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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크고 낡은 대로사(大老司)

경기학광장Vol.4 _ Information & News

< 송시열과 크고 낡은 대로사(大老司) >


- 경기학광장Vol.4 _ Information & 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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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릴 적, 경북 월성 양동마을 외가(外家)의 개 이름은 ‘시열’이었다. 이웃의 강아지도 시열이라 불렀다. 조선의 현군 정조는 송시열(宋時烈)의 글을 모아 송자대전(宋子大典)을 간행하며 그를 송자(宋子)라 불러 최경례(最敬禮)를 다했고 그의 당파(黨派)인 서인 후예들은 공맹(孔孟) 주희(朱子)와 같은 성인의 반열로 대접하여 그를 추앙했다. 한 삶이 이름을 얻고 누대(屢代)에 걸쳐 그 이름을 떨치는 건 쉽지 않다.

그런데, 한쪽은 개 이름에 붙여 멸시하고 조롱하고 다른 한쪽은 극존칭(極尊稱)으로 높이다 못해 공맹(孔孟)과 같은 반열(班列)의 대접이라니.


한 인물에 대해, 어떻게 이런 극단(極端)의 평가를 하나.

널리 알려진 이름일수록, 그 이름을 떠받들고자 행적을 부풀리거나 사실을 비틀고 심지어 없는 사실까지 이리저리 꿰어 꾸미는 걸 종종 본다.

터무니없는 멸시도 억울하겠지만 지나친 대접도 올바르지 않다.


그런 그가 왜 경기도에 있나?

그를 따라가 본다.



2019년의 가을에도 그를 받들어 추모하며 제사를 지낸다.


대로(大老)의 일생


대로, 큰 어른쯤 되겠다. 그의 이름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거론된다. 그렇기에 그의 말과 글, 삶의 자취는 속속들이 드러나 있고, 그에 대한 자료는 조선의 정치인 그 누구보다 넘친다. 조선 중기 선조 때 나서 숙종 때 사약(賜藥)을 먹고 죽기까지 왜란(倭亂) 호란(胡亂) 다 겪으며 치열한 조선 당쟁의 시간, 동인·서인·남인·북인·대북·서북·공서·청서·노서·소서·청남·탁남·노론·소론·벽파·시파, 외기조차 숨 가쁜, 갈리고 나뉜 정치의 시간 한가운데서 83년을 살다 죽었으니 오래 살았다. 환갑이 되면 나라에서 경로잔치를 열어주던 시대였다.

요절한 천재의 짧은 삶을 아까워하기도 하지만 완고한 권력자의 생(生)이 길고 질기면 백성(百姓)의 삶이 고달프다.


그는 선조40년(1607) 12월 30일 충청도 옥천군 이내면 구룡촌(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 외가(外家)에서 태어났다. 몸이 크고 힘이 셌다 한다. 얼마나 힘이 셌던지 남의 산소에 비문을 적어줄 때, 몇 명의 장정들이 덤벼들어도 꿈쩍하지 않는 비석을 마치 팔랑개비 돌리듯 하며 글씨를 썼다 한다. 길이 이름을 떨치고 두루 영향을 끼친 그가 평생 아프고 골골했단 기록은 잘 없다. 아명(兒名)은 성뢰(聖賚), 후에 시열(時烈)로 고쳤다.

자는 영보(榮甫)이다. 그의 호(號) 우암(尤庵)은 동학(同學) 김익희(金益熙)가 지어줬다 한다. 젊은 날, 둘 사이의 논쟁 끝에 송시열이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자, ‘말에 허물이 적어야한다(言寡尤)’며 그의 당호를 지었고 송시열은 받아들였다나.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갑조(甲祚)이고,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이다.

아버지 송갑조는 광해군 말엽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폐위되려는 인목대비 앞에 예를 올리다 진사 벼슬이 떨어졌다 한다. 그 시기, 무모하거나 용감한 일이었다.

