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의 주막거리 >
- 경기학광장Vol.3 _ Column & Stu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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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주막은 여행자에게 술과 밥을 팔거나 잠자리를 제공하는 사설
시설을 말한다. 따라서 주막은 교통이 빈번한 길가에 위치하기 마련인데, 경기도는 한양에서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도로망이 통과하는 곳이므로 예로부터 주막이 번성할 수밖에 없었다.
대개 도시의 변두리 지역이나 시골의 경우는 험난한 고개나 나루를 건너는 지점에 주막이 한두 채 정도 있었지만, 6대로 등 간선도로의 경우는 통행량이 많아서 주막집이 줄지어 있었으므로
주막거리라고 불렀다.
경기도의 주막거리는 한양을 오가는 여행객들의 휴게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성에서 유래한 주막문화를 흡수하여 전국으로 전파하는 등 주막문화를 선도했던 지역이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경기도의 주요 주막거리를 찾아 전통적 길문화이자 유흥문화를 이끌었던 주막의 모습과 변모양상에 대하여 고찰해보고자
한다.
주막거리를 형성하였던 지역은 지금도 음식점과 유흥업소가
밀집해 있는 상업지역인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주막거리에 대한 연구는 단순한 과거회귀적인 관점을 넘어 이러한 지역이 지녔던 나름의 역사적 배경을 밝히는 일이며, 더 나아가 이들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작업으로서 미래지향적인 의미도
부여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2. 경기도 주막거리의 사적 전개 양상
■ 원(院)에서 주막으로
전통사회의 교통제도는 역원제를 기반으로 하였다. 역은 공문을 전달하거나 공무로 여행하는 자에게 역마를 제공하는 곳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숙식처를 알선하기도 하였다. 바로 원이 여행객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곳이었으며, 주로 퇴임한 관리나 지역의 유지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였다. 그래서 원은 처음에는 공적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를 위한 시설이었지만
점차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며 역할이 확장되었다.
하지만 원을 운영하는 데는 상당한 재정이 필요했는데,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시설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의 지원만으로 운영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양평군의 신원리는 <신증동국여지승
람>의 기록에 따르면 월계원이 있었던 곳이지만, 신원(新院)이라는 지명이 붙은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월계원이 폐쇄된 후 새로운 원이 들어선다. 신원리에는 이외에도 호리원이라는 자연마을도 있는 것을 보면 이곳에 있던 원이 폐쇄와 개창을 거듭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 중기부터는 원이 하나 둘씩 폐쇄되기 시작하며 영리적 목적으로 운영되는 사설 숙박시설인 주막이 나타난다.
■ 숯막〔炭幕〕에서 술막〔酒幕〕으로
조선 중기에는 원을 대체하는 시설로 숯막이 등장한다. 이 숯막에 대해서 유희춘(1513~1577)은 “경기도 일대의 숯막〔炭幕〕은
여행하는 사람들이 숙박하는 곳인데, 도둑이 쳐들어가서 협박하고 그 집을 불태웁니다.” 라고 하여 경기도 도처에 존재했던 숯막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숯막이 어떤 형태였는지는 윤국형(1543
∼1611)의 <갑진만록> 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호남과 영남의
대로에 주점이 있기는 하지만, 여행하는 사람이 도움을 받는 것은
술과 물, 꼴과 땔나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길을 떠나는 사람은 반드시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싣고 가는데, 먼 길일 경우 말 세
마리에 싣고 가까운 길이라도 두 마리 분량은 되기에 사람들이 괴로워한 지가 오래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숯막은
술을 파는 주점인 동시에 숙박시설이기는 하지만 꼴과 땔나무 정
도를 제공할 뿐이어서 여행자들이 직접 불을 때서 밥을 해먹고 우마를 먹여야 하는 곳이었다. 이렇듯 술을 제외하고 숙식은 손수
해결해야 하는 셀프-서비스 형태의 시설을 불을 피우는 공간으
로 대유하여 숯막이라고 불렀던 듯하다.
이러한 숯막은 원에서 주막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이
었다고 판단된다. 여기서의 주막은 주모가 여행객에게 술과 음식, 그리고 숙박에 관한 편의를 온전히 제공하는 장소를 의미하며, 이
러한 형태의 주막이 본격적으로 번성한 것은 임란, 병란 이후로
판단된다. 특히 17~8세기에는 화폐가 통용되고, 상업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주머니가 두둑한 여행객들의 수가 급증했다.
이에 본격적인 서비스업으로서 주막의 영리적 운영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이덕무는 <서해여언(西海旅言)>에서 “술과 숯은 발음이 서로
비슷하므로 술막(酒幕)이 와전되어 숯막(炭幕)이 된 것이다.” 라고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조선후기 주막이 성행하였던 상황에서 생겨난 착각인 듯하다. 곧 숯막의 시대는 이미 끝났고 술막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조선후기 주막의 번영 양상
▲ 1900년대 초 서울근교 주막집 모습
주막은 ‘술 주(酒)’자와 ‘장막 막(幕)’자의 합성어이다. ‘장막’
의 의미는 ‘비바람을 가릴 정도로 간단하게 만든 집’을 가리키므로 임시숙소의 개념에 알맞다 하겠는데, ‘술’이라는 글자가 앞서는 바람에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주막은
술집이면서, 음식점이었고, 여관이기도 했던 것이다. 여행객들이
요기를 하고 한 잔 술로 피로를 풀고 잠을 청할 수 있는 복합시설,
그것이 바로 주막이었다.
