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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김영회 선생님께 듣는 고향생각

경기학광장Vol.4 _ People & Life

< 나의 살던 고향은? 김영회 선생님께 듣는 고향생각 >


- 경기학광장Vol.4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김영회 선생님께 듣는 고향생각


수원역을 내리면 난파 홍영후가 작곡한 ‘고향생각’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현재 인구 125만이 넘는 큰 도시로 성장한 수원은 경기도청의 소재지이자 경기 남부의 핵심 도시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수원이 고향이자, 수원의 옛 모습을 이야기해 줄 김영회 선생님을 용인시 기흥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영회 선생님은 1943년, 해방되기 2년 전에 태어났으며, 고등학교까지 수원 영화동에 거주하셨으며, 이후 대학과 직장을 다니기 위해 수원을 떠났다. 그러다 지난 2003년 은퇴한 이후 용인으로 내려오셨는데, 선생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옛 수원과 현재 모습을 한번 주목해보자!


선생님의 기억 속 6.25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6.25가 있었어, 그 때 당시 수원에는 경부선 도로 하나 밖에 없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우리 집도 폭격을 맞아 반파가 되었지, 아마 지금도 사진에서 볼 수 있는데, 이때 장안문이 반파가 된 거야, 우리 집의 경우 아버지가 사업을 하셔서 집도 크고, 잘 사는 편에 속했어, 그 당시 우리 마을에 기와집이 딱 두 채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였으니까, 6.25가 일어나던 날 나는 학교를 안 갔어, 그때 우리 아버지가 군부대에 군납을 했는데, 주로 수원역에서 마차에 물품을 싣고 군납을 하셨어, 그래서 제일 먼저 전쟁 소식을 들었던 거지, 아버지가 북괴군이 쳐들어오니까 학교 가지 말라고 하셔서, 일찌감치 피난을 갔었어, 당시 우리 집 말고, 외숙부네 점포가 장안문 바깥쪽에 있었는데, 자전거를 판매 및 수리 하셨어, 그런데 점포 앞으로 북괴의 탱크가 들어오다가 폭파된 거야, 지금도 관련 사진이 있는 걸로 알아, 이때의 영향으로 장안문 누각이 반파된 기억이 생생해! 이때 외숙부네 집도 전쟁 통에 파괴되고, 이 과정에서 외숙모도 돌아가셨어, 어떻게 보면 나에게 아픈 추억이지.

북괴가 쳐들어오니까 피난을 가야 했는데, 트럭을 타고 부산까지 갔어, 그래도 아버지가 군납을 하셨던 덕분에, 서울이 수복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시 올라올 수 있었어, 그래도 군인들 덕분에 피난 생활도 쉽게 했어, 재미있는 건 외할머니가 의왕에 살았는데, 집이 제법 컸어! 추후 들은 이야기로는 외할머니가 나이도 있으시고 하니까 피난을 안 갔는데, 아 글쎄! 외할머니 집이 크다 보니까 중공군, 인민군들이 본부개념인 HQ(Head Quarters) 건물로 활용했다는 거야, 그런데 외할머니 말이 “야~ 중공군, 인민군들이 나 돈 주고 갔어”라고 말을 했어, 실제 중국화폐와 북한화폐를 본 기억이 남아 있어, 이건 드문 일이거든, 1.4 후퇴 때로 보이는데 그 때는 동네에서 할머니들도 안 해치고, 밥 먹으면 돈도 주고, 담배주면 고맙다고 했다고 외할머니가 이야기했어, 또 당시 수원 화성의 문과 관련한 구전이 전해지기도 했는데, “동문은 도망가고, 서문은 서있고, 북문은 부서지고, 남문은 남아 있다”, 그런데 수원에 다시 돌아와 보니 우리 집이 반파가 되어 있더라고, 어쩔 수 없이 한 쪽의 파손 안 된 부분에서 생활하고, 수리하고 지냈어,


수원 화성의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6.25 이후 “동문은 도망가고, 서문은 서있고, 북문은 부서지고, 남문은 남아 있다”라는 말이 떠돌았다.



서장대에서 바라본 화성행궁,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헐린 뒤 병원과 경찰서 학교 등이 세워졌다.


선생님이 기억하시는 수원의 모습은?


당시 우리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는데, 방앗간을 하셨어, 당시 수원에서 아무개네 방앗간하면 많이 알았거든, 우리 가게 이름이 ‘영무정미소’였어, 이름의 의미는 영화동과 연무동을 따서 지었는데, 가게 위치도 영화동과 연무동의 경계에 있었어, 아버지가 왜 이렇게 이름을 지었냐 하면 영화정미소라고 하면 영화동 사람들은 좋지만, 건너편 연무동 사람들은 싫어하거든, 오히려 예전에는 연무동이 농토가 더 많기도 했어, 때문에 당시 지역명을 따서 영화상회, 연무상회 등도 기억에 남아, 내가 신풍초등학교를 다녔는데, 47회야, 보통 학교를 갈 때 화홍문을 통해서 가곤 했거든, 그런데 학교를 오가다 보면 일본 사람들의 잔학성 같은 게 느껴져, 뭐냐하면 지금은 신풍루(新豊樓)가 있는 화성행궁을 헐어버리고, 여기에 경찰서(=북군영)를 짓고, 병원(=자혜의원, 경기도립수원의원)은 만들었어,

