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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 작가의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다’

경기학광장Vol.1 _ Column & study

< 한수산 작가의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다’ >


- 경기학광장Vol.1 _ Column & stu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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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쓴 순례기



이 책은 생활성서사에서 2000년에 간행되었던 201쪽 분량의 책이다. 책의 제목만으로 미루어 본다면, 노숙자들과 관련된 것이라고 오해할 소지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부초(浮草), 군함도(軍艦島) 등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소설가 한수산의 천주교 성지 순례기이다.

책의 제목인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다’는 저자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신부의 성지인 충청북도 진천군 배티성지를 순례하고 붙인 제목이다. 저자는 ‘길 위의 목자’로 알려진 최신부의 일생을 그렇게 표현하였다. 최신부는 포교를 위하여 전국의 길을 돌아다니며 세례를 주었고, 길에서 전염병인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다’라는 표현은 최신부의 생애에 대한 짜안한 저자의 심정을 압축한 표현이다.

이 책은 저자가 강조한 바와 같이 안내 가이드북이 아니다. 이 책은 저자가 1989년 세례를 받은 이후 4~5년 간의 성지 순례를 하면서 얻은 믿음과 성찰의 산물이다. 지식이나 생각의 나열이 아닌 길 위에서 발로 쓴 순례기이다. “길의 끝에는 사람이 있었고 죽음으로 믿음을 증거하며 살다 간 사람의 자취에는 하느님이 있었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순례 성지 24 곳, 그 절반이 경기도



삼성산 성지


저자는 우리나라의 천주교 성지 24곳을 순례하였다. 천주교 성지가 100여 곳도 넘겠지만, 저자가 우선 선정한 지역들이다. 그런데 흥미를 끄는 점이 있다. 그 순례 성지 가운데 절반 이상이 경기도에 있다는 것이다. 책의 제목은 충북 진천의 최양업 신부 관련 지역인데, 실제 그 절반 이상이 경기 도에 있는 것이다. 저자가 순례한 성지를 책에서 소개한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표> 저자가 순례한 성지


저자는 특별히 경기도를 우선 순위에 두었던 것 같지는 않다. 전국의 천주교 성지를 대상으로 하였는데, 자연스럽게 경기도 지역에 많은 성지가 분포되어 있는 것이다. 성지가 많다고 하여 그 지역의 신앙심이 더 깊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사실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경기도는 이제 천주교 성지의 고향이자 순례자의 땅이 되었다.



단내성지 마리아상


경기도, 순교와 복음 전파의 땅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경기도가 천주교의 최대, 최고의 성지라는 사실을 몰랐다. 순교자의 생애에 있어서 최고, 최대라는 수식어가 갖는 의미에 무게를 둘 필요는 없다. 그렇다하더라도 순례 성지의 고장이라는 경기도의 이미지는 종전의 실용적 성향의 경기도와는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오는 것만은 분명하다.

돌이켜 보면 경기도는 신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오는 지리적 위치에 있다. 우리 역사에 있어서 수도가 가장 오랫동안 있었던 지역이 경기도였다. 새로운 문물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지역, 바로 경기도인 것이다. 성리학은 개경, 양명학은 한양과 강화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천주교도 공식 적으로 마테오 릿치의 『 천주실의』가 처음 도착한 지역이 한양이었다. 돌이켜 보니 새삼스러울 일도 아닌데, 이 책을 통하여 새롭게 알게 된 것 같아 경기지역민으로서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가져 보는 계기가 되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천주교는 처음 서학(천주학)으로 알려져 점차 종교로 확대되었다.


목이 잘리고, 산 채로 묻혀도 오직 하느님


사람은 어떤 때에 죽음을 선택할까? 순교자들의 삶을 보면서 문득 생각해 보는 사실이다. 이 책에는 여러 형태의 죽음이 나온다. 절두산에서 목을 잘린 순교자, 포교를 다니다가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 선교자, 이역만리 조선 땅에 순교를 목적으로 왔다가 삼성산에 묻힌 외국인 선교사 등.

여러 순교자들의 죽음을 맞은 시간이나 상황은 전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다. 믿음이라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신앙이라는 것을 믿고 죽음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신앙은 성리학에 매몰되어 있었던 조선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천주교가 우리 사상계에 미친 영향은 크다. 성리학 세계에서 기본이었던 ‘신분’ 이라 는 수직적 계급 사회를 평등이라는 수평적 사회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순교자들의 신분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구분이 없다. 순교자들은 하느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리려다가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이 책은 순교자들의 목숨이 이 땅에 무엇을 이루어 놓았는가에 대하여 다시 일깨워 주고 있다.



백지사(白紙死)를 당해도

백지사는 저자가 이천의 단내 성지에서 눈여겨 본 각자이다. 단내 성지는 정은 바오로 성인의 순교지이다. 왜 이곳의 돌덩이에 백지사라고 각자를 하였으며 그 뜻은 무엇인가? 정 바오로 성인은 1804년에 태어나 1866년에 순교를 하였다. 그리고 백지사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방법이었다. 당시 고문 방법의 하나가 물에 적신 백지를 얼굴에 붙여 나가는 것이었다. 종이가 여러 겹으로 얼굴을 덮게 되면 결국 호흡을 하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이다. 정은 바오로 성인은 60세가 넘은 고령에 백지사를 당하였다. 그렇게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는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감내한 순교자들의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하였던 점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나의 나약한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에 대한 변명이 깔려 있다.


순례자가 흘린 피의 값은?



