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도로 본 경기도 >
- 경기학광장Vol.1 _ Column & stud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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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는 인간의 세계관과 실제 살고 있는 공간을 표현한다. 따라서 지도는 인간 내부의 정신적 세계와 외부의 물리적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이자,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장소를 이해하는 중요하고
근본적인 수단이다. 동시에 지도는 그것을 제작하는 과정에서의 기술과 과학, 지도에 담겨져 있는 인간 삶의 공간과 사고, 그리고 지도를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의 미술과 문화까지 포함하는 문화적
산물인 동시에 사회적 산물이다. 또한, 당대의 사회·문화적 요청에
따라 제작되기 때문에 지도는 시간과 공간의 교차 속에서 탄생된다. 즉, 지도를 통해 공간을 본다는 것은, 지도를 통해 지리와 환경은 물론 지도에 표현된 지리정보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를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조상들의 숨결이 스며들어 있는 지도를 통해 경기도의 공간적 변화 속에서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들의 삶을 보고자 한다.
왜 지도인가?
‘지도는 언제부터 제작되었을까?’ 이 질문은 ‘지도가 제작된
그곳에(장소), 언제부터(시간), 누가(사람) 살고 있었는가?’를 물어
보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에는 호랑이·사슴·멧돼지와 같은 육상동물,
고래와 같은 해상동물, 그리고 사람의 전신(全身)이나 얼굴과 그
물을 이용해 고래를 잡는 모습과 호랑이를 포획하는 등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 암각화는 울산 태화강 지류에 약 7,000년 전인 신석기시대를 살았던 당시 선조들의 삶과 환경을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그림지도이다. 그들은 왜 이런 지도를 제작했을까? 아마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나 그 지역을 포함한 주변 지역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에 대한 정보를 기억하고 싶었거나 다른 사람이나
후손들에게 이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림지도는 다
른 장소에서도 발견된다. 마셜 제도에서는 나무의 줄기와 돌, 조개
껍질 등을 엮어서 그들이 삶의 공간이었던 바다의 모습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지도로 제작하였고, 약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에 나뭇가지로 그린 지도에는 세계의 육지는
평탄한 둥근 쟁반과 같아 육지를 에워싼 바다 위에 떠 있다는 그들의 세계관을 보여줌과 동시에, 바다의 바깥쪽에는 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가상의 공간을 지도로 표현하였다. 이처럼 사람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한 파악을 시작으로, 위치와 장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이를 다양한 형태의 지도로 제작하기를 원한다.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 단독 지도 중 가장 오래된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1402년(태종 2)에
대사성 권근(權近), 좌정승 김사형(金士衡), 우정승 이무(李茂),
이회(李薈)가 제작하였다. 지도 하단에 있는 양촌(陽村) 권근이
쓴 발문에 따르면, 이 지도는 중국에서 제작한 《성교광피도(聖敎
廣被圖)》와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합하여 새로 제작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문 첫 시작을 “천하는 지극히 넓다(天下至廣也).”로 시작하며, 중간에는 “··· 새 지도를 만드니, 조리가 있고 볼 만하여 참으로 문 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다. 대저 지도를 보고서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아는 것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한 도움이 되는 것이니, (勒成新圖 井然可觀 誠可以不
出戶而知天下也 夫觀圖籍而知地域之遐邇 亦爲治之一助也)
…”라고 지도의 제작 목적을 밝히고 있다. 즉, 지극히 넓은 천하에
서 조선의 위치와 주변 지역과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지도를 제작하였고, 동시에 새로 건국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지도를 제작하였다.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인들에게 지도는 세계의
