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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부처에게 황제의 길을 묻다 - 고려시대 거석불의 기원 경기도의 미륵불 -

경기학광장Vol.2 _ Column & Study

< 길 위의 부처에게 황제의 길을 묻다

- 고려시대 거석불의 기원 경기도의 미륵불 - >


- 경기학광장Vol.2 _ Column & Stud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황제불의 등장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많은 불상이 조성되었다. 불상을 제작하는데 있어 부처(여래)의 상과 보살상의 구분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여래상은 양쪽 어깨를 모두 덮는 옷인 통견이나 한 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 형태의 대의(大衣)를 착용한 것 이외에 머리나 신체에 장식을 극도로 제한하였다. 이에 반해 보살상은 목걸이, 팔찌, 천의, 보관 등 화려한 소품으로 신체를 장식하였다. 여래상과 보살상의 조각 형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는 국보 82·83 호로 지정된 감산사 아미타불입상과 미륵보살입상을 들 수 있다. 불상을 조성할 때 여래상과 보살상을 명확히 구분하여 제작하는 원칙은 몇몇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있다. 예외의 경우도 여래상이 일부 소품을 이용해 한정적인 치장을 하는 경우에 그친다. 그러나 나말여초기, 구체적으로는 본격적인 후삼국시대가 시작되는 10세기 이후부터 고려초기의 시기에 여래상만 착용하는 대의 형태의 옷을 입고 있는 보살상이 등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부처만이 입는 옷을 착용한 보살상은 고려 초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보살상이 부처가 입는 옷을 착용하고 있는 점도 주목되지만 더 눈길을 끄는 점은 보살상이 쓰고 있는 모자이다. 일반적으로 갓과 같은 형태로 불상의 머리 위에 모자처럼 올려진 별도의 돌을 보개(寶蓋)라고 부른다. 머리위에 보개를 쓰고 있는 형태의 불상은 현재 80여기 정도 알려져 있다. 이 중 가장 처음 만들어진 것은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대구 팔공산 갓바위 부처이다. 팔공산 갓바위 부처의 머리위에 보개가 만들어진 이유는 야외에 조성된 부처를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갓바위 부처의 보개는 현재 일부 파손되었지만 폭이 넓은 팔각형 모양으로 불상의 얼굴에 들이치는 빗줄기를 막을 수 있는 실용적인 장치였다.
통일신라시대 실용적인 이유로 만들어졌던 보개는 고려시대 들어와 실용성보다 상징성이 더 두드러진 보개로 변화되었다.
황제가 착용하는 면류관형 형태의 네모난 보개가 등장한 것이다. 면류관 모양의 방형 보개를 쓰고 있으며 여래상이 입는 대의 형태의 옷을 착용한 보살상은 고려 초에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 집중 적으로 만들어졌다. 면류관 모양의 네모난 보개를 머리에 쓴 불상 중 가장 유명한 불상은 은진미륵이라 불리는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이다. 논산 관촉사 보살상은 높이 18m가 넘는 우리나라 최대의 불상이다. 관촉사에 거대 보살상을 만들도록 지시한 사람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던 고려 제4대 임금 광종(光宗)이다.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은 한 때 우리나라 최악의 졸작으로 평가절하되 기도 하였으나 근래에는 고려시대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재평가되며 국보 제323호로 지정되어 그 명예를 회복하였다.

관봉 석조여래좌상(갓바위 부처)


황제가 착용하는 면류관 형태의 보개를 착용한 불상은 불교의 기원지인 인도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불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는 만들어진 바 없으며 유독 고려초기에만 등장하였던 불상이다. 이렇게 독창적인 불상이 어떻게 우리나라 불상 중 최대의 크기로 논산에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안성의 미륵에서 찾을 수 있다.
안성에는 미륵이라 불리는 많은 석불입상들과 다양한 형태의 석조불상이 산재해 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창건되어 후삼국시대와 고려 초기에 크게 중창되었던 안성 봉업사지 일대에 많은 불상들이 있다. 봉업사지와 그 주변지역에 있는 불상들은 죽산리 석불입상을 비롯하여 봉업사지 석불입상,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장명사지 석불좌상, 기솔리 석불입상, 기솔리 마애불입상, 두현리 석 조삼존불상, 국사암 석조삼존불입상, 기솔리 미완성 석불 등이다. 이 불상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와 후삼국, 고려시대 만들어진 석조불상들이다. 현재 면단위의 행정구역 중 봉업사지가 위치한 안 성시 죽산면의 석불 분포 현황은 죽산면과 인접하였으며 죽주에 포함되었던 이천과 용인지역 일부의 석불까지 합친다면 경주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분포를 보인다.
이 중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과 같은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하고 있어 주목된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황제국 체제를 지향했던 고려 광종대에 조성된 불상이다.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국보 제323호인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의 등장 배경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 열쇠이다.
황제를 상징하는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은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면류관형 보개착용 불상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불상이 안성 봉업사지 인근 에 조성된 것이다.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은 황즉불 사상이 반영된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면류관형 보개착용 불상인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안성 봉업사지 일대에 조성된 이유를 알아보자.


