처럼 토목건축기술의 여러 요소는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성백제 시기의 석축산성 축성기법이 웅진·사비기의 도성에 왜
     적용되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이에 대해 동나성·성흥산성·청마산성이 석축성이고, 축성방법은 자
     연환경에 따라 축성재료가 달라진다는 유 형의 반론을 제기하고 있으나(오강석, 2007, 「百濟 漢城期 城郭 硏
     究」, 세종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32쪽) 이는 오히려 이러한 성들의 석축성벽 축성시기에 대한 재검토
     가 필요한 사항이며, 축성재료는 축성술과 축성목 적에 따라 다를 수는 있어도 석재가 부족해서 토성으로 구
     축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최근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산성 발굴조사를 총정리하는 전시를 하
     며 실시된 세미나에서 김호준은 삼국의 축성양상은 시기별로 구분하고, 중앙과 지방의 축성양상, 축성목적
     및 성격, 주변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 등 다방면에서 접근해야 하며, 단지 토목공학적인 기술계통양상으
     로 접근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4-5세기에 등장 한 한성백제 시기의 석축산성이 오히려 신라에 영향을 주었
     으며, 6~7세기 경기지역으로 진출한 신라가 전형적 인 신라식 석축산성으로 증개축 했다는 논리를 전개했
     다.(김호준, 2017, 「한성기 백제 석축산성의 축조기법과 성 격」, 『경기도 백제산성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고고미술분야 제7회 특별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 47~71쪽)
22) 朴省炫, 2001, 「新羅 郡縣城과 그 性格 -6∼8세기 漢州를 중심으로」, 서울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23) 심광주, 2013, 「청주 부모산성과 주변 보루의 축성기법」, 『청주부모산성의 종합적 고찰』, 충북대학교박물
     관, 64쪽.
24) 서울대학교박물관, 2011, 「연천 무등리 2보루 2차 발굴조사 약보고서」.
25) 고려대학교 고고환경연구소, 2013, 「홍련봉 1·2보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자료집」.
26) 양시은, 2010, 「남한 내 고구려 성곽의 구조와 성격」, 『高句麗渤海硏究』제36집, 107쪽.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아차산 4보루 발굴조사 보고서』, 63~64쪽.
27) 홍련봉 1보루에서는 성벽 안쪽 5m 지점에서 성벽을 따라 6개 지점에서 31개의 목책공이 확인되었으며, 5지
     점, 6지점에서 확인된 목책공의 경우 목책공을 기준으로 동서에 걸쳐 판재선이 확인되기도 했다.(고려대학
     교 고고환 경연구소, 2007, 『紅蓮峰 第1堡壘 -發掘調査 報告書』) 그러나 이것을 석축보다 먼저 있었던 목책
     흔으로 보게 되 면, 홍련봉 1보루는 목책만 있거나, 토축부만으로는 성곽의 기능을 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
     문에 이것은 목책공이 라기 보다는 토축부의 조성을 위하여 성벽 상단에 세웠던 영정주공으로 보는 것이 타
     당할 것이다.
28) 한국토지주택공사 토지주택박물관, 2014, 『漣川 瓠蘆古壘 -3·4차발굴조사 보고서』.
29) 채희국, 1964,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유적에 관한 연구』, 사회과학원 출판사.
30) 민덕식, 2005, 「발굴조사 자료로 본 고구려 성곽의 축조공법」, 『史學志』37집, 단국사학회, 86~87쪽.
31) 이처럼 목주를 먼저 설치할 경우 석축공정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는 춘천 삼악산성, 보은
     호 점산성, 단양 독락산성, 문경 노고성, 제천 와룡산성 등 주로 고려시대에 급조된 석축성의 표면에서 이러
     한 기 둥홈이 확인되는데, 긴급하게 성을 쌓기 위하여 가설목을 설치하고 그에 맞추어 성벽을 구축하였기 때
     문인 것 으로 보인다.
32) 백종오, 1999, 「경기북부지역 고구려성곽의 분포와 성격」, 『경기도박물관년보』제3호. 백종오, 2005, 「남한지
     역의 고구려성곽」, 『한국고대의 Global Pride 고구려』 고려대학교 개교100주년 기념특별 전도록, 29~47쪽.
