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마산수로와 흥망성쇠를 함께 한 불도마을

경기학광장Vol.1 _ Village & history

< 마산수로와 흥망성쇠를 함께 한 불도마을 >


- 경기학광장Vol.1 _ Village & histor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대부도의 숨겨진 마을 불도마을


▲ 불도방조제에 위치한 식당가


대부황금로를 타고 대부도와 선감도를 지나면 불도방조제가 모 습을 드러낸다. 방조제의 오른편으로는 바지락칼국수, 조개구이, 회를 파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식당가를 지나면 산기슭을 따라 정 문규미술관과 펜션촌이 들어서 있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선감도 와 탄도 사이에 불도가 있다는 정보만으로 이곳이 불도마을이라고 착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펜션이 있는 곳부터는 탄도에 속하고, 식당가 역시 방조제 때문에 생긴 장소로 불도마을과는 상관없는 곳 이다.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불도 주민들이 아니라 외지인들인 데, 정식으로 허가가 나지 않은 가게들이므로 세금 대신 벌금을 꼬 박꼬박 내면서 영업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이쯤 되면 이게 합 법인지 불법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다.


그럼 불도마을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불도는 나지 막한 두 구릉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섬의 지형이 지네 형국이었다고 하지만 옛 지도를 보면 비스듬히 놓인 땅콩과 같은 모양이다. 그 래서 섬의 남서쪽 끝에 나있는 불도방조제에서 보면 북동쪽에 위치 한 불도마을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방조제 왼편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만 비로소 마을이 눈에 띈다.


불도마을로 진입하는 길은 해안길과 언덕길이 있다. 이 중 언덕 길이 ‘부처미길’이라고 부르던 본래의 마을길이다. 언덕길 모퉁이 를 돌면 옛 동구에 해당하는 곳에 선감교회가 들어서 있어 ‘부처님 을 모신 마을’이라는 동명과 대조를 이룬다.


불도마을에는 현재 25가구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데, 그 중 토박 이들은 11가구밖에 남지 않았다. 외지인의 집인지 토박이의 집인지 는 한 눈에 구별할 수 있다. 이 한적한 마을에 선주나 귀농인이 이사 올 까닭이 없으므로 은퇴 후의 전원생활이나 별장으로 사용할 목적 으로 지은 화려한 전원주택들은 모두 외지인의 집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낮에 불도마을에서 주민들을 만나기란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 렵다. 항구와 어장, 가게가 다 탄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마을 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50~60대의 주민들은 생업의 터전인 탄도로 나가 있다. ‘마을 쉼터’라는 현판이 붙은 노인정에는 할머니 두세 분이 계실 뿐이다. 탄도에 있는 경로당에는 할아버지들만 계셨던 기억을 떠올리면 이 지역에 전해오는 얘기 중 ‘불도에는 할머니당 이 있어 과부가 많고, 탄도에는 할아버지당이 있어 홀아비가 많다.’ 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 불도 마을 전경



바다 속에서 건져진 부처를 모셨던 섬


현재 대부도 일대는 하나의 섬처럼 보이지만, 방조제들로 연륙 되기전에는 여러 섬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 섬들마다 자연마을 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중 ‘부처미’라고 불리던 불도마을은 선감동 에 속해 있는 자연마을이고, 선감도, 불도, 탄도의 세 섬으로 구성된 선감동은 행정동인 대부동에 속해 있는 법정동이다. 이렇듯 복잡한 행정체계는 조선시대 남양부에서 대부도와 그 인근 섬들을 함께 묶 어서 관할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이 도서지역은 부천군과 옹 진군 시절의 대부면을 거쳐 1994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이 된 것 이다. 행정동 대부동은 대부면의 후신이고, 법정동 선감동은 선감 리의 후신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불도마을의 원래 명칭은 ‘부처미’였는데, 이러한 동명을 얻게 된 유래담이 지금도 전해진다.


돌부처를 건졌어요. 고기 잡는 배가. 요 앞에서, 불도 앞에서. 덕적도 사는 사람이 여기가 고기잡기가 용이하니까. <중략> 와 서 그물을 내렸는데 선원하고 선장하고 똑같은 꿈을 꿨대요. “빨리 고기 잡지 않고 왜 잠만 자느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 호통을 쳐가지고 잠이 깼대요. 그래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둘이 가 똑같더래요. 내용이. 그래서 그물을 걷어 올릴 시간도 안 됐 는데 황급히 걷어 올렸나보죠? 그랬더니 고기는 없고 돌부처 만 들었더래요. 어떻게 돌부처가 그물에 들어갈 수 있는지, 큰 그물을 벌리고 물쌀을 많이 받고 있는 거예요. 그물이. 바닥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내려놓고. 그런 그물인데 그거를 그 어부 가, 배 주인이죠? 불도에다가 중간쯤 있어요. 거기다 암자를 지 어놓고 그거를 모셔놨어요. <중략> 그래서 그 때 이름이 지어 진 거래요. 아마 한두 집 두세 집 이렇게 주민이 존재했을 때였나봐요. 무척 굉장히 오래된 얘기겠죠? 그래서 부처뫼, 산 뫼자 써가지고, 부처뫼가 됐다가 나중에 개명이 되면서 축소시킨거 죠? 쉽게 불도. 그렇게 된거죠.


