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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국가 탄생과 화성 마하리 무덤떼

경기학광장Vol.3 _ Column & Study

< 백제의 국가 탄생과 화성 마하리 무덤떼 >


- 경기학광장Vol.3 _ Column & Stu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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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태고내”, “소근법” 등으로 우리나라 삼국시대 역사 내용을 외우곤 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태고내는 고구려의 태조왕, 백제의 고이왕, 신라의 내물왕으로 삼국에서 고대국가가 등장한 시기를 외우는 족보(?)였다. 소근법은 삼국에 불교가 전해진 시기로 고구려의 소수림왕, 백제의 근초고왕, 신라의 법흥왕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억법은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어 이미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그렇다면 30년 전 교육 내용이 현재와도 같을까? 이번호에서는 “태고내” 와 관련된 얘기를 하려고 한다.

지금 우리는 국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영토와 영역은 국가를 기준으로 나뉘어 있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모습이 고대에도 같았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고대국가의 성립을 평가하는 기준은 서양과 동양이 서로 다르다. 우선 서양에서는 노예제도가 정치적 기반이 되는 시기부터 고대국가가 시작된다고 본다. 자연스럽게 장원제도가 성립하는 중세시대 이후를 국가의 형성시기로 보곤 한다.

이에 비해서 한국에서는 유력 세력이 정치를 장악하는 중앙집권적 정치체가 등장하고, 이를 대표하는 거대 기념물인 성곽의 출현하며, 유력 계층의 마을과 무덤이 갖춰지면서 일정한 지배영역 이 성립되는 시기부터를 고대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한반도에 사는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을까? 쉽게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는 고대국가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백제의 국가 탄생을 상징하는 풍납토성 복원도(한성백제박물관)


그런데 사서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이미 기원전후 시기부터 삼국 이 일정한 영토를 가지고 영역 지배에 들어선 것으로 그려져 있 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사실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어 요 즘도 문헌사학계와 고고학계가 삼국을 바라보는 시각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국시대에서 가장 먼저 고대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구려이다. 고구려는 이미 기원전후 무렵에 성곽이 등장하고, 강력한 기마용병을 운영하는 중앙집권적 정치체를 완성하여 중국의 세력과 맞서게 된다. 고구려가 비교적 이른시기에 고대국가로 발전한 계기는 대륙과 맞닿아 있는 지정학적 특징이 가장 큰 몫을 하였다. 이에 비하여 백제와 신라는 낙랑군(樂浪郡)이 서북한 지역에 자리 잡기 이전까지 주로 종족을 매개로 한 연립 정치체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고대국가로의 출발이 늦게 되었다. <삼국사기 (三國史記)>에 등장하는 백제와 신라의 초기 왕권은 여러 부족 가운데 목지국(目支國)과 사로국(斯盧國)을 중심으로 연합체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과거에 백제가 처음으로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고 본 시기가 고이왕(?∼286년) 대였다. 그리고 1990년 대 후반 풍납토성이 백제의 왕성으로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고고학계에서는 풍납토성이야 말로 고이왕이 축조한 백제 최초의 성이라는 의견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18차례가 넘는 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은 풍납토성의 축조 시점이 고이왕 대와 관련이 없고, 근초고왕(?∼375년) 대와 관련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신라는 이사금의 시대가 지나고 마립간의 시대가 시작된 내물왕(356∼402) 대부터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는 의견이 중심이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는 기원후 4세기 중엽부터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는 것이 고고학계의 중심 의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제 우리 후배들은 “태고내” 대신 “태근내” 로 외우는 시대가 온 것이다.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한 백제는 여전히 지역 정치체에 대한 중앙집권적 통제 대신에 느슨한 간접지배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백제국을 운영하였다. 이러한 간접지배 형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 화성의 대형 백제 무덤떼인 마하리 무덤떼이다.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거대 우물과 출토 유물


백제의 지방 지배 모습을 보여주는 화성 마하리 무덤떼 전경(기호문화재연구원 조사 지역)


삼국시대 사람들의 무덤은 독특한 구조로 이목을 끈다. 특히 경기도의 삼국시대 무덤 양상은 더욱 특이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과 돌덧널무덤[石槨墓]이다. 이 가운데 돌덧널무덤은 이미 청동기시대 처음 등장하지만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는 것은 삼국시대에 접어들어서부터이다. 그리고 삼국시대 가장 특징적인 무덤 형식이 바로 굴식돌방무덤이다. 이전에는 없었던 돌방을 만들어 여러 차례 추가장이 가능하게 만든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는 중국 동한(東漢 : 기원후 25년 ∼ 220년) 대에 크게 유행한 벽돌무덤 [塼室墓]에서 그 유래를 찾기도 한다. 단지 벽돌 대신에 강돌이나 납작한 돌들을 이용해 무덤방을 만든다는 차이가 있을 뿐, 추가장이 가능하게 입구와 무덤길[羨道]을 만든 점에서 공통된다.

