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윤화 씨로부터 듣는 화전이야기 >
- 경기학광장Vol.1 _ People & lif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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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최초로 우리가 여기다가 막을
친 거다. 우리가 막을 치고 장사를 할 당시에는 이 동네 이름이 없었다. 우리가 막이라고 이름을 낸 게 아니라 물건을 사가는 사람들이 막에 가야 살 수 있다며 “막에 가서 담배 사와라”,
“막에 가서 막걸리 한 되만 사와라”해서 이름이 저절로 막이 되었다. 당시는 막걸리병이 따로
없었다. 정종병에다가 막걸리를
받아서 노끈으로 병 입구를 감고 끈을 손에 감아서 들고 갔다.
▲ 화전에서 막을 처음 만들고 장사를 했던 이윤화 씨
이윤화 씨는 1941년,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화전리에서 태어나 부모님과 동생, 누님과 함께 살았다.
현재 덕양중학교가 있는 곳에 일본인들이 만든 관사가 있었고, 그는 그곳에서 살았다. 덕양중학교 자리의 옛날 일본사람들 관사는 해방되면서 주민들이
헐어서 목재를 팔기도 했다.
현재, 학교 앞에 관사가 두 줄로 있었는데 한 줄에 4세대가 있었다. 그의 집은 두 번째 줄에 있었고,
이 관사 건너편 집에 치안대 사무실이 있었다. 피난
간 집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윤화 씨의 어머님은 해방되고 이듬해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1950년, 6.25사변이 난 후 16일 만에 돌아가셨다. 그의 나이 10살 되던 해다.
▲ 덕양중학교 정문 앞에 이윤화 씨가 살던 관사.
왜정관사라고 했고, 이 관사가 있어서 대흥관사라는 지명이 유래됐다.
“우리 아버지가 나하고 동생하고 누님 셋을 두고
산에 숨어계셨는데, 십 몇 일을 산에서 숨어계시다가 우리가 밥이나 잘 먹는지 궁금하셔서 내려오셨어. 어둑어둑할 때 내려왔는데 그걸 친구가 빨갱인데 봤다. 나이 어린 우리 셋이 멍석을 깔아놓고 밥을
먹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오셨어“. 아버지 진지잡수
세요.”그랬더니“ 먹었다.” 그러면서 방에 들어가서
책을 읽으셨다.
아버지 이름이 승만, 위 형이 도만, 젤 큰 형이 천만이다. 아버지 친구가 와서 ‘승만이 나오라’ 고 하
니까 아버지가 그 친구랑 같이 치안대 사무실로 가셨다. 치안대는 피난 간 가정집 빈집을 사무실로 썼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경로당 같기도 하고 말 방이었다.
▲ 치안대 사무실이 있었던 곳
친구 따라서 치안대 가신지 10분이나 됐을까, 그
때‘ 탕, 탕’하고 총소리가 두 번이 나는 거야. 그러
고는 박이선이라는 양반이 승만이 죽었다면서 막
뛰어갔는데, 우리 아버지는 벌써 돌아가셨어.
대한청년단 일을 보셨던 아버지는 공산당들의
목표물이 되셨고, 그래서 60사단 인근에 있던 절터
에 숨어계셨다. 아버지는 이윤화 씨와 동생과 누님
이렇게 셋을 두고 산에 숨어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있었지만 자녀들 걱정이 많았다. 결국 맏아들의 생일날 저녁에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왔다가
변을 당하셨던 것이다.
전쟁이 극심했고, 비행기 공습이 잦았기 때문에
다음날 밤에 들것으로 해서 공동묘지에 묻어드렸
다. 그때부터 어린 이윤화 씨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그는 고양군에서 고생한 걸로 치면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라고 말한다. 다행히 큰아버님이 그
옆에 사셨다. 이윤화 씨와 동생들은 큰집에 얹혀살았다. 그는 어렸지만 지게를 지고 낫과 갈퀴로 나무를 해다 떼는 등 고생이 말도 못했다.
화전과 6.25 전쟁
6.25당시 중공군들이 화전 옆 마을인 매화정 마을에 많았는데 거기서 넘어오면 여기서 그쪽을 향
해 포를 쏘았다. 항공대 자리에서 많은 중공군들이
죽었다.