사실 이러한 형태의 숙박시설은 고려시대에도 가동한 바 있었다. 고려 때에는 원이 불교사원에 의해 운영되는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불교사원에서는 세금과 부역을 면제 받으며
술과 국수 등을 판매하고 숙박업까지도 하였다고 하니 원이라기보다는 주막의 초기 형태였던 것이다.
아무튼 조선후기에는 스님 대신에 주모가 손님을 접대하는 주막이 등장하였으며, 예전에 원이 있었던 지역만이 아니라 장사가
될 법한 곳이면 자연발생적으로 주막이 들어서서 거의 5~10리 간
격으로 자리했다. 주막집이 많아지면서 주막들끼리 경쟁이 붙게
되었는데, 주모의 수완과 손맛, 넉넉한 인심이 주막의 성패를 좌우했을 터이다.
주막집은 술을 팔 경우에는 안주는 공짜였다. 정확하게는 술값에 안주값이 포함되었다고 봄이 타당하겠다. 또한 술과 음식을 먹으면 잠은 그냥 잘 수 있었다. 주막에는 커다란 방이 두 개 정도 있
었는데, 먼저 온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주막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복불복이었던 셈이다.
■ 유흥문화를 선도했던 주막의 후신들
주막은 조선후기로 넘어서면서 술집의 개념이 가장 앞서가는
양상을 보인다. 낯선 곳에 머물며 여행의 피로감을 풀고 잠을 청하기 위해 술을 한 잔 걸치는 경우보다 술을 마시기 위한 목적만으로 주막을 찾는 경우도 허다해졌기 때문이다. 애초에 주막은 술값과 밥값만 받았지 방값은 받지 않았으므로 숙박을 하고 가던 말던 개의치 않는 곳이니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자연스러웠다고도
볼 수 있다. 주막을 나타내는 표시로 대부분 ‘주(酒)’라는 글자를
적은 깃발을 내걸었다는 사례를 통해서도 이러한 변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주막에 따라서는 접대부를 두는 곳까지도 나타나게 되었고, 조선 후기에 상업이 활발해지고 농업의 생산량이 증가함에 따라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숙식의 장소와는 별개로 술과 접대부만으로 운영되는 주점들이 나타나며 유흥의 장소로 탈바꿈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주점은 내외술집, 선술집(목로주점), 대폿집, 색주가(니나노집) 등으로 다양해져갔다.
이러한 술과 관련된 유흥업소는 일제강점기 이후 외래적인 요소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는 해도 그 기원이 주막에서부터 유
래된 것임은 부인할 수가 없다.
· 내외주점
‘내외(內外)’라는 단어는 남녀 사이에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고 피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내외주점은 주모가 얼굴을
비치지도 않고, 손님에게 술만 파는 술집을 일컫는다. 이 주점은
늙은 과부나 몰락한 양반가의 안주인이 생계를 위하여 술집을 차린 데서 유래한다. 그래서인지 막걸리를 시킬 때에도 격 있게 불러야 했고, 문간방으로 손님이 들어오면 주모가 쪽문을 열고 팔뚝만 쑥 내밀어 술을 따라주거나 술상을 들이민다고 하여 ‘팔뚝집’
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 선술집
선술집은 서서 술을 마시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형태의
주점은 조선후기의 번화가에 위치한 주막에서 주로 발견할 수 있다. 신윤복의 <주사거배>를 보면 주모가 술을 떠주면 손님들이 마
당에 선 채로 술을 마시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손님들의 복색을 보면 여행객이나 서민들이 이용하는 술집은 아니고, 양반 술꾼들이 주로 이용하던 곳인 듯하다.
▲ 신윤복 주사거배. 선술집의 기원이 되는 주막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가 되면 서양의 바(Bar)를 연상시키는 목로주점이
생겼다. 목로는 널빤지로 만든 좁고 기다란 상을 가리키는데, 바의
어원도 막대기 술판을 뜻하므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서민들의 술집은 발생학적 공통점이 있는 듯하다. 이 목로 위에 술과 안주를
올려놓고 서서 마시다 보니 이 역시 선술집이란 이름으로 통용되었다.
· 대폿집
‘대폿집’의 대포는 큰 잔을 의미하며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유행한 막걸리집에 해당했다. 대폿집의 원래 형태가 어떻게 출발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둥근 테이블에 막걸리가 담긴 주전자와
안주를 올려놓고 간이 의자에 앉아 술을 마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모저모 따져보면 주문을 받고 술과 안주만 내주면 그만일 뿐 손님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술집이니 진정한 내외주점의 후신은
대폿집이었던 듯하다.
