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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정씨 동래부원군 정난종 가문과 군포시 속달동

경기학광장Vol.1 _ Village & history



< 동래정씨 동래부원군 정난종 가문과 군포시 속달동 >


- 경기학광장Vol.1 _ Village & histo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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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정씨 동래부원군파 문중이 세거해 온 군포시 속달동 속달마을은 수리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 남향으로 형성된 골짜기의 동쪽 자락에 서향(西向)으로 입지 하였다. 이 문중의 입향(入鄕)은 정난종(鄭蘭宗, 1433- 1489)의 입묘(立墓)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황해도관찰사로 재임할 때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 ?-1467) 의 난을 평정하여 공을 세우고, 1470년(성종 원년)에 동지 중추부사로 사은부사가 되어 명(明)에 다녀와 1471년(성 종 2)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으로 동래군(東 萊君)에 봉해져 파시조가 되었다. 낮은 구릉을 따라 놓인 마을 안길을 올라가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5호로 지정된 이 문중의 종택(宗宅)이 나타난다. 이 가옥은 유교적 공간질서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실제적인 쓰임새를 중시하는 조선 후기 살림집의 특징을 담고 있다. 전통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유교적 질서에서 위계가 높거나 신성한 공간들은 마을의 상부와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동래정씨 익혜공파

이 가문은 조선전기 훈구파의 중진으로 활동한 명신으로 서예(書藝)에도 일가를 이루었던 동래부원군 정난종(東萊府院君鄭蘭 宗, 1433-1489)을 파조(派祖)로 하는 익혜공파(翼惠公派)이다. 속달동은 정난종의 사패지지(賜牌之地)로, 그와 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의 장지(葬地)가 또한 이곳에 있다. 이후 정난종의 장자 정광보(鄭光輔, 1457-1524)와 정광보의 둘째아들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이 속달동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이후 정난종과 정광보,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을 비롯한 후손의 묘역과 그 종택이 계속하여 이곳에 자리하였으니, 정난종의 종가가 묘역과 더불어 이곳을 지켜온 지가 벌써 500년을 넘어선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정씨(鄭氏)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육촌(斯盧 六村) 가운데 하나인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의 촌장으로 정씨 성을 사성(賜姓)받은 지백호(智伯虎)를 비조(鼻祖)로 한다. 동래 정씨는 지백호의 원손(遠孫)으로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會文)을 득관시조(得貫始祖)로 하며, 고려 초에 보윤(甫 尹)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일세(一世)로 하여 이어지고 있다.

동래정씨는 조선 초기부터 구한말의 시기까지 고관대작을 끊임없이 배출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정승가문 가운데 하나이다. 동래정씨로 조선시대에 정승의 자리에 오른 인물만 17명에 달하는데, 이 수치는 전주이씨의 22명, 안동김씨(구안동 4명, 신안동 15명)의 19명 다음으로 많은 정승을 배출한 수치이다. 전주이씨는 왕족이고, 60년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제외한다면 동래정씨가 조선시대 최고의 정승집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동래정씨 중에서도 여기서 거론하는 동래부원군 정난종 가문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난종 자신이 세조·성종대의 훈구파의 주요 중진으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그 아들 광보, 광필을 비롯 한 많은 명신들을 배출하였던 것이다. 앞서 말한 17명의 정승 가운데 영의정을 역임한 문익공(文翼公) 정광필을 비롯한 13명이 정난종을 파조로 하는 동래정씨 익혜공파 후손이라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동래정씨는 주로 동래와 양산(梁山) 등의 영남일대에 산거(散 居)하여 왔으며, 정난종 역시 예천(醴泉) 출신이다. 현재 종택과 묘역이 소재한 속달지역과 동래정씨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정난종 이 관직에서 이루어 낸 성과의 대가로 이 지역을 사패지지로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정난종의 사후, 인근에 있던 부인 완산이씨의 묘소를 이장하여 현 위치에 함께 쌍분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이는 정 난종의 유명에 따른 것이라 한다. 이후 정광보가 선영을 좇아 이곳에 유택을 세우고 거주하였다.

종택과 속달의 의미

정난종 종택과 묘역이 자리한 속달(速達)은 수리산 서쪽편 줄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골짜기 기슭에 자리한다. 속달이라는 이름은 ‘수리산의 골짜기 안’을 뜻하는 것으로, 한문의 ‘속달(速達)’은 음 차에 불과하다고 한다. 조선시대 속달은 남양만에 배를 타고 온 지방민들이 과천을 통해 서울로 올라가던 교통의 요지였다.