6.25때 철로로 기차가 넘어오면 비행기에서 포를
쏴서 기차에 불이 붙었고 불덩어리 기차가 창릉천
적개다리 넘어가면서 자빠지기도 했다.
비행기끼리 공중전을 하다가 한강에 떨어지기도
했다. 공중전하면 재미있다. 다섯발에 한 발이 맞는
데 그게 빠르게 나오니까 불이 막 나오는 것처럼 보
였다.
기차 차고지에는 기차 망가진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선로반들이 타고 다니는 게 있는데,
젓는 게 없이 부서진 게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망가진 기차 더미에서 이걸 찾아서 저 위에까지
끌고 올라가서 타고 내려왔다. 젓는 게 없어서
멈출 수도 없었던 거였다. 다니던 기차가 없었으니 다행이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지만 놀거리가 없었던 아이들에게는 무척 재미있었다.
항공대 앞 막거리 이야기
▲ 항공대학교 정문이 있었던 곳. 건널목을 지나 항공대학교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고, 정문 앞에 학교를 상징하는 송골매 탑이
있었다. 지금은 정문이 지하보도로 바뀌었다. 지하보도 왼쪽에 차량까지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현재는 그 도로 위로
포장되었다. 이 곳이 처음 막을 치고 장사를 했던 곳이고, 막거리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곳이다.
1950년대 후반, 30사단(필승신병교육대, 제
30기계화보병사단) 앞에 있는 벌말이라고 부르는 마을에는 집이 몇 채 있었을 뿐이었고, 30사단 부근부터 현재 화전동 행정복지센터가 있는
화랑로 길가에는 집이 하나도 없었다.
화랑로 165번길 양 옆으로 생겨난 마을이 벌말이다. 1957년, 일제 강점기 군수물품을 보관하는 창고였던 곳에 30사단이 들어왔다. 지금처럼 전투사단이 아니고 예비사단이 들어와서
제대한 군인들이 한 달씩 들어와서 훈련받고
나갔다.
예비사단 되고나서부터 30사단 앞부터 항공대 앞 막거리까지 술집이 생겼다가 예비사단이
전투사단이 되고나니 술집이 없어졌다. 당시, 부사관으로 제대한 사람들이 전부 술집을 차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군인들이 돈을 모았다가 이 동네 땅 사서 술집을 차렸던 것이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벌말은 고양군에서 돈이 가장 많이 도는 곳이었다.
1950년대, 화전에는 서울역에서 출발하여 만주와 신의주로 들어가는 철로길이 여러 갈래 있었다. 이 철로길은 일제강점기 때 군인 수송과
군수물품 운반에 이용되었다. 현재 30사단 자리에 군수창고가 있었고, 그 곳까지 철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해방되자 인근 각지의 주민들이 몰려가서 군수창고에 쌓였던 군수물품들을
모두 가져갔다. 쌀, 잡곡, 옷감 등을 비롯한 각종 군수물품을 모두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가져갔다.
하지만 겁이 많았던 주민들은 절대 그 근처에도 가면 안 된다고 자녀들을 타이르며 단속하기도 했다. 뒤늦게 그곳에 도착했던 어떤 주민이 텅빈 창고 한 곳에 던져져있는 쌀 알갱이만
한 돌이 가득 든 것밖에 없자 할 수 없이 그것을
지고 왔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라이터돌이었고,
그는 큰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경인선 철로 변정목을 걸어
다니며 장사를 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쌀을 구하기 위해 옷감을 비롯한 온갖 생활용품을
들고 능곡, 일산 등으로 왔던 것이다. 생활용품을 팔아 쌀을 구해갖고 서울 가서 팔거나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다. 누구나 다 걸어다녀야 했고, 통금이 있었기에 어디에선가 하루 유숙을
해야 했다. 그곳이 바로 옛 항공대학교 정문자리였던‘ 막’이었고, 이 때부터‘ 막’,‘ 막거리' 등의 지명이 붙게 되었다.
이윤화 씨와 큰어머님과 큰아버님은 철로변인 이 곳에서 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다. 큰
어머님은 밥장사를 했고, 이윤화 씨는 박격포
상자 위에 담배, 연필 등을 갖다 놓고 팔았다.