황제국 건설을 위한 전진기지 – 안성 봉업사지

광종은 태조 왕건과 충주유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광종은 치열한 권력투쟁을 통해 태조 왕건을 이은 혜종과 정종을 물리치고 고려 제4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집권초기의 광종은 당 태종과 명신들의 문답내용이 기술된 『정관정요』를 읽으며 부모를 위해 원당을 창건하고 아버지의 동료들이었던 구신들의 소리를 귀담아 들었다. 이러한 과정은 자신을 견제하는 강력한 호족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방편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광종은 자신의 힘을 축적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을 매우 치밀하게 수행해 갔다.
광종은 즉위 7년(956년)에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이 거느린 사병을 약화시켰다. 광종 9년(958년)에는 과거제를 시행하여 자신을 보필하고 지지할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광종은 본격적인 황제체제 구축을 위한 제도적 준비를 갖추어 갔다. 10년에 걸친 준비과정을 거친 광종은 마침내 즉위 11년(960)에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고 개경을 황제의 도읍으로 칭하였으며 서경을 서도라 명명하였다. 광종은 이때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였다. 960년은 지방호족이 세운 나라가 황제의 나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광종은 경신년인 960년부터 본격적이고 대대적으로 구신들과 정적들을 숙청하였다. 광종이 스스로 황제라 칭한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권위를 높여 자신에게 저항하 는 세력을 압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최승로전에 의하면 광종의 숙청작업은 960년부터 광종 말년까지 16년간 지속되었다. 황제권을 확고히 확립하고자 하는 광종과 강력한 사병을 거느린 구신들의 존재는 숙명적으로 병립할 수 없는 관계였다. 결국 어느 편의 실질적인 물리력이 상대편을 제압 할 수 있느냐에 따라 정국의 향배는 갈리게 되었다. 10년간 자신의 뜻을 숨기며 훈신숙장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준비해온 광종은 본격적인 숙청작업을 진행하는 집권중기에도 여전히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강력한 호족들의 반발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었다. 호족들의 반발에 치밀하고 철저히 대비하고 있는 광종 의 모습은 아래에서 설명할 유적의 발굴성과를 통해 알 수 있다.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

봉업사지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7년부터 2004년까지 경기도박물관에 의해 3차례의 발굴조사가 진행된 바 있다. 발굴조사 결과 봉업사는 통일신라시기 화차사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였으며 이 사찰은 나말의 시기에 폐허가 되었다가 능달에 의해 925년경 사역의 일부가 중창되었다. 이후 봉업사는 광종대에 들어와 진전이 건립되고 현재의 봉업사지 사역 대부분에서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졌다. 1차 발굴조사는 현재의 봉업사지 오층석탑 주변에서 진행되었다. 1차 조사에서는 21개의 건물지와 그 부속시설이 확인되었다. 2차 조사에서는 광종대 조성되었으며 태조 왕건의 진영을 봉안했던 진전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3차 발굴조사는 현재의 죽산리 삼층석탑 주변에서 진행되었고 발굴조사 결과 이 구역은 통일신라 말기에 폐허가 된 후 광종대에 크게 중창된 지역임이 확인되었다. 태조 왕건의 재위 기간에 청주 출신 능달에 의해 사역의 일부가 중창된 봉업사는 광종대에 들어와 전 사역에 걸쳐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다.

안성 죽산리(봉업사지) 삼층석탑

광종은 집권 중반기를 전후한 시기에 봉업사를 집중적으로 재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망이산성까지 수리하였다. 망이산성은 백제시대 축성된 토성과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에 사용 된 석성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1998년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망이산성이 광종대에 증축되었음이 밝혀졌다. 광종대 증축된 곳은 망이산성의 서쪽 문지 일대였다. 이곳은 안성 죽주지역에서 진천으로 향하는 교통로를 감시하기 좋은 장소이다. 광종대 죽주지역에서는 봉업사의 중창과 망이산성의 증축 등이 행해졌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찰이 창건되기도 하였다. 이 사찰은 장릉리 사지로서 2005~2006년 사이 중앙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 결과 광종대 초창된 것이 밝혀졌다.

광종은 집권 초인 954년, 충주와 안성 봉업사지의 중간지점에 어머니를 위한 사찰인 숭선사를 창건하였다. 이후 광종은 죽주 일대의 사찰과 관방유적을 정비하였으며 평택에도 성을 쌓았다. 평택 비파산성은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해 2004년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명문기와 등을 통해 비파산성은 965년 경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954년(광종 5년) 충주 숭선사를 창건한 광종은 956년경부터는 죽주에 위치한 봉업사를 본격적으로 중창하였다. 광종에 의한 봉업사 중창 사업은 광종이 황제체제를 선포한 960년(광종 11)경 이후에는 봉업사에 진전사원이 건립될 정도로 광종 집권 중반기에 집중적으로 시행되었다. 광종대에 추진된 봉업사의 대대적인 중창은 출토된 기와를 통해 보았을 때 광종대 후반과 경종, 성종 대에도 있었지만 주로 광종 집권 중기인 광종 956년(광종 7), 958년(광종 9), 961년(광종 11), 963년(광종 133)에 집중되었다. 죽주지역에 대한 광종의 관심은 봉업사의 중창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광종은 봉업사에서 서남쪽으로 약 5km떨어진 곳인 장릉리 사지에 958년(광종 9) 사찰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집권 중반기에 동남쪽으로 약 6km 떨어진 망이산성을 963년(광종 14) 수리하였고 평택 비파산성을 축성하기도 하였다.

