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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한국 도자기를 지키는 도자기 장인, 한상구

경기학광장Vol.4 _ People & Life

< 한국 도자기를 지키는 도자기 장인, 한상구 >


- 경기학광장Vol.4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 도자기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최고의 명품이지만 수요가 없다. 생활자기조차 외면받고 있다. 백화점에도 외국 식기 투성이다. 한국도자기는 최고의 품질임에도 한국인에게 철저히 외면 받는다. 한때 일본사람들이 미친 듯 좋아했으나 요새 젊은 일본인들은 그렇지도 않단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돼도 당장에 집 한 채, 전시장 한 칸 제대로 마련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도자기의 거장 백웅 한상구(83)는 척박한 현실에도 아랑곳없이 곰처럼 미련할 정도로 밤낮없이 흰백(白)자 처럼 정결한 한국의 정신을 품은 도자기 연구에만 혼을 쏟는다. 죽기 전에 천년을 이어갈 명품을 남겨야 한다는 장인의 꿈. 그의 손에서 또 다른 새로운 천년이 열린다.
경기도 여주군 오금리. 집과 작업장과 가마가 한곳에 있는 삼선요 현장에서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1호 사기장 청화백자보유자인 한상구 옹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들었다.

흙의 전문가

처음 도자기 연구할 적에 우리 안사람(서옥선)하고 흙을 이고 지고 거의 안다닌 데가 없어요. 흙을 가져와봐야 얼마를 가져오겠어요. 토속종 흙을 실험용으로 하기 위해서였지. 왜냐면 도자기라는 거는 연구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거라서요. 흙은 여기저기 있고, 내가 처음에 어떤 목표를 삼았냐면 고창이면 고창사기, 괴산이면 괴산사기, 문경, 여주, 강진, 해남. 내가 그걸 어떻게 터득했냐면 내가 도자기에 능통하려면 그 지방의 토속흙 가지고서 한계점에 있는 도자기를 재현해야 한다. 그런 중심으로 연구를 했어요. 백자 한 가지만 한다. 청자 한 가지만 한다. 그건 바보 같은 짓이에요. 왜. 백자에 청자를 접목시킬 수도 있는 거고, 유약이 접목될 수도 있는 거에요. 통달이 안되면 못하는 거에요. 연구할 때 다른 걸 접목시켜 터득하고. 전통기법으로 도자기 재현하는 재료가 딱 정해져 있으면 내가 왜 그 짓을 해요. 백토광산 있잖아요. 겉흙 다르고, 중간 흙 다르고, 밑에 흙이 다 달라요. 체에 거르면 다 달라져요. 흙에서 나를 이길 수 있는 전문가는 없다고 봐요.

83세 고령에도 무한 연구

지금도 밤 새워가면서 연구해요. 83세인데 연구가 무한대에요. 우리 나라 도자기 역사가 긴데 그래도 또 연구할 게 있어요. 한 가지를 터득하면 열 가지 의문이 생기고. 계속 연구를 하게 돼 있어요. 도자기가 뭐냐고 한가지로다 물으면 ‘정말 힘들다’ ‘정말 어렵다’. 옛날 도자기 명품들을 볼 때 내 생각에 이건 돌연변이야. 명품들은 돌연변이가 아니면 안나와요. 수학공식은 1+1=2 아녜요. 흙은 그게 아녜요. 세상공식이 딱 들어맞지 않아. 생각지도 않은 게 퉁그러져 나와. 이건 실패가 아냐. 난 그런 걸 안버렸어요. 내년엔 장담하고 남들이 안 나오는 색상. 좋든 나쁘든 한국적 맛이 나는 한국적인 연구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창조의 도자기가 몇 가지가 나올 거에요. 예를 들어, 구워보니까 고려청자 소지로 제조한 것이 새까만 흑자 소지가 됐다구요. 이게 바로 돌연변이에요. 몇 해 전에 사금파리 안내버리고 놔뒀더니 이제 용도가 나오네. 연구하다 발전되면 다 써먹게 돼 있어요. 실패작이라는 데서 얻어요. 수십년 후에 십분의 일, 백분의 일도 안되는 경우라도 그걸 써먹을 찬스가 생겨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그래서 그런 얘기가 놔왔구나 그러는 거에요.

