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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본 경기도

경기학광장Vol.1 _ Column & study

< 지도로 본 경기도 >


- 경기학광장Vol.1 _ Column & stud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지도는 인간의 세계관과 실제 살고 있는 공간을 표현한다. 따라서 지도는 인간 내부의 정신적 세계와 외부의 물리적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이자,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장소를 이해하는 중요하고 근본적인 수단이다. 동시에 지도는 그것을 제작하는 과정에서의 기술과 과학, 지도에 담겨져 있는 인간 삶의 공간과 사고, 그리고 지도를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의 미술과 문화까지 포함하는 문화적 산물인 동시에 사회적 산물이다. 또한, 당대의 사회·문화적 요청에 따라 제작되기 때문에 지도는 시간과 공간의 교차 속에서 탄생된다. 즉, 지도를 통해 공간을 본다는 것은, 지도를 통해 지리와 환경은 물론 지도에 표현된 지리정보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를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조상들의 숨결이 스며들어 있는 지도를 통해 경기도의 공간적 변화 속에서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들의 삶을 보고자 한다.

왜 지도인가?

‘지도는 언제부터 제작되었을까?’ 이 질문은 ‘지도가 제작된 그곳에(장소), 언제부터(시간), 누가(사람) 살고 있었는가?’를 물어 보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에는 호랑이·사슴·멧돼지와 같은 육상동물, 고래와 같은 해상동물, 그리고 사람의 전신(全身)이나 얼굴과 그 물을 이용해 고래를 잡는 모습과 호랑이를 포획하는 등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 암각화는 울산 태화강 지류에 약 7,000년 전인 신석기시대를 살았던 당시 선조들의 삶과 환경을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그림지도이다. 그들은 왜 이런 지도를 제작했을까? 아마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나 그 지역을 포함한 주변 지역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에 대한 정보를 기억하고 싶었거나 다른 사람이나 후손들에게 이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림지도는 다 른 장소에서도 발견된다. 마셜 제도에서는 나무의 줄기와 돌, 조개 껍질 등을 엮어서 그들이 삶의 공간이었던 바다의 모습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지도로 제작하였고, 약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에 나뭇가지로 그린 지도에는 세계의 육지는 평탄한 둥근 쟁반과 같아 육지를 에워싼 바다 위에 떠 있다는 그들의 세계관을 보여줌과 동시에, 바다의 바깥쪽에는 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가상의 공간을 지도로 표현하였다. 이처럼 사람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한 파악을 시작으로, 위치와 장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이를 다양한 형태의 지도로 제작하기를 원한다.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 단독 지도 중 가장 오래된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1402년(태종 2)에 대사성 권근(權近), 좌정승 김사형(金士衡), 우정승 이무(李茂), 이회(李薈)가 제작하였다. 지도 하단에 있는 양촌(陽村) 권근이 쓴 발문에 따르면, 이 지도는 중국에서 제작한 《성교광피도(聖敎 廣被圖)》와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합하여 새로 제작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문 첫 시작을 “천하는 지극히 넓다(天下至廣也).”로 시작하며, 중간에는 “··· 새 지도를 만드니, 조리가 있고 볼 만하여 참으로 문 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다. 대저 지도를 보고서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아는 것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한 도움이 되는 것이니, (勒成新圖 井然可觀 誠可以不 出戶而知天下也 夫觀圖籍而知地域之遐邇 亦爲治之一助也) …”라고 지도의 제작 목적을 밝히고 있다. 즉, 지극히 넓은 천하에 서 조선의 위치와 주변 지역과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지도를 제작하였고, 동시에 새로 건국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지도를 제작하였다.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인들에게 지도는 세계의 바다를 돌아다니며 항로를 개척하고 탐험과 무역, 그리고 식민지 건설을 위한 길잡이이자, 때로는 정치적 무기가 되어 지도를 가진 자가 권력을 차지하기도 했다. 근대지도 탄생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헤르하르뒤스 메르카토르(Gerhardus Mercator, 1394~1594) 는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세계지도를 완성함으로써 바다를 향한 사람들의 욕망을 도왔고, 이 시기에 지도는 보다 정확한 지역의 경계와 지리 정보를 포함한 토지대장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는 자신의 위치 확인을 넘어서, 국가의 영역 확보와 확인에 대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에 대한 새로운 지리 정보를 담고 있는 지도는 더 넓은 세계와 우주를 꿈꾸었던 인간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줌으로써 또 다른 새로운 문화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 과거의 종이지도보다는 컴퓨터, 항공사진과 인공위성 사진, 드론 등을 이용하여 지도를 제작하고, 이는 인터넷 연결망과 사이버 공간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리고 지도를 제작하던 주체가 확실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누구나 자신만의 지도를 제작할 수 있다. 지도는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여러 방식으로 표현되어 왔지만, 지도가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과 목적은 비슷하다. 즉, 지도란 우리가 살고 있는 지리적 공간을 축소된 그림, 약속된 기호 또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지도에는 장소의 자연지리 정보는 물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과 삶이 축적되어 있다. 따라서 한 지역의 지도 변천을 살펴본다는 것은 그 지역에 있었던 자연적 변화를, 그 지역의 역사를,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생각을 살펴본다는 것을 뜻 한다. 그러므로 경기도 지도를 통해 경기도 지역의 모습과 역사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지도로 본 조선시대 이전 경기도