송시열의 아버지 갑조와 맏형 시의는 정묘년 호란 때 죽었다. 아버지와 큰형을 잃은 송시열의 분함을 짐작할 수 있다. 평생의 업(業)으로 삼았다는 북벌(北伐)의 뜻이 이 때문에도 생겼겠다.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은 유전인자와 그를 둘러싼 환경, 인연(因緣)과 종종 맞물린다.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 등과 함께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부자에게서 배웠다. 김장생과 김집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大家)이며 이들의 전공(專攻)은 예학(禮學)이다. 동학(同學)들은 나중에 분파를 겪으나 모두 서인(西人)이었다. 이때의 인연을 보아 송시열의 학맥, 인맥을 살필 수 있겠다.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 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잡혀갔다 돌아왔다. 8년 여를 볼모로 잡혀간 왕자와 부모 형제를 청나라에 잃은 사제(師弟)의 마음은 다르지 않았으리라.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1637년 화의가 성립되어 왕이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낙향하여 10여 년 간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했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올라 척화파와 산림(山林)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도 벼슬길에 나아가며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는 글을 왕에게 올려 효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는 곧 주자에 대한 교조(敎條)적 생각과 태도를 뜻하고 청에 대한 반감을 표시한 것이니 평생을 일관한 그의 진짜 모습이다.

청서파(淸西派 : 인조반정에 간여하지 않았던 서인세력)였기에 지지 세력의 기반이 약했던 그는 충주목사·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

1658년(효종 9)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이조판서에 올라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효종이 갑자기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싼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송시열은 기년복(朞年服 : 만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하면서 3년복(만 2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던 남인의 윤휴(尹鑴)와 대립했다.

예송은 〈대명률 大明律〉·〈경국대전〉의 국제기년설(國制朞年 說)에 따라 결국 1년 복으로 결정되었지만 이 일은 예론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이 정권을 둘러싼 당쟁으로 파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송을 통해 남인을 제압한 송시열은 서인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혀 나갔다.

그러나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이 있자 벼슬을 버리고 회덕으로 돌아갔다. 그 뒤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향리에 묻혀 지냈으나, 사림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막후에서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668년(현종9)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곧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허적의 후임으로 좌의정에 올랐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제2차 예송이 일어났을 때 대공설(大功說 : 9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을 내세운 남인에게 패배, 실각 당했다.

앞서의 1차 예송 때 예를 그르쳤다 하여 덕원으로 유배되었고, 이어 웅천·장기·거제·청풍 등지로 옮겨 다니며 귀양살이를 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재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다시 등용되었다. 그 뒤 서인 내부에서 남인의 숙청 문제를 둘러 싸고 대립이 생겼을 때, 강경하게 남인을 제거할 것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을 지지했다. 이로써 서인은 1683년 윤증(尹拯)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장파의 노론으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1689년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 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해 6월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송시열과 예송논쟁


효종(孝宗)이 죽자, 상복(喪服)을 1년을 입느니 3년을 입어야 하느니, 대왕대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상복을 두고 논쟁이 일었다. 상복의 당사자, 자의대비가 선왕(先王) 인조의 나이 어린 아내였고 죽은 효종의 계모(繼母)였기에 단순하지만은 않았겠으나 이 상복의 문제로 조선의 조정(朝廷)이 몇 해를 들끓었다. 이 얼마나 사소하고 한심한가. 조선은 선왕의 왕비가 입어야 하는 상복논쟁으로 해가 뜨고 날이 저물었다. 조선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성리학이었던 탓이다. 이때의 성리학(性理學), 곧 주자학(朱子學)은 곧 삼강오륜(三綱五倫)으로 정리되고 이는 결국 뭇 관계 사이의 예의를 밝히려 한 이념 아니었나. 군신간의 부자간의 남녀 간의 예의와 범절만이 세상에 최고 가치인양 물고 뜯고 할퀸 세월이었다. 어쩌겠는가, 성리학은 부질없는 예학(禮學)이 핵심 콘텐츠이었던 것을.