도로로는 사람이 많이 안다녔다. 기찻길로 많이 다녔다. 마차도 푹푹 빠지는 물구덩이 길이었기 때문이다. 기찻길로 왜 많이 다녔냐면 능곡, 일산, 강매, 도내동 등에 사는 사람들이 뭘 사려면 아현동까지 가야했다. 그 당시에는 신촌에도 뭐가 없었다. 집도 없었고, 아현동이나 가야했다. 거기서 물건을 사서 걸어왔다.
서울사람들도 이리로 많이 내려왔다. 걸어서
능곡, 일산 가서 팔았다. 성냥 같은 거 시골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을 메고 가서 팔았다. 용산, 종로,
서대문 이런데서 돈 만들려고 비단, 옷, 안경 등
팔 것들을 지고 나와서 금촌, 일산 등으로 가서
팔았다. 이 동네는 농촌이라 곡식은 있으니까
그것들을 팔아서 쌀 콩 잡곡 고추 등을 사갔다.
그래서 철길로 사람들이 많이 다녔고, 우리도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다. 우리 큰어머니가 막에서 밥을 해서 팔았어. 그 사람들이
아현동에서 짐을 지고 와서 팔고 올라갈 때 배가 고프니까 사먹었다.
나는 박격포 상자를 이렇게 놓고 장사를 했다. 도내리, 매화정, 용두리 등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데서는 살 곳이 없으니까 이리로 와서 샀다. 좌판을 놓고 학생들 왔다갔다 할 때 연필도 팔고 했던 자리다. 철로길을 넘어 다녔다. 철로길에 돌을 놓아서 털렁거리지 못하도록 했고 후에는 건널목을 만들었다.
▲ 1980년대 막거리 모습 ▲ 2019년 막거리 모습
집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최초로 우리가 여기다가 막을 친거다. 우리가 막을 치고 장사를
할 당시에는 이 동네 이름이 없었다. 우리가 막이라고 이름을 낸 게 아니라 물건을 사가는 사
람들이 막에 가야 살 수 있다며“ 막에 가서 담배
사와라”“, 막에 가서 막걸리 한 되만 사와라” 해서 이름이 저절로 막이 되었다. 당시는 막걸리
병이 따로 없었다. 정종병에다가 막걸리를 받아서 노끈으로 병 입구를 감고 끈을 손에 감아서
들고 갔다.
옛날에는 9시면 통행금지라서 다닐 수가 없었다. 갈 데가 없으니까 이불보로 포장을 치고
그 안에서 그냥 잠을 잤다. 숙박비는 안받았다.
밥만 사먹었다. 그런데 유숙계를 써야했다. 집이
어딘지, 어디 가서 뭘 팔고, 몇 시에 가는지 등
하루 일과가 나와야 된다. 그게 유숙계다. 당시
우리 큰아버지가 유숙계를 적었다. 공부를 하셨던 분이어서 저녁이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유숙계를 썼다. 당시 덕은동에 지서가 있어서 그 다음 날 조사를 와서 자고 간걸 파악을 했다.
군부대와 주민들의 삶
30사단 사격장이 생기면서 옛날 안동네 사람들은 농사짓던 땅을 사격장으로 다 뺏겼다. 왜정 때, 보급창고 만들면서 망월산 밑으로 강제
이주되면서 철도국 땅에 농사짓고 살았었는데
사격장이 생기면서 그마저도 못하게 된 것이다.
사격장이 생기면서 농토를 빼앗겼던 화전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섰다. 사격장 탄피를 주으러 다닌 것이다. 화전에는 활주로가 있어서 미군들이 기동훈련을 자주 나왔다. 주로 미7사단,
미2사단 등에서 왔고, 오면 1~2주일 훈련을 했다.
이윤화 씨에게는 미군들에 관한 기억도 많다.
