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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조(목적)
본 가이드는 재단법인 경기문화재단의 ‘온라인 아카이브 플랫폼 지지씨(www.ggc.ggcf.kr. 이하 ‘지지씨’)’의 기관회원(이하 ‘회원’)의 정의 및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회원의 생산자료에 관한 기록 저장과 활용에 관한 내용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제2조(정의)
본 가이드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지지씨’는 경기도 소재 문화예술기관의 생산자료 등록과 확산을 위해 경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온라인 아카이브 플랫폼입니다.
② ‘회원’이란 소정의 가입 승인 절차를 거쳐 지지씨 글쓰기 계정(ID)을 부여받고, 지지씨에 자료 등록 권한을 부여받은 경기도 소재 문화예술기관 및 유관기관을 의미합니다.
‘생산자료(=콘텐츠)’란 ‘회원’이 지지씨 플랫폼 상에 게재한 부호, 문자, 음성, 음향, 그림, 사진, 동영상, 링크 등으로 구성된 각종 콘텐츠 자체 또는 파일을 말합니다.
제3조(가이드의 게시와 개정)
① 경기문화재단은 본 가이드의 내용을 ‘회원’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지지씨 플랫폼의 기관회원 등록 안내 페이지에 게시하여, 자유롭게 내려받아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합니다.
② 본 가이드는 경기문화재단의 온라인 플랫폼 운영 정책 및 저작권 등 관련 법규에 따라 개정될 수 있으며, 가이드를 개정, 적용하고자 할 때는 30일 이전에 약관 개정 내용, 사유 등을 '회원'에 전자우편으로 발송, 공지합니다. 단, 법령의 개정 등으로 긴급하게 가이드를 변경할 경우, 효력 발생일 직전에 동일한 방법으로 알려 드립니다.
1. 본 가이드의 개정과 관련하여 이의가 있는 ‘회원’은 탈퇴할 수 있습니다.
2. 경기문화재단의 고지가 있고 난 뒤 효력 발생일까지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을 경우, 개정된 가이드를 승인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제4조(회원자격 및 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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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지지씨’의 가입 신청은 지지씨 누리집에서 가능합니다. 회원가입을 원하는 기관은 계정 신청서를 작성, 가입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1. 회원가입을 원하는 기관은 지지씨에서 내려받기 한 ‘온라인 콘텐츠 플랫폼 지지씨 계정 신청서’를 지지씨 공식 전자메일(ggc@ggcf.kr)로 제출, 승인 요청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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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분류 | 외부기관 | 경기문화재단 |
---|---|---|
중분류 | 뮤지엄(박물관,미술관)/협회/문화예술공공기관/시군청 담당부서 등 | 본부/기관 |
아이디 | 사업부서명/사업명 | 사업부서명/사업명 |
글쓴이 노출 | 아이디와 동일(한글) | 아이디와 동일(한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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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길 위의 부처에게 황제의 길을 묻다 - 고려시대 거석불의 기원 경기도의 미륵불 -
경기학광장Vol.2 _ Column & Study
< 길 위의 부처에게 황제의 길을 묻다
- 고려시대 거석불의 기원 경기도의 미륵불 - >
- 경기학광장Vol.2 _ Column & Stud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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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불의 등장
황제국 체제 완성을 위한 광종의 치밀한 준비 작업은 발굴조사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특히 죽주를 중심으로 한 안성 봉업사 일대에 집중되었다. 죽주지역에서는 봉업사가 대대적으로 수리되면 서 봉업사 뒤편의 죽주산성 역시 정비된 것으로 볼 수 있고 장릉리사지의 사찰과 망이산성이 신·개축되었다. 망이산성은 청주· 진천과 충주지역에서 올라오는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요지에 건설된 산성이다. 장릉리사지는 청주에서 진천을 거처 북쪽으로 올라오는 현재의 17번 지방도로가 동서를 가로지르는 38번 지방 도로와 만나는 지점 근처에 위치해 있다. 즉, 청주와 진천 쪽에서 올라오는 교통로를 감시할 수 있는 위치이다.
