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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에 묻힌 울음소리, 선감도에 가다

경기학광장Vol.1 _ Information & news

< 파도에 묻힌 울음소리, 선감도에 가다 >


- 경기학광장Vol.1 _ Information & news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계절 덕인지 대부도에는 봄바람을 쐬기 위해 나온 이들로 북적였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는 줄지어 선 캠핑카들이 눈에 띄었고,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마다 웃음꽃이 피었다. 뻘이 많은 대부도 바다를 밑천삼아 성업 중인 바지락 칼국수 식당도 발디딜틈이 없다. '아! 경기만에 봄이 왔구나' 절로 탄성이 나온다. 그래서일까. 목적지를 향해 걷는 발걸음이 더욱 무겁다. 같은 바다를 끼고 한쪽의 섬에는 봄의 풍요로움이 가득한데, 다른 한편의 섬은 여전히 차가운 겨울이다. 돌고 돌아 봄이 올 법도 한데, 섬은 봄 바람조차 매섭다. 겨울같은 그 섬, 선감도에는 선감학원이 있다.


선감도 선착장

선감학원 가는 길

지금은 선감도를 가는 길이 조금도 어렵지 않다. 대부도에서 선감도로 이어지는 제법 두툼한 제방이 쌓여있어 금세 선감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선감도 선착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던 대부도와 달리 을씨년스럽다. 선착장이라고 해봤자 콘크리트로 지어진 경사로가 전부고, 그마저도 길이가 짧아 배에서 사람이 내리고 타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이 날 선감도를 찾았을 때는 바다가 온통 갯벌이었다. 시간에 따라 물길이 열리고 닫히는 경기만 바다의 특성 때문이다. 바닷물이 잠시 걷히고 속살을 드러낸 바다의 땅. 아마도 그 땅은 감옥과 다를바 없이 바다에 갇혔던 선감학원 원생들에겐 살아서는 밟을 수 없는 금단의 땅이었으리라. 저 땅을 밟고 육지로 나갈 수 있다면, 거센 물살을 헤치고 물길을 건너가면 살 수 있을까. 이 바다를 바라보며 숱한 날을 번민했을 것이다.

선착장 한 편에 여러 마리의 새 형상을 한 나무 조각이 세워져 있다. 자유를 갈망하듯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지만, 결국 날지 못한 것이 꼭 선감도의 소년을 닮았다.


선감도 선착장 새 모형

그 마음을 안고 방금 지나온 제방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너무 쉽게 섬을 건넌 것은 아닌가. 또다시 마음이 무겁다.
선감도에는 여전히 선감학원의 역사가 오롯하게 남아있지만, 그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TV 시사프로그램과 신문 매체를 통해 여러차례 선감학원의 비극이 소개됐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어린 소년들의 비극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많지 않다. 선감도 초입에 작은 이정표로 '선감학원 가는 길'이 표시됐지만 이를 찾아가는 이도 드물다.
선감학원의 본 건물은 현재 경기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경기창작센터가 리모델링 해 작가들의 레지던시 공간으로 사용한다. 경기창작센터는 선감학원의 피해자를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해 센터 인근에 선감역사박물관을 건립했다.

선감도는 섬 전체가 선감학원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감학원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물론이고, 원생들의 기숙사와 원생을 감시했던 공무원, 교사들의 숙소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특히 주황색 슬레이트 지붕을 한 단층집은 원생들의 숙소로 사용됐다. 숙소 근처에 남아 아직도 운영되고 있는 축사들도 원생들이 고된 노역을 감내해야 했던 곳이다. 원생들이 떠난 그 집에 주민들이 터를 잡고 사는 경우도 흔하다. 박물관 앞에 있던 커다란 원생 숙소도 현재 주민이 살고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잘 닿지 않아 제멋대로 우거져버린 숲길을 지나 다다른 야산 밑자락 즈음에서 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박물관을 오며 보았던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집과는 달리 참 번듯한 건물이다. 그 안에 스무살도 되지 않은, 어쩌면 열살 남짓밖에 되지 않았던 어리고 약한 소년들의 비극이 담겼다.
생각보다 박물관 공간은 넓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많은 소년들의 기록을 볼 수는 없었지만, 모르는 이가 찾아와 억울하게 희생됐던 소년들의 진실을 배우고 추모할 수 있는 정도로는 충분했다.


선감도 지도

36년간 자행된 국가의 아동인권유린사건, 선감학원의 역사

선감역사박물관 전경

박물관 1층은 선감학원의 역사와 원생들의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다. 선감학원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가 1942년 ‘거리의 부랑아를 교화한다’는 명분으로 소년 감화원을 세운 것이 그 시작이다. 하지만 일제가 선감도에 살던 주민 400여 명을 강제이주시킨 후 소년들을 가둔 진짜 이유는 교화보다는 군사인력 양성에 있었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패색이 짙 었던 일본이 힘없는 조선의 소년들을 전쟁의 마지막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1945년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으면서 당시 선감학원에 수용됐던 원생들은 섬을 떠날 수 있었다. 이 때 선감학원의 비극이 끝났어야 했지만 애석하게도 더 잔인한 역사가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해방 후 경기도가 1946년 선감학원의 관할권을 미군정에서 이관받아 1982년까지 운영했다. 그것도 일제강점기의 방식 그대로, 잔인하게 소년들을 굶기고 폭행하고 부려 먹었다. 믿었던 조국이 앞장서 소년들을 다시 섬에 가둔 것이다. 무려 이 잔혹한 국가의 만행은 36년간 자행됐는데, 일제강점기와 그 기간이 일치하는 것은 차라리 운명의 장난이라 여기고 싶다.
일제와 마찬가지로 소년감화를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당시 군사정권은 이들 소년을 정권 강화의 수단으로 악용했다. 이들을 부랑아 취급하며 거리에서 내쫓고 섬에 묶어두는 것을 ‘사회정화’로 포장해 마치 사회가 깨끗해진 것처럼 홍보했다.