해방 후 어르신들이 밭을 일궈 먹었다. 국가
땅이니까. 해방 후에 여기에 신진자동차학원이
들어오기로 했었다. 그런데 어르신들이 밭을 못
일궈 먹을까봐 데모를 했다. 그러더니 군인들이
들어왔다. 불법으로 계속 농사를 지으니까 군인들 동원해서 옥수수, 수수, 보리를 다 빼버렸다. 사단장이 오니까 아버님 또래들이 옥수수대를 던지며 데모를 했다. 그래서 검찰청에 다 끌려가기도 했다. 늑대를 내쫓고 호랑이 불러들인
것이다. 30사단이 들어온 이래 몇 십년째 그린
벨트로 꽁꽁 묶였다.
보리가 시퍼랬고 보름만 있으면 먹을 거였는
데 불도저로 다 밀었다. 그때 난리가 났었다. 아마도 1960~1961년도에 있었던 일로 기억된다.
그렇게 밀고 사격장을 지었다. 시퍼런 보리밭을
다 밀어 버렸다. 강제로 밀면 끝나는 거였다. 지금 같으면 보상이라도 해달라고 할 건데, 그 때는 군인들이 막고 밀어버렸다.
어른 아이 할 것없이 누구라도 사격장에서 탄피 줍는 일을 했다. 탄피의 구리와 납을 따로 구분하고, 납은 녹여서 팔았다. 마을 사람들은 당시의 자신들을 ‘사격장의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현재 양지마을 군인아파트 자리가 500야드
사격장 자리였다. 사격 훈련이 끝나면 호미를
들고 가서 총알을 파냈다. 납 캐러 다니고 탄피 주우러 다녔다. 총알을 양재기에 넣고 연탄불에
녹이면 납이 나왔다. 그걸 팔았다. 바위에 맞은
총알은 찌그러지고, 흙으로 들어간 총알은 손톱
두 마디 정도 크기였다. 납이 제일 많이 나오는
건 권총이다. 탄피는 따로 팔고, 총알은 불에 녹여 납을 팔았다. 납이 녹는 온도와 그릇이 녹는
온도가 달랐다. 각 가정에서 양재기를 많이 사용했을 때 납땜질하러 다니는 할아버지들이 있었다. 물통도 납으로 떼고, 빵꾸난 거는 납 떼는
분들이 다 떼서 썼다.
▲ 사격장이 있었던 곳(현 군인 관사인 양지마을)
그 후 예비군들이 들어와서 사격훈련하면 우리들은 탄피 주우러 다니고, 납을 캐러 다녔다.
총알이 나가서 떨어지는 데에 가서 납과 총알
탄피 쪼개진 거 철, 구리 등을 주웠다. 지남철을
대보아서 안 붙으면 구리니까 구리로 팔고, 붙
는 거는 철로 팔았다.
사격이 끝나면 군인들이 탄피도 죄다 회수해
갔는데 그 나머지를 줍는 것이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돈이 되니까 어른 애 할 것 없이 훈련 끝나면 사격장에 들어가서 구석구석에 있는 거 주웠다. 집에서 납은 녹여서 납 대로 팔고, 총알 껍데기는 껍데기 대로 팔았다. 총알이 떨어진 데를 파면 흙속에서 나오기도 했다.
이 동네 사는 친구 하나는 갈퀴로 나뭇잎 긁어다 불을 떼다가 나뭇잎 밑에 떨어져 있던 실탄까지 긁어가서 불을 뗀 것인데, 안 터진 뇌관이
있었는데 그게 터져서 눈에 맞아 실명한 것이다. 이런 사고가 많았다.
매봉재 넘어 가면 장난이 심한 아이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얘가 산에서 방망이탄을 주웠다.
우리들이 던지지 말라고 하는데도 그 방망이탄을 바위에 던졌다. 그런데 우리 쪽에서는 안보였지만 바위 옆에 어린 애가 하나 있었고, 방망이탄이 터지면서 그 애 옆구리가 터지고 난리가
났었다. 죽지는 않았는데, 나무하던 노인네가 보고 불러다 놓고 야단을 쳤다. 애 죽여 놓고 도망가냐고 혼났다.
안동네 앞에 군인들과 양공주들에게 방을 세
주는 사람이 있었다. 옛날에는 궤짝만 겨우 들어가면 될 정도로 방이 작았다. 방 하나 부엌 하나 있는 집이었고, 당시 1960~70년대 월세가 보증금 5만원에 1달에 만원 정도였다. 중사, 상사
등은 월세를 살았다.