과연 바다 속에서 부처가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부처를 모신 암 자 때문에 마을과 섬의 이름이 유래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지금 도 절터가 남아 있고, 기와와 자기 파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다. 홍금순 할머니에 의하면 자신이 시집왔을 때는 이 암자가 이 미 없어져서 못 보았지만 절터에서 나온 기왓장을 빻아 가루를 만 들어 놋그릇을 닦는 데 사용을 하곤 했었다고 한다.


▲ 불도마을 암자가 있었던 터


경기 충청의 배들이 불도에서 정성을 들이다


이 전설에서 의아한 사항은 덕적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러 온 사람 이 왜 불도에 암자를 지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불도는 조선시대 국영목장이 있던 유인도였다. 따라서 부처가 이곳 주민들의 신앙 대상이 되었겠지만 그 정도의 신도로 암자를 유지할 수는 없었을 터이다. 그런데 이 암자가 마을 언덕에서 마산수로를 굽어보는 곳 에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1864년경 간행된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처음으로 불도(佛島)의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불당이 있는 마을 이 한두 곳이 아닐 터인데도 불구하고 이 섬의 공식적인 이름이 불 도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 마을에 모셔진 부처가 대외적으로도 신앙 의 대상이 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즉 불도의 부처가 마산수로를 통 과하는 뱃사람들에게 항해의 무사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마산수로는 선감도, 불도, 탄도와 그 맞은편인 화성시 송산면의 해안지역 사이에 위치한 경기만을 대표하던 바닷길이었다. 서해안 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육지와 바다가 완곡한 경사를 이루어 선박의 운항에는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마산수로는 수심이 깊어 조수간만의 영향을 별반 받지 않고도 배를 항시 운항할 수 있 어서 오래전부터 뱃길로 이용되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시대부 터 세곡을 운송하던 조운선이 이 수로를 통과하였고, 사선(私船)에 의한 해상운송이 활발했던 조선 후기에는 장삿배의 운항도 잦았다.


▲ 1915년에 측량된 선감동 주변의 지도(1920년대 근세지도)


풍선배로 서해안을 누비다


불도 역시 서해안의 어염과 기타 물류들을 인천이나 서울로 실어 나르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생활을 영위하던 섬이었고, 이러 한 불도의 생활상은 1980년대 초까지 이어진다. 불도에서 운반선 으로 사용하던 배는 풍선배였다. 풍선배는 바람을 이용하여 운행되 는 돛단배를 말한다. 당시 운행되던 풍선배에는 ‘삼판배’라고 부르 는 돛이 두 개 달린 전통 한선도 있었고, ‘하시끼’라고 부르는 일본 식 배도 있었다.


풍선배로 가장 많이 실어 나른 것은 서해안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었다. 염전은 대부도, 남양, 송산에도 있었지만 태안까지도 다녔다. 인천에 소금 객주 사무실이 있어서 어디에 가서 소금을 실어오라는 주문을 받으면 소금을 실어다 주고 운반비를 받았는데 충청도까지 갔다 오면 2배 가량의 운반비를 더 받을 수 있었다. 소금 이외에 이 엉, 돌, 모래, 굴껍질, 뻘 등도 풍선배로 실어 날랐다.


▲ 불도마을과 포구. 소년시절의 김형태 씨, 뒤로 풍선배가 보인다.


1980년대 초 육상교통의 발달로 해상운송업이 사양길에 접어들 자 운반선 대신 소형어선을 구입하여 고기잡이를 시작하였다. 처음 에는 경운기 엔진을 단 배를 2척 정도 운행하다가 1985년에는 3톤 규모의 배 4척 정도가 운행되었는데, 주로 봄철에는 주꾸미와 꽃게 를, 가을철에는 낙지를 잡아 수입을 올렸다.