· 색주가
색주가(色酒家)는 작부 두세 명이 손님들에게 술을 따라주고
몸을 팔기도 하는 곳이다. 그래서 여자를 뜻하는 색(色)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술집이 생긴 것은 상당히 오래되었겠지만, 그림이나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조선후기부터이다.
▲ 김준근, 색주가 모양
색주가는 하급관리나 중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유흥문화였는데, 조선후기 탑골과 수은동 등 도성의 시
전 부근에서 연원하여 홍제원, 남대문 바깥쪽 등 도성
밖에도 자리잡으며 점차 근교 지역으로 퍼져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색주가 앞에는 술 거르는 도구인 용수에 비올 때 갓 위에 쓰는 갓모를 씌워서
긴 장대에 꽂아 세우고, 그 옆에는 작은 등을 달아서 표시를 했다.
이후 색주가가 서민용으로 보급화된 형태라고 보이는 것이 ‘색싯집’ 속칭 ‘니나노집’이었다. 작부들이 주흥을 돋우기 위해서 젓가락을 두드리며 예전 색주가의 잡가 대신 노랫가락이나 유행가를 부르는 것이 이 술집의 트레이드마크였으므로 ‘니나노’라는 여흥구가 술집 이름에 들어간 것이다. 이 니나노집은 적어도
1960~70년대까지는 전국에 만연할 정도로 보편적인 유흥업소로
자리매김했다.
3. 경기도의 주막거리
1) 원이 있던 자리에 주막거리가 들어서다
■ 판교주막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은 한양에서 부산을 잇는 영남로가 통과하는 길목이었다. 판교라는 지명의 유래도 길과 관련이 있다. 이곳에는 탄천을 가로질러 건너는 널다리가 있었고, 영남로를
오가는 행인과 우마차들이 이 널다리를 끊임없이 지나다녔으므로
이 마을을 ‘너더리마을’(현재의 판교1동)이라 불렀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판교(板橋)인 것이다.
원래 판교에는 조선 초에 원이 있었다. <태조실록> 판교원에
대한 기록이 처음 보인다. 도승총(都僧統) 종림(宗林)과 전 판서
윤안정(尹安鼎)이 판교원을 지었는데, 도성을 쌓는 사람 중 병이
든 자가 이곳으로 왕래하면 의원을 청하여 병을 진찰하게 하고 약을 지어 치료하였으며, 음식도 제공하였고 병이 나으면 식량을 주어서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임금은 쌀, 콩, 소금, 젓갈 등을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이 기록을 통하여 볼 때 조선 초부터 한양의 길목인 경기도 도처에 원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주로 퇴임한 관리들이 대민봉사를 표방하며 지역의 유명 인사와 함께 운용하였으며, 조정에서도
이러한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태종실록>는 조운흘이 신유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광주 옛 원강촌에 살면서 자은승 종림과 더불어 세속을 떠나 교제하여, 판교원과 사평원의 두 원을 중창하여 스스로 원주(院主)라고
칭하였는데, 해진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서 일꾼들과 더불어 그
노고를 같이하니, 지나가는 자가 그가 높은 관리인지 알지를 못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태조 때 판교원을 지었던 윤안정의 뒤를 이어 태종 때 조운흘이 판교원을 중창하고 새로운 원주 노릇을
했다는 것은 원의 지속적인 운영이 쉽지 않아 폐쇄되곤 했다는 뜻이다.
조선중기 이후의 문헌이나 고지도를 보면 이 지역에 판교점, 판교주막이 표기되어 있어 결국 판교원이 폐쇄되고 말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이 갖는 영남로 상 교통의 요지로서의
역할이 없어진 것은 아니므로 원 대신 일반 여행객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영리 활동을 하는 주막거리가 이곳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언제쯤 판교에 주막거리가 들어섰을까?
신정(1628~1687년)은 1671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영남으로
향하는데, 그의 여정은 <남행일록(南行日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는 9월 15일 새벽에 한양을 출발해서 판교주
막에 도착하여 아침을 먹고, 용인의 어증포주막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금량역에서 잠을 잔다. 주막이 아니라 역에서 잠을 잔 것은
그가 관원의 신분으로 여행을 했기 때문일 터이다. 따라서 적어도
조선 중기 이후에는 판교에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나그네의 휴식처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 토박이 어른들의 기억에 의하면 자신들이 어릴 적만 하여도 판교 너덜이 마을에는 입구와 출구에 해당하는 노상에 이문(里門)이라는 마을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색시를 둔 술집들이 즐비해 있었다고 한다. 판교의 사례를 통해 원이 주막이 되고, 주막이 색주가로 변화되는 양상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현재 판교는 신도시 개발이 완료되어 아파트촌으로 변해 있어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고, ‘판교원마을’이라는 아파트 단지 이름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 판교원마을이라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너더리마을
■ 인덕원의 주막거리
안양시 관양2동의 인덕원사거리는 현재도 교통이 붐비는 곳이다. 예전 이곳은 과천현에 속한 곳이었고 한양에서 호남지역을 잇는 삼남로(해남로)가 지나가는 길목으로 과천현 관할의 인덕원이
있었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이어받아서인지 인덕원 사거리는 지금도 의왕시·안양시·과천시의 분기점이 되고 있다.