해방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미군들이 활주로에 임시주둔 했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신발주머니 갖고 활주로에 돌맹이 주으러 다녔다.
그러면 미군들이 야전식량 씨레이션을 주고 그랬다. 미군들이 돌맹이 좀 주워달라고 선생들한테 얘기하면 선생님 인솔하에 돌맹이 줍고 그랬다.
미군들과 케이씨들이 오면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었다. 여기는 당시 식당이 없었다. 미군들은 오래 있지 않았고 1~2주일 있다가 갔다. 내가
돼지를 길렀기 때문에 미군들이 먹고 남은 짬밥을 내가 갖고 왔다.
미군들이 짬밥에 안 딴 깡통 몇 개를 넣으면
내가 그걸 팔아다주고 그랬다. 돼지주려고 짬밥
가지고 오면 우리 친구들이 저녁에 왔다. 내가
짬밥 중에서 먹을 만한 게 있으면 뒀다가 친구들 오면 고춧가루 좀 넣고 모닥불에 끓였다. 둘러 앉아 먹으면 아주 그냥 꿀맛이었다. 피자 먹는 것보다 더 좋았다.
전쟁 때 군인들이 이리뛰고 저리뛰고 배고파
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큰어머니가 이거저거
해서 밥을 주면 먹고 그랬다. 이 세상에서 제일
그리운 거는 밥이다. 최고로 맛있는 음식은 뭐냐면 이 깡통을 들고 여기 가서 밥좀 달라고 하면 김치를 주고, 저기 가서 밥 좀 달라고 하면 김치 있으니까 된장을 주고 또 다른데 가서 달라고 하면 밥을 주고, 국도 받고 그런다. 거지는 혼자 먹는 경우가 없다. 이렇게 얻어 모은 것들에
물을 붓거나 받은 국이 있으면 모닥불을 피워서
끓인다. 이것만큼 맛있는 음식은 없다.
화전에는 덕은초등학교가 있다. 1936년도에
덕은리에 만들어졌던 덕은초등학교는 6.25 이전에 화전리로 이전했다. 화전리 덕은초등학교
자리에는 방호굴이 있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닭을 키웠고 학생들은 닭에게 모이를 주기 위해
개구리 등을 잡아오기도 했고, 인근 항공대학교
활주로에 돌을 주으러 다니기도 했다.
덕은초등학교는 덕은리에 있다가 이쪽으로
온 것이다. 운동장에 창고가 하나 있었다. 처음에는 칸막이도 없이 1학년 2학년 따로따로 앉아서 공부했다. 마루짝이 나무였는데 나무가
뜯어지고 빠지고 그런데가 있어서 그리로 책
가방 들고 빠져나가 도망다니고 그랬다. 그 때
친구놈이 닭장에 들어가서 계란을 한 주머니씩
훔쳐갖고 오면 현무라고 가게 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건빵하고 바꿔서 적개다리에 가서 먹고
그랬다. 배고플 때니까 계란 먹을 줄 모르고 건빵하고 바꿔먹었다. 때로 호주머니에서 계란이
깨져서 옷이 엉망진창이 되기도 했다.
학교에서 닭을 길러서 우리들은 개구리 잡으러 다녔다. 초등학교에서 닭을 길렀기 때문에
깡통 들고 적개다리로 개구리 잡으러 다녔다.
닭을 100여 마리 정도 길렀던 거 같다. 그래서
학생들이 학교에서 기르는 닭들에게 개구리 잡아다 먹이고 풀 뜯어다 먹이고 그랬다. 근데 그
닭, 계란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잔디씨 훑어 오는 숙제가 있었다. 더운 여름에 잔디씨 훑어다 학교에다 내면 조금 갖고 왔다고 때리기도 했다. 방학 때 되면 닭들 준다고
아카시아 잎 뜯어 말려서 학교에 냈다.
학교 갔다 오면 부모들이 아이들한테 통을 하나씩 지어주고 능곡에 있는 양조장으로 보냈다.
