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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의 꿈, 철마의 전설이 서려있는 양평 성덕리 고창굿

경기학광장Vol.3 _ Information & News

< 대장장이의 꿈, 철마의 전설이 서려있는 양평 성덕리 고창굿 >


- 경기학광장Vol.3 _ Information & News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양평에 있는 성덕리라는 마을에서는 국수당에 정성껏 음식을 차려 놓고 주민들의 화평을 빌었다. 국수당은 당숲에 있는 조그마한 제당이다. 당숲은 마을 중앙에 있는데 아름드리 나 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당숲 가운데에 돌로 된 감실 위에 이엉을 얹어 만든 국수당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 필자가 처음 답사를 갔던 1999년에 이 국수당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아늑한 공간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모습이 무척 정겨워 보였다.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고 이내 아쉬워 볼펜을 꺼내 그 모습을 종이에 그려보기도 했다.

성덕리의 국수당 모습(1999년, 김태우)

이곳 양평군 강하면 성덕리는 남한강과 해발 712m의 양자산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 양자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성덕천을 이루고 이 성덕천은 북쪽으로 흘러 내려가 남한강과 만나게 된다. 이 성덕천을 따라 성덕리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다. 성덕리는 4개 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강하면사무소쪽에서 마을로 들어서면 2리가 먼저 나오고 더 내려가면 1리와 4리를 지나게 된다. 성덕천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3리가 나온다. 이 마을마다 제당들이 마련되어 있다.

성덕리의 초입에 있는 마을이 2리인데 아주리라고 하고 마을 입구에 장승이 있다. 저수지 서쪽 마을은 1리인데 성촌 또는 양지 마을이라고 한다. 1리에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할머니당이다. 저수지 남쪽 마을이 4리인데 덕촌 또는 응달마을이라고 부른다. 4리에는 할아버지당이 있다. 할아버지당은 수령이 500년이나 된 말채나무를 말한다. 4리에는 첩당도 있는데, 원래는 밤나무였으나 고사하여 소나무를 심어 놓았다. 성덕천을 따라 제일 안쪽 마을, 양자산 자락에 있는 마을이 3리다. 3리는 성덕 혹은 대골이라고 부르는데, 대골은 大谷, 즉 큰골을 의미한다. 3리에는 앞에서 소개 한 국수당이 있다.
성덕리는 요즈음에는 보기 드물게 마을 신앙의 체계를 잘 갖추고 있는 곳이다. 가장 존귀한 존재인 국수당을 중심으로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이 있고 마을 입구의 장승까지, 마을 신앙의 전일적인 체계를 잘 보여준다. 게다가 첩당까지 갖추고 있으니 참으로 인간적인 신의 세계가 아닌가?

