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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부인이 떠난 나루터

경기학광장Vol.3 _ Information & News

< 도미부인이 떠난 나루터 >


- 경기학광장Vol.3 _ Information & News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도미부인의 설화는 <삼국사기> 「열전」에 등장한 이래 조선시대에는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등의 역사서에 그대로 계승되었고, 조선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 정조 때의 <오륜행실도> 및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홍경모의 <중정남 한지> 등에 기록되어 열녀의 표상이 되었다. 그런데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도미부인이 떠난 나루터, 즉 ‘도미나루’ 가 관심을 끌게 되면서 경남 진해나 충남 보령 그리고 한강유역인 경기도 하남, 서울 송파와 강동 등이 그 장소로 주목을 받았다. 도미부인 설화의 시대적 배경은 개로왕 때이므로 백제가 한강유역에 자리 잡았던 한성백제의 시기이다. 그러므로 도미부인이 배를 타고 떠난 곳도 당연히 한강이다.

<삼국사기> 의 도미부인 설화

삼국시대 여성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간혹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에도 여성은 이름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미부인 역시 이름이 없다. 도미는 남편의 이름이고, 그의 부인 이라는 의미에서 ‘도미부인’으로 부르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도미부인의 이름을 ‘아랑’이라고 하는 것은 월탄 박종화의 단편 소설 「아랑의 정조」(<문장>, 1937)에 영향을 받은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도미부인의 이름을 ‘아랑’이라고 한 것은 박종화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은 아니지만 도미부인의 정조를 다룬 것은 김윤경의 「부귀냐? 사랑이냐? 도미부인의 정조」 (<동광> 제36호, 1932)가 박종화의 소설보다는 5년이 더 빠르다.
도미부인은 미모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정절관념이 투철했던 백제의 여성이다. 도미부인은 정절관념에 투철했기 때문에 <삼국사기> 「열전」에 등장한 이래 조선시대에는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등의 역사서에 그대로 계승되었고, 조선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 정조 때의 <오륜행실도> 및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홍경모의 <중정남한지> 등에 기록되어 열녀의 표상이 되었다. 열녀란 의(義)를 중하게 여기고 삶을 가볍게 여기는 여인을 말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도미부인을 「열전」 에 넣은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미부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삼국사기>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오륜행실도(출처, 서울대 규장각)

도미(都彌)는 백제 사람이다. 비록 호적에 편입(編戶)된 평민[小民]이었지만 자못 의리를 알았다.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예뻤으며 또한 절개 있는 행실이 있어 당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개루왕(蓋婁王)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 더불어 말하였다. [왕이] “무릇 부인의 덕은 비록 지조가 굳고 행실이 깨끗함을 우선으로 하지만 만약 그윽하고 어두우며 사람이 없는 곳에서 교묘한 말로써 유혹하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라고 하였다. [도미는] “사람의 마음이란 헤아릴 수 없으나 저의 아내와 같은 사람은 비록 죽더라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그녀를 시험해 보려고 일을 핑계로 도미를 머물게 하고는 가까운 신하 한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왕의 옷을 입고, 마부를 데리고 밤에 그 집에 가도록 시키고, 사람을 시켜 먼저 왕께서 오실 것임을 알리도록 하였다. 왕 [을 가장 한 신하가] 그 부인에게 말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네가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다. 도미와 내기하여 그를 이겼으니 내일 너를 들여 궁인(宮人)으로 삼기로 하였다. 이다음부터 네 몸은 내 것이다.” 드디어 그녀를 간음하려고 하자 부인이 말하였다. “국왕께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실 것이니 제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에 들어가소서. 제가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겠습니다.” 물러나서는 한 계집종을 치장하여 잠자리에 들였다. 왕이 후에 속았음을 알고 크게 노하였다. 도미를 무고하여 처벌하였는데, 두 눈을 멀게 하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 작은 배에 태워 강에 띄웠다. 드디어 그의 아내를 끌어다가 강제로 욕보이려 하니, 부인이 말하였다. “지금 남편을 이미 잃었으니 홀로 남은 이 한 몸을 스스로 보전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왕의 시비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월경 중이라서 온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을 기다려 향기롭게 목욕한 후에 오겠습니다.” 왕이 그 말을 믿고 허락하였다. 부인이 곧 도망쳐 강어귀에 이르렀으나 건널 수가 없었다.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다가 홀연히 외로운 배가 물결을 따라 이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그 남편을 만났는데 아직 죽지 않았다. 풀뿌리를 캐서 먹다 드디어 함께 같은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䔉山) 아래에 이르렀다. 고구려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옷과 음식을 주었다. 마침내 구차히 살다가 객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 도미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도미나루의 위치는 하남시