농사보다 풍요로운 삶을 보장했던 불도의 갯벌


불도 주변의 갯벌에서는 굴, 바지락, 맛, 낙지 등이 많이 채집되었 다. 특히 굴 양식은 주민들의 주요 생계 수단이 되기에 충분했다. 굴 양식장에 돌을 던져 놓으면 굴이 돌에 붙기 시작하고 2년 후부터는 해마다 딸 수 있었다. 굴은 대부도의 진두라는 부두에 가서 팔았다. 10월 초부터 따서 팔기 시작하는데 굴 가격은 김장 대목을 앞둔 11 월 24일 밤이 최절정이었다. 1980년 당시에도 1킬로그램에 보통 5 천 원 이상 갈 정도로 굴 값이 금값이었고 하루 작업을 해서 식구들 모두 굴을 까서 팔면 쌀 2~3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


▲ 굴 양식을 위해 돌을 나르는 불도 아낙네들



생활용수가 부족했던 불도


▲ 간이상수도 공사를 할 당시 주민들을 태운 불도의 전마선


불도가 1980년대까지 생계에 별 문제가 없는 어촌이었다 해도 주민들이 생활하기에 알맞은 환경은 결코 아니었다. 땔감의 부족도 문제이기는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서 가장 큰 애로사항은 생활용수의 부족이었다. 마을에 물이 꽤 잘 나오는 공동우물이 하나 있었지만, 주민들이 사용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 여 청년회가 담당하여 식구 수대로 물을 배분하기도 하였다. 또한 마을 중간 중간에 웅덩이를 파놓아 빗물이 고일 수 있도록 하였고 겨울에는 이 웅덩이에 언 얼음을 지게로 져다가 가마솥에 녹여서 먹기도 했다.


하지만 선감도는 관정을 파면 금방 물이 나올 정도로 물줄기가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빨래를 하거나 물이 많이 필요할 때는 선감 도까지 배를 타고 가야만 했다.


자기네만 (선감도로) 가는 게 아니고. 날 화창한 날 화덕도 가지고 가고, 아줌마 아가씨들 갈 사람들 태우고 가요. 가서 거 기는 나무가 많으니까 땔감 주워다가 물 끓여서 빨래하고 그 동안에 남자들은 땔감 준비해다 주고 물 길어서 배에다 채워놓고.


그러다가 옹진군 시절인 1980년대에는 선감도에서 불도까지 PVC관을 바다 밑으로 깔아서 물을 끌어오는 간이상수도 공사를 했다. 아직도 그때 물을 저장하던 물탱크가 마을에 남아 있다. 당시 PVC관이 안전하게 유지되게 하기 위해 탄도·불도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여 배에 돌을 실어다 그 위에 돌을 덮는 작업을 했다. 상수도 는 1994년에 안산시로 편입된 후 3년이 지나고서야 설치되었다고 한다.


잇단 방조제의 조성과 불도 주민들의 피해 상황


1988년에는 불도와 탄도 방조제가, 1994년에는 시흥시와 대부 도를 연결하는 시화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불도의 삶은 완전히 뒤바 뀌게 되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양식업과 어업 활동에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화호 건설이 시작되고 마산수로의 물길이 막히면서 배를 운행 할 수 없게 되자 대부분의 주민들은 어선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시기 불도 주위에 있던 양식장도 대대적인 간척사업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기존의 양식장에 해당되는 면적 에 대해서만 보상하였기 때문에 주민들은 그곳에 설치된 시설에 대 해서는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현재 굴양식장은 탄도의 누에섬 뒤 에 있는 양식장만 남아 있는데, 굴이 아직까지는 많이 나는 편이지 만 점차 바탕이 황폐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불도의 주민들은 탄도방조제의 완공으로 화성의 내륙지역과 연륙된 직후 탄도로 들어오는 관광객들이 붐볐을 당시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 당시 방조제 주변으로 가서 파라솔을 치고 주말에만 장 사를 하였는데도, 벌이가 제법 쏠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탄도항 에 회센터가 정식으로 들어서고 나서 주민들이 무허가로 운영하던 횟집들은 철거되고 말았다. 물론 안산시에서는 불도와 탄도 어촌계 원들에게 회센터의 입주 우선권을 주었지만 임대료가 비싸서 정작 입주한 불도 주민들은 많지 않은 편이었다.


불도에 남아 있는 풍어굿의 공간들


불도가 섬마을로서 한창 잘 나갔을 때는 2년마다 한 번씩 정월 보름 전에 날을 잡아서 마을 제사를 올렸다. 이를 ‘당제’ 혹은 ‘당굿’ 을 지낸다고 했다.