광종이 죽주지역에 위치한 사찰과 산성을 집중적으로 수리하고 개축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의 정책에 반발하는 세력들을 감시하고 제압하기 위해서이다. 본격적인 구신 숙청 작업에 들어가기 전 광종이 가장 경계했던 세력들은 아마도 자신보다 앞서 왕위에 올랐던 혜종과 정종을 지지했던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왕위계승전 와중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나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여전히 무시 못 할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 죽주지역에 집중적으로 사찰과 관방유적이 정비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광종이 가장 경계했던 세력 중 하나는 바로 진천의 호족들과 청주의 호족들이 아닌가 한다.
진천과 청주는 바로 혜종과 정종의 외척세력들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혜종의 장인은 진천 임희와 청주 김긍률, 경주 연예 등이 있다. 김긍률은 정종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이들 호족세력들은 광종이 등극한 후 표면적으로 불만을 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나 언제든지 광종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세력이었다. 이밖에 광종이 죽주지역에 관심을 집중한 이유는 바로 이곳이 핵심적인 교통의 요지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광종은 죽주를 황제국 체제를 본격적으로 선포하는데 있어 반발세력을 제압하는 배후기지이자 황제국 체제를 선전하는 전초기지로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죽주지역이 반발세력을 제압하는 배후기지의 역할을 했다는 내용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죽주지역이 황제국 체제를 선전하는 전초기지 역할도 하였다는 근거는 아래에서 설명하는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길위의 부처, 황제의 나라를 선포하다 –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고려시대 석조미술사를 연구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불상은 봉업사지 사역의 북동쪽 끝에 해당하는 매산리 마을 입구 미륵 당이라는 곳에 세워져 있다. 이 불상은 최근까지 거의 주목 받지 못한 채 고려시대 중기 혹은 말기의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근래의 연구성과를 통해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960(광종 11)~963년(광종 14)사이에 조성된 석불임을 논증하였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970년(광종 21)경부터 만들기 시작한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의 원형(prototype)으로 볼 수 있는 상이다.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에는 태조 왕건의 명으로 940년 완공된 개태사 석조삼존불의 영향이 강하게 잔존해 있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경우 보살상의 상호가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의 상호와 매우 유사하다. 특히 아래턱이 둥글게 발달해 있는 점, 눈이 올라간 각도, 상대적으로 짧은 코, 인중과 아랫입술 사이의 세로로 파진 홈 등이 매우 흡사하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 입상의 조성시기는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의 조형적 원형이라는 점과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의 양식적 영향이 미치고 있는 점, 보살 상이 자리잡은 지리적 위치, 황제가 착용하는 면류관과 비슷한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점, 봉업사지의 발굴조사 성과 등을 종합해 볼 때 광종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기 시작한 960(광종 11)~963년 (광종 14)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전경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태조 왕건의 명으로 940년 완공된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과 양식적으로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으나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하고 있는 점은 큰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보살상이 황제가 착용하는 면류관과 닮은 방형의 보개를 착용하고 있는 점은 매우 주목된다. 보살상이 보관을 착용할 경우 일반적으로 화려한 원통형 보관을 착용한다. 하지만 보관위에 면류관과 닮은 형태의 방형의 보개를 올려놓은 경우는 광종대 조성된 면류관형 보개착용 보살상과 후대에 이를 모방한 보살상들을 제외하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면류관 형태의 보개를 착용한 불상의 조성은 광종에 의해 창안된 새로운 신양식이라 할 수 있다. 광종은 현재 남아있는 기록을 보았을 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류관을 착용한 황제이다. 황제가 착용하는 면류관 모양을 보살상의 보개로 만든 이유는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에 황즉보살사상, 넓게 보아 황즉불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지금까지 연구 성과에 의하면 광종의 치세기간은 전제정치로 규정되었고, 호족세력의 숙청과 신진세력의 등용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던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한 신진세력으로는 군소 호족출신의 신진관료 및 과거관료, 쌍기를 비롯한 중국계 귀화인, 측근 문신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리고 당시 이루어진 여러 가지 제도개혁-과거제의 실시와 문한기관의 확장, 노비안검의 시행과 시위군의 확대, 중앙 관부의 변화 등은 그러한 체제를 만들거나 유지하기 위한 제도로 인식하였다. 광종의 왕권강화에 대한 노력은 앞에 언급한 정치기반의 확장과 제도개선 이외에 고려 왕실의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는 후삼국시대 고려의 영역에 대한 방어선 정비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최근의 발굴성과를 통해 알 수 있다.
