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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신라 고분에 부장된 토기 훼기 습속

경기학광장Vol.3 _ Column & Study

< 경기도 신라 고분에 부장된 토기 훼기 습속 >


- 경기학광장Vol.3 _ Column & Stu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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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에 신라인들이 오다

서기 553년 신라(新羅) 제24대 진흥왕(眞興王)대에 신라인들은 551년에 백제인들이 회복한 한강 유역 일대를 빼앗아 지금의 하남시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삼국을 통일한 668년 이후에는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개편하였는데, 경기도를 포함한 서울과 황해도, 충청도 일부가 한산주(漢山州) 에 속하게 되었다.
신라인들은 경기지역을 점유하면서 원주민들은 물론 영남 지방의 사람들도 옮겨 살도록 했는데, 이러한 정책을 사민(徙民)이라고 한다. 이 정책에 따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경기지역으로 유입되었고, 여러 곳의 성곽을 중심으로 취락과 고분군, 가마 등의 생산유적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신라인들은 6세기 중반부터 고려시대(高麗時代)가 시작되는 10세기까지 성곽과 취락 주변 산이나 구릉지대에 많은 고분(古墳, 무덤) 을 조성했는데, 대표적으로 파주 성동리, 하남 금암산, 용인 보정동, 여주 매룡동, 이천 중리동 고분군 등이 있다. 최근까지 발굴된 신라 고분의 수는 약 520기에 이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수의 고분이 발굴될 것으로 예상된다.

고분 종류와 훼기 습속의 시작

경기지역에 축조된 신라 고분은 횡혈식 석실묘〔굴식돌방무 덤〕와 횡구식 석실묘〔앞트기식 돌방무덤〕, 석곽묘〔돌덧널무덤〕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들 고분에는 죽은 이를 위한 약간의 껴묻거리 즉 부장품(副葬品)을 함께 묻었다. 부장된 유물의 종류는 토기(土器)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운데, 철기류와 대금구류, 귀금속류, 청동기류가 간헐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그런데, 고분에서 출토되는 토기 종류는 부가구연대부장경호(附加口緣臺附長頸壺)를 비롯한 고배(高杯), 완(盌), 병(甁) 등인데, 이중에는 토기의 구연부〔입술〕이나 경부〔목〕, 대부〔굽부분〕을 일부러 깨뜨린 것이 있다. 이렇게 토기의 특정 부위를 깨뜨린 행위를 ‘훼기(毁棄)’했다고 하며, 장례(葬禮)와 관련된 하나의 습속(習俗)으로 이해되고 있다.
훼기 습속은 중국(中國) 동북지방이나 중앙아시아, 일본(日本) 등 동북아시아지역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제의(祭儀)와 관련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특히 몽골지역의 흉노(匈奴) 무덤에서는 청동 거울을 비롯한 청동 용기류, 토기 등을 훼기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데, 부장된 대부분의 유물 일부분이 훼기된 상태로 출토되고 있다.


몽골 골모드 유적 1호 흉노묘


몽골 골모드 1호 흉노묘 출토 청동 거울편

이러한 훼기 행위는 한반도에서도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 제의유적이나 고인돌〔支石墓〕 등에서 의도적으로 깨뜨린 토기편과 석기편 등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신라는 물론 고구려와 백제, 가야지역에서도 토기를 훼기해 왔고, 고려시대에도 부장된 토기를 훼기하였지만 자기류와 청동제 용기로 대체되면서 점차 사라져가는 양상을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병을 중심으로 완, 발, 접시 등이 부장되었는데, 병의 구연부가 훼기된 경우가 많고, 조선시대에도 자기류의 구연 일부를 깨뜨리거나 작은 명기 (明器)가 대신 부장되기도 한다. 작은 명기는 실생활에서 사용하기 어려운 크기로 만들어졌으며, 훼기 습속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한 불교의 확산에 따른 화장(火葬)문화가 유행하면서 부장품의 매장 비율이 감소하는 한편, 훼기 습속도 약화되는 측면이 있다.


