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이윤화 씨로부터 듣는 화전이야기

경기학광장Vol.1 _ People & life

< 이윤화 씨로부터 듣는 화전이야기 >


- 경기학광장Vol.1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집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최초로 우리가 여기다가 막을 친 거다. 우리가 막을 치고 장사를 할 당시에는 이 동네 이름이 없었다. 우리가 막이라고 이름을 낸 게 아니라 물건을 사가는 사람들이 막에 가야 살 수 있다며 “막에 가서 담배 사와라”, “막에 가서 막걸리 한 되만 사와라”해서 이름이 저절로 막이 되었다. 당시는 막걸리병이 따로 없었다. 정종병에다가 막걸리를 받아서 노끈으로 병 입구를 감고 끈을 손에 감아서 들고 갔다.

화전에서 막을 처음 만들고 장사를 했던 이윤화 씨

이윤화 씨는 1941년,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화전리에서 태어나 부모님과 동생, 누님과 함께 살았다. 현재 덕양중학교가 있는 곳에 일본인들이 만든 관사가 있었고, 그는 그곳에서 살았다. 덕양중학교 자리의 옛날 일본사람들 관사는 해방되면서 주민들이 헐어서 목재를 팔기도 했다. 현재, 학교 앞에 관사가 두 줄로 있었는데 한 줄에 4세대가 있었다. 그의 집은 두 번째 줄에 있었고, 이 관사 건너편 집에 치안대 사무실이 있었다. 피난 간 집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윤화 씨의 어머님은 해방되고 이듬해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1950년, 6.25사변이 난 후 16일 만에 돌아가셨다. 그의 나이 10살 되던 해다.

덕양중학교 정문 앞에 이윤화 씨가 살던 관사. 왜정관사라고 했고, 이 관사가 있어서 대흥관사라는 지명이 유래됐다.

“우리 아버지가 나하고 동생하고 누님 셋을 두고 산에 숨어계셨는데, 십 몇 일을 산에서 숨어계시다가 우리가 밥이나 잘 먹는지 궁금하셔서 내려오셨어. 어둑어둑할 때 내려왔는데 그걸 친구가 빨갱인데 봤다. 나이 어린 우리 셋이 멍석을 깔아놓고 밥을 먹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오셨어“. 아버지 진지잡수 세요.”그랬더니“ 먹었다.” 그러면서 방에 들어가서 책을 읽으셨다.
아버지 이름이 승만, 위 형이 도만, 젤 큰 형이 천만이다. 아버지 친구가 와서 ‘승만이 나오라’ 고 하 니까 아버지가 그 친구랑 같이 치안대 사무실로 가셨다. 치안대는 피난 간 가정집 빈집을 사무실로 썼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경로당 같기도 하고 말 방이었다.

치안대 사무실이 있었던 곳

친구 따라서 치안대 가신지 10분이나 됐을까, 그 때‘ 탕, 탕’하고 총소리가 두 번이 나는 거야. 그러 고는 박이선이라는 양반이 승만이 죽었다면서 막 뛰어갔는데, 우리 아버지는 벌써 돌아가셨어.
대한청년단 일을 보셨던 아버지는 공산당들의 목표물이 되셨고, 그래서 60사단 인근에 있던 절터 에 숨어계셨다. 아버지는 이윤화 씨와 동생과 누님 이렇게 셋을 두고 산에 숨어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있었지만 자녀들 걱정이 많았다. 결국 맏아들의 생일날 저녁에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왔다가 변을 당하셨던 것이다.
전쟁이 극심했고, 비행기 공습이 잦았기 때문에 다음날 밤에 들것으로 해서 공동묘지에 묻어드렸 다. 그때부터 어린 이윤화 씨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그는 고양군에서 고생한 걸로 치면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라고 말한다. 다행히 큰아버님이 그 옆에 사셨다. 이윤화 씨와 동생들은 큰집에 얹혀살았다. 그는 어렸지만 지게를 지고 낫과 갈퀴로 나무를 해다 떼는 등 고생이 말도 못했다.

화전과 6.25 전쟁

6.25당시 중공군들이 화전 옆 마을인 매화정 마을에 많았는데 거기서 넘어오면 여기서 그쪽을 향 해 포를 쏘았다. 항공대 자리에서 많은 중공군들이 죽었다.
6.25때 철로로 기차가 넘어오면 비행기에서 포를 쏴서 기차에 불이 붙었고 불덩어리 기차가 창릉천 적개다리 넘어가면서 자빠지기도 했다.
비행기끼리 공중전을 하다가 한강에 떨어지기도 했다. 공중전하면 재미있다. 다섯발에 한 발이 맞는 데 그게 빠르게 나오니까 불이 막 나오는 것처럼 보 였다.
기차 차고지에는 기차 망가진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선로반들이 타고 다니는 게 있는데,
젓는 게 없이 부서진 게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망가진 기차 더미에서 이걸 찾아서 저 위에까지 끌고 올라가서 타고 내려왔다. 젓는 게 없어서 멈출 수도 없었던 거였다. 다니던 기차가 없었으니 다행이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지만 놀거리가 없었던 아이들에게는 무척 재미있었다.

