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삶으로 쓴 문장은 이론으로 쓴 문장보다 강력하다

사회 분야 『인간의 조건』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조건』

한승태 지음, 시대의창, 2013








삶으로 쓴 문장은 이론으로 쓴 문장보다 강력하다


노명우 -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우리는 제각각의 이유로 책을 읽는다. 어떤 사람은 사실 확인을 위해 책을 참조한다.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시간을 때우려고 읽는 사람도 있고, 책 그 자체가 좋아서 읽기도 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모든 책을 읽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신중하게 읽을 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심사숙고 끝에 한 권의 책을 선택했다면, 그 책은 사실 엄청난 경쟁을 뚫은 것이다.


나는 사뭇 간단한 기준으로 읽을 책을 선정한다. 나는 우선 “내가 쓸 수 없는 책”이라는 판단이 들면 그 책을 독서목록에 올려놓는다. ‘내가 쓸 수 없는 책’은 두 종류이다. 첫째, 저자의 능력이 탁월하여 감히 넘볼 수 없는 학식과 심오한 성찰에 근거하여 쓴 책은 당연하게 ‘내가 쓸 수 없는 책’으로 분류된다. 이런 책은 한 수 배운다는 심정으로 겸허하게 읽어야 한다. 둘째, 저자가 자기 고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책도 ‘내가 쓸 수 없는 책’으로 분류된다. 우주 탐험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이 쓴 책,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사람이 쓴 책, 난민촌에서 오랜 기간 동안 자원봉사를 한 사람이 쓴 책, 이런 책들은 저자의 경험이 없었다면 쓸 수 없는 책이다.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은 두 번째 의미에서의 ‘내가 쓸 수 없는 책’에 속한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조건』을 읽었다.


이론적 탁월성으로 쓰는 글이 있고, 사유의 힘으로 쓰는 글이 있다. 논리적 사유 능력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글이 있는가 하면, 저자의 미학적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한 글도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종류의 문장으로 구성된 책이 아니다. 오로지 저자 한승태의 현장 체험이 깊게 배어있는 문장으로 구성된 책이다.


그는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직업소개소를 통해 진도의 꽃게잡이 배의 일자리를 소개받았고, 꽃게잡이 배에서 일했다. 꽃게잡이 배에서 일한 사람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한승태만 꽃게잡이 배에서 일해본 건 아니다. 세상에 무수히 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고, 세상 사람들은 각각의 경험을 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경험이 텍스트가 되어 책의 세계로 진입하지 않는다. 책을 쓰는 사람이 직접 할 수 있는 경험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경험과 비교해보면 ‘새 발의 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제한적이다.


책의 세계가 이 세상의 모든 경험을 품으려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텍스트로 옮겨져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텍스트의 저자들은 제한된 분야에 바글바글 모여 있다. 아예 텍스트의 저자들이 눈길을 주지 않는 분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기에 아예 기록조차 되지 않은 세상의 분야는 텍스트에 의해 다루어진 분야보다 더 넓다.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은 기록되지 않았던 세상을 저자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텍스트로 옮겨 놓았다는 의미에서 값진 책이다.


꽃게잡이 배의 체험 하나만으로도 그는 대체 불가능한 체험을 바탕으로 문장을 쓰고 있는 예외적인 작가에 속하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그의 노동 체험은 꽃게잡이 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워킹푸어 현장 취재는 시작일 뿐이다. 그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존재하는 워킹 푸어 현상을 모조리 채집하려는 듯 꽃게잡이 배에서 시작하여 노동의 가혹함에 비해 보상은 보잘것없는 모든 노동 현장에 뛰어든다. 그는 가로세로 1.5미터 2.3미터 정도의 크기이며 건넌방 사람의 통화소리 재채기 소리 코고는 소리까지 다 들리고, 경사 45도는 될 것 같은 오르막길을 70미터 걸어 올라가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한 달에 12만 원짜리 고시원에 살았다. 그곳에 살면서 저자는 시간당 3100원을 받으며 편의점에서 노동했고, 시간당 4300원을 받으며 주유소에서 일하기도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돼지 1만5천 두를 사육하는 농장에서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한 달에 한 번 휴일을 보장받으면서 일하며 105만 원의 월급을 받았고, 가로 7미터 세로 60미터 높이 4미터에 이르는 일교차가 사막처럼 많이 나는 비닐하우스에 거주하며 오이 농사를 지었고 한 달에 두 번 쉬고 110만 원을 받았다.


“왜 더럽고 힘든 일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과소평가되는 걸까?” 어디에선가 한번은 본 듯한 문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만나는 이 문장은 강렬한 힘으로 읽는 이의 머리에 충격을 가한다. 독자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저자가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썼음을 알아챈다. 삶으로 쓴 문장은 이론으로 쓴 문장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인간의 조건』은 증명한다.


한승태는 자신의 노동 체험을 바탕으로 최저임금을 이렇게 평가한다. “그날 나는 최저임금이라는 제도가 누구를 위한 규칙인지 이해했다. 최저임금제가 노동자를 위한 제도라는 생각이야말로 지독한 환상이다. 최저임금은 궁극적으로 고용주들이 이 말을 내뱉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봐라! 뭐가 문제냔 말이냐? 나는 법대로 지불했단 말이다!’ 이 말 뒤에 생략된 문장은 ‘그 돈으로 먹고살건 말건 그건 내 알바 아니다’이다. 최저임금제란 정부가 고용주에게 발급해주는 연말 정산용 면죄부일 뿐이다.”


워킹푸어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이론적으로 분석한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문장이다. 한승태의 이런 문장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어떤 뛰어난 경제학자보다 더 강력한 설득력으로 최저임금의 문제를, 노동 빈곤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환기하기에 충분하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문장에서 배어나는 설득력은 오로지 그 현장에 있었던 저자의 삶 덕택이다. 그래서 『인간의 조건』은 귀한 책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동물농장·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문학동네, 2010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2010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

조지 오웰 지음, 김영진 엮음, 한빛비즈, 2018







노명우 -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사회학자,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에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열정을 물려받았고, 버밍엄학파의 문화연구에서는 동시대에 대한 민감한 촉수의 필요성을 배웠다. 지은 책으로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 『계몽의 변증법, 야만으로 후퇴하는 현대』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아방가르드』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세상물정의 사회학』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구경꾼의 탄생』(공역) 등이 있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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