동래부원군 종택

속달이 현 행정구역인 군포시에 편입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시기에 걸쳐 광주부 북방면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07년 월경지 정리의 일환으로 안산 군 북방면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군·면 폐합 때 안산군이 폐지되면서 속달이 포함된 북방면은 인근의 월곡면, 성곶면과 함께 수원군 반월면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1949년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 되고 수원군의 나머지 지역이 화성군으로 변경되면서, 이 지역 역시 화성군 반월면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반월면이 폐지되면서 해당 지역은 수원시 권선구와 안산시, 군포시로 각각 나뉘어 편입되었다. 이때 속달리는 둔대리, 대야미리, 도마교리와 함께 군포시에 편입되었으며, 현재 군포시 속달동으로 편제되었다. 속달은 정난종 종택을 중심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5호로 지정된 현재의 종택은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훼손된 것을 비교적 최근에 보수하였다. 안채와 큰사랑채, 작은사랑채, 광채, 마방채가 현존하고 있으며, ‘ㄱ’ 자형의 안채를 사랑채와 광채가 둘러싸고 있는 튼 ‘ㅁ’자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제말기 속달에는 30~40세대 정도가 거주했고, 그중 동래정씨가 15~20호, 그 밖에 김해김씨와 경주김씨가 비슷한 호수로 거주했다. 현재 속달마을 동래정씨는 6가구 정도이다.

경기도기념물 제115호 정난종 묘역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종가에서 우측 건너편을 바라보면 맞은편 산자락에 정난종 등의 선대 묘역과 재실이 보인다. 수리산을 배경으로 조성된 정난종 묘역에는 정난종 부부의 쌍분을 비롯한 다수 의 묘소와 묘비, 신도비(神道碑) 2기, 묘갈(墓碣) 1기를 비롯한 다수의 장명등(長明燈)과 문인석(文人石) 등이 있다. 묘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성달재(省達齋)라는 재실이 있는데, 이는 근래에 건립한 것이다.

정난종 부부의 쌍분은 묘역의 중간 아래편에 자리하며, 봉분 앞에 묘비와 상석 및 석물들이 배치되었고, 왼편 아래쪽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1525년(중종 20)에 조성되었으며, 남곤(南袞, 1471-1527)이 짓고 강징(姜徵, 1466-1536)이 썼다. 정난종 부부의 쌍분 위단에는 장자 정광보 부부의 쌍분이, 다시 그 위단에는 차자 정광필 부부의 쌍분이 차례로 있다. 정광보의 묘갈 과 정광필의 신도비 역시 각 봉분의 왼편 아래쪽에 세워져 있다. 정광보 묘갈의 비문은 이행(李荇, 1478-1534)이 짓고 성세창(成世昌, 1481-1548)이 썼으며, 정광필신도비의 비문은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이 짓고 이황(李滉, 1501-1570)이 썼다.


정난종묘역


정광필 부부의 쌍분 위단에는 정광필의 4자 정복겸(鄭福謙) 부부의 쌍분이 자리하며, 그 옆으로는 정광필의 2자 정위겸(鄭僞謙) 및 손자 정유신(鄭惟愼), 정유청(鄭惟淸) 등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정난종 묘소의 아랫단에는 정난종의 6세봉사손 정진원(鄭震遠, 1578-1675) 부부의 쌍분이 자리한다. 정난종 이외의 묘소에도 묘비와 상석 및 여러 석물들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

1489년(성종 20)에 처음 조성된 이래 현재까지 훌륭히 보존되고 있는 동래정씨 묘역은 조선 초기에서 중기까지의 묘제 양식 연구는 물론 고고미술사나 금석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또 한 정진원을 제외한 묘역의 배치가 선대를 아래에서부터 안장하여 점차 위로 안장해 가는 양식(역장)을 보여주고 있는 점도 독특한 사례로 관심을 끌고 있다. 현재 해당 묘역 전체는 경기도기념물 제 115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정광필묘역