광종이 새로 만들거나 증·개축하는 사찰과 성곽의 조성시기와 위치를 보면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광종대는 비록 불안정하기는 하였어도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이미 4대째 군주가 등극해 있는 상황이었다. 고려의 안보에 위협을 주는 실질적인 위험은 고려 내부가 아니라 북방의 외적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는 태조 때부터 평양을 복구하였으며 정종은 서경으로 천도를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북방지역의 축성은 태조 때부터 951년 (광종 2년)까지 지속되었다. 951년 평안북도 영변지역인 무주(撫 州)에 축성 작업을 한 후 20년 가까이 축성이 중단되었다. 광종대의 북방 개척은 광종대 후반이 되어서야 다시 진행되었다.
광종은 집군 초기인 951년(광종 2년)에 북방 축성 사업을 실시하였으나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북방 축성 사업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후삼국이 통일된지 30년이 가까이 된 시점에 광종은 한반도 중부지방에 위치한 망이산성을 수리하고 비파산성을 축성하였다. 외적의 실질적인 위험이 상존하는 북방의 축성사업도 진행하지 않은 광종이 한반도 중부지방에 축성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성곽과 사찰은 국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설이다. 고려 광종 때 처음 만들어지거나 수리된 성곽과 사찰을 지도상에서 이어보면 평택, 안성(죽주), 충주로 이어지고 있다. 제천 월광사와 영월 흥녕사의 후원세력이 충주유씨 일파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지도상의 선은 제천과 영월로 연장된다. 이 선은 동서를 가로지르는 현재의 38번 국도선과 일치하며 이는 후삼국 시대 고려의 영역과 거 의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삼국 시기에는 이 선보다 남쪽에 있는 천안이나 청주 지역 역시 고려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 지역은 실질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최전선이거나 반란의 역 모가 의심되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평택 – 안성(죽주) - 숭선사 - 충주 – 제천 – 영월을 잇는 지역은 후삼국 시기에 온전한 고려의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광종은 고려 왕실의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는 이 지역에 대한 방어선 정비까지 마친 상태에서 본격적인 구신과 호족세력의 숙청 작업에 들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어선의 구축은 광종이 강력한 황제 국 체제를 만들어감에 있어 이에 반발하는 세력의 반란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매우 치밀하고 착실하게 황제권 강화를 준비해 갔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황제국 체제 완성을 위한 광종의 치밀한 준비 작업은 발굴조사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특히 죽주를 중심으로 한 안성 봉업사 일대에 집중되었다. 죽주지역에서는 봉업사가 대대적으로 수리되면 서 봉업사 뒤편의 죽주산성 역시 정비된 것으로 볼 수 있고 장릉리사지의 사찰과 망이산성이 신·개축되었다. 망이산성은 청주· 진천과 충주지역에서 올라오는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요지에 건설된 산성이다. 장릉리사지는 청주에서 진천을 거처 북쪽으로 올라오는 현재의 17번 지방도로가 동서를 가로지르는 38번 지방 도로와 만나는 지점 근처에 위치해 있다. 즉, 청주와 진천 쪽에서 올라오는 교통로를 감시할 수 있는 위치이다.


광종이 죽주지역에 위치한 사찰과 산성을 집중적으로 수리하고 개축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의 정책에 반발하는 세력들을 감시하고 제압하기 위해서이다. 본격적인 구신 숙청 작업에 들어가기 전 광종이 가장 경계했던 세력들은 아마도 자신보다 앞서 왕위에 올랐던 혜종과 정종을 지지했던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왕위계승전 와중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나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여전히 무시 못 할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 죽주지역에 집중적으로 사찰과 관방유적이 정비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광종이 가장 경계했던 세력 중 하나는 바로 진천의 호족들과 청주의 호족들이 아닌가 한다.

