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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한영서원의 애국창가집 사건과 3·1운동

경기학광장Vol.4 _ Information & News

< 개성 한영서원의 애국창가집 사건과 3·1운동 >


- 경기학광장Vol.4 _ Information & 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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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경기도 개성에 있는 한영서원에서 교사 신영순을 포함한 11월 동지회의 애국창가집 사건이 발생했다. 창가집의 내용은 대일항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박제상, 이순신, 애국지사 최익현, 안중근 등을 영웅의 모범으로 칭송하고, 이들을 계승케 하는 항일의식을 심어주는 것들이었다. 이어 1919년에는 전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송도고보(한영서원)의 교사 이만규는 독립선언서 배부에 참여하였고, 송도고보 교사들은 물론 개성지역의 남녀학생들에게 소요를 선동한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창가집의 ‘구주전란’ 부분(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1월 동지회의 애국창가집 사건

현재 인천에 위치하고 있는 송도고등학교는 1906년 10월 3일 경기도 개성 산지현에서 개교한 한영서원이 모태이다. 개교한 지 10년쯤 지난 1916년 개성에서는 한영서원을 중심으로 애국창가집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개성경찰서 순사가 한영 서원에서 불온창가를 출판, 반포한다는 정보를 입수, 조사한 결과, 8월 15일 해당 출판물의 일부가 발견되면서 비롯되었다. 경기도 경무부 보고 「불온자 발견처분 건」에 의하면, 당시 이경중 목사가 동간도에서 수집, 보관하고 있던 창가를 한영서원 교사 신영순, 이상춘이 제공받은 다음,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를 포함하여 2권의 창가집으로 발간했다고 한다. 제1권은 1914년 8월 25일 40부를 인쇄하여 한영서원 및 호수돈여학교 생도에게 발매·반포했고, 이어 제2권은 1915년 9월 90책을 인쇄·반포 하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창가를 발매·반포한 목적은 무엇이고 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창가집의 편찬 취지를 보자.

국가의 흥망성쇠는 국민정신에 있고 국민의 정신을 감발(感發)시키는 것은 가곡을 제일로 삼는다. 고로 구미제국에서는 거벽(巨擘)의 시인 및 음악가의 미묘한 시조와 가곡으로서 국민의 정신을 함양한다. … 현재 대가의 저작에 관계된 미묘한 가곡이 적지 않으나 각지에 산재하여 통일되지 못하므로 이에 동지들이 의논하여 현재 여러 대가의 가곡 100여 종을 수집 편찬하여 이름을 창가집이라고 하였다. 그 내용은 희노애락 기타를 망라하여 후일 대방현군자(大方賢君子)의 참고로 제공하 기 위해 본서를 간행하며 청년동지에게 소개한다.

즉, 이들은 국가 흥망성쇠의 열쇠가 곧 국민정신에 있다고 인식하고, 국민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조국을 생각하는 노래, 독립군가, 애국가를 모아 창가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창가집은 ‘영웅의 모범’, ‘선죽교’, ‘구주전란’ 등 다양하였으나 그 중에는 일본의 황제나 황가에게 모욕적인 내용을 담은 곡이나 역대 영웅적인 인물의 반일사상을 표현한 곡들도 있었다. 그중 ‘영웅의 모범’은 내용이 아래와 같다.

제46. 영웅의 모범

1. 계림의 개돼지가 되더라도 일본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죽음을 택한 박제상의 충성을 우리가 모범으로 해야 한다.
2. 일본 황제를 가복(家僕)으로 삼고, 일본 황후를 하비(下婢)로 사역시킬 것을 맹세한 석간로(昔干老)의 장심(壯心)을 우리가 모범으로 해야 한다.
3. 임금이 욕을 보게 되면 신하는 죽음을 택한다고 금산(錦山)의 적을 공격할 때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적병을 몰살시킨 조중봉(趙重峯)과 그 칠백의사의 담략을 우리가 모범으로 해야 한다.
4. 한산도와 영등포에서 거북선을 타고 일함(日艦)을 복멸시킨 이순신의 도략(韜略)을 우리가 모범으로 해야 한다.
5. 홍의천강(紅衣天降)의 장군 좌충우돌 분신(奮迅)하여 쥐와 같은 왜적을 도처에서 제거한 곽재우의 용맹을 우리가 모범으로 해야 한다.
6.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대마(對馬)에 갇혀 일본의 곡식을 먹지 않고 아사(餓死)한 최익현의 절개를 우리가 모범으로 해야 한다.
7. 노적(老賊) 이등박문을 노령 하얼빈에서 요격하여 삼발삼중(三發三中) 사살하고 대한만세를 부르짖은 안중근의 그 의기를 우리가 모범으로 해야 한다.