수많은 흙의 조합과 끊임없는 실험

나는 도자기의 도자도 몰랐어. 옛날 사람들이 그걸 가르쳐줍니까. 할아버지하고 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아랫말에 있던 도자기 공장에 다녔어도 누가 새끼들한테 그걸 가르쳐요. 나야 팔자를 타고나서 이걸 하지만 자손한테 못 물려줄 직업이죠. 나는 옛날 것, 사금파리 그걸 갖고 분석을 해오면서 올라온 거에요. 흙의 수많은 성분중 하나가 다른 하나와 만나면 9대1, 8대2, 7대3, 6대4, 5대5, 두 성분 가지고도 다섯 번 이상을 실험을 해야 대충 성질을 알게 되요. 거기다 두 가지에다 한 가지를 더하면 세 가지가 되면 복잡해. 머리가 터져요. 근데 그것만 갖고 됩니까. 얼마나 많은 조합이 있는데. 흙의 철학이 이렇게 깊고 오묘해요. 아침에 해 뜰 때, 점심때, 흐린날, 불빛 아래. 한자리에서 봐도 틀려 보여요. 그걸 다 관찰하면서 연구를 해요.

160권 기록노트 불태워… 도자기는 하늘의 조화

기록노트 다 불살라버렸어요. 내가 틀림없다고 써놓은 것이 다 실패작이었어. 내가 목적한 게 달성이 안되면 실패야. 자그마치 얼마를 태웠냐하면 이만한 꺼먼 노트(소설책보다 큰 크기)가 160권이야. 그걸 태웠어. 태워버린 목적이 있어요. 우리 아들이(한윤희. 전수조교) 이걸 물려주면 망하라는 것밖에 안되잖아요. 남들이 생각할 때 명인으로 날 잘 뽑았다고 인정해줬지만 내가 생각할 때 난 미흡해요. 한 가지만 연구하는 게 아니잖아요. 이를테면 백자다 하면 백자가 한 두가지가 아녜요. 백자만해도 수백가지가 돼. 실험하면서 이렇게 터져나오고. 청자도 한 두 가지가 아녜요. 하늘의 조화로다.

37세 늦은 나이에 도자기 처음 시작

7, 8살때, 왜정 말기 때 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때는 의학이 없어가지고. 눈병 때문에 그 이듬해 재입학을 하니까 해방이 돼. 해마다 눈이 도져요. 평생을 눈병이 가장 큰 아픔이에요. 도자기도 눈 때문에 손 대게 된거에요. 어렸을 때는 꿈이 많잖아요. 변호사가 꿈이었어요. 솔직한 얘기로다 법률책도 보고 그랬어요. 근데 당시에는 신체 결함이 있으면, 눈이 조금만 나빠도 시험 볼 자격이 안되요. 포기했죠. 농사도 짓고, 옛날에 한문서당 2, 3년 다니고. 해먹고 살게 없었어요. 안사람하고 잠시 장돌뱅이도 했어요. 근데 그 시절 오금리청년회에서 여행을 갔다 오는데 서울의 중앙박물관을 갔어요. 한국인, 외국인 전부 고려청자 조선백자 이런걸 보고 탄복을 해요. 저렇게 좋은 것이 맥이 끊겼다니. 분명히 한국 사람이 만든 건데. 달나라 가는 세상에 저걸 왜 재현을 못하느냐. 도자기를 해야겠다. 그런데 그게 하기가 쉽습니까. 몇 년을 고민했어요. 오금리 아랫말이 사기골이니까 내가 초등학교 때 공작시간에 도자기흙 가져오라면 요만큼 훔쳐다가 공작하고 그랬거든요. 내가 간접적으로 흙을 접한 거잖아요. 그리고 우리 형님이 도자기 하다가 종중재산을 다 날려버렸어요. 지금 돈으로 수십억대. 청주한씨 양절공파 32대. 형님이 면서기 했었는데 남을 두고 해가지고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니까 브로커한테 속고 탕진이 됐어요. 형님은 나보다 3년 앞서서 했나. 우리 부모는 먹지도 못하고 재산을 지킨건데. 내가 성공하는 것도 집안을 돕는 일이라고. 내가 도자기 한다고 천대 많이 받았어요. 그때 10년을 목표로 전통을 재현하겠다고 했는데, 지금 같으면 100년을 잡았을 거에요. 도자기를 처음 시작한 게 내 나이 30대 후반이었어요. 전통자기를 재현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마루에서 만들어가지고 소쿠리에다 담아서 지게에 져가지고 우리 형님 장작가마에다 구웠어요. 오다가 깨지고 도저히 안되겠어서 나중에 이 자리 여기다 가마를 묻었어요. 가마도 직접 지었어요. 처음에 내가 서툴러서 무너졌어요. 잘 짓는 사람 이만섭 데려다가 같이 한거지.