절두산성지


저자는 절두산에서 순례자의 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절두산의 나무와 돌에 끼인 이끼들은 많은 사람들이 껍질을 벗겨 가거나 긁어 갔다고 한다.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자란 나무와 이끼이기 때문에 효험이 크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한때 부처의 코를 가져가거나 귀를 떼어가는 사 람들이 있었다. 물론 영험한 효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와는 달리 절두산의 순교자의 피를 먹었다는 나무와 이끼는 비교하기가 좀 그렇다. 정 바오로 성인과 같이 백지사를 당한 고통을 생각한다면, 그 효능 때문에 순교자의 피를 이기적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썩 기분 좋게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또한 저자는 이역만리에서 유명을 달리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소에도 순례를 하였다. 브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블리외, 도리 신부의 묘소이다. 이 외국인 신부들은 새남터에서 사망하고 삼성산 성지로 모셔졌다. 저자는 새남터에서 삼성산 성지로 외국인 신부의 시신을 봉안한 박순집과 한국 인 최초의 수녀가 된 딸 글라라와 손녀대 두명의 수녀 이야기도 잊지 않고 들려주고 있다.



마재성지


최초의 평등이 선포된 땅, 경기도?


이 책에서 저자가 들려주는 성지와 관련된 사실들은 간략하게 귀동냥이라도 반드시 해야 할 가치가 있다.

골배마실은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나 새남터에서 25세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성장하였던 곳이다. 김신부는 그 뒤에 사망한 어머니 우르술라와 함께 이민식 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된다. 미리내에는 그 외에도 페레올 주교와 이민식의 묘도 있다.

미사리 구산성지는 김성우 성인 등 8인의 성지이다. 구산성지는 수많은 치명 선열들의 성지이자 김대건 신부의 최초 사목지였다. 나바위로 들어온 김대건 신부가 첫 미사를 드렸던 곳이 구산성지이다. 과장되게 말한다면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우리 사제에 의하여 평등 선언을 한 곳이라고나 할까?

인천 만수동 산기슭은 한국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이승훈의 시신은 이곳에 있다가 1981년에 천진암으로 옮겨졌다. 천진암에 이벽, 정약종, 권철신 형제 등과 함께 있으며, 인천 만수동에의 묘는 가묘라는 사실도 알려 준다.

저자는 마재에서 정약종 성인의 가족을 회상한다. 아버지가 죽고 아들이 죽고, 그 아내가 죽고, 또 아들과 딸이 죽어 한 가문이 멸문하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하느님을 믿었을까? 그들이 믿었던 하느님이 과연 누구였길래? 저자는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이 지은 상재상서(上宰上書)의 말을 떠올린다.


“지위에는 높고 낮음이 있고, 일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으니, 한 나라에서는 나라의 임금이 가장 귀중하나, 나라의 임금보다 높은 것은 천지의 큰 임금이십니다.”




인천 만수산 이승훈 묘


황사영의 묘


성지도 신분에 따라? 잘못 알려진 묘소도.....


경기도의 성지 가운데 남양 성모 순례지가 있다. 남양 성모 순례지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던 곳이다. 많은 교우들이 박해를 피하여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한 경우가 있었는데, 남양 성모 순례지가 거기에 해당한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성지라서인지 늦게 알려졌다. 남양 성모 순례지는 마 리아에 대하여‘ 기도하는 성지’이다. 마리아는 원죄 없이 잉태한 동정녀로 천주교인들의 마리아에 대한 기도는 구원이다. 저자는 이러한 성격의 성지에 대하여 조곤조곤 담담한 필치로 설명을 하고 있다.

이 책은 다시 송추의 황사영 묘소로 안내한다. 황사영은‘ 황사영 백서’를 저술하여 잘 알려진 순교자이다. 황사영 순교자는 강화 출신으로 장흥면 송추에서 사망하였고, 묘소도 그 곳에 있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은 황사영의 출신지인 강화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고 이 책에서 는 서술하고 있다.

순교자는 오늘날의 천주교 입장에서 본다면 선구자이지만, 당시 조선 왕조에서는 역모이자 반역자였다. 그래서 잘못 알려지기도 했고, 또 숨어 지내던 분들에 관해서는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현지에서의 확인은 발로 쓴 순례기인 이 책이 갖는 또 하나의 진실함이다.



어농성지


‘성지 경기도’의 의미를 일깨워 준 소중한 책

경기도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언제나 선진적이고 정치·경제·사회 등의 선진적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책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다’를 통하여 경기도의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되었다. 경기도는 종교적으로 순교지로서의 성역이라는 점. 역사를 돌이켜보니 천주교 성지 이전에도 종교 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신륵사, 회암사 등은 불교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유학이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조선시대에도 향교나 서원이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던 지역이기도 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양명학을 접할 수 있었고 현재까지도 보존되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시로서는 신학문이자 새로운 사상이었던 천주교이자 천주학으로도 불렸던 신지식의 수용지였고, 천주교의 평등사상을 전파하고 지키고자 하였던 저항의 장소였다. 더 나아가 자신의 심신을 바쳐 순교하였던 성스러운 장소, 성지 경기도였다. 한수산의 책‘ 길에서 살고 길 에서 죽다’는 종교적 순례기라는 기본의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하면서 경기도가 순례성지라는 새로운 발견을 하게 해 준 소중한 한 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남양성모성지



글 이재범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경기대 사학과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문화재청 사적분과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후삼국시대 궁예정권 연구』, 『슬픈 궁예』, 『나의 일본 여행』 등이 있다.

저자 한수산

경희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부조』, 『군함도』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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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1 _ 2019 여름창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08.16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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