이는 한국 역사 중 실제 대일항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박제상, 이순신 등을 영웅의 모범으로 칭송하고, 당시의 애국지사 최익현, 안중근 등을 독립국의 영웅으로 찬미하면서 이들을 계승함을 맹세케 하는 항일의식을 심어주는 것들이었다.
<송도학원 100년사>의 「창가독립운동 사건」에 의하면, 이 사건은 ‘11월 동지회(13명)’가 주역이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11월 동지회’는 신영순을 중심으로 백남혁, 정사인, 이경중, 오진세, 이상춘, 오립아, 장용섭, 신공량, 이강래, 윤월석 11명으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안종화·최영록이 입회하였다. 11월 동지회는 창가를 통해 민족의 독립운동을 펴고자 애국·독립의 내용을 담은 책자로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경기도 경무부 보고 「불온자 발견처분 건」에 의하면 1916년 신영순, 이상춘, 오진세, 백남혁, 장용섭, 윤월석 등 6명은 출판법, 보안법 위반 및 불경죄로 먼저 체포되었고, 이후 음악교사 정사인, 학감 이만규, 졸업생 백남석, 백남철, 박용하, 이치선, 임시교사 최중순, 경기도 포천 한영문서원 교사 윤자형, 전 한영서원 교사 유봉, 음악대 생도 10명, 사립 호수돈여학교 교사 신공량, 전교사 오립아, 생도 오연거 등 22명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당시 한영서원의 학감이었던 이만규는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고려정 122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었으며, 몽양 여운형과는 절친한 친구이자 사돈지간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사인, 이만규, 백남석, 백남철, 박용하, 최중순 등 6명은 창가의 편찬에 관여한 혐의, 윤자형과 이치선은 1912년 10월이와 유사한 창가집을 편찬한 혐의, 전 교사 유봉은 그 재료를 제공한 혐의, 음악교사와 생도들은 창가를 연주한 행위, 신공량은 타인에게 창가집을 증여하고, 오립아·오연거는 창가집을 호수돈여학교 생도에게 발매·배포한 혐의를 받았다.
일제는 이들에 대한 조치로 이만규를 포함한 창가의 편찬에 관여한 혐의자 6명과 창가를 연주한 행위자, 타인에게 창가집을 증여하고, 발매·배포한 혐의자는 이미 검거한 자들과 연계하여 그해 12월 사건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하고, 창가집을 편찬한 혐의자 윤자형과 이치선, 재료를 제공한 혐의자 유봉은 이미 공소시효가 완료되었으므로 불기소의 의견으로 지방법원 개성지청 검사에게 송치했다.


경기도 경무부 보고(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결과적으로 신영순, 백남혁, 정사인, 오진세, 이경중 5명은 1917년 9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각 1년에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했으며, 이만규, 오립아, 장용섭, 신공량, 이강래, 윤월석은 석방되었다. 이만규는 이후 <조선교육사>를 저술하면서 이 사건을 “학생이 창가집을 등사한 사건”으로,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이 개성경찰서에 체포된 바 있다”고 서술하였다. 이만규가 체포되었을 때 개성경찰서 경부 가와하라(川原)는 “한영서원(의 명칭)을 새 규정대로 고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유예기간 10년 이내에 조선이 독립되기를 바라는 사상에서 고집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추궁했다. 일제의 사립학교 규칙 개정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명칭을 변경하지 않았던 한영서원은 결국 이 사건이 있은 직후인 1917년 사립송도 고등보통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송도고보 교사 이만규의 3·1운동