하남 덕풍동 수리골 4호 석곽묘


화성 분천리 B지구 석곽묘


하남 광암동 10호 석곽묘 유물 출토모습

훼기 토기의 특징은 무엇인가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는 토기들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종류는 앞에서 언급한 부가구연대부장경호와 병, 고배, 호, 완 등이 있다. 이들 토기가 훼기된 경우 보통 구연의 한 군데만 깨뜨린 것이 가장 많고, 2~3군데 간격을 두고 깨뜨리거나, 연속적으로 깨뜨린 경우도 있다. 깨뜨린 횟수를 보면, 1회나 3회를 때린 경우도 있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홀수라는 숫자의 의미를 고려한 것일 개연성이 크다. 연속적으로 깨뜨린 경우는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하여 구연이나 대각을 여러 차례 타결했다. 특히 고배와 대부완 중에는 구순부를 연속적으로 떼어낸 것이 있는데, 이러한 훼기 수법은 기술적으로 정교함이 요구되는 것으로 숙련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며, 깨뜨릴 때 사용한 도구는 석봉이나 주조괭이, 숫돌 등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토기의 구연부와 대각을 깨뜨린 이유는 무엇일까? 구연부는 사람이 직접 입을 대고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내용물을 덜어 낼 때, 보다 용이하게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러한 구연부를 일부러 훼기한 것은 토기 본래의 기능을 상실시키기 위한 목적과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표시해 두는 상징성이 결합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구연부를 훼기한 토기들이 많은 이유는 제기(祭器)로 사용되었다는 표시를 남김으로써 부장용으로 사용된 것을 재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대각을 훼기한 이유도 구연부를 훼기한 목적과 같은데, 그릇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깨뜨린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상징적으로도 제의과정을 마친 후 훼기가 이루어졌을 것이므로 용도에 맞게 사용한 뒤에 폐기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제기나 부장용으로 사용된 토기에 대해서 흔히 “장례 때 사용한 그릇은 되가져 오지 않는다” 또는 “깨진 그릇은 재수가 없다”는 속설과도 연계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용인 보정동 소실 2-1호 출토 고배와 김포 양촌 D구역 2호 석곽묘 출토병, 군포 산본동 3호 석곽묘 출토 편구병의 바닥에는 ‘X’자가 시문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시를 하는 것도 현생에서 제물로 사용된 것을 재사용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인 동시에 제물(祭物)로서의 기능을 다했다는 표시로 해석될 수 있겠다.


왜 병을 가장 많이 훼기했을까?

토기 종류 중에 훼기가 많이 된 순서는, 병>편구병>부가구연 대부장경호>호>고배>대부완이다. 그렇다면 왜 병과 편구병이 다른 기종에 비해 훼기된 수가 많을까? 병과 편구병은 6세기 중반부터 9세기까지 꾸준하게 고분에 부장되었는데, 고배, 완, 뚜껑 등과 함께 세트를 이루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또한 3~4 점 이하의 토기가 부장된 경우에도 병이나 편구병은 거의 대부분 부장되었고, 훼기된 수량도 많은 편이다. 병류의 훼기 비율이 높은 이유는 장례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장례과정에서 필요한 음식물인 술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피장자를 집에서부터 장지(葬地)까지 운반하여 피장자를 고분에 안치한 뒤,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제사를 치르면서 부장품을 매납하는데, 이 때 약간의 음식물과 함께 병류에 술을 넣어 사용한 후 부장했을 개연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과정을 음식물 공헌(貢獻)이라고 하는데, 의성 학미리 1호 석실묘 등에서는 토기 훼기와 더불어 현실 안에서 음식물 공헌 및 향화(香火), 시상 사이에 대도 부장, 호석 밖에 기대 훼기 등의 양상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산동 73호 남순장덧널에서 출토된 개배 안에서도 생선뼈가 나왔고, 그 외 고령 지산동 여러 고분에서 발견된 토기 안에서 고등어, 바다고둥 등과 함께 닭이나 새뼈, 복숭아, 기장 등이 남아 있었다. 경기지역 고분 중에서는 파주 성동리 경-석실 2호분의 유개고배 안에 서 생선뼈가 출토되기도 했다.
따라서, 병류가 훼기대상 기종으로 선택되는 이유는 술을 담아 다른 음식물과 함께 공헌되었기 때문이며, 대부분 피장자의 머리쪽 옆에 놓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술은 도취음료로서 제사나 결혼, 축제 등의 행사 때 나눠마셨고, 이것을 인간은 신(神)과의 교류를 하는 매개체로 삼았을 것이며, 죽은 자를 위한 위로 차원에서 중요한 제물로 여겼을 것이다. 또한, 병으로서의 기능을 상실시킨 행위이기도 하지만, 관념적으론 죽은 자를 위로하고 또 한편으로 죽은 자와 산 자가 인연을 끊기 위한 의미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고령 지산동 2호 석곽묘 출토 유개고배 (바다고둥이 담겨 있다)