현재 전하고 있는 경기도 지도 대부분은 조선시대 이후의 지리 정보를 담고 있으며, 그 가운데 대다수는 16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현전하는 지도 이전의 경기도 지역의 모습은 역사적 자료를 통해 오늘날 다시 지도로 만들어 볼 수 있다. 우선 ‘경기(京畿)’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민 족문화대백과 사전에 따르면, ‘경’은 ‘천자(天子)가 도읍한 경사 (京師)’를 뜻하고, ‘기’는 ‘천자의 거주지인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이내의 땅’을 의미하는 것으로, ‘경기(京畿)’라는 지명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지역적 범위가 확대되어 ‘왕도의 외곽 지역’이라는 일반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왕도의 외곽지역을 ‘경기’라고 칭한 것은 고려시대이다. 고려는 건국 이후 수도인 개경(開京)을 개주(開州) 혹은 황도(皇 都) 등으로 부르다가 995년(고려 성종 14)부터 개성부(開城府)라 칭하였다. 그리고 개성부는 개성에서 가까운 6개 고을인 적현(赤縣)과 적현보다 멀리 떨어진 7개 고을인 기현(畿縣)을 관할하였고, 이 지역이 바로 고려 경기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그림 1).

그림 1. 997년 적현(赤縣)과 기현(畿縣) 지도(좌) 1018년 경기 지도(우)

1018년(현종 9) 고려는 대대적인 지방제도 개편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주현(主縣)-속현(屬縣) 제도의 기틀을 완성하였다. 개성의 외곽지역을 ‘경기(京畿)’라고 칭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며, 기존의 개성부를 없애고 새로 개성현령을 두었다. 당시 경기의 영역은 정주(貞州)와 덕수(德水), 강음(江陰)의 3개 현을 관할하였던 개성현(開城縣)과 송림(松林)과 임진(臨津), 토산(兎山), 임강(臨江), 적성(積城), 파평(坡平), 마전(麻田) 등 7개 현을 관할한 장단현(長湍縣)의 현령관(縣令官)이 축이 되었다. 즉, 당시 경기는 12개 현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개성현과 장단현이 주현(主縣) 이 되고, 나머지 10개 현은 속현으로 편제되었다(그림 1). 이때부터 칭해진 ‘경기’는 천년이라는 역사 속에 지리적으로 그 위치와 소속 행정구역이 변화하였고, 그 시간의 변화 속에 ‘경기’ 지역의 삶의 모습과 문화가 만들어져 왔다.

1062년(문종 16)에 고려의 경기는 일부 개편된다. 개성현이 개성부로 복구되었으며, 개성현령 또한 지개성부사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서해도 평주의 관할 하에 있던 우봉군을 경기에 새로 편입시 켰다. 이에 당시 경기는 1부(개성부)와 1군(우봉군), 그리고 기존의 11현으로 구성되었으며, 무신집권기에 해당하는 1219년(고종 6) 당시의 경기는 2부(개성부와 승천부)와 1군, 10현 등 13개 군현 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몇 번의 크고 작은 행정구역 변화가 있었고, 고려 말기인 1390년(공양왕 2)에는 그 영역을 확대하고, 확대한 경기 지역을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분리하였다. 기존의 경 기 소속 군현 중 장단(長湍)과 임강(臨江), 토산(兎山), 임진(臨津), 송림(松林), 마전(麻田), 적성(積城), 파평(坡平) 등 8개 군현은 경기좌도에, 그리고 개성(開城), 강음(江陰), 해풍(海豊), 덕수(德水), 우봉(牛峯) 등 5개 군현은 경기우도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경기좌도에는 양광도의 한양(漢陽), 남양(南陽), 인주(仁州), 안산(安山), 교하(交河), 양천(陽川), 금주(衿州), 과주(果州), 포주(抱州), 서원(瑞原), 고봉(高峯) 등과 교주도의 철원(鐵原), 영평(永平), 이천(伊川), 안협(安峽), 연주(漣州), 삭녕(朔寧) 등을, 경기우도에는 양광도의 부평(富平), 강화(江華), 교동(喬桐), 김포(金浦), 통진(通津)과 서해도의 연안(延安), 평주(平州), 배주(白州), 곡주(谷州), 수안(遂安), 재령(載寧), 서흥(瑞興), 신은(新恩), 협계(俠溪) 등을 추가로 편입시켰다(그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