송도고등보통학교가 애국창가집 사건을 겪은 지 만 2년 여가 지난 1919년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다. 개성에서는 3월 3일부터 시위운동이 시작되어 7일까지 매일 지속되었는데, 3일에는 송도고등보통학교와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 및 일반 군중이 합세하여 1,500명이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다음날에도 2,000명의 시위로 이어졌고, 6일에는 1,000명이 읍내에서 시위운동을 벌여 구금된 인사를 탈환하고자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후 30일부터 개성에서는 다시 1주 일간 시위가 계속되었다.
애국창가집 사건 당시 송도고등보통학교의 학감이었던 이만규는 3·1운동에서 독립선언문을 인쇄·배포하고 치안을 방해한 혐의, 즉 ‘출판물 위반 및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개성경찰서 순사부장 미즈노(水野憲)가 4월 10일 작성한 「이만규에 관한 수사보고」에는 남감리교 목사 오화영이 2월 22일 개성에 와서 김지환, 이경중, 이강래, 오진세, 신공량과 밀의를 하였고, 24일 경성으로 돌아갈 때에는 이만규의 집에 들러 다른 사람의 배석 없이 단독으로 비밀회의를 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오화영은 1919년 2월 16일 정춘수로부터 천도교 측의 만세시위 준비를 듣고, 2월 20일 박희도의 자택에서 이승훈, 정춘수, 오기선, 신홍식과 함께 천도교단과 연합하는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본인은 개성지역 3·1운동 준비를 담당하기로 했다. 이어 그는 22일에서 24일에 걸쳐 이만규, 김지환 등에게 서울의 3·1운동 준비를 알리기 위해 개성에 왔다.
그런데 이만규는 오화영으로부터 서울의 3·1운동 준비를 전달 받은 것은 아니다. 오화영이 개성에 온 22일 이만규는 여운형의 동생인 여운홍을 만나러 경성에 가고 없었다. 4월 21일의 「이만규 신문조서」에 의하면, 이만규는 2월 22일과 27일 서울에서 두 차례 여운홍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경성 박영래의 집에서 여운홍을 만난 이만규는 여운홍으로부터 외국에 있는 동포들의 상황을 들었고, 또한 여운홍과 연희 또는 세브란스 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 경성에서의 3·1운동 계획을 들었다.
이만규는 다음날인 23일(일요일) 마지막 차로 귀가할 때 상하이로 가는 현순과 같은 2등실에 동승하였다. <삼일운동사자료집>에는 현순이 26일 상하이로 출발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현순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3·1운동과 나의 사명」에는 24일로 되어 있다. 현순은 이때 미국대통령 및 파리강화회의 위원에게 독립원조탄원서를 발송하기 위해 상하이로 가는 길이었다.
27일 이만규는 여운홍이 아직 경성에 체류 중이었으므로 재차 그를 만났다. 여운홍은 조선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들어왔으며, 그간 손병희와 이상재 등을 만났는데, 이미 나름대로 운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안심하고 돌아간다고 하였다. 27일에도 이만규는 역시 여운홍은 같은 기차를 타고 개성 역까지 왔으며, 여운홍은 상해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여운홍이 직접 쓴 <몽양 여운형>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여운형의 지시를 받고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일본으로 갔고, 2월 1일 사촌형제인 여운일의 소개로 유학생들을 만났으 며, 2월 8일 도쿄 YMCA회관에서 독립선언이 행해지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여운홍은 2월 16일 국내로 잠입해 친구인 박영래의 집에서 유숙하며 3·1독립선언의 민족대표인 이상재, 최남선, 함태영, 이갑성과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일,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의 진상을 전한 후, 2월 27일 밤 남대문 역을 출발하여 상하이로 탈출했다고 하였다. 여운홍의 글에는 이만규에 관한 얘기가 없지만, 이만규의 진술과 날짜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만규는 오화영을 만나기 전인 22일 이미 여운홍으로부터 3·1운동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다 들어 알고 있었다. 이는 24일 오화영을 만났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이야기를 통해 서도 확인된다. 오화영은 이만규에게 “경성에서 3·1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느냐”고 물었고, 이만규는 “이미 들었다”고 대답했더니 “그렇다면 별로 할 말이 없으니 그대도 이의가 없으면 동지로서 서명날인을 하라”고 했던 것이다.
이만규는 강조원의 집으로 도착한 독립선언서를 받아서 배부에 대한 의논에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같은 학교 교사들에게 보여주었고, 개성지역의 남녀학생들에게 소요를 선동한 주모자로 인정 되었다. 경찰과 검사의 3차례(4월 10일, 4월 21일, 5월 1일)에 걸친 조사 끝에 1919년 5월 9일 손병희 외 266명의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피고사건의 공범자로 예심이 청구되었으나, 1919년 8월 4일 예심이 종결되면서 증거불충분으로 면소 방면되었다. 그러나 그는 방면되기까지 약 4개월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글 김세민

1954년생,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원대, 건국대, 이화여대, 공주대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하남역사박물관 관장 및 세종대학교 역사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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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학광장 Vol.4 _ 2020 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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