양조장 감독자가 이 동네 사람 매부뻘 되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술을 덜 짠 술지게미를
그 통에 담아줬다. 아이들이 그걸 지고 적개다리를 건너 집으로 오다가 호밀밭에 가서 밀대를
잘라서 빨대를 만들어 술통에 넣고 쪽쪽 빨아먹었다.
빨대를 꽂아 막걸리를 먹은 아이들이 비틀거리고 집에 오면 통에는 막걸리 국물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거에 사카린을 넣고 끓여서 어른도 한 그릇 애들도 한 그릇씩 나눠먹었다. 먹을
것도 없던 시절, 아이들이 달달하니까 그걸 퍼
먹고 취해서 어린애들이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공주사범 졸업하고 와도 스무살밖에 안되니
학생들하고는 두 세 살 밖에 차이가 안 났다. 나이차이가 안 나니 선생들이 매로 다스렸다. ‘초등학교 때도 이렇게 맞는데 중학교 가면 더 맞을 거 아니냐고 중학교 안 간다’ 고 그랬던 친구가 엄청 많다. 나중에 그 선생 때문에 중학교 못
갔다고 원망을 많이 했다.
하여간 초등학교 다닐 때 매 엄청 맞았다. 선생하고 2~3살 차이밖에 안 났으니 매로 다스려야 말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졸업식이 끝나면 여선생이고 남선생이고 죄 도망갔다. 때렸으니까 맞을까봐 도망간 것이다. 지금처럼 영악하지는 않았어도 순박하고 그랬는데 맞은 게 억울해서 그랬던 것 같다.
기관고에서 석탄 줍고, 훔치고, 팔고
▲ 서울역에서 신의주로 달렸던 기차가 통과했던 굴.
화전 옆 덕은동 쪽에 기관고가 있었다. 열차에 석탄을 보충하는 곳이다. 이 기관고 역시 화전마을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기억의 장소다.
기관고라고 있었다. 열차에 석탄을 보충하는
곳이다. 어른이나 애나 밤중에 기차 부서진 것
쌓아놓은 곳에 숨었다가 석탄을 훔치러 갔다.
포대기에 철사를 둥그렇게 껴서 삼태기 모양으로
만들어서 석탄더미에 대고 막 쓸어 담았다. 안동네 사람들 거반 석탄을 팔아서 먹고 살았다.
기관사, 석탄 퍼서 넣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이 밥을 먹으러 가거나 자리를 비킬 때가 있는데 그 때 석탄을 훔치는 거였다. 그때 도망가다가 기차에서 뛰어내렸는데 척추에 금이 갔다.
당시에는 병원이 없어서 안갔다.
훔친 석탄을 팔러가는데 순사가 그냥 놔두질
않았다. 당시 덕은리와 수색에 검문소가 있었다.
하루에 버스 1, 2번밖에 안다녔는데, 덕은리에
가면 검문하고 수색에 가면 또 검문했다. 순사들한테 돈 안주면 석탄 뺐기고 내려야 했다. 그래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돈 모아서 순사한테 주고 그랬다. 석탄 장사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그만 푸대에 석탄을 갖고 설렁탕집에
가져가면 설렁탕도 한 그릇 주고 석탄도 샀다.
여기서 석탄, 곡스(코크스 cokes)를 갖고 영천에
가서 장사했다. 나중에 구공탄 구멍 9개짜리가
나왔다.
▲ 일제 강점기 기차를 수리하고 석탄을 샇아 두었던 기관고가 있던 자리
구술을 정리하면서 어르신께서 해주셨던 말씀을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살려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대로 정리했다. 손을 대는
것보다는 어르신이 해주신 말을 그대로 만나는
것이 더 생생하게 과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국전쟁과 이후의 삶을 겪었던 어르신들의
옛 기억을 소환하는 일은 쉬운 듯하면서도 쉽지
않았다. 특정한 기억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고,
구술을 하실 때도 기억나시는 대로 이야기 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르신의 이야기에는
전쟁 후의 피폐한 삶에 대한 절절한 묘사가 있었다.
그러한 내용들은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는 큰 감동과 전쟁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뜻깊었다.
글 이옥석 상명여자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서강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고양신문 기자와 고양시향토 문화보존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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