인덕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부의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고 했으니 조선전기부터 설치되었던 원임은 분명하다. 인덕원 터의 정확한 위치가 고증된 것은 아니지만 후대 주막거리가 있
었다는 청덕에버빌 아파트 부근에는 원터를 기념하기 위해 ‘인덕원터’ 표석을 세워놓았다.
인덕원터의 표석에는 왕이 덕을 베풀어 인덕(仁德)이라 했고,
이곳에 여행자들의 숙식을 제공하는 원(院)이 있어서 인덕원이라
불렸다 한다. 이외에 눈에 띄는 사항은 한양에서 내려온 내시들이
살았던 마을이라는 기록이 보이는 것이다. 판교원에서 보았듯이
대개 원은 은퇴한 관리가 낙향하여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통해 유추해 볼 때 인덕원의 경우도 한양에서 은퇴한 내시들이 이
곳에 정착하여 살며 원을 운영하였고, 임금이 지원을 해줌으로써
이곳 주민과 행인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인덕원터 표석에는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쉬어갔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는 <난중일기>를 통해 확인되는 사실이다. 1597년
4월 초사흘(계해 5월 18일) 이순신(李舜臣)은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고 쉬어갔던 것이다. 따라서 정유재란 즈음까지 원이 존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조선 후기 지도에는 원에 대한 표시는
없고 대신 인덕원점, 인덕원평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원은
조선 중기 이후에 폐지되었고, 원이 폐지된 이후 주막거리가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 인덕원터 표석
비록 옛 주막거리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지만, 지금도 이곳은
음식점, 호프집, 룸싸롱, 노래방, 모텔 등으로 가득 차 있는 거리이
다. 아마도 안양, 과천, 의왕을 통틀어 가장 많은 유흥시설이 밀집
해 있는 곳일 터이고, 이러한 모습은 주막거리가 현대화된 모습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2) 한강변 나루터의 주막거리
■ 풍속마을로 거듭난 미음나루의 주막거리
주막거리는 길에 위치하기 마련인데, 전통사회에서 길은 육로만 있는 것은 아니고 수로도 있었다. 이 물길에는 나루가 있어서
나룻배를 통해 강 건너편으로 건네주기도 하고, 장삿배와 뗏목이
쉬어가는 정류장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나루에는 이들이 쉬어가는 주막거리가 자리했음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특히 윗강이라 불리는 한강의 중상류 지역에는 팔당댐이 건설되는 1970년대 이전까지 장삿배와 뗏목이 운용되었으므로 경기도에서 주막거리가 가장 늦게까지 번성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남양주시 수석동에는 미음나루 풍속마을로 지정된 마을이 있다. 원래 미음마을은 한강변에 위치한 외미음과 강변에서 조금
떨어진 내미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주민들이 주로 살던 지역은 내미음이었고, 외미음에는 나루와 주막거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중 풍속마을로 지정된 지역은 외미음으로 현재 30여 개의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고 2006년에는 음식문화 시범거리로
지정된 바 있다. 처음에는 매운탕과 해물탕, 장어구이 등 토속음식점이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겨냥한 카페 등도
다수 생겼다.
미음나루는 역사적으로도 유래가 깊어 다수의 고문헌에 나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사』에는 “노수포라 하였고 속명은 미음이다. 즉 한강이 꺾이는 곳이니 그 서쪽은 양주 땅과
경계이다.”라는 기록이 보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미음진은 주의 동쪽 70리에 있어 광주로 통한다.”고 하였다. 강 맞은편 옛 광주 지역은 하남시 선동과 미사동이고 현재는 나루 대신
강동대교가 물길로 단절된 두 지역을 연결하고 있다.
하지만 미음나루는 한강을 떠다니던 뗏목과 장삿배들의 중간
쉼터로 더욱 유명했다. 사실 이 때문에 미음나루 주변에 주막들이
번성했던 것이다. 지금은 떼꾼과 뱃사공을 위해 술과 음식을 장만하던 주막집들 대신 카페와 토속음식점들로 대체되었지만 옛
주막거리의 전통이 현재의 풍속마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 미음나루터비
▲ 수석동 풍속마을
■ 덕소주막의 ‘썩정이 할머니집’
한강변에는 도처에 주막거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수없이 많은 주막집들의 가장 큰 고객은 떼꾼들이었다. 인제에서 내려오는
북한강 뗏목과 영월, 정선에서 내려오는 남한강 뗏목은 팔당댐에
의해 한강 본류가 막히기 전까지 중수기 때는 줄지어 내려갔다.