진천과 청주는 바로 혜종과 정종의 외척세력들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혜종의 장인은 진천 임희와 청주 김긍률, 경주 연예 등이 있다. 김긍률은 정종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이들 호족세력들은 광종이 등극한 후 표면적으로 불만을 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나 언제든지 광종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세력이었다. 이밖에 광종이 죽주지역에 관심을 집중한 이유는 바로 이곳이 핵심적인 교통의 요지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광종은 죽주를 황제국 체제를 본격적으로 선포하는데 있어 반발세력을 제압하는 배후기지이자 황제국 체제를 선전하는 전초기지로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죽주지역이 반발세력을 제압하는 배후기지의 역할을 했다는 내용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죽주지역이 황제국 체제를 선전하는 전초기지 역할도 하였다는 근거는 아래에서 설명하는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길위의 부처, 황제의 나라를 선포하다 –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고려시대 석조미술사를 연구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불상은 봉업사지 사역의 북동쪽 끝에 해당하는 매산리 마을 입구 미륵 당이라는 곳에 세워져 있다. 이 불상은 최근까지 거의 주목 받지 못한 채 고려시대 중기 혹은 말기의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근래의 연구성과를 통해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960(광종 11)~963년(광종 14)사이에 조성된 석불임을 논증하였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970년(광종 21)경부터 만들기 시작한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의 원형(prototype)으로 볼 수 있는 상이다.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에는 태조 왕건의 명으로 940년 완공된 개태사 석조삼존불의 영향이 강하게 잔존해 있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경우 보살상의 상호가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의 상호와 매우 유사하다. 특히 아래턱이 둥글게 발달해 있는 점, 눈이 올라간 각도, 상대적으로 짧은 코, 인중과 아랫입술 사이의 세로로 파진 홈 등이 매우 흡사하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 입상의 조성시기는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의 조형적 원형이라는 점과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의 양식적 영향이 미치고 있는 점, 보살 상이 자리잡은 지리적 위치, 황제가 착용하는 면류관과 비슷한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점, 봉업사지의 발굴조사 성과 등을 종합해 볼 때 광종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기 시작한 960(광종 11)~963년 (광종 14)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전경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태조 왕건의 명으로 940년 완공된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과 양식적으로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으나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하고 있는 점은 큰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보살상이 황제가 착용하는 면류관과 닮은 방형의 보개를 착용하고 있는 점은 매우 주목된다. 보살상이 보관을 착용할 경우 일반적으로 화려한 원통형 보관을 착용한다. 하지만 보관위에 면류관과 닮은 형태의 방형의 보개를 올려놓은 경우는 광종대 조성된 면류관형 보개착용 보살상과 후대에 이를 모방한 보살상들을 제외하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면류관 형태의 보개를 착용한 불상의 조성은 광종에 의해 창안된 새로운 신양식이라 할 수 있다. 광종은 현재 남아있는 기록을 보았을 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류관을 착용한 황제이다. 황제가 착용하는 면류관 모양을 보살상의 보개로 만든 이유는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에 황즉보살사상, 넓게 보아 황즉불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지금까지 연구 성과에 의하면 광종의 치세기간은 전제정치로 규정되었고, 호족세력의 숙청과 신진세력의 등용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던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한 신진세력으로는 군소 호족출신의 신진관료 및 과거관료, 쌍기를 비롯한 중국계 귀화인, 측근 문신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리고 당시 이루어진 여러 가지 제도개혁-과거제의 실시와 문한기관의 확장, 노비안검의 시행과 시위군의 확대, 중앙 관부의 변화 등은 그러한 체제를 만들거나 유지하기 위한 제도로 인식하였다. 광종의 왕권강화에 대한 노력은 앞에 언급한 정치기반의 확장과 제도개선 이외에 고려 왕실의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는 후삼국시대 고려의 영역에 대한 방어선 정비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최근의 발굴성과를 통해 알 수 있다.


부여 대조사 석조보살입상


즉위 11년이 되는 960년, 광종은 스스로 황제임을 천명하고 본격적인 구신숙청에 들어갔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960(광종 11)~963년(광종 14) 사이 죽주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세워진 이곳은 광종이 구축한 평택 자미산성-죽주- 충주-제천을 연결하는 방어선의 최전선 중앙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광종은 스스로 황제로 칭한 960년 직후, 교통의 요지인 죽주에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을 세워 만천하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선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을 살펴보는데 있어 눈여겨봐야 할 점은 석조보살입상이 서있는 입지이다.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현재 미륵당이라 불리는 곳에 서있으며 바로 옆에는 거찰 봉업사가 존재하였다. 봉업사지 발굴조사 결과 이곳에서는 다량의 명문 기와가 출토되어 광종대 크게 증·개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서있는 곳은 크게 봉업사의 영역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봉업사 중심사역에서는 한참 벗어난 북쪽 지역이다.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황제를 상징하는 중요한 불상이라면 봉업사지의 중심사역 내에 위치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업사지의 사역 북쪽 끝에 위치한 이유는 교통로 때문이다. 고려시대 전라도나 충청도 쪽에서 개경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청주를 거처 죽주산성 앞을 지나 북쪽으로 향하였다. 경상도 쪽에서는 월악산 하늘재를 넘어 충주를 거쳐 죽주산성 앞을 지나 개경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고려시대 죽주지역은 교통의 핵심 요충지였다.

