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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옛 읍치 마을의 역사를 계승하고 있는 성황제

경기학광장Vol.2 _ Information & News

< 경기도 옛 읍치 마을의 역사를 계승하고 있는 성황제 >


- 경기학광장Vol.2 _ Information & 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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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에는 옛 읍치에서 행해졌던 대표적인 의례인 성황제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안산의 잿머리성황제와 시흥의 군자봉성황제가 그것이다. 이들 성황제는 2015년 말에 경기도 무형 문화제 제 58호와 59호로 나란히 등재되었다.

안산 읍치의 이동(일제강점기 1:50,000 지도, 종로도서관 소장, 『안산시사』1, 2011, 159쪽 재인용)

성황(城隍)이나 성황신에 대한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 중에 성황이 본래 중국의 성곽과 성 주변을 감싸고 있는 연못, 즉 성지(城池)를 뜻하는 것이니 성곽과 성지의 신(神)이 성황신이라는 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민속학에서는 중국의 성황 신앙이 들어오기 이전에 한국 고유의 서낭 혹은 서낭당 신앙이 존재했다고도 본다. 유래가 어찌되었든 우리나라 성황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 성종 15년(996) 안종(安宗) 욱(郁)에 대한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종은 고려 8대 임금인 현종의 아버지가 된다. 그는 죽기 전에 어린 아들에게 “내가 죽거든 이 금(金)을 지관에게 주고 나를 이 고을 성황당 남녘 귀룡동(歸龍洞)에 매장하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 고 당부했다.
이 기록만으로 보면 10C 후반에 이미 성황 신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문종 9년(1055)에는 성을 새로 쌓고 성황신사(城 隍神祠)를 설치하여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했던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성황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시흥 군자봉 성황당과 안산 잿머리 성황당의 위치

이러한 성황신앙은 점차 향촌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고 본관인(本貫人)이 그 지역의 성황신으로 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고려 후기에는 성황신앙이 향촌 공동체 신앙으로 발전했고 성황신은 점차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성황신앙은 전래 초기에는 국가나 관에서 주도해 나갔지만 점차 지역민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마을신앙의 하나로 변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서울의 한강 유역에 많이 남아 있는 부군당 신앙과 비슷하다. 부군당 역시 조선 초기에는 서울의 여러 관청이나 지방 관아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점차 마을에 지어지면서 마을신앙으로 변하게 된 사례이다.
이러한 성황사 의례는 무당에 의해 굿의 형태로 지내기도 했다. 특히, 별기은(別祈恩)이 이러한 형태를 잘 보여준다. 별기은이란 국가에서 정기적으로 행하는 국행제 이외에 왕실에서 별도로 치제하는 제의를 일컫는 말이었다. 별기은은 팔관회나 연등회와는 별도로 행해지는 산천제로서 명산대천에서 무격에 의해 행해지는 국가적인 무속제의였다. 그런데 이러한 별기은의 전통은 성황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순창에서 명종 8년(1563)에 기록된 「순창성황대신사적(淳昌城隍大神事跡)」에 의하면, “해마다 5월 1일에서 5일까지 향리 5명을 번갈아 정하여 각자 그의 집에 당을 설 치하여 대왕이 부인을 거느리게 하고 큰 깃발을 세워 표시하였다. 무당의 무리들이 어지러이 떼 지어 모이고 나열하여 정재(呈才)를 하며 순행하여 제사를 받드니 역시 지금껏 폐지되지 않은 것은 신령스런 신의 덕이 사람들의 눈마다 엄숙히 들어서이다.”라고 하여 당시 성황제를 할 때는 무당들이 굿을 요란스럽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안산 잿머리 성황당 전경

잿머리 성황제와 군자봉 성황제 역시 이러한 전통의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지금의 유가 행렬과 김부대왕을 모시는 산제와 당굿이 그러한 전통의 지속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두 성황당의 존재는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어 그 연원이 명확하고 김부대왕과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 모셔지고 있다는 동질성 등이 경기도의 대표적인 지역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안산 잿머리 성황제와 시흥 군자봉 성황제는 역사적으로 관련이 깊다. 즉,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나 『여지도서』의 기사를 보면, “성황사는 2곳이 있는데 하나는 관아에서 서쪽으로 21리, 다른 하나는 서쪽 32리에 있다.” 라고 하여 서쪽으로 21리에 있던 성황사는 시흥 군자봉 성황사를, 서쪽 32리에 있던 성황사를 안산 잿머리 성황사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근거로 『안산시사』에 따르면, 안산의 옛 읍치가 군자산성에 위치하였다가 언젠가 목내동으로 이전하였고 1441년을 기점으로 수암동으로 이전한 것으로 보았다. 통상 성황사는 읍치 주변에 있는 것을 감안하면 군자산성에 읍치가 있을 때 군자봉 성황사를 건립하였을 것이고 다시 목내동으로 이전할 때 인근에 잿머리성황사를 건립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안산의 잿머리 성황당과 시흥의 군자봉 성황당이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 두 성황당 의례가 나란히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이다.

