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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살찐 유적, 경기도의 소규모 고고학 유적

경기학광장Vol.2 _ Column & Study

< 작지만 살찐 유적, 경기도의 소규모 고고학 유적 >


- 경기학광장Vol.2 _ Column & Stud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고고학 유적이라고 하면 우리는 피라미드를 생각하고, 사라진 아틀란티스 제국 등을 떠올린다. 한국에서도 무령왕릉, 천마총 등 신비에 둘러싸인 유적을 떠올리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고 고학자라면 영화로 알려진 인디아나존스처럼 넓은 밀짚모자, 채찍과 반바지 탐험복을 입은 멋진 탐험가를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탐험가들은 이러한 복장을 하고 전 세계의 보물을 찾아 누볐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탐험가라기보다는 약탈자에 가깝다. 당시 약소국가였던 이집트와 터키 등에서 보물탐험을 통해 수집한 유물들을 자국으로 옮겨가곤 했 다. 이러한 눈높이로 인해 일반인들은 고고학 유적이 매우 현란하고, 신비로운 존재로만 비춰지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 고고학 유적은 일반적인 민초들이 살았던 흔적들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최근 국가의 발굴조사 비용 지원을 통해 이루어진 발굴조사들은 작지만 내실로 가득차고, 우리 선조의 삶의 향기를 풍기는 유적들이 대단히 많다. 이번 호에서는 작지만 내실로 가득 찬 고고학 유적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양평 양수리 두물머리의 밤 풍경

양평 양수리 유적은 서울에서 양평으로 가는 6번 국도를 따라 남양주를 지나서 도착할 수 있다. 요즘은 경의중앙선이 지평까지 연장되어 있어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양수역에서 내리면 쉽게 도착할 수 있다. 최근에는 둘레길이 잘 놓아져 있어 자전거 등의 라이딩족이 자주 찾는 곳이 되었다. 자동차로는 신양수대교를 타고 양평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양수리의 서쪽으로 진입하는 도로가 잘 닦여 있다. 아니면 45번 국도를 따라 청평 방향으로 이동하면 양수리의 동쪽으로 진입하는 양수대교를 통해 양수리에 다다를 수 있다.

양수리는 현재 팔당댐의 건설과 더불어 강물의 수위가 높아짐에 따라 마치 섬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레고랜드(Lego Land)를 개발하기 위하여 조사된 춘천 중도유적이 대표적이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1990년대에는 경춘선 열차를 타고 춘천 중도 일대의 민박집으로 MT(Membership Training)를 떠나곤 했다. 당시 중도는 유명한 유원지로서 춘천에서 배를 타고 중도로 들어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주변에 댐이 건설되기 이전 북한강의 수위가 낮았던 시기에는 중도는 섬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양수리 역시 현재는 섬과 같은 모습이지만 이전에는 섬이 아니었다. 양평 양수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서 한강으로 연결된 지역이다. 두 강이 만나는 지역이라 하여 두물머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두물머리는 두 강이 만나 물의 흐름이 급격히 느려지면서 넓은 자연제방을 형성해 놓았다. 이렇게 형성된 자연제방은 선사 및 고대의 마을이 들어설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입지조건을 갖췄다.

양수리 지역에 대한 조사는 1970년대 팔당댐 건설에 따른 수몰 지역에 대한 조사로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수몰이 예상되는 저지대를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져 주로 청동기시대 무덤과 마을들 이 일부 확인되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90년대 말 경의중앙선 전철의 복선화 사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대규모 원삼국시대 마을이 드러났다. 특히 원삼국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집 자리와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하였다. 이후 양수리 지역은 개인 건물을 신축하기 위하여 실시한 발굴조사로 인해 소규모 유적이 무려 20여 건에 달하게 되었다. 이미 양수리 전체가 유물산포지 및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어 개인들은 국가를 통해 발굴조사 비용을 지원받아 건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양수리 유적이 조금씩 파괴되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양수리 708-3번지 유적 원경

이번에 소개할 유적은 양평 양수리 708-3번지로 양수리의 가장 남쪽 두물머리 끝에 위치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면서 형성한 바다와 같은 넓은 강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지역이다. 양수리는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이는 선사시대 및 역사시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집자리들이 풍광 좋은 곳을 따라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는 점 역시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조사는 2019년 5월 31일까지 약 70일간 이루어졌는데 조사 면적은 376㎡로 소규모 국비지원에 해당하는 범위였다. 조사 결과 이 곳에서는 청동기시대 집자리 15동, 도랑유구 1기, 원삼국시대 집자리 20동, 수혈 구덩이 27기, 도랑유구 4기, 조선시대 수혈구덩이 10기, 건물지 6동 등 총 83개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양수리 708-3번지 조사 결과

조선시대 유구가 가장 위층에서 발견되었고, 원삼국시대가 중간 층, 청동기시대가 가장 아래층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유구가 매우 복잡하고 밀집도 및 중복이 심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당시 이 곳이 사람이 살기에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음을 방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청동기시대 집자리는 대부분 세장 방형으로 중앙을 따라 여러 개의 화덕자리가 만들어진 구조이다.