이들 떼꾼들의 입에서 빼놓지 않고 회자되는 주막집은 ‘떡수 썩정이 할머니집’이다. 떡수는 덕소의 와음이고 주모가 성병에 걸려
얼굴이 일그러졌기 때문에 썩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덕소에 이 집 이외에도 색시를 고용하여 젓가락 장단을 두드리는 색주가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음에도 구태여 썩정이 할머니
집을 찾아가고 이런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은 옛 주막의 유풍이 남아 있기 때문인 듯하다. 즉 떼꾼을 잘 다루어 단골로 만드는 주모의 수완과 손맛이 주막집의 성패를 결정한 것이라 판단된다.
덕소나루와 주막거리가 있었던 곳은 현재 경의중앙선 덕소역
철길 아래쪽으로 원조 덕소라는 의미에서 원덕마을이라고 불린다. 한때 홍수로 침수가 되자 마을이 소개된 후 벌판으로 남아 있던 지역이지만 지금은 강변을 바라보며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다.
예전에는 한강의 물줄기가 마을 앞에서 굽이돌았기 때문에 건너편 미사리에는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는 반면 이곳은 깊은 소를 이루고 있어서 뗏목을 대고 쉬어가기에는 제격이었다고 한다.
▲ 1963년 덕소나루의 모습(국가기록원).
강 건너편은 미사리이다. 당시 덕소에는 신앙촌이 있었다.
■ 바댕이에 떠 있던 술거루
팔당대교 인근인 와부읍 팔당리에는 팔당나루가 있었고, 강 맞
은편은 하남시 창우동이다. 팔당대교가 건설되기 전 이곳 팔당리
의 한강은 마치 바다처럼 넓었다고 하여 ‘바댕이’라고 불렸고, 물
길도 고여 있는 것처럼 잘 흐르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곳
을 지나던 장삿배나 뗏목은 노를 젓지 않으면 바람이 불 때까지
하염없이 떠있어야 했다. 특히 서울로 내려가는 배는 서풍을 받아야
하는데 서풍은 아침녘에나 불기 때문에 뱃사공이나 떼꾼들은 물 위
에 떠서 바람이 불 때까지 물 위에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물론 팔당나루에는 주막이 여러 채 있었지만 거기까지 노를 저
어 가기는 귀찮은 노릇이었다. 이럴 경우 주막에서 적극적으로 나
서는 수밖에 없다. 색시들이 조그만 거룻배에 술과 안주를 싣고
노래를 부르며 다가와서 뱃사람과 떼꾼들을 유혹하였는데, 이를
술거루라고 불렀다. 장삿배와 뗏목에 다가간 색시들은 일단 사공
들에게 술을 한 잔씩 건넸다. 얼큰해져야만 술값이나 몸값의 흥정
이 수월하게 풀리기 때문이다. 얘기가 잘 되면 색시들은 술과 안
주를 가지고 장삿배나 뗏목으로 옮겨 타고 사공들과 밤새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논다. 다음날 색시들은 다시 거룻배를 타고 팔
당나루로 돌아오지만, 간혹 짓궂은 사공들은 색시를 계속 태우고
강을 내려오다 미음나루나 광진나루 등에 내려놓기도 하여, 색시
들은 팔당까지 걸어서 돌아와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3) 고갯길의 시작과 끝에는 주막거리가 있었다
■ 도둑이 자주 출몰했던 백고개의 대곡주막과 원골주막
양평군 양평읍 대흥리의 대곡마을(대흥1리)은 황골이라고도
불린다. 원래 큰 마을이라는 의미의 한골이 황골로 변음이 되었고, 한자로는 대곡(大谷)이라 표기한 것이다. 대곡마을에는 주막
거리라는 지명도 남아 있는데, 지금의 대흥주유소 일대이다. 고지
도에도 대곡주막이 표시가 되어 있어 조선후기부터 이곳에 주막
집들이 들어서 있던 것이 확인된다. 마을 주위로 비유현(飛踰峴).
백현(栢峴), 벼랑고개 등 고갯길들이 퍼져있어 주막이 입지하기
에도 적절한 위치였다. 특히 강원도로 향하는 조선시대의 간선도
로 평해로는 백고개를 넘어야 했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도
둑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어서 백사람이 모여야만 지나갈 수 있
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고개 인근에는 도둑이 웅거해 있었다는 도
둑바위도 있는 것으로 보아 도둑이 많았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니 백사람까지야 아니라 해도 고개를 넘을 인원이 꽤 모여야
했고, 이를 위해서 주막집에서 기다리며 쉬어갔을 듯하다.
대곡주막에서 백고개를 넘으면 용문면 삼성리의 원골이었다.
원골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에는 예전 원이 있었고,
후에 주막거리로 바뀌게 된다. 원골 도처에는 기왓장이 널려있어
주민들이 이를 빻아서 놋그릇을 닦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대곡마을에서 백고개로 진입하는 길에는 6번국도가 가로
지르고 있어 접근이 어렵고, 반대편 원골에서 진입하는 길은 폐쇄
된 후 방치된 지 오래여서 자취도 없어지고 말았다. 월성마을의
이윤환 어른5)에 따르면 젊었을 때까지 원골에서 백고개를 넘어
양평읍내를 다니곤 했는데, 고개를 넘는데 30분 정도가 걸렸다고
하니 도둑이 문제일 뿐 그리 험하고 먼 고갯길은 아니었던 듯하다.
