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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고을이 폐지되는 사건

경기학광장Vol.1 _ Information & news

< 조선시대 고을이 폐지되는 사건 >


- 경기학광장Vol.1 _ Information & 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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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고을이 폐지되거나 고을의 격이 강등되는 경우가 있었다. 고을에 거주하는 사람이 역모(逆謀)에 연루되었거나, 강상죄(綱常罪)를 저질렀거나, 극적(劇賊)에 가담했을 때가 그런 경우이다. 강상죄는 삼강오륜의 윤리를 범한 죄이고, 극적은 다수의 도적들이 집단적으로 출몰하여 약탈행위를 일삼던 무리를 말한다. 폐지된 고을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나면 대개 복구되었지만 그간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장릉 정자각 (출처, 문화재청)

조선시대 한 고을에서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발생하면 사건 당사자는 사형에 처하고, 처자식은 노비로 삼으며, 가산(家産)을 몰수하는 것은 물론 살던 집을 헐어 연못으로 만들었다. 인조 때에는 역모에 연루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의금부에서 “근래 역변이 자주 일어나 경외에 못을 판 것이 너무 많아서 보기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전부터 역적들의 가옥을 공신들에게 사급해 온 법규가 있으니 대신들과 의논하여 조치하소서.”라고 아뢰었을 정도이다.

그런데 역모 사건이 발생하면 당사자만 처벌받는 것이 아니었다. 해당 고을의 수령은 파직되고, 읍호를 강등시켜 토지와 백성을 다른 읍에 분속시키거나 고을을 폐지하여 다른 읍에 예속시키기도 한다. 수령과 고을에도 일종의 연대책임을 물린 것이다. 이때 폐지된 고을은 전체가 이웃 고을에 예속되기도 하고, 반으로 나뉘어 두 고을에 예속되기도 하였다.
이는 역모뿐만이 아니라 강상죄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이러한 조치를 두려워한 나머지 해당 고을에 관련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수령이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은폐하려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1625년(인조 3)에 어머니를 시해한 죄인 애남으로 인해 마전군을 현으로 강등시켰는데, 당시 마전군수이던 양귀생은 읍호가 강등될까 덮어두고 시일을 끌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고을을 폐지하는 목적은 나라를 어지럽힌 역적을 엄하게 징계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도록 하자는 의도였지만, 때로는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억울하게 역모의 누명을 쓰고 폐지된 경우도 있었고, 역모와 강상 외에도 조정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아 폐지된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경기도의 경우, 역모나 강상죄로 인해 고을이 강등되거나 폐지된 사례가 얼마나 있었을까?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광주, 부평(부천), 용인, 양지, 죽산(안성), 남양(화성), 안산, 인천, 가 평, 마전(연천), 양근, 진위(평택), 교동, 삭녕(연천과 철원) 등 대부분의 고을들이 한번 이상 강등되거나 폐지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에게 미움을 받아 고을이 폐지되었다

부평부는 1505년(연산 11)에 폐지되었다가 그 다음해인 1506년 (중종 1) 복구되었다. 부평이 연산군 때의 환관(내시) 김순손(金舜孫)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김순손은 일찍이 연산군이 술에 취하 여 선왕의 후궁을 간음하려 하자 이를 간언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았다. 연산군은 김순손의 머리를 베어 창덕궁 단봉문 밖에 두고 환관들에게 돌려보게 하였다. 환관들이 바른 말을 못하도록 교훈으로 삼았던 것이다. 부평은 1698년(숙종 24)에도 현으로 강등되었 는데, 최필성(崔弼成), 안사현(安士賢) 등이 인조의 생부인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인 장릉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부평부는 이미 1438년(세종 20)에도 현으로 강등된 적이 있었다. 세종이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여러 번 조관(朝官)을 보내 찾아보았으나 아전과 백성들이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번거롭고 소요스러운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숨기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성근의 묘역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에는 “1505년(연산군 11) 광주(廣州) 사람으로 난언(亂言)을 한 자가 있어 주(州)를 혁파하였다가 1506년(중종 원년)에 복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광주처럼 큰 고을이 행정구역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물론 다음 해에 바로 복구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폐지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누가 난언을 했는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연산군일기> 를 보면 그 당사자가 정성근(鄭誠謹)임을 알 수 있다. <연산군일기> 에 기록된 정성근의 죄명은 승하하신 선왕의 삼년상을 지낸 죄였다. 연산군은 이 사건에 대해 “신하로서 평소 은총을 받았으니 그 누구인들 망극한 심정이 없겠느냐? 그러나 기한이 있는 것이다. 직위가 높은 재상도 기한을 어길 수 없는데, 하물며 정성근 같은 미소한 관원이 감히 삼년상을 행한단 말인가?”라고 분개하였고, 이를 난신(亂臣)에 비유하였다. 정성근은 이 사건으로 군기시 앞에서 참수를 당한 후 3일 동안 효수(梟首)되는 처벌을 받았다. <연산군일기> 에는 정성근이 잡혀가면서 광주의 천현(穿峴)을 지나자 슬프게 곡을 했다고 기록하였다. 의금부 도사 신함(申涵)이 왜 곡을 하느냐고 묻자, 정성근은 “부모의 묘가 근처에 있는데 수갑이 채워져 말에서 내려 절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곡한다.”고 하였다. 근처 서부면에 그의 아버지 정척의 묘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모에 연루되어 고을이 강등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는 용인에 거주하고 있던 하인준(河仁俊) 과 안성에 거주하고 있던 설구인(薛求仁)이 인목대비 폐모 상소와 관련하여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조정에서 그들이 거주하던 용인과 안성의 읍호 강등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런데 안성은 이미 죽산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강등할 수가 없었고, 용인은 읍을 폐지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3도의 직로가 통하는 요충지라고 하여 다만 현령 에서 현감으로 낮추고 당시 현령 심영을 파직하는 선에서 마무리하였다.

