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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고려시대의 길 (2)

고려의 역도와 역제 & 고려시대의 길


이 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글 입니다.

서영일(한백문화재연구원 원장)


고려의 역도와 역제

고려시대 국가의 간선로는 ‘역도(역로)’라고 불렸다. 919년 고려의 왕도가 개경(개성)으로 정해졌는데, 고려 정부는 이때부터 개경을 중심으로 전국의 교통로를 재편성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의 역도는 처음 군사적 목적과 관련하여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길은 후삼국 통일 및 거란과의 항쟁 등에서 군수지원에 꼭 필요한 수단이었다. 수로는 조세의 운반과 군사 보급로로, 육로는 병력이동 및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는 목적으로 정비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 왕실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지방 세력을 특히 우대하였다. 이들을 포섭하여 길을 확보하고 군사지원체계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이 당시 경기도에서는 광주, 양주, 이천, 안성 등의 지방 세력이 중용되었다. 광주, 이천, 양주 등의 지방 세력은 남한강 수로와 경주 방면 육로의 요지여서 주목되었다. 안성은 아산만과 충청 및 호남 지방으로 통하는 육로의 요지로 주목되었다.


2000년 이후 경기도 일대 각 시군에서는 산성 정비를 목적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주로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던 산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고려시대에 광종(949∼975)에서 현종(1010∼1031)때까지 대대적인 산성의 수축과 축조가 이루어졌던 사실이 규명되었다. 이천 설봉산성, 안성 죽주산성, 망이산성. 비봉산성, 평택 비파산성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산성들은 모두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며 그 주변 지역은 물론 개경에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삼도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 유학자이며 정치가인 최승로는 성종이 즉위하자 정치개혁안이 담긴 「시무 28조」를 올렸다. 그 중 17조에서 정(亭), 역, 도진 등 교통의 중심지에 자리 잡은 세도가들이 백성을 수탈해서 멋대로 큰 집을 지어 백성들의 고초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과 역은 교통로 변에 설치된 교통시설로 여행자들의 숙박을 지원하고 행정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도진은 강을 건너는 곳과 수로에서 배가 정박하는 곳으로 육로와 수로의 요지이며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다.

이런 지역을 장악한 세도가들이 그 이익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서 백성들을 장악하고 세력을 확대하여 문제가 된 것이다. 이 당시까지도 지방의 중요 교통의 요지를 중앙 정부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사정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성종 이후 현종은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까지 몽진을 떠났다. 그런데 중도에 교통로를 장악한 지방 세력들의 냉대가 심했다. 심지어 공격을 받아 생명의 위협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나주까지 가는 몽진 길은 직로가 아니라 우호적인 지방 세력이 있는 곳을 따라 우회하였다.

고려 중앙 정부는 이미 국토부터 이런 사정을 타개하기 위하여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광종에서 현종 대에 산성의 수축과 축조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이 산성들은 비록 경기도 일대에 위치하지만 개경과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말부터 후삼국을 거쳐 고려 초까지 경기도의 대표적인 지방 세력이 세거하던 곳이다.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고려 왕실에 협력하여 세력을 떨쳤지만 통일 후 지방통치 및 교통로 정비 과정에서 골칫거리가 되었다. 점차 왕권이 안정되면서 교통로 주변 지방 세도가를 제압하고 통제할 필요성이 커졌다. 그 대책으로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거나 새로 축조하고 지방관을 파견할 준비를 진행하였다.

당시 산성 수축에서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신라의 산성에 외성을 덧붙여 규모를 확대하거나 새로 큰 성을 쌓아서 그 안에 지방 관아를 두는 것이었다. 이는 신라시대부터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산성을 활용하여 그 속에 관아를 설치하고 여기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치할 수 있는 안전한 거점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그 주변 교통로도 장악하여 이를 바탕으로 세력을 유지하는 지방 세력을 제거하고자 하는 의지가 표현된 것이었다.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에 정, 역, 도진 주변의 세도가를 제압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어쨌든 성종 이후 고려의 지방제도는 본격적으로 점차 정비되어 갔다. 먼저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는데 12목은 모두 지방 지배와 교통의 요지에 해당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지방관을 파견하는 군현이 늘어나서 점차 지방제도가 정비되었다. 그 과정에서 개경을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역도가 완성되었다.