문익공 정광필과 숙정공주

정난종의 아들 가운데 가장 현달하였으며, 사직지신(社稷之臣)으로까지 추앙받는 이가 바로 차자 광필이다. 정광필은 자가 사훈 (士勛), 호가 수천(守天)이며, 후에 문익(文翼)의 시호를 받았다. 정광필은 본인뿐만 아니라 자손에서도 현달한 인물이 지속적으로 배출되었다. 13대손 정범조(鄭範朝, 1837-1897)가 1892년(고종 29) 우의정과 좌의정에 오르기까지 정광필을 포함한 후손 가운데 무려 13명의 상신이 배출되었고, 그 가운데 4명이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익혜공파 가운데 정광필을 파시조로 하는 문익공파(文翼公派)가 있는데, 그 현달함이 이와 같아 익혜공파 전체 문중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동래정씨가 10여대 400여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번영을 누리게 된 이유에 대해, 동래정씨 집안에서는 “우선 문익공을 비롯하여 그의 많은 자손들이 모두 당대에 이름을 떨친 재신들이었음 에도 성품이 온화하고 모가 나지 않았으며 또 큰 실책이나 정적(政敵)이 별로 없었다. 그것이 가문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선조조(宣祖朝) 이후 치열했던 4색당쟁에 동래정씨는 그 중 어느파에도 깊 이 관여하지 않은 것도 하나의 예이다. 뒷날 세도를 잡은 안동김씨 (安東金氏)의 선대외가(先代外家: 임당 정유길의 외손 김상용, 김상헌)로서의 도움도 받았음직하다. 그러나 동래정씨는 조선왕족 이씨와 세도정치의 안동김씨 다음으로 많은 상신(相臣)을 배출 하면서도 외척으로 세력을 얻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라고 한다.


덕고개 당숲

속달동 덕고개의 숙정공주(淑靜公主, 1645-1668) 묘는 동래정 씨 문익공파와 관련이 있고, ‘덕고개 당숲’은 숙정공주 묘가 조성되면서 풍수적으로 만들어진 숲이다.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 1648-1723)은 효종의 부마로 자는 수원(秀遠), 호는 죽헌(竹軒)이며, 생부는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이다. 그는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에게 입양되었고, 1656년에 효종의 다섯째 딸 숙정공주와 혼인하여 동평위가 되었다.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한거 만록(閑居漫錄)』 등의 저서가 있다. 시호는 익효(翼孝)다.

동래정씨 창원공파

정난종의 장자이자 광필의 형인 광보를 파조로 하는 창원공파(昌原公派)의 경우 문익공파만큼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그 자손들이 관직에 진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출사의 방법에 있어서도 과거뿐만 아니라 공신의 후손으로서의 지위를 활용한 훈음(勳蔭)을 십분 활용하였다. 정광보의 차자 사룡이 문과를 통하여 대제학과 공조판서까지 오르고, 손자 순우(純祐 1509-1556) 역시 문과 이후 파주목사까지 역임하는 등 창원공파에서도 초기에는 과거를 통한 출사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출사의 주된 방법은 훈음(勳陰)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공신 당사자에게 봉군(封君)하고, 당사자가 죽은 뒤에는 적장손이 봉군을 승습(承襲)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승습의 기준은 모든 적장손이 아닌, 2품 이상의 관직자에게만 해당되었다. 이때 2품 이상의 관직은 적장손들 당대의 실직뿐만 아니라, 사후 추증된 관직까지 포함하고 있다.

동래부원군 종택

정난종 종가에만 국한했을 때, 고손 상철(象哲:蓬山君)이 훈음을 통하여 출사한 이래, 1861년(철종 12) 13대손 학묵(學黙, 1829-1903)이 이전 해(1860년)의 춘당대추도기(春塘臺秋到記)를 거쳐 문과 전시(殿試)에 합격할 때까지 출사는 훈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특히 정난종의 종손들은 공신의 적장자로서 회맹연(會盟宴)에 참여하고 관직에 나아갔으며 봉군되었다.

속달마을의 풍수적 입지를 보면, 수리산에서부터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이 마을을 겹싸면서 작은 분지지형을 형성하였고, 마을의 주거지는 주산지맥의 서쪽 사면에 입지하였다. 따라서 주택 배치의 풍수적 지세향(地勢向)은 서향(西向)이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듯이, 군포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은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서향으로 말미암아 일조 조건은 불리하지만, 장소 이미지적 측면에서 보자면 전면과 마을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지맥들이 주택지를 에워싸고 있어, 이상적인 풍수 조건이 심리적인 위호감(衛護感)과 안온감(安穩感)을 불러일으킨다.


글 이진복

성균관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중국고대사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졸업 후 성대를 비롯하여 한양대, 카이스트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1996년 열린사회연구소를 창립하여 현재까지 닫힌사회가 아닌 열린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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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학광장 Vol.1 _ 2019 여름창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08.16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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