▲ 팔당댐이 건설되기 전 팔당대교 주변의 한강은 바다와 같았다.
■ 송강 정철이 쉬어갔던 흑천(黑川)주막
백고개를 넘어 원골에 당도한 평해로는 말구리재라는 가파른
벼랑길을 마주치게 된다. 이 악명 높은 벼랑길은 잔도(棧道)6로
되어 있어 간혹 이곳을 지나던 말이 굴러떨어지기도 했으므로 말
구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 벼랑길을 지나면 바로 거무내마을(양평군 용문면 삼성3리)이다. 거무내는 흑천(黑川)
의 고유어로 상성마을 곧 웃비레 북쪽에 위치한 냇가 마을인데,
이곳 냇물 바닥의 돌이 검은 색이어서 물빛이 검은 색으로 보이므
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옛날 이 마을에는 흑천점(黑川店)이라
는 주막거리가 있었고, 횡성과 원주에서 소몰이꾼이 자주 다니기
도 해서 우마가 쉬어갈 수 있는 마방집도 있었다.
▲ 예전 주막거리가 있었다는 대흥주유소 일대
정철의 <관동별곡>의 서두에는 한양에서 원주 감영까지의 부
임 여정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여정에 흑수가 등장한다. ‘평구역
에서 말을 갈아타고 흑수로 돌아들어오니’라는 구절이다. 그런데
<관동별곡>을 해설한 참고서마다 ‘흑수’가 ‘여강’의 다른 이름이
라고 되어 있는 탓에 잘못된 지식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유포되어
있다. 여강은 여주를 흐르는 한강을 말하는데, 원주감영로는 여강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의 ‘흑수’는 ‘여강’이 아니라
‘흑천’이다.
▲ 거무내마을에 진입하기 전의 흑천. 벼랑에 있는 길이 말구리이다.
▲ 주막을 연상케 하는 거무내마을의 허름한 집.
흑천은 양평군 청운면 신론리의 성지봉에서 발원하여 양평군의
중앙부를 지나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개군면 앙덕리에서 남한강
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남한강의 지류치고는 총 길이가 37km이고 12개의 자체 지류를 가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하천이다. 그
런데 평해로가 통과하는 흑천 구간은 용문면 삼성리부터 다문리
까지의 지역이다. 따라서 정철이 말구리재의 산비탈을 지나 처음
마주치는 강이 흑수였고, 이곳 강변에 있는 흑천점 곧 거무내주막
에서 틀림없이 휴식을 취하다 갔을 것이다. 이러한 행로는 정철이
‘흑수로 돌아서 들어왔다’는 표현과도 일맥상통한다.
4) 갈림길에는 주막이 있었다
경기도의 도처에는 ‘칡 갈(葛)’자를 쓰는 지명이 유독 많이 눈
에 띈다. 양평군의 갈산과 의왕시의 갈산, 용인시의 신갈과 구갈,
평택시의 갈원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이들 지역에는
한결같이 칡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지명 유래담
도 전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지역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길이 갈
라지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칡 때문이 아니라 갈림길의 갈
을 ‘칡 갈(葛)’자로 음차한 것이라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특히
대로의 경우 갈림길은 교통의 요지였으니 행인들이 붐비게 마련
이고, 자연스럽게 주막거리가 형성되는 법이다.
■ 의왕의 갈뫼주막
의왕시 내손동과 안양시 갈산동이 마주치는 지점에는 갈산이
있고 그 산자락에 갈산주막이 있었다. 조선시대 광주목에 속해 있
던 이 지역은 과천현과 수원부를 잇는 삼남대로의 길목이자 안산
을 거쳐 서해안으로 통하는 길이 갈라지는 교통의 분기점에 해당
했으므로 통행량이 많았다.
갈산주막은 1700년대 전반기에 제작된 『해동지도』나 그 이후
에 나온 대부분 지도에 갈산주막(葛山酒幕)으로 명시되어 있다.