일제시대 때 광주분원 도공들이 오금리에 터잡아

할아버지 한호석, 아버지 한용수. 내 어렸을 때 도자기 공장 다니는 걸 봤어요. 도자기를 부모님한테 배운게 아네요. 우리는 공장을 안 했어요. 아버님도 할아버님도 남의 공장에 댕기신거야. 일제시대 때니까 도자기 가마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요. 이 책이 여주 오금리 조사보고서에요. 경기도 광주 분원리가 오금리 저 아랫동네로 옮겨 와 사기골이 된 내력이 써 있어요. 백토가 나는 싸리산이 여주에 있어요. 나라가 한일합방 되고 망했잖아요. 국고보조 끊기니까 광주 분원리가 전부 헤어졌잖아요. 처음에 열두집 정도가 오금리 저 아랫 동네다 자리 잡았어요. 또다시 뿔뿔이 흩어졌는데 일부가 여기서 자리를 잡았어요. 아랫마을이 도자기 공장이 밀집돼 있었어요. 그게 뿌리가 돼 오늘날 여주도자기가 된거에요. 일본사람들이 지은 조선 도자연구소가 오금리에 생기니까 공장 생기고 그런거에요. 조선도 기연구소가 오금리에 있다가 저쪽 오학동으로 옮겨갔어요. 우리 할아버지 한호석은 연구소 서사, 해강선생은 조각과장. 이임조씨는 기술부장. 일본 도자기는 한국사람 죄 잡아다했지만 토질이 틀렸는지 다완같은 거는 색상 등이 비슷한 게 나와요. 근데 백자, 청자 나왔다는 소리는 못들었어요. 천만다행이지. 한국 정신문화는 뭐냐면 우리 어렸을 때만해도 내놓을게 뭐가 있어요. 백자, 청자, 팔만대장경, 몇 가지 안되지. 그게 바로 한국의 혼, 정신이에요. 그걸 일본이 했다고 해봐요. 말도 안되죠.