▲ 부여 대조사 석조보살입상
즉위 11년이 되는 960년, 광종은 스스로 황제임을 천명하고 본격적인 구신숙청에 들어갔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960(광종 11)~963년(광종 14) 사이 죽주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세워진 이곳은 광종이 구축한 평택 자미산성-죽주- 충주-제천을 연결하는 방어선의 최전선 중앙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광종은 스스로 황제로 칭한 960년 직후, 교통의 요지인 죽주에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을 세워 만천하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선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을 살펴보는데 있어 눈여겨봐야 할 점은 석조보살입상이 서있는 입지이다.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현재 미륵당이라 불리는 곳에 서있으며 바로 옆에는 거찰 봉업사가 존재하였다. 봉업사지 발굴조사 결과 이곳에서는 다량의 명문 기와가 출토되어 광종대 크게 증·개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서있는 곳은 크게 봉업사의 영역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봉업사 중심사역에서는 한참 벗어난 북쪽 지역이다.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황제를 상징하는 중요한 불상이라면 봉업사지의 중심사역 내에 위치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업사지의 사역 북쪽 끝에 위치한 이유는 교통로 때문이다. 고려시대 전라도나 충청도 쪽에서 개경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청주를 거처 죽주산성 앞을 지나 북쪽으로 향하였다. 경상도 쪽에서는 월악산 하늘재를 넘어 충주를 거쳐 죽주산성 앞을 지나 개경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고려시대 죽주지역은 교통의 핵심 요충지였다.
안성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봉업사의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유는 충주 쪽과 연결된 교통로가 죽주산성 동쪽, 현재의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서있는 곳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충주 쪽에서 오는 사람들이 개경을 향하다 봉업사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죽주산성 동쪽의 갈림길에서 남쪽방향으로 내려와야 된다. 그리 먼 길은 아니지만 봉업사에 방문할 일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 굳이 남쪽으로 발길을 돌릴 이유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청주와 충주방향의 길이 만나는 삼거리의 북쪽에 세워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위치에 세워짐으로 해서 남쪽에서 개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나 개경에서 남쪽 지방으로 향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앞을 지나가야만 하였다. 즉, 광종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기 시작한 960년 무렵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석조보살입상을 선전효과가 가장 좋은 장소에 세움으로써 새로운 황제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온 만방에 효과적으로 선포한 것으로 보인다.
▲ 당진 안국사지 석조보살입상
▲ 익산 고도리 석조보살입상
대의를 입고 있으며 머리에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 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불상은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한국 불교조각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불상이 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고려 광종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본격적인 황제국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한 시기에 조성된 불상이다.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근래에 국보로 지정된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의 원형이된 불상이다. 은진미륵으로 알려진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은 그 크기로 인해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관촉사 석조보살입상보다 먼저 만들어졌으며 호족의 시대가 끝나고 황제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던 매산리 석조 보살입상의 가치는 아직까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면류관형 보개착용 불상 중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이 완공된 후
조성된 불상은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과 당진 안국사지 석조보살입상 등을 들 수 있다. 구읍리 불상의 상호는 관촉사 불상과
같이 볼이 넓으며 옆으로 퍼져 있는 모습이다. 구읍리 불상의 귀는 관촉사 불상의 귀와 같이 보발이 귀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구읍리 불상은 관촉사 불상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구읍리 불상은 관촉사뿐만 아니라 대조사 불상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은 황제가 착용하는 복식인 면복(冕服)형태의 대의를 착용하고 있다. 구읍리 석조보살
입상의 상호는 관촉사 불상을 모방하고 있으나 목걸이와 복식은
대조사 불상을 따르고 있다.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의 조성시기는
10세기 조성설과 11세기 조성설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10세기 말기나 11세기 초반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에서 관촉사와 대조사 불상의 형식적 특징이 모두 나타나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은 관촉사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하는 시기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10세기
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당진 안국사지 석조보살입상의 조성시기는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태평십(太平十..)”명 기와를 통해 조성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요의 성종(1021~1030)연간으로서 “태평십..” 은 1030년을 가리킨다. 안국사지에서는 막새기와가 단일종류의 것만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태평십...”명 기와를 창건기의 기와로 봐도 무방할 것이며 안국사지 석조보살입상은 이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보다 후대에 조성되었다면 매산리 불상에서는 관촉사 불상의 특징이 간취되거나 안국사지 불상처럼 석주형으로 조성되었을 것이다. 또는 구읍리 불상 같이 면복형 대의를 착용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에서는 관촉사나 대조사 불상에서 찾기 어려운 개태사 불상의 특징이 강하 게 남아 있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조성시기는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의 조형적 원형이라는 점과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의 양식적 영향이 미치고 있는 점, 보살상이 자리 잡은 지리적 위치, 황제가 착용하는 면류관과 비슷한 방형의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점, 봉업사지의 발굴조사 성과 등을 종합해 볼 때 광종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기 시작한 960~963년(광종11~14)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불의 영향 – 모방과 변형
본 글에서 언급한 고려 광종대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석불상들은 모두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하고 있는 석조보살입상들이다.