안성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봉업사의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유는 충주 쪽과 연결된 교통로가 죽주산성 동쪽, 현재의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서있는 곳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충주 쪽에서 오는 사람들이 개경을 향하다 봉업사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죽주산성 동쪽의 갈림길에서 남쪽방향으로 내려와야 된다. 그리 먼 길은 아니지만 봉업사에 방문할 일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 굳이 남쪽으로 발길을 돌릴 이유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청주와 충주방향의 길이 만나는 삼거리의 북쪽에 세워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위치에 세워짐으로 해서 남쪽에서 개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나 개경에서 남쪽 지방으로 향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앞을 지나가야만 하였다. 즉, 광종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기 시작한 960년 무렵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석조보살입상을 선전효과가 가장 좋은 장소에 세움으로써 새로운 황제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온 만방에 효과적으로 선포한 것으로 보인다.


당진 안국사지 석조보살입상


익산 고도리 석조보살입상


대의를 입고 있으며 머리에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 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불상은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한국 불교조각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불상이 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고려 광종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본격적인 황제국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한 시기에 조성된 불상이다.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근래에 국보로 지정된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의 원형이된 불상이다. 은진미륵으로 알려진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은 그 크기로 인해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관촉사 석조보살입상보다 먼저 만들어졌으며 호족의 시대가 끝나고 황제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던 매산리 석조 보살입상의 가치는 아직까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면류관형 보개착용 불상 중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이 완공된 후 조성된 불상은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과 당진 안국사지 석조보살입상 등을 들 수 있다. 구읍리 불상의 상호는 관촉사 불상과 같이 볼이 넓으며 옆으로 퍼져 있는 모습이다. 구읍리 불상의 귀는 관촉사 불상의 귀와 같이 보발이 귀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구읍리 불상은 관촉사 불상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구읍리 불상은 관촉사뿐만 아니라 대조사 불상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은 황제가 착용하는 복식인 면복(冕服)형태의 대의를 착용하고 있다. 구읍리 석조보살 입상의 상호는 관촉사 불상을 모방하고 있으나 목걸이와 복식은 대조사 불상을 따르고 있다.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의 조성시기는 10세기 조성설과 11세기 조성설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10세기 말기나 11세기 초반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에서 관촉사와 대조사 불상의 형식적 특징이 모두 나타나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은 관촉사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하는 시기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10세기 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당진 안국사지 석조보살입상의 조성시기는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태평십(太平十..)”명 기와를 통해 조성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요의 성종(1021~1030)연간으로서 “태평십..” 은 1030년을 가리킨다. 안국사지에서는 막새기와가 단일종류의 것만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태평십...”명 기와를 창건기의 기와로 봐도 무방할 것이며 안국사지 석조보살입상은 이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보다 후대에 조성되었다면 매산리 불상에서는 관촉사 불상의 특징이 간취되거나 안국사지 불상처럼 석주형으로 조성되었을 것이다. 또는 구읍리 불상 같이 면복형 대의를 착용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에서는 관촉사나 대조사 불상에서 찾기 어려운 개태사 불상의 특징이 강하 게 남아 있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조성시기는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의 조형적 원형이라는 점과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의 양식적 영향이 미치고 있는 점, 보살상이 자리 잡은 지리적 위치, 황제가 착용하는 면류관과 비슷한 방형의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점, 봉업사지의 발굴조사 성과 등을 종합해 볼 때 광종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기 시작한 960~963년(광종11~14)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불의 영향 – 모방과 변형


본 글에서 언급한 고려 광종대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석불상들은 모두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하고 있는 석조보살입상들이다.

죽주(안성)와 논산, 부여 일대에 조성된 면류관형 보개 착용 석조보살입상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 조성되는 면류관형 보개의 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기도 일대에 등장하는 면류관형 파주 용미리 마애불 중 향 우측 불상 등이다. 이 중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과 흡사한 보관을 착용하고있는 포천 구읍리 석불입상은 11세기 전반기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되며 매산리 석불입상, 관촉 사 보살입상 등과 같이 황즉불 사상이 반영되어 조성된 석불이라 할 수 있다. 파주 용미리 마애불은 최근의 연구 성과에 의해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마애불임이 밝혀짐에 따라 고려전기의 면류관형 석불 착용과 달리 단순히 앞 시대의 면류관형 보개를 모방하여 조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충청도와 전라북도 일대에 등장하는 면류관형 보개착용 불상은 관촉사 보살입상, 대조사 보살입상 이외에 당진 안국사지 석불입상,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 김제 흥복사 석불입상, 예산 읍내리 석불입상 등이 있다. 이중 익산 고도리, 김제 흥복사, 예산 읍내리 석불상들은 단순히 방형의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하고 있다는 점 이외에 광종대 석불상으로부터 직접적인 형식이나 양식적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안성 아양동 석조보살입상