항공대 앞 막거리 이야기

항공대학교 정문이 있었던 곳. 건널목을 지나 항공대학교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고, 정문 앞에 학교를 상징하는 송골매 탑이 있었다. 지금은 정문이 지하보도로 바뀌었다. 지하보도 왼쪽에 차량까지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현재는 그 도로 위로 포장되었다. 이 곳이 처음 막을 치고 장사를 했던 곳이고, 막거리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곳이다.

1950년대 후반, 30사단(필승신병교육대, 제 30기계화보병사단) 앞에 있는 벌말이라고 부르는 마을에는 집이 몇 채 있었을 뿐이었고, 30사단 부근부터 현재 화전동 행정복지센터가 있는 화랑로 길가에는 집이 하나도 없었다.
화랑로 165번길 양 옆으로 생겨난 마을이 벌말이다. 1957년, 일제 강점기 군수물품을 보관하는 창고였던 곳에 30사단이 들어왔다. 지금처럼 전투사단이 아니고 예비사단이 들어와서 제대한 군인들이 한 달씩 들어와서 훈련받고 나갔다.
예비사단 되고나서부터 30사단 앞부터 항공대 앞 막거리까지 술집이 생겼다가 예비사단이 전투사단이 되고나니 술집이 없어졌다. 당시, 부사관으로 제대한 사람들이 전부 술집을 차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군인들이 돈을 모았다가 이 동네 땅 사서 술집을 차렸던 것이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벌말은 고양군에서 돈이 가장 많이 도는 곳이었다.

1950년대, 화전에는 서울역에서 출발하여 만주와 신의주로 들어가는 철로길이 여러 갈래 있었다. 이 철로길은 일제강점기 때 군인 수송과 군수물품 운반에 이용되었다. 현재 30사단 자리에 군수창고가 있었고, 그 곳까지 철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해방되자 인근 각지의 주민들이 몰려가서 군수창고에 쌓였던 군수물품들을 모두 가져갔다. 쌀, 잡곡, 옷감 등을 비롯한 각종 군수물품을 모두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가져갔다.
하지만 겁이 많았던 주민들은 절대 그 근처에도 가면 안 된다고 자녀들을 타이르며 단속하기도 했다. 뒤늦게 그곳에 도착했던 어떤 주민이 텅빈 창고 한 곳에 던져져있는 쌀 알갱이만 한 돌이 가득 든 것밖에 없자 할 수 없이 그것을 지고 왔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라이터돌이었고, 그는 큰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경인선 철로 변정목을 걸어 다니며 장사를 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쌀을 구하기 위해 옷감을 비롯한 온갖 생활용품을 들고 능곡, 일산 등으로 왔던 것이다. 생활용품을 팔아 쌀을 구해갖고 서울 가서 팔거나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다. 누구나 다 걸어다녀야 했고, 통금이 있었기에 어디에선가 하루 유숙을 해야 했다. 그곳이 바로 옛 항공대학교 정문자리였던‘ 막’이었고, 이 때부터‘ 막’,‘ 막거리' 등의 지명이 붙게 되었다.
이윤화 씨와 큰어머님과 큰아버님은 철로변인 이 곳에서 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다. 큰 어머님은 밥장사를 했고, 이윤화 씨는 박격포 상자 위에 담배, 연필 등을 갖다 놓고 팔았다.
도로로는 사람이 많이 안다녔다. 기찻길로 많이 다녔다. 마차도 푹푹 빠지는 물구덩이 길이었기 때문이다. 기찻길로 왜 많이 다녔냐면 능곡, 일산, 강매, 도내동 등에 사는 사람들이 뭘 사려면 아현동까지 가야했다. 그 당시에는 신촌에도 뭐가 없었다. 집도 없었고, 아현동이나 가야했다. 거기서 물건을 사서 걸어왔다.

서울사람들도 이리로 많이 내려왔다. 걸어서 능곡, 일산 가서 팔았다. 성냥 같은 거 시골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을 메고 가서 팔았다. 용산, 종로, 서대문 이런데서 돈 만들려고 비단, 옷, 안경 등 팔 것들을 지고 나와서 금촌, 일산 등으로 가서 팔았다. 이 동네는 농촌이라 곡식은 있으니까 그것들을 팔아서 쌀 콩 잡곡 고추 등을 사갔다.
그래서 철길로 사람들이 많이 다녔고, 우리도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다. 우리 큰어머니가 막에서 밥을 해서 팔았어. 그 사람들이 아현동에서 짐을 지고 와서 팔고 올라갈 때 배가 고프니까 사먹었다.
나는 박격포 상자를 이렇게 놓고 장사를 했다. 도내리, 매화정, 용두리 등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데서는 살 곳이 없으니까 이리로 와서 샀다. 좌판을 놓고 학생들 왔다갔다 할 때 연필도 팔고 했던 자리다. 철로길을 넘어 다녔다. 철로길에 돌을 놓아서 털렁거리지 못하도록 했고 후에는 건널목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