죽주(안성)와 논산, 부여 일대에 조성된 면류관형 보개 착용 석조보살입상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 조성되는 면류관형 보개의 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기도 일대에 등장하는 면류관형 파주 용미리 마애불 중 향 우측 불상 등이다. 이 중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과 흡사한 보관을 착용하고있는 포천 구읍리 석불입상은 11세기 전반기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되며 매산리 석불입상, 관촉 사 보살입상 등과 같이 황즉불 사상이 반영되어 조성된 석불이라 할 수 있다. 파주 용미리 마애불은 최근의 연구 성과에 의해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마애불임이 밝혀짐에 따라 고려전기의 면류관형 석불 착용과 달리 단순히 앞 시대의 면류관형 보개를 모방하여 조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충청도와 전라북도 일대에 등장하는 면류관형 보개착용 불상은 관촉사 보살입상, 대조사 보살입상 이외에 당진 안국사지 석불입상,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 김제 흥복사 석불입상, 예산 읍내리 석불입상 등이 있다. 이중 익산 고도리, 김제 흥복사, 예산 읍내리 석불상들은 단순히 방형의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하고 있다는 점 이외에 광종대 석불상으로부터 직접적인 형식이나 양식적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안성 아양동 석조보살입상
▲ 용인 미평리 석조보살입상
황즉불 사상이 반영된 불상 중 부여 대조사 석조보살입상과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은 주변지역의 다른 석불상에 양식적 영향을 그리 크게 미치지 못했다. 반면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주변의 석불상에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양식적 특징을 강하게 미치고 있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는 석불상의 편년은 고려초에서 후기까지 다양하다. 매산리 석조 보살입상의 조형적 영향이 미치는 석불은 가까이에는 안성과 용인지역뿐만 아니라 멀리로는 포천과 원주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안성 지역의 경우 안성 쌍미륵사 마애불과 안성 아양동 석조 보살입상에서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쌍미륵사 마애불의 경우 마모가 심하고 부조된 선각의 깊이가 얕아 상반신 이상은 알아보기 힘드나 하반신의 경우 다리와 다리 사이에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에서 보이는 돋을띠 문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성 아양동 석조보살입상의 경우 상호가 길고 크게 조성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과는 닮은 점을 찾기 어려우나 보관 중앙과 주변의 화문 장식이 매산리 석조 보살입상에서 기인했음을 알 수 있다. 용인 지역에서는 미평리 석불입상의 다리사이 돋을띠, 용인 목신리 석조보살입상의 상호 등에서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가까운 주변지역의 다른 석불상에 양식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점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원주 봉산동 석조보살입상의 경우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을 똑같이 모방하려고 시도하고 있어 주목된다.
원주 봉산동 석조보살입상은 봉산동 작은 야산위에 위치한 민가
옆에 세워져 있다. 이 석조보살입상은 높이는 1.78m로서 언뜻 보면 비슷한 크기의 원주지역 보살상들과 비슷한 양식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인의 위치, 보살상임에도 대의를 착용하고 있는 점, 대의의 하반신 옷 주름, 보관과 이마가 만나는 지점이 일직선이 아닌 여러 개의 반원형으로 표현된 점등은 봉산동 석조보살 입상이
약 5.6m 크기의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을 모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봉산동 석조보살입상의 보관 정상부는 현재 시멘트가 발라져 있어 둥글게 돌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원래의 형태는 평평하게 마감되어 있어 매산리 석조보살입상과 같은 면류관형 보개가 올려져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주 봉산동 석조보살입상은
세부적으로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과 차이를 보이는데 보관의
장식표현에서 차이점이 눈에 띤다. 봉산동 석조보살입상의 보관은 마치 황제가 착용하는 통천관의 뒷부분을 표현해 놓은 듯이 정면에서 보았을 때 좌우로 갈라진 수직의 물결문이 표현되어 있다.
