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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 덕봉리 선비마을의 해주오씨 고문서

경기학광장Vol.3 _ Column & Study

< 양성 덕봉리 선비마을의 해주오씨 고문서 >


- 경기학광장Vol.3 _ Column & Stud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에는 조선시대 이래 해주오씨 자손들이 동성마을을 이루어 살아온 안성선비 마을이 있다. 고성산이 평온하게 감싸 안은 듯한 마을 안쪽에는 ‘정무공 오정방 고택’이 고풍스럽게 자리하고 있고, 그 맞은편에는 종중 재실이 있다. 고택은 해주오씨 정무공파의 종손가에서 대대로 살아온 곳으로서 종가의 내력을 보여주는 고문서가 전래되어 왔고, 종중 재실에는 종가와 별도로 정무공파 종중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고문서가 보전되어 왔다. 마을의 역사만큼이나 깊은 해주오씨 정무공파 종가와 종중 고문서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기울여보자.


양성 덕뫼마을 오씨

과거 양성현(陽城縣) 또는 양성군(陽城郡)이라 일컫던 고을은 경기도의 한 독립된 고을이었다. 현재는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양성면을 찾아가면 조선시대 지방의 공교육을 담당했던 양성향교(陽城鄕校)가 고색창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면사무소 마당에는 조선시대 몇몇 수령들의 치적을 기리는 선정비(善政 碑)가 남아 있어 이곳이 지난날 한 고을의 관아가 있었던 지역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양성면사무소에서 남쪽으로 차를 몰아 5분 정도 달리면 길옆으로 덕봉서원, 덕봉리, 안성선비마을 등을 알리는 표지판을 만나게 된다. 덕봉(德峰), 덕산(德山), 덕뫼 등은 모두 마을을 평온하게 감싸 안은 산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재 덕봉리에는 여러 성씨가 어우러져 살고 있지만, 조선 중기 이래 오백여 년 이상 해주오씨 정무공파 자손들이 일가를 이루고 선영을 유지해 옴으로써 모든 해주오씨 정무공파 자손들의 발원지가 되었다. 정무공(貞武公) 오정방(吳定邦, 1552~1625)은 1583년 (선조 25)에 무과에 장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때 전장에서 공을 세웠고,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역임한 뒤 병마절도사에까지 올랐으며, 사후에 정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오정방의 손자 대부터 생원·진사를 비롯한 문·무과 합격자가 줄을 이었고, 천파 오숙, 양곡 오두인, 해창위 오태주, 순암 오재순, 월곡 오원, 노주 오희상 등 당대의 명사들이 연이어 배출되었다.

종가와 종중에 전해진 문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5호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에는 안채와 사랑채를 갖춘 ㄱ자 형태의 살림집과 불천위(不遷位) 신위를 모신 사당이 남아 있다. 이곳은 정무공파의 종손과 그의 가족이 대를 이어 살아온 종가의 주거 공간일 뿐만 아니라, 양곡 오두인의 불천위(不遷位)를 모신 사당이 유지되어 온 곳이다. 이를 대변하듯 종가에는 국왕 정조가 오정방에게 시호를 내린 교지(敎旨),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천파 오숙의 문과 급제 홍패(紅牌), 경기도관찰사와 형조판서를 지낸 양곡 오두인의 문과 급제 홍패 및 경기도관찰사 제수 교서(敎書)와 유서(諭書), 그리고 역대 종손들의 관직 내력을 보여주는 각종 공문서들이 전래되었다.


1796년(정조 20) 오정방에게 ‘정무’라는 시호를 내린 교지

종가와는 별도로 정무공파 종중(宗中)에는 1700년대부터 형성된 종계(宗稧) 관련 문서, 종중 전답안(田畓案), 종중 재산목록, 종원들이 단체로 관에 제출한 민원문서 등이 여러 개의 궤짝에 담겨 지금의 종중 임원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조선시대에 종중이라는 인식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종계 조직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기는 1700년대를 전후한 때로 추정되고 있다. 부계 혈통을 중심으로 한 동성 종계 조직이 구체화되고, 그에 따른 규약이 제정되었으며, 일정한 산지(山地)에 선조의 묘를 차례대로 조성하는 선영(先塋)이 보편화된 것도 이 시기를 지나면서이다. 정무공파 종중에 전래된 1700년대 종계 관련 문서에는 종원들의 명단과 종계 절목(節目, 규약)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어 당시 양반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계의 실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종계절목’에는 종계를 결성한 취지, 종회(宗會) 소집과 의무, 집강(執綱) 및 유사(有司) 등 종계 실무자 운용, 상벌(賞罰) 규칙, 종계 자금 조성, 종원의 애경사 부조 등 종계 운영 전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종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선대 조상의 시향일(時享日)에 이유 없이 불참한 경우, 웃어른에 대해 불손한 행동을 한 경우, 종중에 상이 났는데도 조문하지 않는 경우 등에 대한 처벌을 명시해 놓았고, 종원 가운데 외직으로 수령에 부임하는 경사가 있을 때 전별금 지급이나 과거에 급제한 자손을 위한 등과답(登科畓) 운용 등에 대한 내용 등이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규약은 최초에 한번 만들어 놓은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서 지속적으로 추가하거나 개정되어 왔다.