바다를 돌아다니며 항로를 개척하고 탐험과 무역, 그리고 식민지
건설을 위한 길잡이이자, 때로는 정치적 무기가 되어 지도를 가진 자가 권력을 차지하기도 했다. 근대지도 탄생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헤르하르뒤스 메르카토르(Gerhardus Mercator, 1394~1594)
는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세계지도를 완성함으로써 바다를 향한 사람들의 욕망을 도왔고, 이 시기에 지도는 보다 정확한 지역의 경계와 지리 정보를 포함한 토지대장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는
자신의 위치 확인을 넘어서, 국가의 영역 확보와 확인에 대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에 대한 새로운 지리 정보를 담고 있는 지도는 더 넓은 세계와 우주를 꿈꾸었던 인간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줌으로써 또 다른 새로운 문화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 과거의 종이지도보다는 컴퓨터, 항공사진과 인공위성 사진, 드론 등을 이용하여 지도를 제작하고, 이는 인터넷 연결망과 사이버 공간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리고 지도를 제작하던 주체가 확실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누구나 자신만의 지도를 제작할 수 있다. 지도는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여러 방식으로 표현되어 왔지만, 지도가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과
목적은 비슷하다. 즉, 지도란 우리가 살고 있는 지리적 공간을 축소된 그림, 약속된 기호 또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지도에는 장소의 자연지리 정보는 물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과 삶이 축적되어 있다. 따라서 한 지역의 지도 변천을 살펴본다는 것은 그 지역에 있었던 자연적 변화를, 그 지역의 역사를,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생각을 살펴본다는 것을 뜻
한다. 그러므로 경기도 지도를 통해 경기도 지역의 모습과 역사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지도로 본 조선시대 이전 경기도
현재 전하고 있는 경기도 지도 대부분은 조선시대 이후의 지리
정보를 담고 있으며, 그 가운데 대다수는 16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현전하는 지도 이전의 경기도 지역의 모습은 역사적
자료를 통해 오늘날 다시 지도로 만들어 볼 수 있다. 우선 ‘경기(京畿)’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민
족문화대백과 사전에 따르면, ‘경’은 ‘천자(天子)가 도읍한 경사
(京師)’를 뜻하고, ‘기’는 ‘천자의 거주지인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이내의 땅’을 의미하는 것으로, ‘경기(京畿)’라는 지명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지역적 범위가 확대되어 ‘왕도의 외곽
지역’이라는 일반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왕도의 외곽지역을 ‘경기’라고 칭한 것은 고려시대이다.
고려는 건국 이후 수도인 개경(開京)을 개주(開州) 혹은 황도(皇
都) 등으로 부르다가 995년(고려 성종 14)부터 개성부(開城府)라
칭하였다. 그리고 개성부는 개성에서 가까운 6개 고을인 적현(赤縣)과 적현보다 멀리 떨어진 7개 고을인 기현(畿縣)을 관할하였고,
이 지역이 바로 고려 경기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그림 1).
▲ 그림 1. 997년 적현(赤縣)과 기현(畿縣) 지도(좌) 1018년 경기 지도(우)
1018년(현종 9) 고려는 대대적인 지방제도 개편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주현(主縣)-속현(屬縣) 제도의 기틀을 완성하였다. 개성의 외곽지역을 ‘경기(京畿)’라고 칭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며, 기존의 개성부를 없애고 새로 개성현령을 두었다. 당시 경기의 영역은
정주(貞州)와 덕수(德水), 강음(江陰)의 3개 현을 관할하였던 개성현(開城縣)과 송림(松林)과 임진(臨津), 토산(兎山), 임강(臨江), 적성(積城), 파평(坡平), 마전(麻田) 등 7개 현을 관할한 장단현(長湍縣)의 현령관(縣令官)이 축이 되었다. 즉, 당시 경기는
12개 현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개성현과 장단현이 주현(主縣)
이 되고, 나머지 10개 현은 속현으로 편제되었다(그림 1). 이때부터
칭해진 ‘경기’는 천년이라는 역사 속에 지리적으로 그 위치와 소속
행정구역이 변화하였고, 그 시간의 변화 속에 ‘경기’ 지역의 삶의 모습과 문화가 만들어져 왔다.