원주 봉산동 석조보살입상의 상호는 1090년에 조성된 원주 입석사 마애불의 상호와 비슷한 점이 많아 조성시기를 입석사 마애불과 비슷한 시기로 유추할 수 있다.
11세기 말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원주 봉산동 석조보살 입상이 960년경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 입상을 모방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11세기 말경까지도 인근지역 뿐만 아니라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원주 지역까지에도 매우 중요한 석조보살상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라 하겠다.
길위의 부처, 건물에 갇히다 –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고려시대는 많은 거석불들이 조성되었다. 일반적으로 4~5m 정도 크기를 갖고 있는 석조불상을 거석불로 호명한다. 머리에 면류관 형태의 보개를 착용한 보살상은 경기도 안성과 논산 관촉사, 부여 대조사, 당진 안국사 등 한강이 남쪽에 주로 만들어졌다. 한강 이남쪽에 면류관형 보개 착용 보살상이 주로 만들어진 이유는 황제 광종의 권위를 해당 지역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황제라 칭한 광종대 이후 면류관형 보개착용 보살상은 11세기 초반까지 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이다.
▲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측면
▲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상호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포천군 군내면 구읍리에 위치한 용화당 안에 세워져 있다. 이 불상은 높이 4.4m의 큰 불상으로 명성황후가 불공을 드리기 위해 3년간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읍리 석불입상은 머리에 면류관 형태의 보개를 착용하고 있다. 보개는 사각형태이나 뒷부분의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되었다. 관에는 소용돌이 형태의 문양이 새겨져있고 관의 중앙에는 화불이 조각되었다. 비교적 큰 상호는 위엄 있고 후덕한 인상을 준다.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눈은 반개하였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있고 귀 가운데를 한 가닥의 굵은 보발이 가로지르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으며 삼도 아래에는 목걸이 형태의 장식물이 조각되었다. 법의는 두꺼운 통견의이다. 불상의 전면에 새겨진 옷 주름은 그물 형태로 돋을새김되었다. 오른손은 장지와 약지를 구부려 엄지에 붙인 채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가슴 위에 올렸다. 왼손은 손을 곧게 펴고 손바닥을 밖으로 한 채 배 부분에 붙여놓았다. 석불의 발 부분은 대좌와 함께 조각되었고 신체와는 떨어져있다. 구읍리 석불입상이 취하고 있는 모습 중 주목해야 할 부분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면류관 형태의 보개를 들 수 있다. 이 석불입상의 보개는
안성 매산리 석불입상 보개의 영향하에 조성되었음을 그 형태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관 부분에 표현된 장식문양은 구읍리 석
불입상의 보개가 매산리 석불입상의 면류관형 보개를 직모했음을 알게 해준다. 매산리 석불입상의 관 가운데 새겨진 꽃봉오리 모양은 구읍리 석불에도 새겨져있다. 다만 구읍리 석불에는 그 안에 화문(華紋) 대신 화불(化佛)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차이점이다.
둘째, 귀를 가로지르는 굵은 보발(寶髮)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보발은 8세기경 조성된 금동불이나 마애불에서 간간이 볼 수 있다. 이후 10세기 전반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상과 940년경 조성된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을 필두로 고려시대 전기에 다시 크게 유행한다. 특히 개태사 좌․우 협시불에서 보이는 귀를 가로지르는 굵고 선명한 보발의 영향은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경기․충청 지역의 석불상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구읍리 석불입상에 표현된 보발 역시 개태사 작품의 영향이 미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매우 크게 조각된 상호를 들 수 있다. 구읍리 석불입상의 상호는 신체와 비교했을 때 매우 크게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커다란 얼굴은 신체를 사등신으로 만들고 있는데 대표적인 사등신 불상으로는 관촉사 석불입상을 들 수 있다. 즉 구읍리 불상의 상호는 관촉사 석불입상이 영향을 끼친 것임을 알 수 있다.