33) 실례로 백종오는 양주분지를 중심으로 하는 천보산맥의 보루가 환상외곽방어체계와 그 안에 능형내곽방어
     체계 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마치 천보산맥상의 몇 개의 보루와 불곡산, 도락산이 보루 등으로 동서 16㎞,
     남북 12.5 ㎞의 거대한 고로봉형 방어기지였던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나(백종오, 2005, 「남한지역의 고구려
     성곽」, 『한국고 대의 Global Pride 고구려』 고려대학교 개교100주년 기념특별전도록, 44쪽) 양주분지 일대
     고구려 성곽의 숫자 와 규모를 고려할 때 주둔병력은 다해야 천여 명 정도였을 텐데 이 정도의 인력으로 둘
     레 57㎞ 규모의 대규모 고 로봉형 성곽시스템을 완성했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34) 최종택, 2008, 「고고자료를 통해 본 백제 웅진도읍기 한강유역 영유설 재고」, 『백제연구』제47집,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27~160쪽.
35) 이와 관련하여 한성이남에서 차령산맥 이북지역이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을
     제 기한 김주태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최종택, 2008, 「고고자료를 통해 본
     백제 웅진도읍기 한강유역 영유설 재고」, 『백제연구』제47집,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48쪽)
36) 심광주·김주홍·정나리, 1999, 『연천 호로고루 -정밀지표조사 보고서』,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8쪽.
37) 심광주·정나리·이형호, 2007, 『연천 호로고루Ⅲ -2차 발굴조사 보고서』,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38) 심광주·정나리·이형호, 2008, 『연천 호로고루 -2차 발굴조사 보고서』,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302~304쪽.
39) 보고자는 이 목책 ②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목책의 축성기법을 고려할 때 이 목책열이
     오히려 고구려에 의하여 구축되었으며, 기둥을 대고 석축한 성벽 ①과 성벽 ②는 성벽이라기보다는 평탄면
    확보를 위한 기단부 조성목적이며, 신라에 의하여 구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국립공주박물관,
    1999, 『 대전 월평동유적』)
40) 백종오는 한강유역 지배가 교통로 확보를 위한 일시적인 지배였다는 견해에 대하여 금강유역의 남성골산성
     같은 대규모 고구려 유적 발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연구자세와 삼국사기 기록에 대한 긍정
     적인 시각 교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각을 세우고 있지만(백종오, 2006, 『고구려 남진정책 연구』, 서경, 327
     쪽), 항구적인 지배를 위해서라면 왜 토성이나 석성 등 좀더 견고한 성곽을 구축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삼국
     사기』 지리지만을 취신하고 본기 기록을 무시하는 것이 긍정적인 시각교정을 의미하는 것인지 보완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41) 국립공주박물관, 1999, 『대전 월평동유적』, 216~218쪽.
42) 이정범은 5세기 중·후반 남하하여 한강유역에 대한 군사적 거점을 만들었으며, 청원 남성골산성과 대전 월평
     산성은 충주지역 고구려세력 진출의 결과물로 보았으며 이 지역과 양주분지 지역은 권역지배 형태로 이행되
     지 못하고 거점지배에 머물었다. 임진강 유역만 권역지배로 이행된 것으로 보았다.(이정범, 2015, 「5~6세기
     고구려의 한강유역 지배형태」, 『고구려발해연구』제51집, 고구려발해학회) 양시은은 475년부터 551년까지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영역적으로 안정되게 지배했으며 5세기 중에는 몽촌토성이, 6세기에는 아차산 보루군
     자체가 중심이 되어 한강유역을 경영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양시은, 2010, 「고 구려의 한강유역 지배방식
     에 대한 검토」, 『고고학9-1』, 중부고고학회)
43) 이형호는 호로고루 출토 토기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3기로 구분하여 1기(5세기 중엽~5세기 후엽), 2기(6세기
     전엽~6세기 중엽), 3기(6세기 중엽 이후)로 상정하였으며,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보루군을 6세기 중엽에 축조
     되어 6세기 후엽까지 사용되었으며, 용마산보루군, 시루봉보루는 6세기 후엽에 축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추
     정하고 있다.(이형호, 2014, 「남한지역 출토 고구려토기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44) 최종택, 2008, 「고고자료를 통해 본 백제 웅진도읍기 한강유역 영유설 제고」, 『백제연구』제47집,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39쪽.
45) 551년 돌궐이 신성을 공격해 왔으며 552년 장안성 축성을 시작하였고, 557년 환도성 간주리의 반역 등이 있
     었다.
