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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 정암 조광조

경기도 용인시 심곡서원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 정암 조광조


- 경기도 용인시 심곡서원 -


20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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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심곡서원 ⓒ이재형

요즘 너도 나도 개혁(改革, reform)을 말한다. 개혁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고치는 것이다. 즉 기존의 체제와 조화를 이루면서 한정된 변혁을 꾀하는 것이다. 묵은 조직이나 제도, 풍습, 방식 등을 바꾸어 새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혁신(革新)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개혁은 말은 쉽지만 이루기는 쉽지 않다. 저항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개혁보다 더 급진적인 것이 혁명(革命)이다. 혁명은 기존의 사회제도 또는 정치체제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개혁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다. 조광조는 사극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역사는 그를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얽힌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아직까지 평가를 받는 중이다. 시대를 앞서간 조선의 개혁가 조광조는 개혁가일까? 혁명가일까?

경기도 용인에 심곡서원이 있다. 조광조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며 그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서원은 아파트들로 둘러싸여 있다. 다른 곳과 달리 이 서원은 항상 개방돼 있다. 겨울바람이 유난히 차가운 날 심곡서원에 들러 조광조의 개혁을 생각해봤다.


중종반정과 사림파 대표 인물 조광조

▲ 심곡서원의 동재(居仁齊) ⓒ이재형

먼저 역사가 평가한 조광조를 보자. 조광조는 조선 중종(1488~1544) 때 인물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晉城大君)이다. 포악하다고 소문난 연산군은 신하들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했다. 연산군 폭정에 신하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신세다. 그래서 신하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연산군을 폐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한다. 그 왕이 중종이다. 중종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 이른바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 9월2일)이다.

중종은 적통이 아니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처지였다. 반정 공신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왕조 최초의 반정이었기에 연산군을 쫓아낸 공신들 포상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때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조광조가 혜성처럼 등장한다. 조광조는 당시 사림(士林, 선비들의 집단을 뜻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광조는 관직에 오르자마자 젊은 혈기로 중종에게 과감한 개혁을 진언한다. 신하들이 부패했기 때문에 전부 갈아엎어야 한다고.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조광조가 정6품 사간원*의 대간이 된 지 이틀 만에 왕에게 올린 상소문 내용은 이렇다. 이걸 대담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겁이 없다고 해야 하나? 상소문을 받은 왕의 마음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사간원은 바른 말을 하는 자리인데, 아직까지 제대로 바른 말을 한 자가 없으니 사헌부와 사간원 전부를 파직해주시기 바랍니다.”

*사간원(司諫院) :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했던 기관. 사간원은 홍문관(弘文館)·사헌부와 함께 삼사(三司)라 했다. 수장은 대사간이었으며 정3품 벼슬이었다.


▲ 심곡서원 장서각(藏書閣) ⓒ이재형


시대를 앞서간 조광조의 개혁 조치

신참내기 관료 조광조의 말에 조정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 듣다보니 조광조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광조 의견에 동조하는 대신들이 하나둘씩 생기고 늘어났다. 왕권이 약한 중종은 개혁을 무기로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중종 역시 조광조 주장을 받아들여 사간원 전원을 물갈이 하는 등 개혁의 칼을 빼들었다.

당시 중종은 조광조를 얼마나 신뢰했을까? 중종실록에 나타나있다. 중종실록은 국왕과 신하의 관계를 이렇게 묘사했다. “조광조가 말하자 중종은 얼굴빛을 가다듬으며 들었고, 서로 진정으로 간절히 논설해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다가 환관이 촛불을 들고 가자 그제야 그만 두었다(1519년 7월 21일)”. 중종은 조광조를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조광조의 개혁 몇 가지만 살펴보자. 노비법을 고쳐 노비들이 양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서얼법을 바꿔 능력 있는 서얼들이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반 아버지와 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서(庶), 양반 아버지와 천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얼(孼)이라 하고, 이들을 모두 합쳐 서얼(庶孼)이라 불렀다. 인재등용에 서얼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다. 지금은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시대상황으로 미뤄볼 때 서얼법 철폐는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다.

▲ 심곡서원 강당(講堂) ⓒ이재형

또한 성리학을 숭상하기 위해 소격서(昭格署) 폐지도 주장했다. 소격서는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임금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도교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소격서 폐지를 두고 중종은 신뢰하던 조광조와 뜻이 맞지 않았다. 선대왕부터 이어져오던 소격서를 폐지하는 것을 중종이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소격서를 두고 중종이 조광조와 대치한 것은 조광조를 위시한 사람파의 국정 장악을 두려워한 것이다.


조광조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한 중종

사실 중종이 조광조 등 사림파를 중용한 이유는 반정 공신을 포함한 훈구파(훈구파, 勳舊란 옛날에 공을 세운 사람들, 즉 왕이 권좌에 오를 때 공을 세운 사람들)의 득세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즉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조광조를 앞세워 개혁을 시작했지만, 이후 조광조와 사림파의 힘이 너무 세진 것이다. 이런 것도 모르고 조광조는 소격서를 철폐하지 않은 중종을 강하게 비판하고 대항해 결국 소격서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소격서 폐지로 중종과 조광조의 사이는 멀어질 대로 멀어졌다. 결국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다.

▲ 조광조 위패를 모신 심곡서원 사우(祠宇) ⓒ이재형

개혁은 사회적 모순을 제거하되 기존 체제의 붕괴를 막는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개혁에는 언제나 저항이 따른다. 조광조의 개혁을 못마땅해 하는 훈구파 세력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조정 밖에서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달릴 주(走), 닮은 초(肖) 이 두 글자를 합하면 조(趙)가 나온다. 여기서 조(趙)씨는 조광조다.