특히 원생 수가 곧 실적이 되면서부터는 부모가 있고 주거지도 명확한 아이들조차 마구잡이로 잡혀왔다. 그렇게 해서 선감학원에 수용된 원생 수는 약 5천700여 명이 넘는다. 이 중 부모가 있는 아동도 제법 있었다고 전해진다.

소년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비통함을 감출 수 없다. 박물관 2층에는 원생들이 입었던 원복과 사용했던 농기구, 일하던 사진 등이 전시됐는데 실제 생활은 이보다 더 참담했으리라.
강도 높은 노역과 반복되는 폭행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학원 내에서의 폭행은 대물림됐다, 직원이 아동들을 폭행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덩치 크고 힘이 센 형님들이 ‘반장’의 완장을 차고 어린 동생들을 때리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같은 원생끼리의 폭행은 특히 밤마다 일상처럼 이루어졌다. 밤이 가장 무서웠다는 생존자의 진술이 가슴을 아린다.


섬 야산에 있는 선감학원 위령제 현수막


섬 곳곳에 남아있는 원생들의 숙소

노동강도도 혹독했다. 원생에게 일괄적으로 노동할당량을 주고 이를 채우지 못하면 체벌이 뒤따랐다. 직업훈련이란 미명하에 이들은 양잠과 염전, 농사, 축사관리 등 어른도 해내기 힘든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이 곳에서 생산한 농산물과 소금 등을 팔아 선감학원 운영비로 충당했기 때문에 더욱 가혹하게 채찍질 당했다.
먹지 못하는 고통은 더할 나위 없이 끔찍했다. 생존한 원생의 증언에 따르면 먹을 것이 없어 쥐를 잡아 구워 먹기도 하고 찔레 나무 껍데기, 무궁화씨 등 들판에 널린 식물들로 배를 채웠다.

살인적인 노동과 반복되는 폭행, 굶주림은 원생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맞아서 죽고, 굶어서 죽고, 과로해서 죽는 일이 허다했다. 때때로 감옥보다 더한 학원을 벗어나기 위해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져 탈출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해 죽기도 했다.
죽은 아이들은 가마니에 말려 섬 야산에 암매장됐다. 현재 선감학원에서 죽은 아이들의 이름은 물론, 몇명이나 이 곳에서 죽어나갔는지 알 길이 없다. 어떤 기록도 존재하지 않아서다. 그저 선생들이 시키는 대로 죽은 친구를 땅을 파서 묻어야 했던 생존자들의 증언으로만 추측할 뿐이다.

생존자,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의 이야기


선감학원

이 모든 이야기는 박물관을 찾아가면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다. 필자가 박물관에 도착하자, 박물관 옆 건물에서 50대 중후반쯤 돼 보이는 남성이 걸어왔다. 선감학원이 궁금해서 왔다고 하니, 그는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선감학원의 생존자였다.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선감학원의 실상을 생생하게 알리기 위해 생존자들이 해설사를 자처했다.

부모가 없다는 그는 인천에서 시립보호소 등을 전전하다 직업 교육을 시켜준다는 말만 믿고 배를 타고 이 곳에 왔다. 열셋 나이로 감당하기 벅찬 노동도 괴로웠지만, 매일 밤 되풀이되는 구타가 가장 끔찍했다. 그는 “선생들이 반에서 가장 덩치 큰 형들을 뽑아 관리하게끔 했는데, 같은 원생들끼리 서열이 정해져 구타가 대물림됐다. 밤마다 여기저기서 맞는 소리가 들리면 언제 내 순서가 되나 긴장했던 그 순간이 가장 힘들었다. 어쩔 땐 차라리 일찍 맞고 잠이라도 더 자는게 낫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원생들이 입던 교복

어렵사리 선감학원을 빠져 나왔지만 고아였던 그는 길거리를 전전했고 다시 선감학원에 붙잡혀왔다. 그는 “워낙 사는게 힘든 시절이니까.... 그땐 그냥 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체념했지. 별 수가 없었다”는 말로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리고 한숨지었다. ‘바닷가 자갈돌도 우리하고 놀고요/ 푸른 하늘 별들도 우리하고 놀아요/ 아끼고 사랑하자 우리들의 동무들/ 정다웁게 잘 자라자 선감학원 형제들’


선감역사박물관 창에 쓰여진 교가

창문에 쓰여진 선감학원 교가가 눈물겹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노랫말처럼 사회가 어린 소년을 가슴 깊이 품어주었다면....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어린 소년들이 국가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됐던 것도 몰랐던 지난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짙다. 이제라도 그 소년을 품어야 한다. 끊임없이 진실을 기억하고 소년을 추모하면서.



글 공지영

유년을 보낸 경기도에 돌아와 경인일보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사회부, 경제부, 문화부 등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경기도의 숨은 이면과 매력을 동시에 발굴하며 도민에게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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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 경기학광장 Vol.1 _ 2019 여름창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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