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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옛길 역사문화탐방로 영남길

경기학광장Vol.3 _ Information & News

< 경기도 옛길 역사문화탐방로 영남길 >


- 경기학광장Vol.3 _ Information & News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경기도 옛길 역사문화탐방로 사업’(이하 경기옛길)의 시작 및 삼남길에 대한 소개는 창간호에, 두 번째 단추인 의주길에 대한 소개는 지난호에 기고한 바 있다. 삼남길, 의주길 두 개의 역사문화탐방로와 함께 2019년 현재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경기옛길은 이번에 소개할 영남길까지 총 3개 노선이며 삼남길과 의주길은 2013년에 영남길은 2015년에 조성 완료되어 다양한 활용 프로그램이 운용되고 있다. 이에 이번 호에는 역사문화탐방로 경기옛길의 세 번째 단추인 영남길을 소개해 본다.

1) 경기옛길 영남길


[그림 1] 조선시대의 대로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에는 총 6개의 간선도로망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지난호까지 소개한 의주대가 제1로, 해남로(삼남로)가 제5로, 이번에 소개하는 경기옛길 영남길의 바탕인 영남로(동래로)가 제4로에 해당한다.
물론 다른 조선시대 간선도로들과 마찬가치로 6대로 체제가 아닌 9대로, 10대로 체제일 때는 도로 번호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양을 시점으로 목적지가 부산 동래인 것은 변함이 없으며 전체 거리는 조선시대 거리 기준으로 약 960리에 달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천리길로 인식되며 이는 걸어서 열나흘에서 열여섯새 정도의 시간이 소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남대로 도로망의 전신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형성되었다. 경상도 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신라의 세력이 통일과 함께 확장되면 서 9주5소경을 설치하였는데 각 주의 치소와 소경 등을 왕래하는 교통로도 같이 정비되었다. 『삼국사기』 권37지리지 마지막 부분에 동해통, 북해통, 해남통, 염지통, 북요통 등 교통로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오통(五通)’으로 칭한다. 명칭 외에 경유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없지만 이름을 통해 각 길의 성격을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는 있다. ‘오통’의 존재를 통해 신라의 도로체계의 존재를 확인한 후 다른 기록들을 더 살펴보면 신라가 계립령과, 죽령 등의 고갯길을 도로망으로 개척하고 소백산맥을 넘어 중부지방으로 진출하면서 영남대로의 기반이 닦였다는 사실까지도 추론이 가능하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영남지방으로 향하는 도로망이 발달하는데 이 역시 영남대로의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영남대로는 조선에 이르러 6대로 체제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신라시대부터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영남대로가 조선시기에 이르러서는 한성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도로체계로 편입되는데 조선후기 『도로고』 상에서 영남대로(동래로)의 경로는 다음과 같다.

한성漢城 – 판교점板橋店 – 용인龍仁 – 양지陽智 – 충주忠州 – 조령동화원鳥嶺 – 문경聞慶 – 덕통역德通驛 – 낙동진洛東津 – 동명원현東明院峴 – 대구大邱 – 청도淸道 – 밀양密陽 – 양산梁山 – 동래東萊 – 좌수영左水營 – 부산진釜山鎭

경기옛길 영남길은 위 옛 영남대로(동래로)를 기반으로 하여 탐방로가 조성되었으며 다른 경기옛길 탐방로들과 마찬가지로 문헌에 나타난 각 경유지 중 경기도내 구간만을 그 사업 대상으로 하 기 때문에 판교점 – 용인 – 양지 – 돌원(石院: 현재 이천시 율면으로 충청도 충주시와 경기도의 경계)까지 탐방로가 조성된 상태다.

