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이천 김좌근 옛집을 찾았다.

경기학광장Vol.3 _ Information & News

< 이천 김좌근 옛집을 찾았다. >


- 경기학광장Vol.3 _ Information & News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어느 평균 술자리

학교 동창 몇이 어울려 술잔을 기울인다, 어디에서나 봄직한 이 사회 평균의 술자리. 정다운 대화가 고기 굽는 불판만큼이나 달궈지고.

“대한민국의 병폐는 끼리끼리 해먹는 정실문화(情實文化)가 그 주범 아냐? 일가붙이라고 밀어주고 당겨주고 같은 학교 출신이라 채용할 때 승진할 때 점수 더 주고 고향놈이라고 봐주고 결국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 인맥으로 얽힌 구조가 이 사회를 좀먹는 거라고. 기준과 원칙이 없어요, 그걸 강조하면 어디 삐죽 튀어나온 모난 놈 마냥 취급받다 정 맞고...떼거리공화국 떼한민국 이라고 ”

작은 인쇄업으로 밥 먹고 사는 그는 학창시절 군사정권에 맞서 스크럼 짜고 구호 외치다 강제징집 되었던 이력의 소유자다.

“근데, 너 역시 친구들 도움으로 일거리 많이 받잖아, 말은 쉽겠다만 누군들 그런 비판에 자유로운가? 생각해보라고. 좁은 땅덩어리에 자원빈국이지, 70년 전엔 동족끼리 서로 싸워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됐단 말야...거기다가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끼어 한 세대 넘게 식민 지배를 당한 경험도 있지, 그럼에도 OECD 참여국에 경제규모가 10등 이짝저짝 이라며...우리 부모님 세대만 해도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보릿고개의 기억이 있는데 이만하게 사는 것도 어쩌면 혈연 학연 지연으로 똘똘 뭉쳐 쌔빠지게 일한 결과 아닌가?”

정부출연기관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는 그는 왕년에 스크럼 밖 도서관에서 영어책 보느라 눈치 보던 박사학위 소유자다.
나이 50넘어 경기도 이천에서 부동산중개업 개업하며 대박나라고 화분 많이 받던 무던한 다른 동무가 말을 받는다. 그 역시 어깨동무 같이하고 구호 외치던.
“뭐 꼭 어떤 현상에 한 가지 측면만 있겠어? 이리저리 살펴보면 혈연 지연 학연의 정실문화가 순기능으로 작동해서 뭉쳐진 큰 힘이 되어 국가동력으로 발휘됐을 수도 있겠고 그게 오래 고이고 썩다보니 사회의 암덩어리가 됐을 수도 있겠고... 다른 나라는 안 그렇대? 팔은 안으로 굽는 게 섭리고 인지상정이잖아.”

그의 한마디 더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중심인물. 김좌근 알지? 그의 옛집이 우리 마을에 있어.”

한 번 찾아볼까.
그렇게 나선 길이었다.

정비 복원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김좌근 고택

경기도 지정문화재, 김좌근 고택

김좌근(金左根)故宅은 경기도 이천시 淸白리로 393번길에 자리한다. 부패와 세도정치의 상징 김좌근의 흔적이 청백리길에 있다니 어색하다. 김좌근 때문에 ‘청백리길’이라 했다면 잘못됐다.
경기도민속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인물 관련 유적은 대부분은 훌륭한 선현(先賢)이나 나라를 위해 충심을 다한 위인이 대부분인데, 이 김좌근 고택은 나라를 병들게 한 부패 인물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라 길 이름에 찬성하기 어렵다.
이 집은 김좌근의 아들이며 고종 때 어영대장과 이조판서를 지낸 김병기가 아버지 김좌근을 위해 지은 집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복판에 높다란 솟을대문과 사랑채, 행랑채가 두 겹으로 안채를 둘러싼 규모 있는 사대부 집 전통가옥의 모습을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었으나 후손들이 덩치가 큰 건물을 관리하기가 벅차다는 이유로 당시 신흥재벌에 건물을 팔아넘겼다.
사랑채와 행랑채를 뜯어 옮기는 도중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건물 이전이 중단되어 그나마 지금의 모습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평면구조는 ㄷ자 형태의 안채와 ㄱ자형의 행랑채가 따로 나뉘어져 있는데 원래는 두 건물 사이에도 가로막힌 건물이 있어 연결되고 사랑과 행랑을 흙을 밟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인적도 없는 집에 들어가 보니, 기둥과 서까래 들보는 물론이고 문살 하나하나가 잘 다듬어져 소홀한 구석이 없다. 기둥을 받친 주춧돌과 섬돌, 건물을 둘러싼 기단석들도 잘 다듬어져 정갈한 인상을 준다. 집 앞으로는 연못을 파서 인공 섬을 만들었는데 시멘트 구조물로 된 정자가 있고 연잎이 빼곡하다. 집 뒤쪽으로는 김좌근과 아들 김병기 등 일족의 묘가 있다.
2009년 서울대학교는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에 있는 이집과 주변 대지 10만1500㎡을 후손들로부터 기증받았다. 서울대는 이 집을 어찌 쓰려나. 2019년 여름, 아직 그대로 멀쩡히 있다.