그후 약 10여년이 지난 1628년(인조 6) 용인이 다시 역적이 살던 고을이라 하여 현감으로 강등되었다가 1738년(영조 14) 복구되었다. 용인에 살고 있던 이우명이 유효립(柳孝立)의 역모에 가담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성군(仁城 君)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한 역모였으나 허선(許選)의 고변으로 실패하였다. 유효립의 역모에는 이우명 외에도 양지현의 조헌립, 죽산부의 허유 등이 함께 가담하였다. 이때 양지는 역참이 있는 곳이라 하여 혁파를 면하였으나, 죽산부는 현감으로 강등되었다.

1644년(인조 22)에는 심기원의 옥사와 관련하여 남양부와 안산의 읍호 강등이 논의되었다. 남양부는 역적 정형(鄭衡)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0여 년 후인 1653년(효종 4)에 다시 부로 복구되었다. 안산은 역적 나영록(羅永祿)이 살던 곳이라는 이유로 이조에서 안산군의 읍호를 강등시키자고 청하였으나, “나영록이 항복해 온 왜인의 자식이니 우리나라 사람의 관례에 따 라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유로 읍호를 강등시키지 않았다.

1688년(숙종 14)에는 승려 여환이 지관 황회, 무녀 원향(용녀부인)과 계화(정성인), 아전 정원태 등 11명과 더불어 석가의 운수가 다하고 미륵이 세상을 주관한다는 말을 주창하며 반역운동을 하다 가 처형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이때 인천부가 반역한 중이(怡)의 고향이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97년(숙종 23)에 다시 승격되었다고 하여 여환이 인천 출신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숙종실록> 에는 ‘여환이 본래 통천의 중’ 이라고 하여 통천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지도서> 에 의하면, 여환 사건에 등장하는 황회가 인천에서 태어나 영평에서 거주했다고 하며, 따라서 인천이 현으로 강등된 것은 여환 때문이 아니라 황회 때문이라고 하였다.

1697년(숙종 23)에는 역적 이영창(李榮昌)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가평이 현으로 강등되었다. 숙종 23년 정월에 작성된 <이영창등 추안> 의 「상변서」 에는 나이가 70세인 승려 운부가 승도들에게 불경을 가르쳤는데, 그중에서 뛰어난 자인 옥여, 일여, 묘정, 대성, 법주 등 1백여 명을 얻어 그 술업(術業)을 전수시켰다고 한다. 그는 팔도의 승려와 체결하였고 장길산 무리와도 결탁하였다. 또 이른바 진인(眞人)인 정성(鄭姓)과 최성(崔姓)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나라를 평정하여 정성을 왕으로 삼은 후 중국을 공격하여 최성을 세워 황제로 삼는다고 운운하였다.

       
정감록(출처, 서울대 규장각)

1868년(고종 5) 역적 정덕기(鄭德基)가 살았던 곳이라 하여 삭녕군을 현으로 강등시켰다. 정덕기는 평생 관직을 원했으나 집안이 빈곤한 탓에 과거장에도 한번 들어가지 못했다. 정덕기는 이를 한 탄하여 영·호남과 충청도의 세력을 모아 변란을 기도했다. 전주의 윤내형 등과 공모한 이들은 정덕기의 몸에는 칠성반점이 있고 손바닥에는 ‘왕’ 자 무늬가 있다 하여 정덕기를 정진인(鄭眞人)으로 내세웠다. 또 <구성비결>, <음부경> 등을 가지고 다니며 “기술(奇術) 이 있어서 능히 평지를 대해(大海)로 만들고 오백명의 신병(神兵)을 부릴 수 있으니 조만간 ‘남중(南中)’에서 기병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또한 “후세에는 연일 정씨가 권력을 잡게 된다.” 는 것과 “양선을 물리치기 위한 의병을 모집한다.”는 명분으로 세력을 규합하였다. 공모자를 규합하기 위해 정덕기는 영남, 윤내형 은 호남을 담당하기로 했다. 모의에 동참한 황재두는 지리산 수문동 장처사가 자신의 스승이며, 하동, 진주 및 공충도(충청도)의 지모지사가 모두 자기 수하에 있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결국 황재두 의 고발로 발각되었다.