당제는 만신에 의해 주재되었고 고사풀이–당맞이–당마당굿의 순 서로 진행되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작은당에서 당제를 무사히 치 르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고사풀이가 끝나면 큰당에서 하는 굿인 당 맞이를 하기 위해 당산으로 올라갔는데 이때 선주와 주민들이 고사 기(告祀旗)를 앞세우고 뒤를 따랐다. 당맞이의 하이라이트는 선주 들이 고사기를 가장 먼저 자신의 배에 꽂기 위하여 경쟁을 하는 장 면이었다. 선주들은 고사기를 들고 있다가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자기 배에 먼저 꽂으려고 오솔길은 물론 길이 아닌 곳도 아랑곳하 지 않고 달려 내려가곤 했다.


당맞이가 끝나 어둠이 질 무렵이면 만신과 주민들은 당마당으로 내려와 이튿날 아침까지 밤새 굿을 하며 놀았다. 당마당에는 천막 으로 굿청을 차렸고, 추위를 피하기 위해 군데군데 화톳불을 피웠 다. 굿을 하는 중간 중간에 만신은 꽃반을 가져다 놓은 주민들의 신수를 봐 주었다. 굿에는 주민들도 참여하는데, ‘무건(무감) 선다’ 고 하여 연장자부터 오색찬란한 무복을 빌려 입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 불도 큰당 안의 모습


▲ 불도의 작은당 구지뽕나무


▲ 불도의 큰당


당제는 시화방조제가 완공된 후 1995년경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당제를 지내던 공간은 여전히 마을에 남아 있고, 주민들 역시 당제 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할머니당으로 불리는 큰당은 큰 철탑이 솟아 있는 야트막한 당 산에 자리잡고 있다. 예전 포구가 있었던 해안과 마산수로를 바라 보는 위치이다. 당집 내부의 돌제단에는 제기, 촛대, 화병, 손거울 등이 놓여 있으며, 당산할머니에게 폐백으로 드린 색동한복과 사 탕, 꽃고무신 등도 바닥에 흩어져 있다.


작은당은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구지뽕나무인데, 마을 어귀에 있 던 포구에서 당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서 있다. 예전 이곳에서는 당 제를 지내기 전 고사풀이를 하였고, 당제가 끝난 뒤에는 ‘서낭을 만 든다’고 하여 창호지에 쌀을 조금 싸서 나무에 걸어두었다.


당마당으로 사용되었던 살구나무가 있던 집은 몇 년 전까지만 해 도 옛 모습 그대로 있었지만, 지금은 외지인에게 팔려 살구나무는 베어지고 집도 헐린 채 함석울타리로 둘려져 있다.


불도주민들의 희로애락을 신명으로 풀던 이 당제의 공간들이 언제까지 마을에 남아 있을 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오래도록 주민 들과 함께 하기를 소망해 본다. 얼마 전 외지에서 온 사람이 구지뽕 나무를 베려하자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작은당에 왜 손을 대려 하느 냐며 화를 내셔서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당제가 중단된 지 24년이나 지났지만 마을제당에 대한 신앙이 토박이 분들에게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 불도의 당마당이 있던 곳. 살구나무가 있던 집은 헐리고 없다.


경기만 에코뮤지엄 사업과 불도의 미래


마을의 젖줄이었던 마산수로와 마을주변의 갯벌이 사라진 후 불 도는 그야말로 생활의 터전을 잃은 마을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탄도에 항만이 건설되고 탄도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공동어장이 있 기는 하지만 예전만 같을 리는 없다.


현재 불도에서 어선을 부리는 분은 김형태 씨가 유일하며, 일 부 주민은 탄도에서 횟집을 운영하기도 한다. 그 외의 불도주민 들은 밭농사와 굴양식을 주요 생업으로 하고 있지만 고령에 접어 든 어른들은 점차 일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과연 불도의 미래는 보장될 수 있을 것인지 의아해진다.


불도를 에코뮤지엄의 섬으로 조성하는 것이 이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 현재 경기도에서는 경기만 일대를 대상으로 에코뮤지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선감동 또한 그 중심 지역 중 하나인데, 선감 도에서는 다크투어리)과 농어촌체험마을을, 탄도에서는 탄도항과 누에섬을 관광상품화하며 적극 동참하고 있다. 불도 역시 경기 만의 특성을 드러내는 역사와 문화가 깃든 섬이다. 앞서 언급하였 던 마산수로의 역사와 풍어굿이 불도를 대표하는 문화관광상품으 로 활용되어 스러져가는 불도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화성시 송산면에서 바라본 불도마을. 철탑이 있는 곳이 당산이고, 마을 앞에는 옛 마산수로가 있다.



글 김준기

동국대학교에서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대학원에서 구비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민속학연구소에 근무하며 마을조사를 다니면서 살아있는 민속현상과 그 안에 담겨있는 전통문화의 가치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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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Vol.1 _ 2019 여름창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08.16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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