양수리 708-3번지 유적 청동기시대 집자리(왼쪽) 및 원삼국시대 집자리(오른쪽)

▲ 양수리 708-3번지 유적 청동기시대 출토 유물(1) 

▲ 양수리 708-3번지 유적 원삼국시대 출토 유물(2∼3)

그리고 원삼국시대 집자리의 화덕시설은 한쪽 벽면에 온돌과 같은 구들을 시설한 것과 짧은 부뚜막이 시설된 것이 발견되었다. 우리나라 온돌의 기원으로 알려진 외줄구들은 원삼국시대 중부지 역에 처음 등장한다. 주로 중국의 동북지역 내지 한반도의 동북지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외줄구들을 볼 수 있는 집자리가 양수리 708-3번지 유적에서도 다수 발견되었다. 출토 유물은 청동기시대 토기와 각종 석기류, 원삼국시대 중도식무문 토기와 한성백제 토기류 등이 있었다.
과거의 마을 유적이었던 두물머리 유적은 현재 시민들의 쉴 공간으로 새롭게 꾸며졌다. 드라마의 촬영장소, 시민들의 산책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유명해졌다. 주변에는 소위 맛집으로 등록된 다양한 먹거리 음식점들과 아기자기한 카페 거리로 새롭게 단장되어 있다. 이곳은 선사시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과거의 마을이 현대의 복합 공간으로 새롭게 리모델링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석양이 내려앉은 두물머리에서는 과거 1600년 전의 온기가 흐르고 있다.

다음으로 경기도 광주시 소재 역동 유적이다. 광주시는 서울의 상수원을 품고 있는 지역으로 기존에는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있어 경기도에서도 가장 개발이 더딘 지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발이 더딘 덕분에 많은 유적들이 잘 보존될 수 있는 수도권의 유일한 지방자치단체가 된 것이다. 이러한 지역에 개발이 시작된 것은 제2영동고속도로를 만들기 위해 도심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가 개설되면서부터이다. 자연스럽게 도로 좌 우를 따라 상업시설이 들어서게 되면서 다양한 발굴조사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미 조사된 광주 곤지암리 유적도 역시 역세권 개발 과정에서 알려진 유적으로, 원삼국시대 이 지역의 유력 정치체가 있었던 마을로 유명세를 탔다. 오늘 살펴볼 광주 역동 유적은 바로 이 곤지암리 유적과 쌍벽을 이룰 수 있는 대표적인 마을 유적이다.
광주 역동 지역은 인접한 장지동과 더불어 경안천이 굽이 흐르면서 만든 넓은 충적대지상에 위치한다. 그 동안 이루어진 소규모 조사 성과들로 볼 때 장지동과 역동은 각각 다른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광주시는 경기도의 다른 지역과 달리 중간 크기의 산들이 무수히 많다. 따라서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나마 최근 새로 만든 3번 국도를 타고 자가용 을 이용해서 태전인터체인지를 이용하면 역동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대중교통은 경강선 전철을 이용해 경기광주역에서 내리면 역동 유적에 접근할 수 있다. 광주 역동 216-27번지 유적도 개인이 건물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는 2019년 3월 13일부터 2019년 5월 24일까지 (재)한국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역동 216-27번지 유적 조사 결과

역동 216-27번지 유적 청동기시대 집자리

▲  역동 216-27번지 유적 삼국시대 집자리

조사결과 청동기시대 집자리 2동, 삼국시대 집자리 7동 및 기타 유구 85기 등 총 94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좁은 면적이 조사된 점을 감안할 때 매우 많은 유구들이 발견되어 당시 이 지역의 마 을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좋은 유적으로 평가된다. 청동기시대 집자리는 방형 내지 장방형으로 중앙 부분에 화덕시설을 여려 개 가지고 있는 구조이다. 삼국시대 집자리는 여·철자(呂·凸字) 모양 집자리로 외줄구들은 발견되지 않고, 뒷벽쪽에 짧은 일직선 모양의 부뚜막을 시설한 형태이다.
청동기시대 집자리에서는 반달모양석도[半月形石器]를 비롯한 다양한 석기류와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 등이 출토되었다. 삼국시대 집자리에서는 중도식무문토기(中島式無文土器), 한성 백제 토기류 등 기원후 4세기 이후 유물들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특히 삼국시대 집자리에서 출토된 솥과 시루는 삼국시대 사람들의 식사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선사 시대까지는 시루가 개발되지 않아 밥을 끓여 먹는 수준의 식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원삼국시대부터 시루가 등장하면서 찌는 음식 조리법이 가능하게 되었고, 다양한 방식으로 음식을 조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리 방법의 발달은 다양한 그릇들과 저장용기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 이후 단순한 식기 조합에서 복잡한 식기 조합, 나아가 제사용 용기 등의 등장을 촉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역동 216-27 유적 출토 유물(주발)

역동 216-27 유적 출토 유물(반달모양돌칼)

역동 216-27 유적 출토 유물(솥과 시루)

최근 광주시도 경강선 전철이 연결되고, 도로가 잘 발달하면서 서울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역 주변의 역세권 개발과 함께 소규모 발굴조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 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유적들이 파괴되고 있는 점은 개발과 보존이라는 빛과 그림자를 잘 보여준다. 고고학 유적은 현재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후손에 넘겨주고, 잘 보존할 수 있도록 할 의 무도 함께 지는 것이다. 특히 양평과 광주시와 같이 소규모 단위로 조각조각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소중한 유적이 훼손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후손을 위해서라도 체계적인 발굴, 보존 대책과 더불어 두 지역의 유적이 더 이상 파괴되지 않도록 조치할 필요가 있다. 그 대안으로 선사 공원 등을 만들어 관광 자원으로 개발한다면 유적의 보존과 활용의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대한 각 지방자치단체의 의지가 그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한 시점이다. 뜨거운 낮이 지나면, 서늘한 바람이 부는 밤이 찾아온다. 현재를 지켜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허락되지 않는다. 따라서 성숙한 문화 의식 속에 소중한 유적을 지키기 위한 인식과 의지가 공유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역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자 후손들에 대한 빚이라고 생각한다.


글 박경신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학예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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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2 _ 2019 가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0.18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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