성덕리 마을과 마을제당들

성덕리에서는 3년마다 ‘고창굿’을 했다. 예전에는 2월초 열흘 안으로 날을 잡아 제를 지냈으나 1997년도부터 음력 2월 초삼일로 고정되었다. ‘고창굿’이라는 명칭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 고창굿이 ‘소리 높여 노래 부르는(高唱) 굿’에 왔다고도 하고 곶(串)과 당(堂)이 합쳐진 ‘곶당굿’이 변해서 되었다고도 하고 ‘창고가 있었던 곳[庫倉]의 굿’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여러 설이 있기는 하지만 이곳 성덕리가 인근 산에서 벌목한 목재를 쌓아놓는 집하장 구실을 하였으며 당시 업자들이 돈을 대어 고창굿을 크게 열었다는 것은 공통된 견해이다. 현재 저수지 자리가 예전 고창굿을 벌이던 터라 한다.
2000년에 행해진 고창굿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창굿은 아침 일찍 3리의 국수당 제사부터 시작된다. 제물로는 소머리와 시루떡(백설기), 북어, 미역국, 콩과 팥, 삼색실과, 술을 올린다. 제사 순서는 초헌 - 삼배 - 축 - 삼배 - 술 고수레(3군데) - 아헌 - 삼배 - 종헌 - 삼배 - 소지 - 풍물 및 음복 순이다.
국수당 제사가 끝나면 풍물을 울리며 할아버지당이 있는 4리로 이동한다. 4리에 있는 말채나무 앞에 다시 상을 차린다. 제물은 국수당과 동일하다. 말채나무 밑둥에 ‘山地祖父之 神位’라고 쓴 한지를 붙이고 제를 시작한다. 제사 순서도 국수당과 동일하다.
할아버지당 제사가 끝나면 다시 풍물을 울리며 할머니당이 있는 1리로 이동한 다. 할머지당은 성덕1리 논 끝의 언덕배기에 서 있는 느티나무이다. 이 나무에는 ‘山地祖母之 神位’라 쓴 한지를 붙이고 제를 시작하게 된다. 제물과 제사 순서는 역시 동일하다.
할머니당 제사가 끝나면 첩당 제사 순서이다. 원래는 첩당이 있는 4리로 가서 제사를 지내야 하지만 지금은 멀리 첩당을 바라보고 절을 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마지막으로 2리를 지나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장승으로 이동한다. 마을 입구에는 붉은색으로 칠해진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장승이 서 있다. 여기에 제를 지내는 것을 장승맞이라고 한다. 장승맞이는 간단하게 술 한 잔 올리는 것으로 마치는데 먼저 천하대장군부터 제를 지내고 나서 지하여장군에 제를 지낸다. 이렇게 제사가 끝나면 화랭이를 불러 고창굿을 했다. 성덕리의 고창굿은 인근에서도 무척 유명했다. 고창굿이 진행되는 동안은 광대 재주나 줄타기가 벌어졌다. 양평 인근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굿을 구경하기도 하고 노름을 했으며 색주가도 들어 서서 난장을 텄다. 이 굿은 일제말기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과거 고창굿을 할 때는 한 날 한 시, 밤 10시에 각 마을에서 국수당, 할아버지당, 할머니당에 대한 제사를 동시에 지냈다고 한다. 이를 산제사라고 했다. 첩당은 다른 당처럼 제사를 독자적으로 지내지는 않고, 세 당에서의 제사를 마친 후에 술 한 잔 부어 놓는 곳이었다. 이렇게 세 당에서 별도로 산제사를 올릴 때에는 각기 화주가 별도로 있었고 소지도 각각 올렸다. 그 다음날 굿청에 들어가서 부정을 치고 굿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같이 큰 판이 벌어지려면 큰 돈이 들어간다. 예전에는 ‘고창세’를 매년 집집마다 벼 한 말씩 걷어 모아 두었다가 3년에 한 번씩 고창굿을 성대히 치렀다. 뿐만 아니라 성덕리 주민들이 모으는 ‘고창세’ 외에 다른 마을 사람들이 내는 ‘제방전’[契房錢]으로 큰 몫을 충당하였다. 제방전은 성덕리 뒤편의 양자산 일대에서 땔나무를 해가는 다른 마을의 주민들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도 다치지 않고 무사하게 해 달라’는 뜻에서 내는 돈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인근 산에서 벌목한 목재를 취급했던 업자들도 상당한 돈을 내었을 것이다. 이처럼 당시 성덕리는 양자산 일대의 벌목 사업과 땔나무꾼들로 번성했었고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고창굿과 같은 큰 굿이 벌어질 수 있었다.

성덕리에서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국수당이라는 제당이다. 돌로 감실을 만들어 놓고 이엉으로 지붕을 해 얹은 모습도 특이하지만 그 국수당에 여러 마리의 철마가 모셔져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국사당에는 19기의 철마와 토마 2기가 봉안되어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은 철마를 모셔 놓았을까?”하는 궁금증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사례를 찾아보니 50여 군데에서 철마를 모시고 있었다. 주로 강원도 지역에 많았고 충청도와 전남지역이 몇 곳 있었는데 경기도는 성덕리가 유일했다. 그 렇다면 왜 이런 철마를 모시게 되었을까?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이유가 세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호환방지를 위해, 또 하나는 주신(主神)의 승용(乘用)으로, 나머지 하나는 근처에 솥점 또는 주물터(대장간)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성업을 위해 모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호환 방지를 위해 모시게 된 경우는 관련 전설이 전한다.

성덕리의 국수당 모습(1999년, 김태우)

옛날에 호랑이가 산줄기를 타고 이 부락으로 침입하여 인명의 피해를 가져오게 하자 이곳 국수당의 ‘쇠말’이 발로 차서 호랑이를 물리쳤다. 이때 쇠말의 뒷다리가 부러졌고 호랑이는 부락 앞 ‘솥바리섬’에 떨어져 죽었다. 죽은 호랑이를 부락 사람들이 배를 가지고 건너가 운반해다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지금 국수당의 쇠말 뒷다리 부러져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국수당의 철마들(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아카이브)


국수당의 철마를 확대한 모습(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아카이브)