넷째, 신체 전면에 새겨진 옷 주름을 들 수 있다. 구읍리 불상의 전면에는 마치 그물 같은 옷 주름이 돋을 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이러한 옷 주름은 다른 작품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11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예산 삽교 석불입상의 신체 앞면 옷 주름이 이러한 형태이다. 삽교 석불 입상에 새겨진 옷 주름 역시 돋을 새김으로 마치 그물처럼 조각되어 있다. 하지만 삽교 석불입상의 앞면 옷 주름의 수직선은 옷 주름 표현이 아니라 지팡이(錫杖) 조각의 연장선임을 알 수 있다. 구읍리 석불을 조성한 장인들은 돋을 새김 형태의 옷 주름 표현을 삽교 석불입상의 옷 주름 표현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도상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 것인지 또는 지팡이 표현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인지는 단정지을 수 없으나, 그들은 삽교 석불의 지팡이 표현마저 옷 주름으로 포함시켜 돋을 새김한 그물 모양의 새로운 옷 주름 문양을 창안한 것으로 보인다.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11세기 초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가 착용하는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포천 구읍리 석조 보살입상은 이러한 형태의 불상 중 가장 북쪽에 조성된 불상이다.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고려가 11세기 초반까지도 황제국 체제를 지향했었음을 방증하는 불상이다.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 입상은 한국전쟁 직후까지도 구읍리 마을 앞 농경지에 세워져 있 었다. 그러나 현재는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위로 작은 법당이 건립되어 있다. 길위이 부처였던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어느 날 집안의 부처가 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사찰측이 사찰 건물 안에 봉안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을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아 직접 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대외관계와 불상 양식의 변화
960년경 처음 등장한 면류관형 보개착용 보살상은 부여 대조사, 논산 관촉사를 거쳐 1030년 당진 안국사지에서는 석주형으로 완전히 형식화되고 이후 황즉불사상을 내포한 방형의 면류관형 보개착용 보살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안국사지 석불입상은 대의의 형태가 거의 보이지 않는 점을 고려한다면 여래형 복식을 입고 머리에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은 포천 구읍리 불상이 마지막으로 조성된 셈이다. 면류관형 보개착용 석조보살상들이 유행하지 않게 된 반면, 보개는 착용하지 않았으나 여래형 대의착용 보살상들은 원주 봉산동, 서울 광진구, 황해도 영파리, 서울 은평구 청담사 등에 계속해서 조성되고 있었다.
11세기에 들어와 면류관형 보개착용의 조성은 사라지고 여래형 대의착용 보살상은 지속적으로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충주 미륵대원 석불입상은 석주형 석불이며 머리에 팔각보개를 착용하고 있다. 미륵대원의 창건시기는 11세기말~12세기 초로 알려져 있다. 미륵대원 석불입상은 국가적 지원과 관심 하에 조성되었음에도 석불의 형태는 석주형이며 보개는 팔각보개를 착용하고 있다. 미륵대원 석불입상의 예로 보았을 때 11세기말 이후 12세기부터는 면류관형 보개착용 보살상이나 여래형 대의착용 보살상은 조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고려 내부의 종교적 상황의 변화도 중요하게 작용되었겠지만 국제정세의 역학관계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11세기 들어 국력이 성장한 요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주도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요는 1043년(정종 9), 1049년(문종 3), 1055년(문종 9), 1057년(문종 11)에 관복과 제후로 봉해질 때 천자가 내려주는 규(圭)를 보냈다. 1065년(문종 19)에는 구류관(九旒冠)과 구장복(九章服), 옥 규 등을 보내기도 했다. 이는 황제국 체제를 지향하는 고려를 견제하고 제후국으로 강등시키고자 하는 요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고려의 신하들은 임금을 칭할 때에 ‘신성제왕(神聖帝 王)’이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했는데 금을 사대하는 12세기 전반 인종 시절에 한 때 그 호칭을 중단한 적도 있었다.
고려의 황제국 체제 지향과 대외적관계의 충돌은 불상제작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요는 황제가 사용하는 12류 면류관을 고려가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 면 고려 중앙정부의 후원 하에 조성된 황제를 상징하는 방형의 면류관을 착용한 불상들은 11세기에 들어와 더 이상 후원을 받지 못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황즉보살을 구현하는 방법을 찾은 것으로 생각된다.