오금리 도자기작업장(자료출처 : 여주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도자기 금지령

할아버지, 아버지는 엄격해서 우리가 도자기를 못하게 하죠. 그걸해 서 먹고 살 수 없잖아요. 아버지가 흙을 집에 가져와서 금강산이고 말연적, 등잔, 촛대, 벼루 장난삼아서 만들어요. 내가 거들어주면서 어깨너머로 배웠어요. 근데 골동장사들이 전부 수집하러 다니는거 야. 골동장사가 아주 그냥 이 근방에 떴었어요. 집에 이것저것 많았는데 좋은 것 용단지 목단단지 같은 것, 장광에 넣어둔 것 훔쳐가고. 그때는 시절이 그러니까. 큰댁이 동네 사랑방이었어요. 모깃불 켜놓고 별 얘기가 다 나와. 도자기 흙을 파가지고 마차에 싣고 나오는데 쳐 죽을뻔 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어디 가서 흙 파온거. 양구 가서 파온거. 그런게 참고가 된거에요.
처음에 하도 어려워서 한숨만 나오고. 관두려고 도자기를 팽개치고 뒤돌아보면 천길만길 낭떠러지야. 평생 눈병인데 뭘 해먹고 살아. 다른 것 할 것도 없고 진퇴양난. 죽을 길밖에 없어. 사람이 이래서 자살하는구나. 그 당시 고난의 대명사가 한상구야. 하는대로 실패하고 논 댓마지기며 밭이며 다 팔아먹고 애들은 어린데 굶어죽을 생각 해봐요. 우리 안사람하고 맨날 흙 파러 다니는 게 일이었어. 도자기 불 땔 때 나는 가마에서 한술 내다먹어요. 때다 중단하면 다 망가지잖아요. 내가 나무 한가지 한가지 넣으면서 떠먹으면 우리 안사람이 나더러 식사하라면서 넣어요. 우리 안사람이 숙달이 되니까 나보다 더 잘 때. 대한민국에서 이 사람보다 불 잘 때는 사람이 없어요. 도가 튼거야. 흙반죽도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다 해줬어요.

70년대, 일본으로 도자기 헐값에 팔려나가

그 시절 요강과 화분이 히트쳤어요. 난 처음에 화분으로 시작했어요. 화분 팔아서 밥을 먹으면서 연구 할려고 내딴에는 취지가 좋았지.
근데 화분을 전부 실패봤어. 남들 잘 팔리는 색깔 안하고 내 맘대로 실험을 해가지고. 그게 됩니까. 지금은 내가 독학한게 잘했다는게 뭐냐면, 되든지 안되든지 남의것 갖다 하면 뭐해. 독자성 있는 내 작품을 연구해야지. 한가지부터 열가지 다 독학이야. 자존심이 강해서 구경도 안했다니까. 하도 배고프고 실패만보고. 근데 어느정도 기술이 올라오니까 내 물건이 일본으로 많이 나갔어요. 솔직한 얘기로다 작품을 싸인을 안했다구요. 싸인을 하면 일본에서 팔아먹을 수가 없대. 그때가 70년대 후반인데 일본에 도자기를 전문적으로 파는 사람들이죠. 개인적으로다가 일본 드나들면서. 나이 많은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장사꾼이 비행장 가면 한국 국부 유출한다고 잡는다는 거야. 하도 화딱지 나니까 패대기치면서 이게 옛날거냐고. 여주 한상구가 만든거라고. 사인을 하면 일본놈들이 사질 않는대요. 근사치라도 옛날맛이 나니까는 위안적으로다 볼려구 관상용으로 사는거죠. 당신들 옛날 것 팔아먹으면 큰일나. 절대 그건 하지말라고 신신당부하지. 그러면 옛날게 값이 얼만대 그러느냐고 그러지. 한번은 불을 때니까 색깔이 기가 막혀. 천하를 다 얻은 것 같지. 장사꾼들이 와 서 보고는 깜짝 놀래. 깨진거고 찌그러진거고 몽땅 가져갔어. 일본 사람들이 한국 도자기를 그렇게 좋아한대요. 다완 분청 백자 하여간 옛날 걸 한국 사람보다 더 좋아한다니까. 싸게 파는 정도가 아니지. 내가 처음에는 5천원씩 받았어. 그러다가 차츰 올라서 15000원도 받고 몇해 있다가 3만원도, 몇해 있다가 5만원도 받고 그랬는데 자기가 많이는 안나와. 깨지고 그러니까. 한번은 한차를 다 싣고 가더니 돈도 안주고. 배가 고프니까 줬다고. 내가 고생의 대명사였어요.