위의 이야기는 충남 서산군 부석면 창리에서 전해져 오는 전설이다. 다음으로 주신의 승용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서낭신이나 도당신이 타고 다닐 수 있게 동제당에 철마를 봉안해 두었다는 것이 다. 마지막으로 솥점 또는 주물터(대장간)의 성업을 위해 모시게 되었다는 것은 대장장이들이 그해 첫 솥이나 주물을 만들 때 철마를 만들어 인근 제당에 바치면서 사고 없이 성업할 수 있도록 빌었다는 유래이다. 성덕리가 이러한 경우이다. 실제로 솥점이 있었다는 성덕3리의 밭을 뒤져보면 쇠똥, 즉 슬래그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장장이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성업을 위해 왜 동 제당에 철마를 바쳤을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과거 대장장이들이 지녔던 종교적 상징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샤머니즘 연구로 유명한 종교학자인 엘리아데의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라는 책에서는 샤먼과 대장장이가 무척 관련이 깊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고대에는 샤먼들이 왕이었으며 이 ‘샤먼-킹’ 들은 철을 다룰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민속학자인 이두현은 시베리아 여러 부족에게는 대장장이와 샤먼과 도공은 다같이 불의 지배자이며, 영웅이나 신화적 왕(왕조의 시조)도 이에 포함된다고 했다. 또한, 몽고족의 경우는 대장장이를 포함한 장인계층을 ‘달칸(Darkhan)’이라 하는데 이 말은 ‘영웅’을 나타내는 말이며 ‘자유로운’ 그리고 나라의 부역에서 ‘면세의 특권을 받은’ 귀족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샤먼과 대장장이가 비슷한 부류로 인식되었던 유풍은 우리나라의 탈해왕 신화에서도 나타난다. 신화에서는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기 위해 몰래 그 집 마당에 숫돌과 숯부스러기를 묻어 놓고는 자신의 집은 대대로 대장장이 집안이니 땅을 파보면 그 흔적이 나올 것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장차 왕이 될 탈해가 대장장이 집안임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대장장이들은 마을신에 대한 인식이 각별하였을 것이다. 대장장이들 역시 마을신을 신봉하였을 것이고 마을신이 좌정하고 있는 동제당에 철마를 봉안함으로써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러한 추론은 대장장이들이 철마 봉안 장소로 동제당을 택한 이유를 어느정도 설명해 주고 있다. 성덕리의 국수당 철마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도 대장장이들이 해마다 이곳을 찾아 철마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성덕리의 국수당은 마을 주민들의 신앙처이기도 하지만 대장장이들의 신앙과 꿈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성덕리 의례 문서인 <신사기록부> 표지(2016, 김태우)

성덕리 고창굿의 역사는 <신사기록부(神祀記錄簿)>라는 당문서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문서에는 을묘년(1915년)부터 을미년(2015년)까지의 고창굿 관련 내역이 적혀 있다. 이 문서를 보면, 일제강점기 동안에도 변함없이 꾸준히 고창굿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일제 때는 형사들이 와서 싸움판, 놀음판을 단속했고 일본인 지서 주임도 못마땅하게 여겼겠지만 줄곧 한해 걸이로 꼭 계속했다고 한다. 그 후도 굿을 하면 언제나 사람들은 많이 모였다. 노인들은 일본인 지서 주임이 반대하면 밤에 산짐승(호랑이)이 내려와서 문을 뜯고 했기 때문에 외경감으로 끝내 반대를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성덕리 고창굿은 다른 지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기도 했지만 국수당이 영험했다는 것도 유명했었던 것 같다.

성덕리 의례 문서 <신사기록부> 중 을묘년의 기록(2016, 김태우)

몇 년 전에 찾은 성덕리는 많이 변해 있었다. 외지인의 별장과 여기저기 들어서 있는 건물들로 인해 예전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국수당은 돌탑으로 바뀌고 새로 건축된 제당이 국수당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국수당 안에는 할아버지당, 할머니당, 국수당 신주가 함께 모셔져 있었다. 하지만 성덕리 고창굿의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는 고창제추진위원장인 김종구씨 (남, 2016년 당시 77세)의 열정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성덕리의 문서를 조사하기 위해 2016년에 다시 성덕리를 찾았을 때 농사일로 바쁜 와중에도 따뜻하게 맞아 주시고 세 시간 넘게 걸린 문서 촬영 동안에도 세심하게 배려해 주신 김종구 위원장님과 사모님의 따뜻한 마음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성덕리 고창제는 2009년 3월 5일에 양평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오랫동안 기록된 당문서와 잘 갖추어진 마을 제당들, 철마를 모신 국수당, 그리고 열정적인 주체들이 있지만 아직까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점이 아쉽다.


글 김태우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문위원으로 근무한 바 있으며 경기도문화재 전문위원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신한대학교 교양교육원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서울의 공동체의례와 주도집단』, 『경기도의 장인』(공저)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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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 경기학광장 Vol.3 _ 2019 겨울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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