소문은 궁내에까지 파다하게 퍼진다. 이런 모함은 왕이 조광조를 경계한다는 것을 눈치 챈 개혁 반대파(훈구파)의 모략이다. 훈구파 일당들은 궁녀를 시켜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써서 벌레들이 파먹게 한 다음 왕에게 일러바쳤다. 주변 상황은 조광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조광조는 역모를 꾀한다는 모함을 받게 된다. 주초위왕 일화는 그럴듯하게 꾸며진 야사(野史)인줄 알았는데, 인종실록에도 실린 정사(正史)다. 벌레들이 나뭇잎을 먹었다는 기묘한 얘기와 함께 조광조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역사에 남긴 것이다.

조정에서는 훈구파 신하들을 중심으로 조광조를 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중종은 힘이 세진 조광조를 견제했는데, 상소를 빌미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보통 왕조국가에서는 왕에게 초점을 맞춘 정치가 이뤄지는데, 중종보다 조광조가 펼치는 정치가 더 유명한 상황이 된 것이다. 중종은 조광조를 두려워해 그는 물론 사림파 신하들을 귀양 보냈다. 이것이 기묘사화(중종14년)다.  


기묘사화로 멈추게 되는 조광조의 개혁

▲ 조광조 묘역 입구에 있는 절명시비 ⓒ이재형

조광조는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언젠가 왕이 자신을 부를 것이라고 믿고 기다렸다. 많은 신하들이 귀양 보낸 조광조를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중종을 말렸다. 하지만 중종은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약을 내렸다. 그렇게 신뢰하던 조광조를 하루아침에 내치다니. 조광조는 개혁을 이루지 못한 채 38세의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았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시(絶命詩)를 지어 자신의 감회를 피력하였다. 그의 개혁은 4년 만에 멈췄다. 심곡서원에서 멀지 않은, 조광조 묘소 입구에 절명시비가 있다. 시는 마지막까지 임금과 나라를 걱정했던 조광조의 마음을 담고 있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愛君如愛父)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憂國如憂家)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白日臨下土)
나의 붉은 마음 환히 비추리(昭昭照丹衷)

▲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기 직전에 지은 절명시 ⓒ이재형

조광조의 개혁은 당시로서는 사회체제를 바꾸는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것이 백성을 위한 개혁이었다고 해도 개혁은 기존 체제와 조화를 이루면서 서서히 이뤄졌어야 했다.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속도 조절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노비가 양반이 되고 첩의 자식도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세상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개혁이 아니라 내심 혁명을 이루고자 했을까? 조광조가 겨눈 개혁 아니 혁명의 칼을 맞은 훈구파는 결국 눈엣가시인 조광조를 내치고 만 셈이다.


조광조의 개혁정신이 어린 심곡서원

조광조 위패를 모신 심곡서원은 500년 전 젊은 개혁가의 꿈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곳이다. 서원 앞에 홍살문이 서 있다. 홍살문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표시다. 주로 왕릉과 서원 등에 세워졌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내세웠던 조선의 상징적 건축물이다. 뼈대 있는 집안의 제실이나 효자가 나온 마을 입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 심곡서원 외삼문과 사적비 ⓒ이재형

▲ 효종이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내린 사액 현판 ⓒ이재형

서원의 바깥문인 외삼문 앞에 국가사적(제530호)임을 알리는 비석이 있다. 심곡서원은 효종 때 세워졌다. 조광조가 개혁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깝게 죽은 것을 불쌍히 여겨 효종이 ‘심곡’(深谷)이라는 시호를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다.

*사액서원(賜額書院) :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

심곡서원은 흥선대원군 때 내린 사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사원 중 하나다. 서원의 전체적인 구조는 전학후묘(前學後廟, 앞쪽에 공부하는 곳, 뒤쪽은 사당 배치) 형태다. 강당 다음으로 만나는 내삼문의 현판은 1650년 사액된 현판이다. 조광조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사원은 철폐되지 않은 채 남아 다행이다. 그의 개혁정신이 서원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 심곡서원 뒤편에 있는 느티나무 ⓒ이재형

심곡서원에는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첫 번째는 동재 옆 연못가 느티나무다. 서원 설립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수령은 대략 500년, 둘레도 4미터나 된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 꿋꿋하게 자란다. 조광조의 개혁의지를 대변하는 것처럼. 두 번째 느티나무는 사우 뒤편에 있다. 여름이면 시원한 나무 그늘을 드리우는 곳이다. 수령은 400년에 둘레가 4미터, 높이는 19미터다. 아래 나무보다 더 크다.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심곡서원을 지켜보며 조광조의 넋을 위로하듯이 버티고 있다.

▲ 경기도 용인에 있는 조광조 묘 ⓒ이재형

심곡서원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조광조 묘소를 찾아가봤다. 그의 묘에는 부인이 합장되어 있다. 개혁의 꿈을 놓은 채 부인과 편안히 누워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개혁을 실현하지 못한 채 사약을 받고 죽은 조광조가 꿈꾸던 개혁은 어떤 것일까? 조광조가 그린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조광조의 개혁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란 생각이 든다. 예나 지금이나 개혁은 왜 이리도 더디고 늦은 걸까?


○ 심곡서원 공간 정보 
주소: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16-9
국가사적 제530호
전화: 031-261-6750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있습니다.




인문쟁이 이재형

2018, 2019 [인문쟁이 4,5기]

이재형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생활을 했고 34년간의 공직생활을 끝낸 후 요즘은 아내와 어디론가 여행 떠나기를 좋아한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는 말처럼. 은퇴 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활발히 하며 ‘갑분싸’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인생 2모작을 인문쟁이와 함께 하면서 여행과 인문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그 세계에서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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