일본 유혹의 손길 단호히 뿌리쳐

인사동에서 장사한다는 누가 몇 번씩이나 일본 가서 도자기하라고. 당시 돈으로 한달에 400~500만원 주는데 그 대신 거기서 여자 비서 하나를 준대요. 비서가 일일이 일하는 걸 체크를 한대. 그래서 내가 미친 소리 말라고. 그놈들이 한국 도자기 기술 뺏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 단 한마디에 그어버렸는데 그다음에 몇 번을 더 왔어요. 올림픽인가 국가적 행사 때인데 일본 작가가 우리집에 7명이 몰려 왔었어요. 그 사람들이 일본 도자기 명사 국보들이야. 우리 공장 견학을 온거에요. 종이컵에다 커피를 타줬더니 이 사람들이 안마시고 있어. 내가 그때 큰 실수를 했다고. 도자기하는 사람이 도자기에 커피를 안주니까 안마셔. 난 누가 오든지 우리 안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간편하게 대접하는건데 왜 그러냐고. 나중에 한참 있다가 한잔씩들 마시더라구. 계속 안가고 미적미적 그래. 그때 딱 떠오른게 뭐냐면 임진왜란 때 우리 도공 싹 데려간 사람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뭘 또 눈 도둑질하러 왔냐고. 아주 내가 일본사람들이 꼴도 보기 싫어요. 일제시대 때 어른들이 가마짝 기일 내에 짜지 못했다고 작대기로 맞는것도 봤다구. 아침부터 하루종일 농사짓고 밤에 전기가 있어요 뭐가 있어. 어쨌든 알고 보면 그때 내가 잘못한건데…. 그들을 박대를 했어. 공장 견학도 안시켰어. 단양군청에서도 왔었어요. 관광목적으로다 단양에 장작가마 10개를 설립하려고 하는데 한 선생님 오셔야겠다고. 터도 주고 공장 설립할 자금을 주고 먹고살게 해주겠으니 오라고. 우리 두 내외가 며칠밤 고민했어요. 우리 제수 씨가 애들 맡기고 가서 있다가 오면 되지 않느냐고. 난 죽으면 같이 죽지 애들 요만한 걸 놔두고 안된다고. 몇 번 전화가 왔어요. 나중엔 왔다갔다 하라고. 말같지 않은 소리 마라. 죽어도 여기서 내 자리서 죽는다고 거절했더니 지금 생각하면 잘했어요.
난 그때 한창 매스콤에 터졌어요. 방송에도 나오고 작품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하던 때였죠. 연구한지 10년 거의 다 되갔을 거에요. 도자기는 얼마나 했는지가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냐가 문제에요. 타고나고 노력하고 두 개 다 있는 것 같아요. 목적은 전통재현에 두고 있죠.

도자기 장사 하늘같이 떠받들며 배우다

그때 작품 장사들한테 배운거에요. 그 사람들은 귀신아냐. 그 사람들한테 배운거에요. 형태, 색상, 그림도 내가 저거하면 저들이 와서 가르쳐줘요. 스승이 없었어요. 도자기 깡파리 조각이 스승이야. 그 사람들이 워낙 밝으니까. 그 사람들한테 묻고 물으면 내가 도자기에 무지하니까. 모든 기법이나 뭐나 내가 뭘 안다고 내 맘대로 해. 하늘 같이 떠받들고 배우려고 그랬으니까. 그림은 처음은 연필로 그려가지고 그랬는데 지금은 숙달되니까 눈 감고도 한다고. 툭툭 시원스럽게 치고 나가. 처음에는 이게 용대가리야 개대가리지. 당신 용대가리 봤어. 그러면 그 사람도 웃고 나도 웃고 그랬는데. 작품장사는 그림 감각으로 사가지 화가들이 그리는 거는 쳐다보지도 않아요. 일본 사람들도 내 그림에 반했다고. 한국화가 월전 장우성 그 양반이 우리집 와서 나하고 같이 그림 그렸잖아요.