용인 미평리 석조보살입상


황즉불 사상이 반영된 불상 중 부여 대조사 석조보살입상과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은 주변지역의 다른 석불상에 양식적 영향을 그리 크게 미치지 못했다. 반면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주변의 석불상에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양식적 특징을 강하게 미치고 있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는 석불상의 편년은 고려초에서 후기까지 다양하다. 매산리 석조 보살입상의 조형적 영향이 미치는 석불은 가까이에는 안성과 용인지역뿐만 아니라 멀리로는 포천과 원주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안성 지역의 경우 안성 쌍미륵사 마애불과 안성 아양동 석조 보살입상에서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쌍미륵사 마애불의 경우 마모가 심하고 부조된 선각의 깊이가 얕아 상반신 이상은 알아보기 힘드나 하반신의 경우 다리와 다리 사이에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에서 보이는 돋을띠 문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성 아양동 석조보살입상의 경우 상호가 길고 크게 조성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과는 닮은 점을 찾기 어려우나 보관 중앙과 주변의 화문 장식이 매산리 석조 보살입상에서 기인했음을 알 수 있다. 용인 지역에서는 미평리 석불입상의 다리사이 돋을띠, 용인 목신리 석조보살입상의 상호 등에서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가까운 주변지역의 다른 석불상에 양식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점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원주 봉산동 석조보살입상의 경우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을 똑같이 모방하려고 시도하고 있어 주목된다. 원주 봉산동 석조보살입상은 봉산동 작은 야산위에 위치한 민가 옆에 세워져 있다. 이 석조보살입상은 높이는 1.78m로서 언뜻 보면 비슷한 크기의 원주지역 보살상들과 비슷한 양식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인의 위치, 보살상임에도 대의를 착용하고 있는 점, 대의의 하반신 옷 주름, 보관과 이마가 만나는 지점이 일직선이 아닌 여러 개의 반원형으로 표현된 점등은 봉산동 석조보살 입상이 약 5.6m 크기의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을 모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봉산동 석조보살입상의 보관 정상부는 현재 시멘트가 발라져 있어 둥글게 돌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원래의 형태는 평평하게 마감되어 있어 매산리 석조보살입상과 같은 면류관형 보개가 올려져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주 봉산동 석조보살입상은 세부적으로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과 차이를 보이는데 보관의 장식표현에서 차이점이 눈에 띤다. 봉산동 석조보살입상의 보관은 마치 황제가 착용하는 통천관의 뒷부분을 표현해 놓은 듯이 정면에서 보았을 때 좌우로 갈라진 수직의 물결문이 표현되어 있다. 원주 봉산동 석조보살입상의 상호는 1090년에 조성된 원주 입석사 마애불의 상호와 비슷한 점이 많아 조성시기를 입석사 마애불과 비슷한 시기로 유추할 수 있다.

11세기 말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원주 봉산동 석조보살 입상이 960년경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 입상을 모방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11세기 말경까지도 인근지역 뿐만 아니라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원주 지역까지에도 매우 중요한 석조보살상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라 하겠다.


길위의 부처, 건물에 갇히다 –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고려시대는 많은 거석불들이 조성되었다. 일반적으로 4~5m 정도 크기를 갖고 있는 석조불상을 거석불로 호명한다. 머리에 면류관 형태의 보개를 착용한 보살상은 경기도 안성과 논산 관촉사, 부여 대조사, 당진 안국사 등 한강이 남쪽에 주로 만들어졌다. 한강 이남쪽에 면류관형 보개 착용 보살상이 주로 만들어진 이유는 황제 광종의 권위를 해당 지역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황제라 칭한 광종대 이후 면류관형 보개착용 보살상은 11세기 초반까지 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이다.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측면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상호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포천군 군내면 구읍리에 위치한 용화당 안에 세워져 있다. 이 불상은 높이 4.4m의 큰 불상으로 명성황후가 불공을 드리기 위해 3년간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읍리 석불입상은 머리에 면류관 형태의 보개를 착용하고 있다. 보개는 사각형태이나 뒷부분의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되었다. 관에는 소용돌이 형태의 문양이 새겨져있고 관의 중앙에는 화불이 조각되었다. 비교적 큰 상호는 위엄 있고 후덕한 인상을 준다.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눈은 반개하였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있고 귀 가운데를 한 가닥의 굵은 보발이 가로지르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으며 삼도 아래에는 목걸이 형태의 장식물이 조각되었다. 법의는 두꺼운 통견의이다. 불상의 전면에 새겨진 옷 주름은 그물 형태로 돋을새김되었다. 오른손은 장지와 약지를 구부려 엄지에 붙인 채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가슴 위에 올렸다. 왼손은 손을 곧게 펴고 손바닥을 밖으로 한 채 배 부분에 붙여놓았다. 석불의 발 부분은 대좌와 함께 조각되었고 신체와는 떨어져있다. 구읍리 석불입상이 취하고 있는 모습 중 주목해야 할 부분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면류관 형태의 보개를 들 수 있다. 이 석불입상의 보개는 안성 매산리 석불입상 보개의 영향하에 조성되었음을 그 형태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관 부분에 표현된 장식문양은 구읍리 석 불입상의 보개가 매산리 석불입상의 면류관형 보개를 직모했음을 알게 해준다. 매산리 석불입상의 관 가운데 새겨진 꽃봉오리 모양은 구읍리 석불에도 새겨져있다. 다만 구읍리 석불에는 그 안에 화문(華紋) 대신 화불(化佛)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차이점이다.