1062년(문종 16)에 고려의 경기는 일부 개편된다. 개성현이 개성부로 복구되었으며, 개성현령 또한 지개성부사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서해도 평주의 관할 하에 있던 우봉군을 경기에 새로 편입시
켰다. 이에 당시 경기는 1부(개성부)와 1군(우봉군), 그리고 기존의 11현으로 구성되었으며, 무신집권기에 해당하는 1219년(고종
6) 당시의 경기는 2부(개성부와 승천부)와 1군, 10현 등 13개 군현
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몇 번의 크고 작은 행정구역 변화가 있었고,
고려 말기인 1390년(공양왕 2)에는 그 영역을 확대하고, 확대한
경기 지역을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분리하였다. 기존의 경
기 소속 군현 중 장단(長湍)과 임강(臨江), 토산(兎山), 임진(臨津), 송림(松林), 마전(麻田), 적성(積城), 파평(坡平) 등 8개 군현은 경기좌도에, 그리고 개성(開城), 강음(江陰), 해풍(海豊), 덕수(德水), 우봉(牛峯) 등 5개 군현은 경기우도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경기좌도에는 양광도의 한양(漢陽), 남양(南陽), 인주(仁州),
안산(安山), 교하(交河), 양천(陽川), 금주(衿州), 과주(果州), 포주(抱州), 서원(瑞原), 고봉(高峯) 등과 교주도의 철원(鐵原), 영평(永平), 이천(伊川), 안협(安峽), 연주(漣州), 삭녕(朔寧) 등을,
경기우도에는 양광도의 부평(富平), 강화(江華), 교동(喬桐), 김포(金浦), 통진(通津)과 서해도의 연안(延安), 평주(平州), 배주(白州), 곡주(谷州), 수안(遂安), 재령(載寧), 서흥(瑞興), 신은(新恩), 협계(俠溪) 등을 추가로 편입시켰다(그림 2).
▲ 그림 2. 1219년 경기 지도(좌)와 1391년 경기 지도(우)
고지도로 본 조선시대 경기도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된 이후 지방 행정구역 개편이 시작하였고, 이후 태종대인 1413년에 8도제가 수립되고, 세종대에 이르러
대부분 확립되었다. 고려 말에 형성된 좌·우도는 태조·태종·세종
대를 거치면서 다시 ‘경기’로 합쳐졌으며, 경기 우도에 소속되어 있었던 수안·곡주·연안 등 이전 경기의 서북지역은 지금의 황해도로
환속되었다. 그리고 건국과 함께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가 이전하
면서, 한양의 동남 지역에 위치한 광주(廣州)·수원·여주·안성 등이 경기로 이속되었다. 이는 한양을 중심으로 ‘경기’ 지역의 재편이
이루어진 것으로, 새로운 왕도인 한양을 보위하기 위함이었다.
1557년(명종 12)~1558년(명종 13)에 국가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를 통해 한반도에서의
조선시대 경기 지역의 위치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 3). 《조선방역지도》는 조선 초인 1463년(세조 9)에 정척(鄭陟)과 양성지(梁誠之)가 제작한 《동국지도(東國地圖)》의 모습을 따르고 있는 지도로, 지도 상단에는 제목이 있고 하단에는 이이(李㶊)를 비롯하여 제작에 관련된 12명의 관등과 성명을 기록한 좌목(座目)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상류 지역은 거의 일직선으로 되어 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소략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조선시대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산줄기와 물줄기의 표현은 매우 자세히 표현되어 있어, 당시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지도에는 8도의 주현(州縣)과 수영 및 병영이 표시되어 있으며, 각 군현은 도
별로 색을 달리하여 경기도는 황색, 충청도는 황색, 강원도는 연녹색, 황해도는 연백색, 경상도는 적색, 전라도는 백색, 함경도는 청색, 평안도는 녹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이는 다섯 방위를 나타내는
오방색을 한양과 경기를 중심으로 채색한 것이다.
▲ 그림 3. 《조선방역지도》
《조선방역지도》가 조선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그린 조선전도라면, 경기도를 대상으로 하여 제작된 다양한 형태의 ‘도별도’도 있다. 그 중에서도 ≪동국지도≫는 조선시대 지리지 속에 포함된 지
도가 아닌 하나의 독립된 지도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는 지도첩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본 지도이다. 이는 임란 이전에 편찬되어 현재까지 전해지는 몇 안 되는 지도이며, 지도의 내용 또한 16세기 중엽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어 지도사적으로 중요한 지도이다. ≪동국지도≫에는 〈경기〉 지도를 포함하여 8도의 도별도가 수록되어 있다(그림 4). 총 16장 32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동국지도≫는 각 도별도와 함께 각 도별로 ‘지계리수(地界里數)’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에 표기된 제목을 ‘내제’라고 부르는데, ≪동국지도≫에 수록된 경기도 지역의 지도에는 내제가 ‘경기도’가 아니라 ‘경기’로 표기되어 있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전국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경기도 도별도의 내제도 ‘경기’
로 표기되어 있다. 경기도 지도명이 ‘경기’에서 ‘경기도’로 바뀐 시기를 정확하기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현존하는 지도에서는 대부분
18세기 이후 제작된 지도에서 ‘경기도’로 표기되었다.