󰡔고려사󰡕에는 전국에 약 525개의 역과 이 역을 서로 연결하는 22개의 역도가 기록되었다. 다만 이 역들이 모두 한 시기에 설치된 것은 아니었다. 서산시 해미에 있었던 몽웅역은 태조 때 설치되었다고 전하나 분명하지 않다, 충남 목천의 장지역은 청주 상당산성에서 출토된 신라 기와에 그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말부터 존재하였던 것을 고려 초에 재설치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몇몇 역은 이미 후삼국 시기부터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역들이 정확히 언제부터 고려의 역도와 역제에 포함되었는지 알 수 없다. 992년(성종 11)에는 주(州)·부(府)·군(郡)·현(縣)과 관(館)·역(驛)·강(江)·포(浦)의 체제를 개편하였다. 이후 현종대에도 지방제도에 대한 개편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성종에서 현종에 이르는 시기에 전국적인 역제와 역도가 서서히 완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고려시대 역도의 노선은 󰡔고려사󰡕의 기록을 참조하면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22역도 중 경기도 지역에 해당되는 역도는 청교도, 춘주도, 평구도, 경주도, 충청주도 등 5개가 있었다.

청교도는 개경에서 남경(서울)에 이르는 길로 인천과 수원까지 연결되었다. 소속된 역으로는 청교역(개성), 통파역(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마산역(파주시 파주읍), 벽지역(고양시 일산), 영서역(서울), 평리역, 상림단조역(파주시 적성면), 청파역(서울), 노원역(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행주역(고양시 행주동), 종승역(김포시 양촌면), 금륜역(수원), 중림역(인천), 녹양역(양주시 고읍동) 등이 있었다. 역의 위치로 그 노선을 추정하면 개경-장단-적성-양주-서울 광진나루로 이어지는 길과 장단-파주-고양-서울-수원(또는 인천) 등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춘주도는 개경에서 춘천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소속된 역으로는 상수역(남양주), 감정역(가평), 쌍곡역(포천), 안수역(포천시 포천읍), 임천역(연천군 청산면) 등이 있었다. 그 노선을 추정하여 보면 개경-장단-연천-포천-가평을 지나 춘천으로 가는 길과 개경-서울-남양주-청평-가평 등을 거쳐서 춘천으로 이어지는 두 길이 있었다.

평구도는 서울에서 원주로 연결되는 길이다. 소속된 역은 평구역(서울), 봉안역(광주), 오빈역(양평), 전곡역과 백동역(지평) 등이 있었다. 청교도에서 연결되어 광주-양평-지평 등을 지나서 원주로 연결되는 노선으로 지금의 중앙선 철도와 유사하였다.

경주도는 충주나 청주 방면을 통해서 경주로 가는 길이다. 소속된 역으로는 덕풍역(하남시 덕풍동), 남산역(광주시 광지원리), 경안역(광주시 역동), 안리역(이천시 신둔면), 무극역(이천시 장호원읍), 오천역(이천시 마장면), 양재역(서울 양재동), 장가역(서울 장지동), 안업역(성남 수내동, 조선시대 낙생역), 금령역(용인 역북동), 좌찬역(용인 원삼면 좌항리), 분행역(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분행마을) 등이 있었다. 역의 위치로 추정하여 보면 경주도는 두 개의 노선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덕풍역을 출발하여 광주-이천-장호원으로 연결되는 충주 방면의 길과 판교-용인-양지-죽산으로 연결되어 청주 방면으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충청주도는 서울에서 공주로 이어지는 길이다. 소속된 역으로는 동화역(화성시 봉담읍 동화리), 원천역(수원시 원천동), 청호역(오산시 대원동 역말), 가천역(안성시 원곡면 내가천리) 등이 있었다. 경주도의 안업역이나 청교도의 금륜역을 출발하여 오산-안성 등을 거쳐서 천안으로 가는 길이다.

역도의 실상과 운영

역도는 통행하는 사람과 수레의 수에 따라 대로, 중로, 소로 등으로 나누어졌다. 하지만 그 기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알 수 없다. 각각의 규모와 구조를 알 수 있는 자료 역시 없다.

고려시대 길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기록이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는 책이다. 송나라 사람 서긍이 쓴 책으로 보통은 줄여서 󰡔고려도경󰡕이라고 한다. 서긍은 1123년 인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하여 고려를 방문하였다. 고려시대 국제무역항으로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벽란도를 거쳐서 개경에 들어 왔다. 󰡔고려도경󰡕은 그가 한 달 남짓 고려에 머무르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송나라 휘종에게 바친 일종의 출장보고서이다.