<삼국사기> 「열전」의 도미부인 설화는 설화의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보니 역사학계에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도미부인이 떠난 나루터, 즉 ‘도미나루’ 가 관심을 끌게 되면서 경남 진해나 충남 보령 그리고 한강유역인 경기도 하남, 서울 송파와 강동 등이 그 장소로 주목을 받았다.

도미부인 설화의 시대적 배경은 개로왕 때이므로 백제가 한강유역에 자리 잡았던 한성백제의 시기이다. 그러므로 도미부인이 배를 타고 떠난 곳도 당연히 한강이다. 한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양수리에서 만나 하남지역의 도(두)미강, 미사리, 구산, 둔지, 미음진을 지나 광진, 송파진, 삼전도, 독(도)진, 저자도를 거쳐 용산, 마포, 행주산성을 지나 임진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주목 되는 것은 하남지역을 흐르는 강을 도(두)미강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도미나루는 왕실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기록하고 있다. 선조 때 가뭄으로 6차례나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오지 않자, 장소를 옮겨 검단산 아래 도미진에서 기우제 를 지냈으며, 숙종 때에도 4차례나 기우제를 지냈다. 그 외에도, 조선시대 우리나라는 유황이 잘 산출되지 않아 주로 일본과 중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숙종 때 광주 도미진 위의 군기시(軍器寺) 시장(柴場)에서 유황이 산출된다는 보고가 있자, 왕이 유황을 캐어 사용하도록 지시한 바가 있다. 도미진 위 시장은 바로 검단산이다.

도미강 바로 옆 검단산은 옛날부터 광주의 진산, 숭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산이며, 조선 초에는 태종 이방원이 내시별감을 보내어 광주의 성황과 검단산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또한 상왕과 함께 검단산에서 사냥을 즐겨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검단산이 제사지내는 장소와 왕의 사냥터였던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세종 때에는 광주 검단산의 사냥 몰이꾼 2,000여명을 광주와 용인 아홉 읍(邑)에서 징발한 것으로 보아 사냥의 규모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성종 때에는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야 하는데, 광주 검단산에서 짐승을 쫓으면 비가 온다 하여 사복을 보내어 노루와 사슴을 잡도록 한 것으로 보아 검단산에서의 사냥은 단순한 사냥 외에 기우(祈雨)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이 쓴 <아방강역고>(위례고)에서는 백제의 하남위례성을 설명하면서 “… 동쪽으로 높은 산에 의지했다고 한 것은 검단산(광주고읍 동쪽-원주)을 말한 것이요, 서쪽으로 큰 바다에 막혔다고 한 것은 행주 어귀이다. 남쪽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본 것은 둔골제이다. 북쪽으로 한수를 띠었다는 것은 두미강(斗尾江 : 度迷津- 원주)이다.…”라고 하여 <삼국사기> 「백제본기」백제 건국설화에 나오는 내용 중 북쪽의 한수(한강)를 두미강(도미진)에 비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백제의 하남위례성을 설명한 것이고, <삼국사기> 「열전」의 도미부인 설화와 도미나루를 연결시켜 서술한 것은 1656 년 유형원이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동국여지지>가 처음이다. <동국여지지> 「열녀」는 도미부인의 설화를 기록하면서 “이는 도읍이 ‘남한(南漢)’일 때이므로 이 부근일 것이다.”라고 하여 백제의 도읍이 남한이고, 부근에 있는 도미나루가 도미부인 설화의 진원지라는 것이다.