둘째, 귀를 가로지르는 굵은 보발(寶髮)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보발은 8세기경 조성된 금동불이나 마애불에서 간간이 볼 수 있다. 이후 10세기 전반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상과 940년경 조성된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을 필두로 고려시대 전기에 다시 크게 유행한다. 특히 개태사 좌․우 협시불에서 보이는 귀를 가로지르는 굵고 선명한 보발의 영향은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경기․충청 지역의 석불상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구읍리 석불입상에 표현된 보발 역시 개태사 작품의 영향이 미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매우 크게 조각된 상호를 들 수 있다. 구읍리 석불입상의 상호는 신체와 비교했을 때 매우 크게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커다란 얼굴은 신체를 사등신으로 만들고 있는데 대표적인 사등신 불상으로는 관촉사 석불입상을 들 수 있다. 즉 구읍리 불상의 상호는 관촉사 석불입상이 영향을 끼친 것임을 알 수 있다.

넷째, 신체 전면에 새겨진 옷 주름을 들 수 있다. 구읍리 불상의 전면에는 마치 그물 같은 옷 주름이 돋을 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이러한 옷 주름은 다른 작품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11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예산 삽교 석불입상의 신체 앞면 옷 주름이 이러한 형태이다. 삽교 석불 입상에 새겨진 옷 주름 역시 돋을 새김으로 마치 그물처럼 조각되어 있다. 하지만 삽교 석불입상의 앞면 옷 주름의 수직선은 옷 주름 표현이 아니라 지팡이(錫杖) 조각의 연장선임을 알 수 있다. 구읍리 석불을 조성한 장인들은 돋을 새김 형태의 옷 주름 표현을 삽교 석불입상의 옷 주름 표현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도상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 것인지 또는 지팡이 표현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인지는 단정지을 수 없으나, 그들은 삽교 석불의 지팡이 표현마저 옷 주름으로 포함시켜 돋을 새김한 그물 모양의 새로운 옷 주름 문양을 창안한 것으로 보인다.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11세기 초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가 착용하는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포천 구읍리 석조 보살입상은 이러한 형태의 불상 중 가장 북쪽에 조성된 불상이다.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고려가 11세기 초반까지도 황제국 체제를 지향했었음을 방증하는 불상이다.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 입상은 한국전쟁 직후까지도 구읍리 마을 앞 농경지에 세워져 있 었다. 그러나 현재는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위로 작은 법당이 건립되어 있다. 길위이 부처였던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어느 날 집안의 부처가 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사찰측이 사찰 건물 안에 봉안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을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아 직접 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대외관계와 불상 양식의 변화


960년경 처음 등장한 면류관형 보개착용 보살상은 부여 대조사, 논산 관촉사를 거쳐 1030년 당진 안국사지에서는 석주형으로 완전히 형식화되고 이후 황즉불사상을 내포한 방형의 면류관형 보개착용 보살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안국사지 석불입상은 대의의 형태가 거의 보이지 않는 점을 고려한다면 여래형 복식을 입고 머리에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은 포천 구읍리 불상이 마지막으로 조성된 셈이다. 면류관형 보개착용 석조보살상들이 유행하지 않게 된 반면, 보개는 착용하지 않았으나 여래형 대의착용 보살상들은 원주 봉산동, 서울 광진구, 황해도 영파리, 서울 은평구 청담사 등에 계속해서 조성되고 있었다.

11세기에 들어와 면류관형 보개착용의 조성은 사라지고 여래형 대의착용 보살상은 지속적으로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충주 미륵대원 석불입상은 석주형 석불이며 머리에 팔각보개를 착용하고 있다. 미륵대원의 창건시기는 11세기말~12세기 초로 알려져 있다. 미륵대원 석불입상은 국가적 지원과 관심 하에 조성되었음에도 석불의 형태는 석주형이며 보개는 팔각보개를 착용하고 있다. 미륵대원 석불입상의 예로 보았을 때 11세기말 이후 12세기부터는 면류관형 보개착용 보살상이나 여래형 대의착용 보살상은 조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고려 내부의 종교적 상황의 변화도 중요하게 작용되었겠지만 국제정세의 역학관계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11세기 들어 국력이 성장한 요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주도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요는 1043년(정종 9), 1049년(문종 3), 1055년(문종 9), 1057년(문종 11)에 관복과 제후로 봉해질 때 천자가 내려주는 규(圭)를 보냈다. 1065년(문종 19)에는 구류관(九旒冠)과 구장복(九章服), 옥 규 등을 보내기도 했다. 이는 황제국 체제를 지향하는 고려를 견제하고 제후국으로 강등시키고자 하는 요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고려의 신하들은 임금을 칭할 때에 ‘신성제왕(神聖帝 王)’이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했는데 금을 사대하는 12세기 전반 인종 시절에 한 때 그 호칭을 중단한 적도 있었다.