〈경기〉 지도에서 경기도의 전체적인 윤곽은 동람도 유형의 지도를 따르고 있으며, 주요 하천과 각 군현의 진산을 비롯하여 주요 산의 모습을 소략하게 그려 넣었다. 산의 모습은 독립적인 산봉우리
를 중심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바다에는 조선전기 지도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파도 무늬를 그려 넣었다. 지도 중앙에 서울인 ‘경도(京都)’는 이중의 사각형으로, 그리고 경기도의 각 군현은 직사각
형으로 표시하고 지명을 기입하였다. 군현명 옆에는 좌우도 소속,
군현의 품계, 별칭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각 군현을 연결하는 붉은
선은 도로를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지도의 외도곽과 내도곽 사이의 여백에는 그 도면의 변두리 지역과 연결되는 타도의 군현 명칭
을 기록하여 도별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도의 상단 여백에는 찰방(察訪), 첨사(僉使), 만호(萬戶), 권관(權官) 등 중심 역과
군사 중심지에 대한 지리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지도와 함께 수록된 ‘지계리수’는 도내 소속 군현수, 서울에서 각 군현까지의
거리를 일정과 식(息)으로 기록하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인접한
군현과의 거리를 일목요연하게 나타낸 자료이다.
≪동국지도≫의 〈경기〉 지도는 전국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도로서의 성격을 지닌 ‘동람도’와 달리 각 군현에 관련된 내용을 더욱 상세하게 추가했다는 점에서 지도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형태는 비슷하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지도
상단에 기록된 지리정보의 경우 여백을 이용하여 첨가한 것이 아니라, 전체 도면의 상단 부분을 일정하게 분배하여 써 넣은 것으로, 지도를 만들었던 주요 목적이 이러한 내용을 파악하고자 하는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지도와 함께 별도로 수록한 ‘지계리수’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지도는 내용뿐만 아니라 제작 형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지도가 필사본이 아닌 목판본으로 제작되어 인쇄되었다는 것은 당시 이미 지도의 중요성이 공인되었다는 증거이며, 수요가 많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 그림 4. ≪동국지도≫에 수록된 〈경기〉 지도(좌)와 지계리수(우)
≪동국지도≫의 〈경기〉 지도와 같이 지도의 전체적인 윤곽은 동람도 유형의 지도와 유사하나, 지도에 반영된 지리정보 등의 표현
방법 등이 다른 지도도 있다. 이러한 지도는 소략한 형태로 제작되었던 동람도형 도별지도로부터 사실적이고 내용이 풍부한 도별지도로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팔도총도(八道總圖)≫에 수록되어 있는 〈경기도(京畿道)〉 지도(그림의 경우, 산지 표현에 있어 주요 산을 독립적으로 표현한 ≪동국
지도≫의 〈경기〉 지도와 달리 정상기의 ≪동국지도≫ 유형의 지도에 표현된 산지와 비슷하게 연속된 산봉우리를 그리고 채색을 더해
산줄기의 모습으로 이어 그렸다. 그리고 목판본 지도책에서는 표현하기 힘든 많은 도서 지역의 정보가 수록되어 있는데, 인천 앞 서해바다에는 교동, 강화를 비롯하여 수많은 섬들이 그려져 있으며 지명
이 표기되어 있다. 지도에 섬을 상세하게 그리고 섬의 이름까지 표기했다는 것은 18세기의 바다와 섬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반영한 것이다. 서울인 ‘한양(漢陽)’과 오늘날 개성인 ‘송도(松都)’는 원으로
표시하고, 그 외 각 군현은 직사각형 안에 지명을 기록하고 좌우도
소속을 함께 표시해 주었다. 조선시대 경기 좌도와 우도는 한강을
기준으로 한강 이남이 좌도이고, 이북이 우도에 해당한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좌도에 22개의 군현이, 우도에 13개의 군현이 소속되어 있었다. 여기서 한성부는 조선시대 경기도 소속이 아니었고,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강화도의 경우 좌·우도에 속하지 않았다.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요 역이 표시되어 있으며, 경기도와
인접한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지역의 주요 강줄기와 산, 군현을 함께 그려 주변지역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 그림 5. ≪팔도총도≫에 수록되어 있는 〈경기도〉 지도
1750년대 초 관찬에서 제작한 회화식 군현지도집인 ≪해동지도(海東地圖)≫은 민간에서 제작된 지도집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데 활용된 관찬 군현지도집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해동지도≫ 1책에 수록되어 있는 〈경기도〉
지도(그림 6)의 경우, 1책 표지에 적힌 표제에는 ‘경기전도(京畿全圖)’로, 그리고 지도의 내제는 ‘경기도’로 기록되어 있다. 경기도 전역의 모습을 2면에 수록하고 있으며, 서울인 ‘경도(京都)’를 붉은