안동김씨와 김좌근

김좌근은 1797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이다. 아버지는 순조 초기 벽파를 물리치고 안동 김씨 세도정권을 구축한 영안부원군 김조순, 어머니는 청양부부인 심씨이다. 김조순의 3남 1녀 중 막내였던 그는 손윗누이가 헌종과 철종 대에 두 차례나 수렴청정을 했던 순원왕후 김씨이다.
그의 나이 29세에 이르러서야 매형 순조가 장인 김조순의 회갑을 축하하는 뜻으로 무품관직인 부수(副率)에 임명한 다음 6품직에 보임하도록 했다.
1838년(헌종 4년) 7월 19일 규장각 직각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839년에는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의가 되었다. 1841년(헌종 7년) 1월 1일에는 이조 참판에 제수되더니 그달 8일에는 임금의 특 명인 중비(中批)로 현재의 장관 직급인 공조 판서, 또 8일 뒤에는 병조 판서가 되었다. 1842년(헌종 8년)에는 이조 판서, 한성부 판윤,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고 이후 계속 육조의 판서직을 오갔다. 보태 말하자면, 자고 일어나면 벼슬이 올랐다.
1849년(철종 즉위년)부터 의정부 우참찬, 선혜청 당상, 규장각 제학 등의 고위직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총융사, 금위대장 등을 역임하며 병권까지 움켜쥐었다. 이어서 형조 판서, 훈련대장, 공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고, 1853년(철종 4년) 2월 25일, 드디어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의 지위인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그 후 김좌근은 1863년(철종 14년)까지 세 차례나 영의정이 되어 정사를 주물렀다.
철종 즉위 초기 김좌근은 세도가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불식시키려는 듯 자못 인정에 넘치는 정책을 펼쳤다. 당시 그는 최근에 숙종대부터 금지된 지방 수령들의 거사유혜비(去思遺惠碑), 즉 공덕비(功德碑)가 유행하고(광주도자기 박물관 앞에는 당시의 공덕비가 즐비하다. 이 지랄들을 하고 살았구나...) 이를 세우지 못하면 수치로 여기는 악습이 생겨 관청 앞이 역대 수령들의 명단을 늘어놓은 꼴이 되었고, 이를 통해 모리배들이 경비를 챙김으로써 백성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며 이런 그릇된 풍조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철종은 수령들의 공덕비 건립을 엄금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훗날 동학농민혁명의 빌미가 된 고부군수 조병갑의 예(例)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패정권의 그늘 아래 허약한 임금의 명령이 통할 리 만무했다.
1854년에는 유배된 죄인들이 친상을 당하면 고향에 돌아가 장례를 치르게 하는 법이 지방 수령들에게 악용되어 뇌물수수로 변질되고, 형조에서 돈을 받고 석방하는 일이 잦으므로 서리(胥吏) 들이 농간을 부리고 죄인들이 거리낌 없이 횡행하는 일이 잦으니 법을 엄히 시행하라고 상주했다. 그렇듯 김좌근은 부조리한 형법을 개정하는 등 모나지 않는 정사를 펼쳤지만 정작 시급한 민생회복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김좌근과 그의 아들 김병기의 묘소에 있던 장명등과 묘표. 2009년 김좌근의 6대손이 서울대박물관에 기증하여 현재 서울대 캠퍼스에 전시되어 있다. 장명등은 그의 권세와 재력을 보여주는 듯 왕릉급의 최상품이다.