원래 ‘도경’이란 책의 이름과 같이 그림이 그려진 책이다. 책을 간행한지 2년 후 금나라가 송나라를 침입했는데, 그 와중에 휘종에게 진상되었던 원본이 훼손되어 그림은 없어졌다. 다만 글로 기록된 내용 중 일부가 복원되었다. 고려의 풍속과 실상 중, 중국과 같은 부분은 빼고 특이한 부분을 중심으로 외국인의 시각에서 기록하여 나름대로 상당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한 달 남짓 머문 기간에 그가 관찰하고 들은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실제 본 것도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해 오해한 부분도 있다. 따라서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책에는 고려시대의 길과 수레 사용에 대한 기록이 있어서 주목되었다. 서긍은 고려의 길에 대해서

“산이 많고 도로가 험하여 수레로 운반하기가 불리하다.”


고 하였다. 서긍의 관찰인지 전언을 기록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기록을 그대로 이해하면 고려시대 길은 규모나 형태가 수레가 통행하기 부적합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 기록은 단순히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서긍의 시각을 전반적으로 이해한 상태에서 해석해야 한다. 기록 그대로 이해하면 안 된다. 같은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군사(군수물자)는 수레로 운송하며, 수레는 말로 끌게 한다. 고려는 비록 해국(海國)이지만, 무거운 짐을 끌고 먼 곳을 가는 데는 거마(車馬)를 폐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토지가 낮고 좁으며 도로에는 모래와 자갈이 많아 중국과 비교되지 않으므로 수레의 제도와 말을 어거하는 방법도 또한 다르다.”

이 같은 기록으로 보아 서긍이 말한 ‘수레로 운반하기가 어렵다’는 의미는 수레를 사용하지 않거나 수레가 통행하지 못할 정도로 길의 규모나 구조가 보잘 것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서긍은 자기의 고국인 송나라를 기준으로 고려의 역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를 소국으로 내려 보는 중화의식도 깔려 있다. 우리는 그 점을 고려하여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서긍은 고려의 길이 송나라나 중국의 역대 길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한 것이다.

고려는 조운제도를 운영하고 있어서 조세 운송 등 주요한 물자들은 내륙수로와 해로를 활용하였다. 고려를 ‘해국’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서긍은 고려의 배가 자기가 타고 온 배에 비하여 작다는 기록도 남겼다. 하지만 고려 사람들이 배를 다루고 해로를 활용하여 원거리를 항해하는 기술이 뛰어나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고려를 ‘해국’이라 표현한 것이다.

서긍의 의식 속에 고려는 ‘해국’이라는 생각이 깊게 뿌리박고 있었다. 조운 등 해로와 수로를 통해 조세 등 주요 물자가 운반되는 사정을 보았던 것이다. 그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육로와 수레의 사용은 그에 비하여 빈약하다고 보았다.

고려는 중국에 비하면 산악지대가 많다. 송나라의 넓은 평원지대의 도로에 익숙한 서긍에게 고려의 산악지대 고개와 험한 지형을 통과하는 길은 규모도 작고 생소하였던 것이다. 특히 개경 주변의 지형은 상당히 험하고 고갯길이 많다. 넓은 평야도 적어서 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고려의 전 지역을 관찰하고 기록한 것이 아니다.

반면에 고려도경에서도 수레를 원거리 운송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묘사되었다. 군수 물자는 말이 끄는 수레를 활용하여 운반하였고 수레를 사용하는 제도가 존재하였던 것도 기록되어 있다. 고려의 길은 그 기능과 운영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서긍의 기록에서 보면 고려시대 역도는 적어도 수레가 교행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너비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고갯길의 경우 수레를 사용하는데 중국과 다른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고려 사람들은 그 문제를 극복하였기에 수레를 사용하는 법을 폐지하지 않았고 군수 물자 등 중요한 물자의 운반에는 수레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 역도는 주로 정치와 군사적 목적으로 주로 활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규모나 구조도 말이 끄는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고 관리되었던 것이다.