안산 잿머리 성황당 내부

잿머리 성황제 유가 돌기

잿머리 성황제 줄광대 놀음

필자는 2014년에 군자봉 성황제와 잿머리 성황제를 현지 조사한 바 있다. 당시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이 두 성황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두 성황제는 모두 10월 초에 개최가 되는데 잿머리 성 황제가 10월 초하루에, 군자봉 성황제가 초삼일에 개최된다. 안산의 잿머리 성황당은 성곡동에 있는 야트막한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성황당이 세워지게 된 유래로 고려 때 최고의 외교가 로 알려진 서희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서희가 중국에 사신으로 가기 위해 성곡리 해안가 뱃터에서 배를 타려고 하자 폭풍우가 몰아쳤다. 이에 뱃길의 무사함을 비는 용왕제를 지내고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소복한 여인 두 명이 나타났다. 한 명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김부대왕)의 비 홍씨였고 또 한 사람은 홍씨의 모친인 안씨였다. 두 여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홍씨가 김부대왕과 결혼하였는데 첫날밤에 소박당하여 친정에 돌아와 청상에 죽었다는 것이다. 이에 모녀가 한을 품고 혼령이 되어 떠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희에게 부탁하기를 모녀가 의지할 집 한 칸이라도 지어주면 은혜를 갚을 것이라고 했다. 서희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이튿날이 되자 그곳에 작은 성을 쌓고 아담한 집을 지은 후 이 곳에 두 여인의 화상을 그려 봉안하였다. 그러자 폭풍우도 물러가고 서희 일행은 무사히 중국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어진 사당이 지금의 성황당이고 성황당 의례도 이렇게 시작된 것이라고 전한다.

군자봉 성황당 터

현재 잿머리 성황제는 ‘성곡동 동민회’가 주관하고 있다. 원래 성황제는 성곡동(군자면 성곡리)의 자연마을이었던 무들, 돌안말, 벌말, 안말, 골우물 등 5개 마을이 공동으로 지냈다. 1986년 안산 신도시건설로 인해 마을 전체가 폐동되기 전까지는 135세대가 거주하고 있었던, 군자면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었다. 마을이 폐동되면서 5개 마을 주민들의 친목 도모와 “5개 마을이 공동으로 지내던 잿머리 성황제의 지속적인 개최와 원형의 보존․전승을 위해” 1987년에 동민회를 결성하였다고 한다.
동민회가 결성되기 이전에도 5개 마을이 공동으로 성황제를 주관했고 지역의 중요 사안들을 함께 해결해 나갔다. 1971년에 성곡 초등학교 설립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성황제 유가를 돌 아 모금을 하기도 했고 1990년에는 성황당을 복원하기 위해 4천여 만원의 성금을 모으기도 했다. 2005년 3월에는 성황당에 화재가 나서 또 한 번 성금을 모아 보수하기도 하였다. 1983년부터 관 과 협력하여 정식으로 제1회 행사를 치른 이후에 현재까지 매년 지속적으로 개최되기는 했으나 마을이 이주한 이후로는 유가나 줄광대놀음 등이 생략되는 등 간소하게 치러졌다. 그러다 1990년 성황당을 새롭게 복원한 이후에는 유가와 줄광대놀음을 다시 부활시켜 현재까지 행하고 있다.