2) 영남길의 중요성

경기옛길 의주길의 기반인 의주대로(관서대로)가 대륙으로 통하는 중국과의 외교루트로서 그 중요성이 컸다면 영남길의 기반이 되는 영남대로(동래로)는 해양으로 통하는 왜(일본)와의 외교 루트로서 그 중요성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이 당시 중국대륙의 지배국가와 외교 사신단을 교환한 것은 두 시기로 나뉘는데 이는 사신단의 명칭에서 그 차이를 찾을 수 있다. 초기 대륙을 지배한 국가가 명明나라였던 시기 조선의 중국사신단 명칭은 조천사(朝天使)였다. 이는 ‘천자를 알현하기 위한 사신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명나라를 진정한 황제의 국가로 인정하는 의미였다. 그러나 대륙의 중심 세력이 청(淸)나라로 바뀌자 조선은 사신단의 명칭을 연행사(燕行使)로 바꾼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한 사신단’이라는 의미를 없애고 단순히 ‘연경으로 가는 사신단’이라고 의미를 축소시킨 것이다. 이러한 사신단의 명칭에 반영된 의미는 영남대로를 통해 해양세력인 왜(倭)로 보냈던 사신단에서도 보인다. 조선이 왜로 보낸 사신단의 명칭은 통신사(通信使)였으며 이는 곧 ‘믿음을 나누는 사신단’이라는 깊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로 왜가 이 믿음을 져버리자 조선은 왜로 보내는 통신사를 중단하고 만다. 신뢰를 져 버린 국가와 믿음을 나눌 수는 없는 법이다. 어찌되었든 영남대로는 이 조선에서 왜로 보내는 통신사와 왜에서 조선으로 보내는 사신단인 국왕사(國王使)가 이용했던 주요 외교루트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림 2] 에도성에 들어가는 통신사 행렬도[인조십사년통산사입강호성도], 조선1636년, 30.7cm×595cm), 국립중앙박물관

3) 영남길의 조선통신사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통신사의 규모는 300~500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사절단이었고, 6개월에서 1년이 소요되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이 사절단이 영남길을 통해 부산에 도착하면 대마도 주의 안내를 받으며 해로를 이용하여 대마도를 거쳐 교토나 도쿄로 향했다. 일본에 도착하면 통신사가 통과하는 지역의 객사마다 향응을 받으며 한시를 짓고 한문으로 학술적 의견을 나누는 문화 교류의 장이 열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에는 조선 사신들이 남긴 서화와 시문들과 사절단의 행렬도를 그린 병풍, 판화들도 많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새길 수 있다.

4) 과거길, 영남길

영남길을 조사하다 보면 많은 주민들이 영남대로를 과거길, 벼슬길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주 들을 수 있다. 과거제가 폐지된 것이 1894년 갑오개혁 때이니 아무리 연령대가 높은 주민이라도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봇짐을 메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올라 가던 선비들의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은 없겠지만 아직껏 과거길이라는 명칭이 남아 있다는 것은 영남길이 역사에 대한 기억을 간직 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도에서 한양에 이르려면 도중에 강원도부터 충청북도에 걸쳐 있는 소백산맥을 반드시 넘어야 했다. 전통사회의 토목기술에는 한계가 있어서 요즘처럼 터널을 뚫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자연히 험준한 산을 넘어 다니기 편리하도록 고갯길을 만들어 통행하였다. 이 고갯길이 죽령, 추풍령, 문경새재라고 불리는 조령 등이다. 이중 가장 오래된 고갯길은 신라 때 만들어진 죽령인데 경상도 지역을 영남(嶺南), 즉 고개 남쪽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죽령의 남쪽에 위치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시대 영남길의 노선이 새롭게 정비되면서 문경새재를 이용하게 되고 시간을 많이 단축하게 된다.


[그림 3] 문경새재과거길, 경북나드리, 경북도청

영남에서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가는 선비들은 여러 고갯 길 중에 꼭 문경새재를 고집하여 넘었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만약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질까 봐 걱정이 되고, 죽령을 넘으면 ‘쭈욱’ 미끄러질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고. 이에 비해 문경은 옛 이름이 ‘문희(聞喜)’였는데 이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과거급제라는 기쁜 소식을 듣기 위하여 영남은 물론이고 호남의 선비들까지 먼 길을 돌아서 문경새재를 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선비들까지 이런 미신을 믿었다고 나무라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은 당시 과거급제가 모든 선비들의 꿈인데, 한 번 과거길에 오르려면 여비와 숙식비를 마련하느라 집안의 기둥뿌리가 휘청거릴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그 때문에 평생 한두 번 정도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하니, 과거에 임하는 선비들의 조심스러운 마음이라고 이해해줄 만도 하다. 이렇게 과거길을 다니는 것이 큰일이었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상황을 잘 나타내주는 기록이 하나 있다. 조선 영조 때 경상북도 구미 선산에 살던 노상추라는 선비는 일생의 기록을 일기로 남겼고 이것이 <노상추 일기>다. 이 글에는 당시 선비들이 과거의 경비 조달에 얼마나 애를 썼는지, 한양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잘 드러나 있다.