백자청화진사용문대호

세계적인 노력파 한상구

백자 청자같은 것은 고 최순우선생, 정양모 선생은 여태 살아계시다고. 그분들이 쓰신 것 큰 감명을 받았어요. 그걸 봐가지고 내거랑 합작이 돼서 연구가 된거에요. 청자라면 청자가 인쇄술이 좋아가지고 엷은데 두꺼운데 감각이 다 나타나요. 하도 연구를 하니까 이제 도록만 봐도 색상이 감정이 돼요. 연구서도 읽고. 어쨌든 대한민국에서 전 세계에서도 나만큼 노력파가 없어. 한국도자기가 죽은 원인이 어딨는지 알아요. 한국 사람들이 옛것 재현해서 그 바탕에서 새로운 것 창조해야 하는데 도자기 도자도 모르니까 흙 제조해 파는 사람, 유약 만들어서 전부 팔아먹은거에요. 둘째는 화공약품이라는게 있어요. 화공약품은 일본서 건너온거라고. 원토에서 나온 색상이 아니라 제조한 것 가지고 한거라 화학적 냄새가 나요. 이 사람들이 연구 안한거야. 골치아프니까. 당장 돈버는 데만 급급해가지고. 그런데 도자기 원료. 흙 채취를 법적으로 완화시켜줘야 해요. 도자기를 발전시키려면 1톤 미만으로다 재량껏 하게 해야 하는데 자기네 것 조금이라도 건들면 고발하니 연구를 할 수가 있겠어요. 자유롭게 좀 해줬으면 좋겠다. 인생이 짧은데…. 1월에 폐암 직전에 수술해서 살았어요. 연구하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잖아요. 좋은 생각 가지고 해도 어찔어찔해요. 내가 죽더라도 후세가 찬양할만한 작품을 남기면 좋겠다. 그런 생각밖에 없어요. 구상은 다 돼 있어요.


경기도무형문화재 지정통보

첨예한 신경과 감각의 작업

눈 각막 수술을 50년인가 60년만에 했어요. 2000년 들어 수술했어요. 두 눈을 앓았어도 왼쪽이 실명되다시피 하고 이쪽은 그래도 좋았어요. 지금은 우리 안사람 바늘귀 못끼는걸 껴줘요. 머리칼 같은 바늘귀를 낀다니까. 도자기할 때 시력이 중요해요. 지금도 연구할 때 아무리 눈 좋은 사람도 확대경가지고 분석 하잖아요. 두 개나 사다놨어요. 그래도 도자기는 분석이 안되요. 한 흙에도 성분이 조금씩 있기 때문에 도저히 안되요. 육감으로 감이 발달돼야 연구하는 거지 감각 없으면 못해요. 아주 첨예한 신경이.

도자기 귀신, 머릿속에 데이터 가득

청화백자는 내가 볼적에는 더 연구할 게 없는거 같아. 시간낭비 하지 말고 다른거. 한가지 연구 하려면 옛날 것 보다 기술이 좋아야 똑같이 만드는거야. 근사치 다 살려놓고 죽을려고 그래. 그 수많은 재료, 생각도 똑같아야 되고. 언제 만들었냐 시간 시차만 있는거지. 가장 힘든게 고려청자 비취색. 60%는 나왔어요. 다른 색상 저절로 연구과정에서 터져 나와요. 결국 전통을 바탕으로 창조가 나오는 거야. 지금 나는 도자기 연구에 박힌 사람이라 밥 먹다가도 연구하고, 다니면서도 연구하고. 내가 한참 연구할 때 피치 올라갈 때 머리가 지끈지끈할 때 자전거 타고 수십키로 타요. 한바퀴씩 돌잖아요. 자연의 경치하고 대화하면 의문점이 탁 생각이 되면서 터져요. 요새는 나이가 많으니까 밤 한시에 깨면 잠이 안와요. 일단 책 들여다보면서 연구를 해요. 하여간 도자기 연구를 해. 도자기 귀신이래. 아예 귀신이래. 연구 데이터는 머릿속에만 있는 거에요. 난 치매 걱정 없어. 젊어서하고 기억력이 똑같은데 밥 먹고 밤낮을 도자기 연구에서 떠나지 않으니까 다 외고 있지. 실패한 것 기록해놓으면 아들 죽어라 죽어라 하는 거에요.

글 박숙현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대 대학원에서 공공감사정책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사주당의 태교신기, 처인성 등 용인지역학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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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 경기학광장 Vol.4 _ 2020 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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