훼기 습속의 변화와 목적에 대해

경기지역에서 발굴된 신라 고분에서는 부가구연대부장경호를 비롯하여 고배, 완, 단경호, 잔, 병, 접시, 발형토기, 파배 등이 출토되고 있으며, 수량은 10점 미만인 경우가 많으나, 파주 성동리 고분군에서와 같이 20점이 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7 세기 중반을 지나면서부터는 기종이 병과 고배, 완, 합, 호 등으로 단순화되고, 수량도 5점 이내로 줄어들며 10점을 넘는 경우가 드물다. 특히 7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 이르면 제기로서의 토기 사용이 이전에 비해 더 간소화되었음을 의미하며, 장례와 관련되어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즉 8~9세기 불교의 확산으로 인한 왕실과 귀족, 승려들의 화장(火葬)이 유행하게 됨에 따라 민간에도 영향을 주어 매장 중심의 장례문화에 변화가 생겼다. 따라서, 신라인들은 고분에 많은 토기를 부장해 오다가 불교의 영향으로 점차 고분을 축조하기보다 화장을 선호해 가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이해된다.
불교의 영향을 받아 고분 축조 비율이 줄어들자 토기 부장량이 감소하게 되었으며, 제의행위도 간소화된 것으로 이해된다. 즉 부장된 토기 중 여러 점을 훼기해 오던 방식에서 병류를 중심으로 1~2점만 깨뜨리고, 구연을 연속적으로 떼어내거나 구연과 대각을 깨뜨리던 훼기방법은 되도록 단순하게 쳐서 부장 하는 양상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기존의 매장문화가 화장문화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소요되는 비용의 절감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릇을 깨는 행위는 사령(死靈)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한 단절의 기원과 사령에 대한 배려 모두가 혼합된 태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한, 토기 훼기를 통해 피장자를 위한 장례절차가 마무리 되어감에 따라 남은 가족들은 죽음이라는 두려움에서 차츰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토기를 깨는 소리와 노래 등의 장례의식은 죽은 영혼을 위로함과 동시에 잡귀(雜鬼)를 물리치는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거나, 남은 가족과 장례를 준비한 사람들에게 심리적 위안과 안도감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훼기된 토기도 그 생명력이 끝난 것이므로 피장자와 함께 부장됨으로써 장례를 위해 준비한 제물로서의 기능도 다 한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요즘 우리의 장례방법은 매장하는 것보다 화장이 다시 유행 하고 있다. 인구는 많고, 땅은 좁은데, 묘는 많아지다 보니 후세들과 자연을 위해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봉안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조상들의 묘는 함부로 정리하지 못하니, 한식(寒食) 때나 추석 때 등 1년에도 여러 번 성묘를 하고, 벌초를 하는 문화는 아직 남아 있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제사 음식과 그릇, 술을 들고 성묘를 하게 되는데, 필자가 조사를 다니다보면 묘 주변에 버려진 술병은 물론이요 음식과 깨진 그릇을 자주 보게 된다. 그만큼 습속이라는 것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전해져 오고 있음을 목도(目睹)하고 있지만, 이제는 환경보호는 물론이요 멧돼지로부터 조상님 묘를 지키기 위해서 라도 묘 주변을 청결히 하고, 쓰레기를 수거해 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글 황보 경

세종대학교 박물관 학예주임. 세종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신라문화연구』, 『역사자료로 본 삼국과 한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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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3 _ 2019 겨울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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