‘도미’는 하남에서도 주로 ‘두미’라는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에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두미’가 도미부인 설화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도미나루의 위치는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주 동쪽 10리’라고 하였고, <동국여지지>나 <중정남한지>는 ‘주 북쪽 23리’라고 하였 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주 동쪽 10리’라는 것은 광주 관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인데, 이 시기에는 관아가 고골 향교 일대이므로 이 곳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팔당 방면이 대략 10리가 맞으며 방향도 동북쪽이 된다. <중정남한지>나 <대동지지>가 주 북쪽 23리라고 한 것은 남한산성의 관아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도미진이 ‘용진(龍津) 하류’라고 하였고, <여지도서>에서는 ‘경안면을 지나 도미진으로 흘러간다.’고 하였으며, <증보문헌비고>에서는 “… 서쪽으로 흘러 마점(麻岾)을 경유하여 소천(昭川)을 지나고 두미천(斗迷遷)과 미음도(渼陰 渡)를 경유하여 오른쪽으로 왕산천(王山川)을 지나고 또 서쪽으로 흘러 광진, 송파도, 삼전도가 되고, 왼쪽으로 탄천, 양재천을 지나 독도(禿島), 압구정을 경유하여 오른쪽으로 중량천을 지나 한강이 된다. …”라고 하였으니, 도미진이 용진, 경안, 마점, 소천보다는 하류이고 미음보다는 상류이다. 즉 도미진은 남양주의 용진보다 는 아래이거나, 광주의 소천보다 아래이며, 미사리보다 위에 위치하고 있다. 용진은 지금의 남양주 두물머리 위쪽에 있고, 소천은 팔당 위쪽 우천을 말하고, 미음도는 미사리 부근, 왕산천은 왕숙천, 독도는 뚝섬을 말한다.
그런데 <광주부지>나 <중정남한지>는 모두 도미나루가 ‘동부면’ 에 있다고 하였다. 한강유역에서 동부면으로 불리던 곳은 하남시밖에 없다. 하남시는 광주군 동부면과 서부면으로 시가 되었기 때 문이다.
‘도(두)미’는 검단산과 예봉산이 마주보고 있는 좁은 협곡 구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도(두)미협으로도 불리었고, 주변에 돌길이 길게 놓여 있기 때문에 도(두)미천 등으로도 불렸다. <신증동국여 지승람> 「도미진」에는 “주 동쪽 10리, 양근군 대탄 용진 하류에 있는데 그 북쪽 언덕을 도미천이라 한다. 동쪽으로 봉안역을 향하여 돌길이 7~8리나 빙 둘렀는데, 신라 방언에 흔히 물언덕 돌길을 천이라 불렀다.”고 하여 ‘천’이라는 말이 신라시대 이전부터의 전승임을 전하고 있다. 도미천에는 도(두)미원이 있었다.


영화포스트(출처, 양해남 컬렉션)

현대에 이르러서는 도미부인을 소재로 영화가 나오기도 하였고, 최근에는 최인호가 <몽유도원도>(열림원, 2002)라는 제목으로 도미부인의 일대기를 소설로 출간하였다. 국립극장 국립무용단의 무 용극으로도 정기공연되고 있고, 민속예술단은 해외에서도 공연하였으며,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로도 공연되었다.


글 김세민

1954년생,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원대, 건국대, 이화여대, 공주대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하남역사박물관 관장 및 세종 대학교 역사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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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학광장 Vol.3 _ 2019 겨울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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