화성 마하리 무덤떼는 사적 제45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1995년 경부고속철도건설을 위해 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서울대학교박물관과 호암미술관 등에서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많은 수의 널무덤[木棺墓], 덧널무덤[木槨墓], 돌덧널무덤[石槨墓],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독무덤[甕棺墓] 등이 조사되었다. 마하리 백제 굴식 돌방무덤은 돌방의 형태가 방형 내지 장방형에 가깝다. 벽면 석재는 판석을 눕혀서 쌓는 방식으로 하단부터 중단부까지는 수 직으로 올라가며 쌓고, 이후 상단부는 말각형태로 폭을 줄여 안쪽으로 모아지게 쌓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특히 벽면의 모퉁이를 연접하여 쌓은 방식은 백제의 특징적인 무덤 양식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시신을 들고 들어가기 위해서 만든 무덤길은 중앙, 오른쪽, 왼쪽 등 다양한 형식이 발견되었다. 무덤 내에서는 대표적인 백제토기 항아리, 바리, 병 등이 발견되었으며, 고리자루큰 칼[環頭大刀], 말재갈, 귀금속 귀걸이 등의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다. 굴식돌방무덤은 당시 화성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유력 계층의 무덤으로서 당시 화성지역의 정치적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무덤으로 평가된다. 특히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경기도 고유의 무덤 형태로써 주목된다.


화성 마하리 기호-1호 굴식돌방무덤 구조(왼쪽)와 출토 유물(오른쪽)


최근 조사된 마하리 무덤떼는 (재)기호문화재연구원이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번 조사는 화성시 봉담읍 당하리에서 정남면 오일리 사이의 도로확포장공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2018년 8월 20일 (재)기호문화재연구원이 처음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2019년 9월에야 조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발굴조사가 1년 넘게 진행된 것은 이전 발굴조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규모 무덤이 한꺼번에 발견되어 보존 대책이 논의 되었기 때문이다. 발굴조사 결과 총 143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백제 유구는 굴식돌방무덤 6기, 돌덧널무덤 52기, 독무덤 1기, 집자리 13기 등 132기가 확인되었다.


화성 마하리 무덤떼는 출토 유물 등으로 볼 때 지방의 귀족 무덤으로 평가된다. 삼국시대 남진을 계획하고 있던 백제에 있어서 화성지역은 충청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에 해당하였다. 이런 이유로 백제의 중앙세력은 화성지역의 유력 계층을 적극적으로 회유하였는데 바로 마하리 백제 무덤떼가 대표적인 회유의 결과이다. 그 증거들은 백제의 중앙양식 토기류와 귀금속 등이 다수 출토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앙의 무덤 양식을 강요하지 않고, 지방 고유의 장례 풍습을 허용하면서 백제 중앙의 지배권에 속하게 하는 정책을 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화성 마하리 무덤떼는 삼국시대 고대 국가 백제의 지방 지배 형태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조사 지역은 원래 도로가 개설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무덤떼의 학술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가 제기되면서 해당 지역 지하로 터널을 굴착하여 도로를 개설하는 방식으로 설계가 변경되고 있다. 학술적 가치가 높다는 것은 곧 후대에 물려줄 우리의 소중한 유산이라는 점을 대변한다. 따라서 무분별한 개발 보다는 합리적인 보존대책이 필요한데 마하리 무덤떼의 보존 대책이 좋은 선례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 의미가 크다.


화성 마하리 기호-3호 굴식돌방무덤 구조(왼쪽)와 내부 구조(오른쪽)


경기도 지역 가운데 화성 지역은 개발 속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늦은 편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파괴되지 않고, 잘 보존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하리 무덤 떼의 주변으로는 사적으로 지적된 것이 무색할 만큼 많은 수의 공장들이 들어서 있으며, 무덤의 궁둥이가 터져 외부에 노출된 부분이 적지 않다. 향후 사적 주변에 대한 정비와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삼국시대 백제 지방인의 실체를 꼼꼼하게 밝혀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초기 단계의 지방자치제를 시행하고 있다. 중앙 정부는 재정지원과 정책적 결정을, 지방자치단체는 적극적인 지역 정책 실천이라는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인 국가 경영의 모습이다. 그런데 최근 지나친 중앙 간섭과, 도를 넘은 지방자치단체의 월권 등은 모두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효율적인 국가 운영 방식은 중앙과 지방이 조화를 이루었던 마하리 무덤떼와 같은 사례가 아닐까 싶다.




글 박경신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학예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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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3 _ 2019 겨울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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