고려의 황제국 체제 지향과 대외적관계의 충돌은 불상제작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요는 황제가 사용하는 12류 면류관을 고려가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 면 고려 중앙정부의 후원 하에 조성된 황제를 상징하는 방형의 면류관을 착용한 불상들은 11세기에 들어와 더 이상 후원을 받지 못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황즉보살을 구현하는 방법을 찾은 것으로 생각된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원형보개


숭유억불국가 조선의 거석불 –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경기도의 석불 중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과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황제가 착용하는 면류관 형태의 보개를 머리에 쓰고 있다. 이 불상들은 불상 자체가 황즉불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도 황제가 쓰는 모자와 유사한 형태의 보개를 착용한 초대형 불상이 조성된 바 있다. 바로 파주 용미리 마애 이불입상이다. 용미리 마애불 중 향좌측의 불상은 원정모라 불리는 머리 부분이 둥근 모자를 착용하고 있다. 원정모는 원나라 황제나 귀족들이 착용하는 모자였다. 원정모는 고려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우리나라에서 유행하였다. 그 결과 조선초기 조성된 파주 용미리 마애불 역시 원정모를 착용한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원정모는 원나라 황제들이 즐겨 착용하는 모자였으나 면류관처럼 황제만 착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정모는 귀족들 역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파주 용미라 마애불이 원정모를 착용한 이유는 당시의 복식 유행이 불상에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파주시 광탄면 용암사 뒤편 장지산 자락에 있다. 높이 17m에 달하는 거대한 마애불인 용미리 마애이불 입상은 그동안 고려시대 대표적인 거석불 중 하나로 알려져 왔다. 마애불은 원형의 보개를 착용한 불상과 방형의 보개를 착용한 불상 두 구가 서로 병립하여 조성되었다. 마애불의 신체는 거대한 바위에 조각하였으며 머리는 별도로 조성하여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두 불상 중 원형의 보개를 착용한 불상은 용화수로 추정되는 지물을 잡고 있다. 방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두 불상의 착의는 양쪽 어깨를 덮는 통견형 대의를 입고 대의 안쪽에는 내의를 착용한 형태이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그동안 고려 초기 또는 고려시대 11세기 조성된 불상으로 알려져 왔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여겨졌던 이유는 고려초 대형석불들이 유행 하는 조류 속에서 건립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1세기 조성설의 근거는 이 불상이 고려 선종대인 11세기에 조성되었다는 전설 때문이다. 그러나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에 대한 근래의 연구는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조선전기에 건립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불상의 향우측 바위에는 “성화칠년칠월(成化七年七月)”로 시작하는 발원문이 있어 이 불상이 1471년(성종 2)년 조성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조성배경은 조선 초(1471) 함양군·심장기·한명회 등 세조 측근이 세조를 추도하고 성종과 정희왕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불상을 조성한 것이다. 고려 선종대의 설화는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을 고려대의 일로 부회한 것이다.


근래의 연구 성과 이외에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착용하고 있는 보개는 이 불상의 조성 시기가 고려 초기나 11세기가 아님을 방증한다. 불상이 착용하고 있는 보개는 대부분 원형이나 방형이다. 현재 보개를 착용하고 있는 불상은 약 80여구가 알려져 있다. 방형의 면류관형태 보개는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관촉사석 조보살입상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스로 황제라 칭한 고려 광종대 처음 등장한다. 후대 형식화가 진행되기 이전에 조성된 방형 보개는 황즉불 사상과 연관 지을 수 있다. 광종대 황제국 체제를 선포한 고려는 11세기경에도 대내적으로 여전히 황제국 제도를 유지 하고 있었다. 고려의 황제국 체제는 면류관형 보개착용 불상이 유행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원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이 방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보다 더 크게 조성되었다. 불상의 위치도 원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이 방형 보개 착용 불상보다 앞에 조성되었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고려 초기나 11세기경에 조성되었다면 방형보개를 착용한 불상은 황즉불 사상과 연관 지을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두 불상이 착용한 보개의 위치는 바뀌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고려 초기나 11세기 조성된 불상으로 보기 어렵다. 즉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기존의 연구 성과가 입증한 바와 같이 성화연간인 1471년(성종 2) 조성된 불상이라 할 수 있다.

경기도 일원에는 많은 불상들이 있다. 이 불상들 중에는 높이 4~5m가 넘는 거석불도 다수 존재한다. 이 불상들은 그동안 지방 호족들이 만든 지방불 양식으로 여겨졌을 뿐 구체적인 조성시기나 건립배경 등이 설명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 성과는 경기도의 미륵불이 황제체제를 선포하는 상징물이 되기도 하였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또한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이 죽은 왕을 추모하여 조성한 경우도 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러하듯이 경기도의 미륵불은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는 또 다른 사료이며 역사의 길을 밝히는 안내자라 말할 수 있다.



글 정성권 단국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불교미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태봉과 고려 석조미술로 보는 역사>, <고려의 국왕>(공저), ( 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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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학광장 Vol.2 _ 2019 가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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