군자봉 성황제 산신맞이

안산 잿머리 성황제가 벌어지고 이틀 후인 10월 초사흘이 되면 시흥의 군자봉에서 성황제가 펼쳐진다. 군자봉 성황당은 군자봉 정상에 그 터가 남아 있다. 성황당이 있었던 자리에 제단과 느티나무 신목만 남아 있다. 이 군자봉 성황당에도 김부대왕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경순왕이 고려에 사직을 넘겨 준 이후에 안씨부인과 함께 이 곳 군자봉 아래 구준물마을로 와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경순왕이 죽자 안씨부인은 매일 군자봉에 올라 치성을 드렸고 어느 날 경순왕이 안씨부인의 꿈에 나타나 부인을 위로하고 사라졌다. 이후 이야기는 잿머리 성황당 설화에서 나타난 서희 이 야기와 비슷하다. 다만 군자봉 정상에 지은 당에 경순왕와 안씨부인만을 모셨다는 점이 다르다.
군자봉 성황제는 현재 ‘군자봉 성황제 연구보존회’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원래는 1993년에 ‘경기도민속예술경연대회’ 참가를 계기로 ‘군자봉 성황제 민속보존회’가 설립되었으나 이후 활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다가 2009년에 재건을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부분 인근 지역에 거주하고 있지만 이곳 군자동 구준물에 살다가 이사를 간 사람들도 다수 참여하고 있다. 현재 보존회는 풍물을 치는 회원들, 노인회, 부녀회원들과 당주무당을 중심으로 전수를 진행하고 있으며 마을회관 내에 전수 공간을 별도로 마련해 놓고 있다.

군자봉 성황제 서낭기 모시기

원래 성황제는 삼월 삼짇날과 시월 초사흘, 이렇게 일 년에 두 번을 했다. 삼월은 ‘꽃맞이’라고 해서 3년에 한 번씩은 대규모 유가를 돌았다. 즉 정월 초사흘부터 시작해서 2월 그믐 즈음까지 유가를 돌았다. 유가를 돌 때는 구준물 마을은 물론이고 주민들 중 시집 간 집이나 이사 간 집까지 찾아갔기 때문에 한 번 돌기 시작 하면 2~3개월이 걸렸다. 군자봉 성황제의 당주무당인 고현희씨에 의하면, 유가를 돌게 되면 먼저 섣달그믐에 대왕님을 굿당에 모셔 놓았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에 비손을 하고 시루를 찌면 소달구지가 와서 여기에 시루를 싣고 동네를 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유가는 음력 3월 2일까지 돌았고 삼월 삼짇날에는 굿을 하였다고 한다. 현재 보존회원들은 당시 어른들이 유가를 도느라 보름 정도 집에 들어오지 않다가 돌아오면 다른 어른들이 교대해서 다시 나가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유가돌기가 이 정도였으니 당시 성황제를 위해 들이는 정성과 관심이 대단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또한, 안산 잿머리 성황제 유가를 돌 때는 항상 여기를 찾아와 인사를 했다고 한다고 하니 잿머리 성황당과 이곳 군자봉 성황당이 연관이 깊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군자봉 성황제 서낭맞이

이러한 유가 행렬은 한국전쟁 이후 중단되었다가 2005년 복원 행사를 계기로 해서 현재는 성황제 전에 인근 마을 몇 집을 도는 형태로 간소화해서 진행하고 있다. 유가를 다 돌면 굿이 시작된다. 굿은 군자봉 성황당 터에서 먼저 벌어지고 이것이 끝나면 산을 내려와 당주집에서 하게 된다. 원래는 군자봉 성황당에서 모든 굿이 행해져야겠지만 지금은 당집이 없으니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이것을 순서대로 살펴보면 먼저 풍물패와 서낭기를 앞세우고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산 정상에 오르면 신청울림을 시작으로 해서 뒷전까지 굿을 하게 되는데 점심 무렵에 굿은 끝난다. 굿이 끝나면 성황당 터에 세워 두었던 서낭기를 메고 다시 산을 내려오게 된다. 산을 내려와 당주집 대문에 서낭기를 세워 놓고 서낭맞이를 한다. 서낭맞이 이후에는 당주 집에서 다시 굿을 하게 된다.
이처럼 경기도 지역에서는 유일한 성황제가 시흥과 안산에서 전승되고 있다. 연원을 길게 잡으면 고려 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둘 다 읍치의 성황사 의례이며 모시는 신이 동일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전국에서도 거의 유일하지 않나 생각된다.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 두 성황제가 2015년에도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어느 한 지역만 된 것이 아니라 두 지역이 동시에 지정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이 두 성황제는 앞으로도 경기도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재로 전승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각 기 다른 지역이기는 하지만 역사적 연원이 비슷하고 모시는 신도 동일하기에 두 지역 각자 지내는 성황제 이외에 이 두 성황제를 연계하여 ‘경기도 성황제 축제’를 기획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글 김태우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문위원으로 근무한 바 있으며 경기도문화재 전문위원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신한대학교 교양교육원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서울의 공동체의 례와 주도집단』, 『경기도의 장인』(공저)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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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2 _ 2019 가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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