46) 신라는 551년부터 약 20여 년 사이에 임진강하구(북한산비: 555년)에서부터 철원-원산(황초령비: 568년)-북
     청(황초령비: 568년)까지 진출하여 한반도의 거의 1/3에 달하는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죽령
     에서 철원까지는 직선거리로 200㎞에 달하여 정확히 500리가 된다.
47) 신광철은 장수산성을 중심으로 대현산성 수양산성 등이 위치하는 황해도 일대에 고구려 남부의 거점성들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신광철, 2011, 「황해도 일대의 고구려 관방체계와 남부전선의 변화」, 『선사와 고
     대』 제35 호) 권순진도 고구려의 최후방어선은 황해도 지역이며, 임진강 북안의 고구려 성곽들은 여울목이
     나 나루터 통제 및 양주일원에 배치된 전방후배의 후방 작전 지휘소 또는 병참기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
     정하고 있다.(권순진, 2012, 「임진강유역 고구려성의 성격 재고」, 『軍史』제83호, 192쪽)
48)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14년조.
49) 《삼국사기》 열전 제5 온달.
50) 이도학, 2013, 「溫達의 南下徑路와 戰死處 阿旦城 檢證」, 『동아시아고고학』32, 278~285쪽.
51) 윤성호, 2017, 「新羅의 漢江流域 領域化 過程 연구」, 고려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85~288쪽.
52)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5 선덕왕 7년조.
53) 《삼국사기》 권8 고구려본기 영류왕 21년조.
54) 《삼국사기》 권42 열전2 김유신중.
55)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7 문무왕 11년.
56) 백영종은 5~6세기 신라산성의 구조적인 특징은 교통로를 따라 배치되며 현문식 성문을 갖추고 있고 내외협
     축식 성벽에 기단보강 석축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백영종, 2007, 「5~6世紀 新羅山城 硏究 -小白山脈 北部
     일원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57) 李仁哲, 1993, 『新羅政治制度史硏究』, 일지사, 349쪽.
58) 심광주, 2003, 「신라성곽」, 『京畿道의 城郭』, 경기문화재단, 228쪽.
59) 심광주, 2013, 「청주 부모산성과 주변보루의 축성기법」, 『청주 부모산성의 종합적 고찰』, 충북대학교박물 
     관, 49~50쪽.
60) 화성축성에 동원된 장인들의 숫자
(경기문화재단편, 2005, 『화성성역의궤』 국역증보판 하권, 517~536쪽).
61)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10 보장왕 4년.
62)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5년.
63)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5년.
64) 최근 서울대 박물관에서 전곡리 토성구간에 대한 절개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성벽으로 추정되던 구간에서 후
     대의 토층이 퇴적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전곡리토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고구려는 남쪽 일부구간에만 목
     책 등을 설치하고 일시적으로 주둔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으나(서울대학교박물관, 2015, 「전곡리토성
     시굴조사 보고서」, 『연천 무등리 2보루』, 236쪽) 전곡리선사유적지 진입로 부근에서 확인된 성벽 단면 구조
     와 현재 전시관이 들어서 있는 기저부에서 확인된 다량의 석축구조물 등을 감안하면 조사시 시굴트렌치를
     설치한 구간이 잘못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65)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1597) 2월 25일자의 내용을 보면, 인조대에 수축하기 전의 남한산성의 규모에 관
      한 내용이 있는데 둘레가 포백척(布帛尺)으로 17,400여 척이라 했다. 포백척은 단위길이는 대략 46㎝ 정도
      이므로 주장성의 둘레는 8㎞ 정도로 환산된다. 《삼국사기》의 1보(步)는 영조척 6척을 기준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66) 차용걸 외, 2007, 『南漢山城 -암문(4)·수구지일대 발굴조사』, 중원문화재연구원.
67) 심광주, 2011, 「남한산성의 축성기술」, 『南漢山城』, 경기도박물관, 181∼184쪽.
68) 중부고고학연구소, 2014, 『坡州 德津山城 -1·2차 학술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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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경기문화재연구원·중부고고학회 학술대회

    주제/ 임진강 유역, 분단과 평화의 고고학

    일시/ 2018.10.19.(금) 10:00 ~ 18:00

    장소/ 전곡선사박물관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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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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