세도정치의 서막을 연 김좌근의 아버지 김조순(1765~1832)의 무덤. 이천시 부발읍에 자리하며 경기도기념물 제207호이다.

조선후기 세도정치과 신음하는 백성들, 그 와중의 김좌근

조선 후기 세도정권이 발호하면서 조선의 백성들은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신음했고, 이에 저항하는 민란이 전국 도처에서 발생했다.
삼정은 국가재정의 기본을 이루고 있었던 전세(田稅)·군포(軍布)·환곡(還穀)을 말한다. 그런데 세도가문에 거금을 바치고 벼슬자리를 얻은 지방 수령들은 본전을 뽑기 위해 삼정을 이용했고, 이에 부화뇌동한 아전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던 것이다.
탐관오리들은 군역을 내지 못해 도망친 사람의 군포를 이웃에게 부과하는 인족침징(隣族侵徵), 젖먹이 어린애까지 군적에 올려 세금을 부과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죽은 사람을 군적과 장부에 올려놓고 세금을 받아내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등으로 잇속 챙기기에 바빴다.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준 다음 비싼 이자를 받아냈다. 심지어 곡식을 빌려주지도 않았는데 장부에 허위 기재한 다음 이속들을 동원하여 강제로 돈을 빼앗기까지 했다.
실로 ‘쥐어 짬’이 딱 맞다.
이런 무지막지한 횡포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유랑자나 도둑이 되었다.
여기 그 시절을 노래한 정약용의 애절한 시 한 편이 있다.
간략히 소개한다.

갈대밭의 어린 신부 통곡하는 소리 기니,
통곡은 관아를 향해서 하다가 하늘에 울부짖네.
수자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것은 오히려 있었지만,
예로부터 사내가 자지를 잘랐다는 것은 듣지 못했네.
시아버지 초상은 이미 끝났고 아기의 양수조차 마르지 않았는데,
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올라 있네.
...
後略

- 자지를 잘라버린 애통함 (哀絶陽)

이 모습이 세도정치기 조선의 꼴이었으니.
누르면 튀어 오르고 학정(虐政)은 저항을 부르는 게 세상 이치다.

결국 1862년(철종 13년)부터 진주 민란을 시작으로 삼남지방에서 농민항쟁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제주도에서도 강제검과 김흥채가 주도하는 민란이 일어났다. 그들의 봉기 이유는 역시 지나친 조세와 불공평한 부역, 환곡의 횡포 등이었다.
이때 김좌근은 이정청의 총재관이 되어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삼정을 개혁할 수 있는 정책을 발의하게 했으나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나오지 않는 가운데 논란만을 일삼다가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 세도정권의 수장이었던 김좌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를 통해 벼슬자리나 이익을 얻으려는 무리들이 날마다 저택 문턱을 오갔고, 창고에는 그들이 가져온 뇌물이 그득했다.
김좌근은 나주 출신의 애첩 양씨를 몹시 총애하자 벼슬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녀를 찾아갔다. 그로 인해 양씨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자 사람들은 그녀의 세도가 정승 못지않다 하여 나합(羅閤)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흥선군 이하응도 파락호(破落戶)의 처지에 있을 때 나합에게 기대어 생존을 도모했다. 유력한 왕권 후보였던 경원군 이하전이 철종에게 “이 나라 조선이 전주 이씨의 나라입니까? 안동 김씨의 나라입니까?”라고 항의했다가 역모로 몰려 사사(賜死)되는 등 살풍경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그는 김좌근을 찾아가 함께 있던 나합에게 큰 절을 올리며 마님 대접을 해주었다. 이에 기분이 흡족해진 김좌근은 이하응이 친 난(蘭)을 팔아주고 주안상을 내주곤 했다.
1862년(철종 13년), 병약한 철종이 일어날 낌새가 없자 흥선군 이하응은 남몰래 신정왕후 조씨와 연통하여 차기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의 의도에 화답한 신정왕후 조씨는 1863년 (고종 즉위년) 12월 철종이 승하하자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아들 이재황을 양자로 삼아 보위(寶位)에 올렸다.