강상죄를 범해 고을이 강등되었다

수원, 마전, 장단, 지평, 통진 등은 부모를 시해한 강상죄를 범한 죄인으로 인해 강등되거나 폐지되었다. 1526년(중종 21) 수원에 사는 노범근(盧凡根)이 자기 아들 노선종, 조카 노치종과 함께 부모를 시해하였기 때문에 수원부가 군으로 강등되었다. 노범근, 노선종, 노치종은 능지처사에 처해졌고, 사헌부에서 수원부사 김창도 체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625년(인조 3)에는 마 전군이 어머니를 시해한 죄인으로 인해 현으로 강등되었고, 1840년(헌종 6)에는 장단부가 아버지를 살해한 이창석으로 인해 현으로 강등되었다. 1685년(숙종 11)에는 지평현이 시어머니를 시해한 죄인 해옥(亥玉)으로 인해 양근군에 예속되었다가 4년만인 1689년(숙종 15) 다시 현이 설치되었다. 1710년(숙종 36)에는 통진부가 부모를 칼로 상해한 죄인 오시준(吳時俊)과 지아비를 시해한 죄인 차진(次進)으로 인해 현으로 강등되었다.

고양, 남양 등은 노비가 상전(주인)을 시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고을이 강등되었다. 1639년(인조 17) 고양에서는 밤에 도적이 들어 종실 대산군(帶山君) 이종윤과 최무를 죽였는데, 뒤에 그 도적을 잡고 보니 이종윤과 최무의 종(노비)이었다. 의금부에서 삼성 (三省, 의정부, 의금부, 사헌부)을 열어 국문하니 모두 승복하였으므로 주인을 시해한 율(律)로 죽였다. 이 일로 해당 토포사를 추고 (推考)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징계하도록 하라는 명이 내렸다. 1665년(현종 6) 노비 얼용(乻龍), 생남(生男), 덕비 (德非) 등이 주인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광주부윤 이회와 남양부사 이지익이 파직되었다. 같은 해 양주에서도 주인을 살해한 생이(生伊)로 인해 목사 민진량(閔晋亮)이 파직되었다. 이 일로 남양부는 현으로 강등되었으나 광주와 양주는 능침이 있는 곳이라 하여 강등 되지 않았다.


전패(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전패를 훔친 죄로 고을이 폐지되거나 강등되었다

연천, 안산 등은 관아에 봉안되어 있는 전패를 훔치거나 훼손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여 고을이 폐지되었다. 전패는 ‘전(殿)’자를 새긴 나무패로, 각 고을의 객사에 봉안하고 하례의식이 있을 때 수령 이하 관원과 백성들이 모시고 경배하는 것이다. 전패는 왕을 상징하는 만큼 매우 엄하게 관리되었는데, 만약 이를 훔치거나 훼손시킨 자는 본인은 물론 일가족을 처형했으며, 그 고을은 강등, 폐지되고 수령은 파면되었다. 이 때문에 수령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이 그를 축출하기 위해 고의로 전패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일이 있었다. 1662년(현종 3)에 연천의 이애립이 전패를 훔쳐간 변고가 발생하여 현을 폐지하여 마전군에 통합시켰고, 1663년(현종 4)에 온양 백성생이(生伊)가 그 고을의 전패를 훔쳤는데, 안산군을 생이의 태생지라 하여 현으로 강등하였다. 군수 심헌(沈櫶)도 파직하였다. 그 외에도 1777년(정조 1)에는 교동부가 극적이 태어난 고을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고, 교하는 1687년 (숙종 13년) 숙모를 음증(淫烝,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간음)한 죄인 김영갑으로 인해 현이 폐지되기도 하였다.

고을을 폐지하거나 강등시키고 수령에게 책임을 물어 파면시키는 일은 폐단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1663년(현종 4)에 고을 혁파법이, 1671년(현종 12)에는 가족연좌법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1796년(정조 20) 홍산현의 전패 도난사건으로 말미암아 그의 처리를 고심하다가 수령 파면규칙도 완화되었다.


글 김세민

1954년생,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원대, 건국대, 이화여대, 공주대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하남역사박물관 관장 및 세종대 학교 역사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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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학광장 Vol.1 _ 2019 여름창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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