<춘향전>에는 이도령이 남원으로 내려가는 도중 이 주막에서 쉬
어가는데, 이본에 따라 ‘갈메, 갈뫼, 갈믜, 갈미’ 등으로 표기가 분
분하다. ‘–메, -믜, -미’는 산의 고유어인 ‘뫼’의 변이음들이기 때
문에 갈산은 한자 표기에 불과하고 실제로 통용되는 지명은 갈뫼
였음을 알 수 있다. ‘뫼’의 발음이 쉬운 편은 아니라서 흔히들 ‘메,
믜, 미’로 발음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갈뫼주막은 삼남대로상에서 지명도가 있었던 주막이었
지만 정확한 위치는 현재 고증되어 있지 않다. 필자도 어디선가
계원대학교 입구에 갈산주막의 유지가 있다는 글을 읽고 몇 시간
동안 주막터를 찾아 계원대학교 입구를 헤맨 적이 있다. 그런데
고문헌에 의하면 분명 독박지(민백동)에서 1리쯤 되는 거리에, 덕
고개 못미처에 갈뫼주막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막거리는 당연히 길가에 있었을 것인데, 산 중턱까지 올라갔으니 지금 생각
해도 미련한 짓을 한 셈이다. 또 다른 힌트는 갈산(葛山)이 갈뫼
의 한자어 표기라면 ‘갈’도 당연히 고유어이고, 갈래길의 의미를
지녔을 것이라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의 지도를 보면 현재의 계원대사거리 부근에는 능안
마을에서 모락산 등성이를 타고 내손리를 거쳐 주도로에 합류하
는 길이 확인되고 이 합류 지점에 인가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또
한 이 지점의 주도로 바로 아래에서는 군포를 거쳐 남양으로 가는
길8도 갈라진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면 갈뫼주막은 계원대사거
리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5) 경기도 주막거리의 다양한 변모 양상
■ 하남의 마방집
▲ 계원대입구사거리
▲ 일제강점기지도로 추정해본 갈산주막의 위치
주막에는 나그네들만 묵어가는 것이 아니라, 말과 소가 묵어가
기도 했다. 조선후기에는 전국적으로 장이 개설되면서 주막은 행
상인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게 되는데, 행상인 중에는 우마차를 이
용하는 물품을 운반하는 경우도 있고, 우시장에 내다팔기 위한 소
를 서너 마리씩 끌고 다니는 소몰이꾼도 있었다.
이에 주막 중에는 우마가 묵어가기에 적절한 시설을 갖춘 마방
집이 등장하게 된다. 특히 경상도 지방의 소가 크기가 크고 맛도
좋았으므로 영남로가 통과하는 경기도 도처에는 마방집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마방집은 소 10~15마리가 들어갈 수 있는 외양간
과 여물을 저장하고 끓일 수 있는 공간, 그리고 행상인이나 소몰
이꾼이 잠을 잘 수 있는 큰방 2~3개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경기도 하남시 천현동에는 ‘마방집’이라는 한정식집이 있다. 이
집은 원래 마방집이 있던 곳이었고 백 년 이상을 삼대가 대물림하
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하니 나름 주막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
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뒤뜰에는 빼곡하게 장독이 늘어서 있고,
부뚜막에는 무쇠솥들이 놓여 있으며, 처마 밑에는 예전에 쓰던 채,
소쿠리, 바구니 등이 걸려 있어 곳곳에서 옛 주막집의 흔적을 찾
을 수 있다.
‘마방집’이 위치한 곳은 서울에서 광주(경안)와 이천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천의 우시장은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올라온 소
들이 집결하는 장으로 한때 소중매인만 30여 명에 달할 될 정도였
다고 하는데, 이천장을 통해 거래된 대부분의 소들의 최종 목적지는
서울의 마장동이었으므로 이 가엾은 소들의 마지막 경유지였던 이
곳에 규모가 큰 마방집이 들어섰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양평 거무내마을 마방집이 있었던 곳
▲ 하남 마방집
■ 안양 미륵당참에 들어선 목로주점
조선 후기 한양에서 호남으로 가는 길인 해남로(삼남대로)는 과천과 시흥을 경유하는 두 개의 노선이 있었다. 이 중 안양역이 위치한 만안구 안양동은 당시 시흥길인 수원별로(水原別路)의 경유지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주막거리가 있었던 곳이다. 이 주막 거리가 바로 정조의 화성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 幸乙卯整理儀軌)의 미륵당참(彌勒堂站)이다. 미륵은 고려시 대부터 여행자의 수호신으로 신앙되었으므로 안양, 의왕, 수원 등 해남로의 경기도 구간에만 세 군데의 미륵당이 확인되는데, 세 곳 모두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안양 미륵당참의 전통은 이곳에 경부선 안양역이 건설되며 이 어진다. 1934년 민속학자 송석하 선생이 미륵당을 조사할 때 찍은 사진들에 미륵당 옆에 있던 안양음식점과 주점이 더불어 찍힌 것 이다.
이곳 토박이 어른의 자료에 의하면 1930년대 안양역 부근에는 미륵당(彌勒堂)이 남아있었고, 그 주위에 수백 년 된 노향목(老 香木) 두 그루가 우뚝 서 있었으며, 바로 그 밑에 두 곳의 목로주 점이 있었다고 한다. 1926년생으로 안양3동에서 태어난 이용구 옹의 기억이다. 그가 말한 두 개의 목로주점 중 한 곳이 ‘안양음식점’일 터이다. 따라서 이들 목로주점들은 예전 나그네들에게 술 과 국밥 등을 팔던 미륵당참 주막의 후신일 터이므로 비록 전통적 인 주막의 형태는 아니지만 나름 시대적으로 변모해 가면서도 일 제강점기까지 주막거리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안양역 부근에 있던 미륵당과 주점 및 안양음식점.