그리고 신풍국민학교(=신풍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원래 객사 건물인 우화관(于華館)이 있었는데, 여기도 헐어버리고 신풍국민학교를 만든 거지, 내가 있을 때의 모습과 현재 화성행궁의 모습 은 완전히 달랐어, 특히 옛날 사진 같은 걸 보면 성벽이나 공설운동장 자리에 천막 같은 게 많이 붙어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건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의 흔적이야, 내가 살던 영화동에는 강원도에서 온 피난민들을 수용했는데, 보통 이렇게 피난 온 피난민들의 경우 아무것도 없으니까 시에서는 천막을 내줬어, 그래도 개인 땅에는 못 짓고, 공설운동장이나 공유지 등이 피난민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는데, 이 때문에 성벽 옆에도 천막을 짓고 살았던 거지, 당시에는 문화재의 중요성을 잘 모를 때였으니까, 그러다 그 사람들이 잘 살게 되니까 땅 사고, 집 사고 나가면서, 지금은 그 흔적도 없더라고, 어떻게 보면 6.25의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지.


학교 다닐 때의 기억을 좀 더 소개해주세요


신풍국민학교는 수원에 가장 오래된 학교야, 고종의 칙령으로만 들어진 공립학교로, 수원공립소학교로 불렸어, 내 기억에 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운동장 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 고목이 있었는데, 지금은 화성행궁이 복원되고, 이 과정에서 광교로 옮겼어, 그런데 당시만 해도 수원에 인구가 별로 없었어, 우리 동네에서 나하고 같이 학교를 다닌 사람이 3명밖에 없었어, 집성촌이 있는 제법 큰 마을인데도 말이지, 또 이 당시 수원에는 신풍을 포함해 매산과 세류 등 3곳의 국민학교가 있었는데, 학교를 배정할 때 보면 신풍 쪽으로 많이 가려고 했어, 아무래도 수원 화성의 사대문이 중심으로 인식되어서 매산과 세류가 변두리로 인식된 것도 없지 않지, 그래서인지 몰라도 가급적이면 신풍을 많이 선호했던 경향이 있었어, 또 학교 다닐 때 주로 소풍을 가면 지금은 연무대로 불리는 동장대나 서장대, 화홍문, 팔달산으로 많이 갔는데, 지금과는 많이 다른 풍경이었어! 이 외에도 광교 쪽에 유원지가 있었는데, 여기 풀장과 놀이기구가 있어서 나름 인기가 있었지! 아~ 그리고 서호저수지로도 소풍을 갔는데, 그 먼 거리를 걸어서 갔어, 예전에는 축만제(祝萬堤)라고 불렸던 곳이야.

또 하나 재미있는 게 당시 수원의 3개 국민학교가 소풍날이 되면 신풍학교의 일정을 참고했어, 보통 그때는 토요일에 소풍을 갔는데, 매산이나 세류는 신풍보다 한주 늦게 간다든지, 빠르게 가든지 하는 식이었지, 또 우리 학교 근처에 사립학교인 소화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천주교 미션스쿨이었어, 당시만 해도 소화초등학교가 있는 북수동 성당과 종로 감리교회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어, 6.25때 학교가 없다보니 자선사업처럼 소화초등학교가 만들어져 취약계층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다가 지금은 광교로 이전했는데, 예전과 달리 지금은 거기 아무나 못 들어갈 만큼 명문 사립학교지, 이후 고등학교는 당시 수원농림고등학교를 갔는데, 당시에는 명문고였어, 일제 때 생긴 학교였는데, 해방 후에 학제가 바뀐 것 같아. 내가 10회를 나왔거든, 그런데 졸업식 날이면 일본인 할아버지들이 오셔서 구경했던 기억이 나,


지금은 광교로 이전된 구 신풍초등학교


마지막으로 수원을 떠나게 된 계기와 직장 생활의 에피소드를 소개해주신다면?


수원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대학과 직장으로 인해 수원을 떠났어, 학부 때는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73년에 삼립식품에 입사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어, 처음 내가 삼립식품에 갔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다들 좋은 곳을 갔다고 부러워하더라고, 실제로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먹는 게 풍족하지 않았던 그런 시절이니까, 그래도 입사한 뒤에 승승장구해서 진급도 빨리했어,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입사하던 시절에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적 위기가 왔는데, 그 때 회사에서도 원가절감이 화두였어, 당시 구매부에 근무했는데, 원료 회사들에게 원가절감 차원에서 협조 요청도 하고, 사무직을 비롯해 인원감축이 있었어, 그런데 당시 사장님이 참 기억에 남아, 당시 인사과장이 인원감축 명단을 가지고, 사장님에게 가니 딱 두 가지 질문을 던지는 거야, 첫 번째 이 사람들이 일을 잘하는지? 두 번째는 다른 곳에 가서 취직할 수 있냐?는 질문이었어? 인사과장이 “힘들 것 같다”라고 이야기하니까 사장님이 그런 인사 방침이 어딨냐며 보내도 잘 하는 사람을 보내야지라면서 전원복귀 시킨 적이 있어,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한 사람이야.


* 수원의 옛 모습에 대해 진솔하게 인터뷰해주신 김영회 선생님께 지면을 빌려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글 김희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문화교양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의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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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4 _ 2020 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3.30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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