색의 원으로, 경기도의 각 군현을 황색의 원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경기도와 인접한 지역의 군현 정보는 대략적인 위치를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지명만 간략하게 표시하였다.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 위치한 덕포진(德浦鎭)을 포함하여 군사 요충지인 진(鎭)은 보라색의 사각형에 붉은색의 테두리를 더해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회화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북한산성과 광주의 남한산성, 그리고 통진의 문수산성(文殊山城) 등은 주변 산세의 모습과 함께
성곽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서해에는 강화도와 교동을 비롯하여 군사적 요충지였던 영종도와 덕적도, 주문도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도서 정보를 자세히 담고 있다. 용진(龍津), 광진(廣津) 등
주요 나루가 한강을 따라 표시되어 있으며,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한 주요 능(陵)도 지도 위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여백에는 토지
와 곡물, 노정(路程)의 기준, 역, 군병(軍兵), 관직, 선박(船舶)의
수 등이 기록되어 있다.
▲ 그림 6. ≪해동지도≫ 1책에 수록되어 있는 〈경기도〉 지도
▲ 그림 7. ≪동국여도≫ 에 수록된 〈기전도〉
‘경기’ 또는 ‘경기도’가 아닌 ‘기전도(畿甸圖)’라는 지도명으로
제작된 지도도 있다. ≪동국여도(東國輿圖)≫ 9번째 도엽인 〈기전도〉에서 ‘기전(畿甸)’은 ‘경기(京畿)’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경기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지도이다(그림 7). 1794년(정조
18)에서 1796년(정조 20)에 걸쳐 현재의 수원 시내에 축조된 화성(華城)의 모습이 군현을 나타내는 원에 성곽 모습을 더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1795년(정조 19) 시흥(始興)으로 바뀌는 금천(衿川) 지명이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衿川’을 ‘黔川’으로, ‘陽川’을
‘楊川’으로 잘못 표기하였다. 또한, 경기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물론, 강을 따라 위치한 나루터의 모습과 기암절벽 형태의 자연 경관,
산성 등은 회화적 기법을 통해 표현하여 그 모습을 보다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가로로 긴 종이에 맞춰 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각 군현간의 거리 즉 일정한 축척이 반영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각 군현 지명 오른쪽에 서울까지의 거리를 기록하여 이를 보완하였다. 그리고 산성을 비롯한 성곽과 진보 등 군사적 방어 시설, 수로를
포함한 도로와 주요 고개 등이 자세히 그려진 지도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도별지도를 지도의 정확도 측면에서 평가하기는 힘들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를 현대 지도와 같은 기준으로
그 정확성을 평가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즉, 오늘날 ‘정확한 지도’
라 함은 일정한 비율의 축척이 반영되어 지역의 보다 정확한 윤곽이 그려져 있으며, 지도에 반영된 지리 정보 또한 기호 등을 사용해 사실적으로 표현한 지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해동지도≫ 1책
에 수록되어 있는 〈경기도〉 지도나 ≪동국여도≫ 에 수록된 〈기전도〉와 같이 회화적으로 그린 지도는 지도를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지도에서 쉽게 주요 산성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그 지역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도 그 모습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도 제작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지리 정보를 강조하여 표시하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많은 지리
정보를 생략하고 간략한 형태의 지도를 제작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동람도 유형의 소략한 지도들은 조선시대에 목판으로 제작되어
민간에서도 즐겨 사용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다음에 소개할 2개의
지도와 같이 18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보다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