정무공파 종중에 전해져 온 조선후기 종계절목

덕산 화민 오아무개가 사또께 아룁니다

종중에 전래된 고문서 가운데는 ‘덕산 화민 오○○(德山化民 吳○○)’ 명의로 관아에 제출한 문서가 여러 점 남아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관청에 문서를 제출할 때 어느 기관에 제출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거주지 범위나 호칭을 달리했다. 예를 들어, 경기도 양성현에 사는 사람이 경기감영에 문서를 제출할 때는 ‘경기도’ 라는 정식 명칭을 모두 쓰지 않고 ‘도내(道內) 양성현거(陽城縣 居) 아무개’ 정도로 표기했다. 반면 자신이 살고 있는 고을 관아에 문서를 제출할 때는 고을명마저 생략한 채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명칭 정도만 적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의 성명 앞에 ‘화민(化民)’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사또의 교화(敎化)를 입은 백성이라는 뜻으로 본관사또가 관할하는 고을 내에 살고 있는 백성을 뜻했다. 즉 ‘덕산 화민 오○○’ 라고 적은 것은 ‘사또께서 관할하고 있는 양성현 내의 덕산에 사는 오아무개가 사또께 아뢸 일이 있어 제출합니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798년(정조 22) 오침 등이 양성현에 올린 문서

위 문서는 1798년 2월에 ‘덕산 화민 오침(吳琛)’을 포함한 오씨 종원 56명이 공동으로 양성현에 제출한 문서이다. 수백 년 동안 정성껏 가꾸어 온 종중 선영의 나무 200여 그루를 유아무개가 밤에 몰래 베어간 행위를 엄히 처벌해 달라는 내용이다. 1838년에도 선영에 조성된 나무 수천 여 그루를 읍내 사람들이 몰래 베어간 일이 발생하여 ‘덕산 화민 오혁상(吳赫常)’ 등이 수차례 양성현에 호소한 문서가 남아 있다. 지금도 정무공파 종중에는 ‘송금(松禁)’ 이라는 종중 직책을 유지할 정도로 선영을 둘러싼 수목 수호에 대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고, 경기도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울창한 소나무 숲을 가꿔온 데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서울에 사는 오판서댁에서 경기순사또께 아룁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종중 문서 가운데는 조상들이 묻혀 있는 선영 수호를 위해 양성현에 살고 있는 오씨 종중 사람들이 공동 명의로 관아에 제출한 것이 여럿 있다. 그런데 이와 함께 ‘경거 오 판서댁 노삼동(京居吳判書宅奴三同)’의 명의로 ‘기영순사또주 (畿營巡使道主)’ 앞으로 제출한 문서도 여러 점 보인다. 서울 도성 내에 살고 있는 오판서댁의 종 삼동이 경기도관찰사에게 무슨 일 때문에 문서를 올렸고, 이 문서는 왜 종중 문서꾸러미에 함께 남아 있는 것일까?
1816년 4월에서 5월에 걸쳐 ‘경거 오판서댁 노삼동’과 ‘경거 유학 오재신(京居幼學吳載紳) 등’ 은 경기감영에 연이어 문서를 올렸다. 경기도 양성현에 있는 종중 선영의 나무를 함부로 베어간 이아무개 등을 법에 따라 다스려달라고 양성현감에게 하소연했으나, 상대측 이씨 집안 사람이 고을 좌수(座首)를 맡고 있는 등 양성현에서는 공정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순사또께서 다른 고을 수령에게 이 사건을 맡겨서 법대로 엄정하게 처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등장한 ‘오판서댁’은 공조·형조·이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한 순암 오재순(吳載純, 1727~1792) 집안을 가리킨다. 앞서 언급한 양곡 오두인의 아들 오태주가 현종의 딸 명안공주와 국혼을 하게 된 이후 해창위 오태주의 자손들은 한성부에서 계속 살면서 고위 관료와 학자를 여러 명 배출하였다. 오재순은 바로 해창위 오태주의 장손자이다.
또 1816년 5월에 제출한 문서에는 바로 오재신을 비롯하여 전병사(前兵使) 오의상(吳毅常), 전도사(前都事) 오희상(吳熙常), 군수 오철상(吳澈常), 전참판(前參判) 오연상(吳淵常) 등 이미 고관을 역임했거나 현직에 있는 정무공파 출신 관료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한성부에 사는 오판서댁 남자종 삼동이 경기도관찰사에게 올린 문서

양성에 있는 정무공파 종중에 어떤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현지에 살고 있는 종원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현지에서의 조치를 진행했고, 이 소식을 공유한 서울에 살고 있던 종원들은 또 그들 대로 당대에 영향력이 있었던 종원들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던 것이다. 양성에 있는 정무공파 종중의 일에 한성부 내에 살고 있던 해창위 오태주의 자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은 다른 문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종계 형성 단계에서도 오재소, 오재신, 오희상 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에도 양성의 정무공파 종가와 종중의 대소사에 큰 힘을 보태줬다는 일화가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양성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다시 양성면으로 돌아가 보자. 과거 양성현 관아가 있었던 곳이 어디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면사무소에 서 있는 선정비는 이곳이 한때 독립된 고을이 자리했던 곳임을 증언하고 있다. 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채 1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조선 중기에 창립된 양성향교가 가지를 넓게 드리운 은행나무 아래 자리 하고 있고, 남쪽으로 2km 지점에는 조선 고종 때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덕봉서원이 단정하게 들판을 향해 있다. 덕봉서원을 지나 오른쪽 굽이로 들어서면 정무공 오정방 고택과 더불어 해주오씨 정무공파 자손들이 5백년 넘게 살아온 안성선비마을과 그 들이 지켜온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보이고, 또 최근 신축한 종중 재실에는 종가와 종중에 전해져온 고문서 등의 복제본을 진열한 아담한 전시실도 갖추고 있어 경기도내에서 찾을만한 좋은 시간여 행 장소가 아닐까 한다.


글 박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한국고문서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대학원 고문헌관리학 전공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문서의 양식, 제도 등을 중점적으로 공부해 왔고, 최근에는 문서에 담긴 여러 정보를 토대로 사람들의 인식과 관습 변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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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학광장 Vol.3 _ 2019 겨울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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