2009년 무렵의 김좌근 고택의 전경

이하응 국수 토하고
김좌근 아들 김병기가 그것을 집어 먹다.

‘상갓집 개’라 세간의 조롱을 받던 왕실 종친 이하응이 하루아침에 임금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되어 세도정치권력 안동김씨의 좌장 영의정 김좌근의 장동(莊洞)저택으로 점심초대를 받는다. 당상(堂上) 당하 할 것 없이 의정부와 육조의 벼슬을 꿰차며 국정을 주무르고 천하를 호령하던 김씨 일문이 즐비하게 모여 대원군을 맞이하는데. 평소 면을 즐기던 대원군의 입맛에 맞춰 국수를 삶아 대접한다. 한 젓가락 건져 입에 베어 문 대원군, 갑자기 ‘욱’ 하는 비명과 함께 먹던 국수를 게워낸다.
왕의 족친(族親)이되, 투전판을 기웃대고 장안의 부랑아들과 어울리며 상가와 잔칫집에 빌붙어 지내던 그다. 한 잔 술과 던져진 전 조각을 옷깃에 비벼 입에 넣고 헛웃음 지으며 저잣거리 싸구려 기생의 가랑이 사이를 오가던 왕년의 이하응, 더러 그의 잘난 붓끝솜씨로 친 난에 푼돈을 던져주며 그나마 체면치레를 시켜 주던 김좌근은 기겁을 한다.
어제의 ‘상갓집 개’가 오늘 유례가 없는 임금의 아버지 국태공이 되어 안동김씨 일가를 찾았는데, 기를 쓰고 공들여 대접한 국수에 독이라도 들었단 말인가. ‘국수에 비상이 들었다...’ 대원군이 외마디라도 할작시면 당장에 대원군의 호위무사들에게 횡액을 당하는 것은 물론 장차 멸문지화는 불 보듯 뻔한 노릇의 순간, 모인 일가붙이 중 김좌근의 아들 이조판서 김병기는 대원군이 먹던 국수 그릇을 급히 제 앞으로 당겨 남겨진 국수를 허겁지겁 입에 넣고 급기야 대원군이 토해 놓은 국수 가락까지 손에 움켜쥐고는 그마저 제 입에 털어 넣는다. 모인 안동 김씨들 중에서, 지난날 이하응을 가장 노골적으로 멸시하고 하대하던 그다.
대체 세도정치가 무엇이며 어땠기에 이런 구역질나는 장면이 가능했단 말인가.
그들이 누구였으며 무엇을 지키려 남이 토해놓은 국수를 제 입에 털어 넣어 결백을 증명하려 한 건가.

김좌근의 옛집을 둘러보며

‘법고창신(法古創新)’, 결국 어제를 살펴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약하려 함이 역사공부의 주요한 뜻 일게다.
조선을 기획 설계한, ‘조선의 디자이너’ 라 불러 마땅한 정도전은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적절한 견제를 머리맡에 두고 국가의 시스템을 만들고 매뉴얼을 정립했다.
‘여봐라 게 아마도 없느냐...’만이 아닌 ‘아니 되옵니다’를 외치며 목을 걸었던 나라였다.
그런 조선을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말아 먹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잖나.
오늘을 생각한다.
왕정을 지나 공화정을 사는 지금, 또 다른 세도정치는 없나?
“대학을 다닌 때를 두고, 나이를 얼마만큼 먹으니 ‘386세대’ 운운하잖아. 오래토록 말이 많더라고. 세월은 흘렀고 모두는 아니지만 그들 일부는 하나의 당파(黨派)가 되고 분명 권력 언저리에 있다 말이지. 조선일보는 자신들이 정권을 쥐락펴락 할 수 있다며? 실제로 그런 적도 있고. 돈이 권력이 된 세상, 재벌은 ‘법 앞에 평등’하지 않잖아.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일이고. 장동김씨, 김좌근이 지금은 없을까...?

김좌근 옛집을 함께 돌아 본 동무의 말이다.
김좌근을 찾으며 머릿속이 시끄럽다.


2019년 현재의 김좌근 고택


글 유성철

자유기고자 ‘뭐가 진짜인가’하는 것이 항상 궁금하다. 인쇄업에 종사하며 경기도 곳곳의 인물과 유적을 찾아 글로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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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3 _ 2019 겨울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2.18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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