▲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원형보개
숭유억불국가 조선의 거석불 –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경기도의 석불 중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과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황제가 착용하는 면류관 형태의 보개를 머리에 쓰고 있다. 이 불상들은 불상 자체가 황즉불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도 황제가 쓰는 모자와 유사한 형태의 보개를 착용한 초대형 불상이 조성된 바 있다. 바로 파주 용미리 마애 이불입상이다. 용미리 마애불 중 향좌측의 불상은 원정모라 불리는 머리 부분이 둥근 모자를 착용하고 있다. 원정모는 원나라 황제나 귀족들이 착용하는 모자였다. 원정모는 고려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우리나라에서 유행하였다. 그 결과 조선초기 조성된 파주 용미리 마애불 역시 원정모를 착용한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원정모는 원나라 황제들이 즐겨 착용하는 모자였으나 면류관처럼 황제만 착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정모는 귀족들 역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파주 용미라 마애불이 원정모를 착용한 이유는 당시의 복식 유행이 불상에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파주시 광탄면 용암사 뒤편 장지산 자락에 있다. 높이 17m에 달하는 거대한 마애불인 용미리 마애이불 입상은 그동안 고려시대 대표적인 거석불 중 하나로 알려져 왔다. 마애불은 원형의 보개를 착용한 불상과 방형의 보개를 착용한 불상 두 구가 서로 병립하여 조성되었다. 마애불의 신체는 거대한 바위에 조각하였으며 머리는 별도로 조성하여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두 불상 중 원형의 보개를 착용한 불상은 용화수로 추정되는 지물을 잡고 있다. 방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두 불상의 착의는 양쪽 어깨를 덮는 통견형 대의를 입고 대의 안쪽에는 내의를 착용한 형태이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그동안 고려 초기 또는 고려시대 11세기 조성된 불상으로 알려져 왔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여겨졌던 이유는 고려초 대형석불들이 유행 하는 조류 속에서 건립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1세기 조성설의 근거는 이 불상이 고려 선종대인 11세기에 조성되었다는 전설 때문이다. 그러나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에 대한 근래의 연구는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조선전기에 건립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불상의 향우측 바위에는 “성화칠년칠월(成化七年七月)”로 시작하는 발원문이 있어 이 불상이 1471년(성종 2)년 조성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조성배경은 조선 초(1471) 함양군·심장기·한명회 등 세조 측근이 세조를 추도하고 성종과 정희왕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불상을 조성한 것이다. 고려 선종대의 설화는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을 고려대의 일로 부회한 것이다.
근래의 연구 성과 이외에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착용하고 있는 보개는 이 불상의 조성 시기가 고려 초기나 11세기가 아님을 방증한다. 불상이 착용하고 있는 보개는 대부분 원형이나 방형이다. 현재 보개를 착용하고 있는 불상은 약 80여구가 알려져 있다. 방형의 면류관형태 보개는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관촉사석 조보살입상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스로 황제라 칭한 고려 광종대 처음 등장한다. 후대 형식화가 진행되기 이전에 조성된 방형 보개는 황즉불 사상과 연관 지을 수 있다. 광종대 황제국 체제를 선포한 고려는 11세기경에도 대내적으로 여전히 황제국 제도를 유지 하고 있었다. 고려의 황제국 체제는 면류관형 보개착용 불상이 유행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원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이 방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보다 더 크게 조성되었다. 불상의 위치도 원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이 방형 보개 착용 불상보다 앞에 조성되었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고려 초기나 11세기경에 조성되었다면 방형보개를 착용한 불상은 황즉불 사상과 연관 지을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두 불상이 착용한 보개의 위치는 바뀌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고려 초기나 11세기 조성된 불상으로 보기 어렵다. 즉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기존의 연구 성과가 입증한 바와 같이 성화연간인 1471년(성종 2) 조성된 불상이라 할 수 있다.
경기도 일원에는 많은 불상들이 있다. 이 불상들 중에는 높이 4~5m가 넘는 거석불도 다수 존재한다. 이 불상들은 그동안 지방 호족들이 만든 지방불 양식으로 여겨졌을 뿐 구체적인 조성시기나 건립배경 등이 설명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 성과는 경기도의 미륵불이 황제체제를 선포하는 상징물이 되기도 하였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또한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이 죽은 왕을 추모하여 조성한 경우도 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러하듯이 경기도의 미륵불은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는 또 다른 사료이며 역사의 길을 밝히는 안내자라 말할 수 있다.
글 정성권
단국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불교미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태봉과 고려 석조미술로 보는
역사>, <고려의 국왕>(공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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