원래 중국에서는 10리에 정을 두고 30리에 역을 두는 것이 원칙이었다. 고려시대에도 각 역도의 역은 일정한 거리를 이격하여 설치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대개 30리마다 1개 역을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직 고려 시대 역의 위치가 정확히 밝혀진 것이 드물어 각 역간의 거리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거리가 역의 설치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겠지만 한국의 경우 중국과 달리 산악지형과 고갯길이 많아서 역과 역간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역과 역 간의 거리는 대체로 30리를 기준으로 하였지만 항상 일정 거리를 유지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역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은 국가에서 직접 하는 것이어서 국가 재정에 따라 역이 설치되었다가 폐지되거나 다시 재설치 되는 등의 변화도 있었다.

각 역은 어떻게 운영되었을까? 일단 각 역에는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와 일꾼들이 있었다. 각 역에는 역장 2~3명, 역정호 7~75명을 배치했다. 초기에는 중앙에서 제도순관(諸道巡官)이 파견되어 역도를 관리하였다. 현종 이후에는 그 이름이 관역사(館驛使)로 바뀌었는데 현종의 이름이 순이어서 이를 피하기 위해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에는 다시 역승(驛丞)의 지휘·감독 아래 역을 운영했다.

역도와 역을 담당하는 관청은 병부였다. 고려 교통로의 정비가 군사적 필요성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로, 교량, 나루 등을 건설하는 책임은 토목공사를 담당한 공부였다. 역도의 관리는 병부가 하고 건설은 공부가 담당하는 이원화된 체제였다. 문종 이후에는 공역서가 역의 관리와 운영을 전담하였다.

경기도의 고려시대 역도는 남경 설치를 전후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삼국시대부터 개성과 서울 사이의 간선은 장단-적성(호로고루)-양주-서울(광진나루) 등을 거쳐서 이천과 수원 방면으로 연결되는 노선이었다. 12세기 이전에는 이 노선이 고려의 기본 역도였다. 하지만 고려 중기 남경이 설치(1067년)되면서 기본 노선이 바뀌게 되었다. 남경으로 가는 지름길인 장단-임진나루-혜음원-벽제-서울(남경)-사평나루(서울 한남동)-양재-과천-수원 등으로 연결되는 노선이 빈번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노선은 개경에서 전라도나 충청도 방면으로 갈 때 지름길이었다. 다만 영남으로 갈 때는 여전히 적성과 광진나루를 지나는 옛길이 활용되었다.


파주 혜음원지 전경 / 파주시청 제공

한편, 고려시대 역은 행정 문서의 전달과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를 위한 시설이었다. 지체 높은 승려들도 이용하였으나 일반인은 이용할 수 없었다. 관리 중에서도 고급관리들이 주로 이용하였는데 하급관리는 이용을 제한받았다. 민간인이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간 여행자들을 위해서 역도 주변에는 원(院)이라고 하는 숙박시설이 있었다. 고려시대 원은 파주 혜음원과 같이 국가에서 민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기도 했지만 대부분 사찰에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간 구제 차원에서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원이 처음 설치된 시기가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신라 말 국가의 공식적인 역제가 무너지면서 이를 대신하는 것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사원(寺院)’이란 명칭은 종교시설로서 「사(寺)」, 숙박 및 구제시설로서 「원(院)」이 결합된 사찰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혜음원이나 충주 미륵대원터에서는 절과 원이 결합된 사원 구조가 출토되었다.

원래 원은 사찰에서 구제 사업의 하나로 행려병자나 대민구제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점차 여행자들이나 상인들도 활용하면서 자연히 물물교환이나 정보가 교환되는 시장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특히 나말여초의 혼란기에 사찰은 자체의 무력뿐만 아니라 이를 지원하는 호족들과 연계되어 있어서 안전한 상업활동을 보장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사찰과 원이 결합된 사원으로써 기능을 보여주는 절터들이 주로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였고 그 규모도 상당하였다. 원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억불정책이 시행되면서 대부분 국유화 되었다. 승려를 환속시켜 원을 관리하는 원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가의 지원이 점차 약해지면서 원주가 도망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원도 그 기능을 다하게 되었다.

대전 유성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길

발굴조사를 통해서 과거의 길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대부분의 도로 유적은 현대의 도시나 도로의 하부에 매몰되어 있다. 현재에도 사람이 살고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발굴조사 과정에서 그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기존에 발굴된 도로들은 경주, 부여 등 고도 지역에서 도심 개발에 앞서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출토되었다.