송석하 선생이 1934년 2월 20일에 촬영한 사진이다.
이 사진들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자책으로 간행한 ‘처음으로
민속을 찍다’에 수록되어 있다.
■ 화성의 떡전거리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는 떡전거리 혹은 병점(餠店)이라 부르
는 지명이 다수 남아 있다. 이러한 명칭은 나그네들이 간단하게
요기를 할 수 있도록 떡을 파는 일종의 스넥코너가 밀집되어 있는
주막거리도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조선후기의 문인이었던 김창흡(1653~1722)은 주막에서 여행
객들에게 팔기 위해 늘어놓은 떡과 술을 보고 곡식을 쓸데없이 허
비하는 것에 대한 해로움을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적어도 1700
년경에는 떡전이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에서 가장 유명한 떡전거리는 1호선 전철(경부선) 병점
역 인근에 있었던 화성의 떡전골이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한양과
호남을 오가던 대로인 해남로(삼남대로)가 통과하던 길목으로 주
막거리에 떡장수들이 포진하고 있어 나그네들이 숙식은 하지 않
고 출출한 배를 떡으로 채우며 쉬었다가 가던 곳이었다.
최근 화성에서는 이러한 떡전거리의 전통을 널리 알리기 위해
‘병점떡전거리축제’라는 거리축제를 거행하고 있다. 이 축제는 연
예인 중심의 무대행사와 형식적인 의전행사를 지양하고, 퓨전 굿,
장원급제 문과시험, 병점 떡자랑대회 등 방문객들의 참여 및 체험
프로그램을 위주로 축제를 구성하고 다양한 저잣거리의 전통음식
을 맛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기본 방향으로 잡았다.
그러나 축제에 온 사람들이 정작 떡은 안 사먹고 술만 먹는 바
람에 고성방가 등 취객들의 눈살 찌푸려지는 행태들이 만연하다
는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러고 보면 떡과 술은 궁합이 별로이다.
떡은 아무래도 술안주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떡전거리의 정체성은 요즘의 스넥코너와 비슷하니, 전
국의 떡을 선보이고, 세계적인 스넥음식을 전시하는 먹거리축제
로 방향성을 잡으면 어떨까하는 의견을 제시해 본다.
▲ 화성 병점역 앞 전경. 병점로라는 도로명이 예전 이곳에 떡전거리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 역주변에는 아직도 음식점과 노래방 등의 유흥업소가 즐비하다.
4. 경기도 주막거리의 역사·문화적 의의와 전망
주막거리는 옛길문화의 중심이고, 숙식문화의 산실이었다. 특
히 경기도는 한양에서 지방을 오가는 주요 도로가 통과하는 지역
이어서, 주막거리가 도처에 형성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 주막의 유
산이 다수 남아 있다.
미음나루주막이 있었던 수석동의 경우는 아예 주막거리가 있었
던 외미음마을을 토속음식점이 즐비한 풍속마을로 조성함으로써
옛 주막거리의 전통에서 마을의 활로를 찾고 있다.
주막거리를 활용하는 정도는 아니라 해도 그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점이 옛 주막의 전통을 물려받는 경우도 있다. 하남의 마방집
등 예전에 주막을 하던 집안이 토속음식점을 운영하며 가업을 계
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중의 다수는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음식
점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주막거리의 전통을 민속공연이나 축제로 활용하는 사례도 눈에
띈다. 과천의 새술막놀이와 화성 떡전거리축제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렇듯 주막문화가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문화유산
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하기도 하는 것
이 문제이다. 이는 주막이 술을 파는 곳이어서 유흥적 요소가 동반되기도 한다는 데 기인할 것이다. 그래서 주막문화는 전통
과 인습 사이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1세기는 문화관광의 시대이다. 여행에 있어서 가장 중
요한 요소 중 하나는 숙박시설임은 물론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
표적인 관광명소에는 호텔이 들어서지 않은 곳은 없다. 따지고 보
면 대규모의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을 뿐이지 호텔 역시 술과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장소에 불과하다. 곧 서양식 주막인 셈
이다. 중국의 관광호텔에 주점(지우띠엔, 酒店)이라는 간판이 달
려 있는 것은 호텔이나 주점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인식을 반영한
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관광지에 서양식 호
텔 대신 전통 주막거리를 조성하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또한 경기도에서는 조선시대의 6대로를 대상으로 문화탐방길
을 조성하고 있다. 이 경기옛길사업에 주막거리를 재현하는 방안
도 고려해 볼 만하다. 지역에 따라서는 문경새재주막과 같이 옛날
주막이 재현되어 운영되는 곳도 있으니 그리 새로운 아이디어라
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주막이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여행
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주막의 문화를 체험하는 시설이 될 때
살아있는 주막으로서의 생명성이 보장될 것이다.
글 김준기 동국대학교에서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대학원에서 구비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민속학연구소에 근무하며 마을조사를 다니면서 살아있는 민속현상과 그 안에 담겨있는 전통문화의 가치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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