5) 영남길의 이야기들

일천리에 달하는 영남대로는 교역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 길을 통해서 영남, 기호 지방에서 산출되는 각종 물품들이 한양으로 올라왔고, 그와 반대로 한양의 문화용품들도 지방으로 공급되었다. 이러한 물류의 유통은 영남길을 분주히 오가던 보부상, 소몰이꾼 등의 덕이었는데 이들은 수시로 영남길을 이용하기 때문에 대로뿐만 아니라 지름길에 해당하는 샛길도 애용하였고 덕분에 여러 갈래길들이 개척된다.


[그림 4 ] 산양1리 용산동 마방터(2015. 12. 24)

특히 영남에서 올라오는 소는 작게는 서너 마리, 많게는 열 마리씩 몰고 다니는 소대행수라고 불리는 전문 소몰이꾼이 있었는데 이들은 소의 발굽이 상하지 않게 짚신을 신기고 옆으로 서너 마리씩 묶어서 경상도 상주에서 경기도 광주까지 소를 몰았다. 영남대로 도처에는 여행객이 묶을 수 있는 큰 방 두어 개가 있는 주막뿐만 아니라 말과 소를 10~15마리 수용할 수 있는 외양간 시설을 갖추고 소죽도 쑤어 먹여주는 마방(馬房)도 존재했다.


[그림 5] 1973년 3월 24일자 동아일보 78

교역로로 중요했던 영남대로는 전쟁시 군대의 이동 경로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임진왜란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날짜가 4월 14일인데, 고니시의 군대가 한양에 진입한 날짜가 5월 2일이다. 평상시 혼자 걸어서 보름정도 걸리던 영남길을 대군을 이끌고 18일만에 돌파한 셈이다. 이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일어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왜군이 영남로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속속들이 꿰뚫고 있 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는 그간 일본국왕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사절단이나 왜관을 통해 들어와 조선에서 장기간 체류하였던 첩자들에 의해서 수집되었을 터다. 둘째는 당시의 영남대로가 대군이 무리 없이 진격할 수 있을 만큼 정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치열했던 동래성 전투와 충주전투를 제외하면 별 격전 없이 왜군이 한양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아쉬운 점은 영남대로상의 가장 험준한 고개인 문경새재의 방어선이 너무 쉽게 뚫렸다는 점인데. 이는 당시 신립 장군이 첩첩산중에 있던 천혜의 요새 문경새재를 버리고 비교적 평탄한 습지대였던 남한강변의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쳤기 때문이다. 배수의 진이란 죽기 살기로 싸우자는 의지가 서려있는 전법이지만 이는 최후의 수단일 뿐 좋은 전법이 될 수는 없다. 이러한 납득할 수 없는 신립의 판단에 대한 아쉬움은 전설로 남아 지금껏 문경과 충주지역에 전해진다.


[그림 6] 현재도 남아 있는 옛길의 모습 - 달래내 고개 올라가는 길 (성남시 금토동 경부고속도로 인접)

비단 임진왜란 시기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영남길의 바탕이 되는 영남대로에 흐르는 이야기들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도 한강 이남의 가장 중요한 교통 요지이며 수많은 자동차 도로들이 교차하는 너더리(板橋:판교)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영남대로를 넓혀 만든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에 얽힌 일화들, 달래내고개 이야기, 한국전쟁 당시 이 길을 오가던 우리 민족의 아픈 기억까지...... 영남대로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한반도에 거주해온 우리 민족의 수많은 기억들을 켜켜히 간직하고 있는 길이며 우리는 지금 그 길을 경기옛길 영남길로 걷고 있다.

글 남찬원 경희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옛 것과 오늘의 것이 조화된 민속과 지역문화에 관심을 두고 <파주 금촌마을의 회상과 기록>, <김포 군하리 마을지>, <고양시의 자연마을들> 등 저서를 집필했으 며, 현재 경기문화재단에서 조선시대 옛길을 도보탐방로로 재해석하는 경기옛길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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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3 _ 2019 겨울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2.18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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