그런데 최근 대규모 택지 개발이 진행되면서 일정구역에 대하여 문화재가 잔존하는지 여부를 파악하기 위한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조선시대 이전의 도로가 발굴되기도 한다. 그 중 고려시대 유적으로 최근 가장 주목되는 것이 대전 유성 지역에서 발굴된 상대동 및 원신흥동 유적이다. 이 유적은 추정 관아(또는 원터), 객사, 창고, 집터, 도로 등이 복합된 일종의 도시 유적이다. 이 일대는 문헌기록을 참조하면 고려시대 유성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전 상대동 원골 유적 - 연못 및 도로3 전경 / 문화재청 제공

상대동 유적의 도로는 서쪽 구릉지 안부에 형성된 고개에서 남쪽에 동서로 이어진 낮은 구릉의 북쪽 사면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길은 고려시대 공주에서 유성을 지나 현재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로 추정된다. 이 도로 남쪽에 있는 구릉지 남사면에서는 고려시대 관아 또는 원터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가 출토되었다. 이 건물터 남쪽 끝단부에 접하여 동서로 연결되는 도로도 출토되었다. 이 도로와 앞의 북쪽 도로는 대형 건물터 동쪽 끝을 따라 지나 북쪽으로 이어진 남북 방향의 도로로 서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남북도로는 북쪽 도로와 교차로를 지나서도 계속 북쪽으로 이어졌다. 동서 방향의 도로에서는 이 보다 작은 도로가 남북 방향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도로 주변에서 출토된 주거지 등 생활유적들과 연결되는 길이었다. 즉 동서 방향과 남북 방향으로 큰 도로가 교차되고 이들 도로에서 분기한 작은 도로들이 각각 도로 주변의 생활 유적과 연결되는 작은 도로가 되는 것이다.

원신흥동 유적은 갑천 서쪽의 충적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방향의 도로와 남북방향의 도로가 서로 망을 이루며 서로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노면에 수레바퀴 자국이 있어서 도로로 추정되는데 유실된 곳이 많아 연결 상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상의 고려시대 도로는 높은 곳은 땅을 파서 조선하고 낮은 곳은 땅을 돋아서 도로의 수평을 조정하였다. 수레가 다니기 위해서는 도로의 경사를 일정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노면에서는 수레바퀴 자국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곡식이나 기타 생활필수품 등을 수레에 싣고 운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노면은 지반이 단단하고 비교적 높은 곳은 삭토한 생토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도로의 보수 과정에서 강자갈을 깔아서 사용하였던 흔적도 보인다. 도로 측면에 별도의 배수시설을 시설하기도 하지만 시설하지 않고 자연경사를 이용해 배수한 것이 섞여 있어 지형에 따라 조성 방법에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평지의 도로는 자갈, 사질토 등을 깔아서 노면을 보강하였다. 사질토만 약 50cm 다진 것도 있다. 이는 일종의 도로 포장방식의 하나로 강자갈과 사질토를 깔아서 도로의 노면을 단단하게 하고 비가 오거나 수레가 지나다니면서 노면을 훼손하는 것을 막고 통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신흥동에서 출토된 도로 중에는 이와 다르게 지면을 그대로 사용하고 수레바퀴 자국 외에는 도로의 규모나 구조를 알 수 있는 흔적이 없는 것도 있다.

도로의 너비는 약 400 ~ 500㎝ 정도이다. 이 정도의 너비면 수레 두 대가 서로 교행 할 수 있는 너비이다. 이 정도 규모이면 비교적 큰 도로에 속하며 역도의 일부일 가능성도 있다.

상대동 유적과 원신흥동 유적은 서로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여 출토된 길로 서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조사가 이루지지 않아 확인이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이 유적들에서는 도로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는 다수의 건물지, 주거시설, 연못, 생산시설 등이 밀집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정으로 보아 이 일대는 옛 유성현으로, 동서방향과 남북방향의 주도로를 중심으로 여기에서 분기된 도로에 의해서 연결된 각종 건물지와 주거지, 생활 유적 등이 유성현을 이루는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 방향의 도로는 옛 유성현을 지나는 큰 길로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가 되고 여기에서 분기된 도로들은 마을 내부를 서로 연결하는 도로로 추정된다.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지만 지금까지 상황으로도 고려시대 지방 군현을 서로 연결하는 도로와 군현 내부의 도로를 대략적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유적으로 주목된다.


<고려시대의 길 (1) : 고려의 역도와 역제 & 고려시대의 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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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경기문화유산학교

    발행일/ 2018.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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