문제의 근원을 찾자면, 죽은 효종의 정통성 문제였다. 인조의 장자(長子)는 죽은 소현세자였고 인조의 둘째 아들로 봉림대군의 신분이었다가 왕위에 오른 효종은 올바른 승계를 못한 임금이란 것이 서인들의 생각, 곧 송시열의 속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선왕비(先王妃)의 상복을 두고 시비(是非)하였고, 앞선 예(例)와 온갖 중국의 묵은 고사(故事)를 들먹이며 싸웠던 것이다. 논쟁은 적대적인 두 정치세력 서인(西人)과 남인(南人)간의 것이었다.

논쟁의 한 장면을 보면, 송시열에 맞섰던 윤선도(尹善道)는 ‘종묘사직을 잇는 것이 최우선 고려 대상인데 장자(長子)가 아니어서 그걸 내치자고? 당연히 3년복이 마땅하지’ 하는 것이었고, 송시열은 ‘왕이고 누구고 어쨌건 장자 아니니까 1년이면 됐잖아?’

이런 거였다.


주장(主張) 다르고 당파가 다르면 사문난적(斯文亂賊), 곧 ‘유교(儒敎), 주자(朱子)의 해석을 어지럽힌다’며 공격했다. 공격의 결과는 살풍경(殺風景)하여 숱한 선비들을 귀양 보내고 죽이고 했으니 논쟁은 어쩌면 ‘죽기 살기’의 것이었다. 그간의 논쟁은 하도 많은 논거를 들이대며 공론(空論)을 일삼다보니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했거니와, 나중 15년 후, 효종비가 죽었던 때 새삼 제기된 2차 예송논쟁 때 상복문제로 당파(黨派)간에 다툴 때는 서로 앞선 논리를 뒤집는 해프닝도 일어난다. 주자 말씀에 바탕을 둔 예송논쟁의 그 많은 상소(上疏)와 말씀들은 너무나 번잡하다. 당시를 비판한 이익(李瀷)의 일갈(一喝)을 옮겨 본다.


“한 글자라도 의심을 품으면 요망하다 하고, 글귀를 서로 비교하면서 고찰하기라도 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니, 정주(程子·朱子)의 글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옛 경전은 어떠하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학문은 어리석고 둔하다.”


그 가운데에 언제나 송시열이 있었다.


효종과 송시열의 북벌(北伐)


8년여를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효종, 아버지와 맏형을 정묘호란 속에 잃은 송시열.

둘은 남한산성에서 험난한 항전의 시간을 같이 하고 삼전도의 굴욕적인 시간을 나란히 지켜봤다.

‘오랑캐’ 청나라에 대한 아픔과 분노의 경험에서 비롯된 적개심은 같은 형질(形質)이었겠다.


효종 9년 겨울,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제수하여 북벌을 맡긴다. 당시, 전쟁을 위해 무력을 증강하고 정벌을 일삼던 청나라의 국세가 안정기로 접어드는 모습을 보자, ‘오랑캐가 중원을 얻어 중국의 제도를 배우면 점점 쇠약해진다’라는 주자의 말을 들먹이며 즉각 실천에 옮기려는 효종의 북벌의 뜻을 미루려 설득한다. 둘의 북벌論은 달랐다.


내용을 보자.

효종은 북벌 의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다. 살펴보면, 우선 무신(武臣)을 우대하고 성(城)을 쌓았다. 둘째로 병장기를 제조하고 10만의 정예 포병을 길러 무력을 키우려 했다. 셋째로 청의 감시를 피해 장정들을 중으로 만들어 전국의 큰 사찰에다 숨겨 두고 훈련시켜 승병으로 만들어 청으로 쳐들어 갈 내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넷째로 청에 볼모로 잡혀있는 조선인과 은밀히 내통하여 적정(敵情)을 살피는 첩자로 쓸 것이며 전쟁 발발시 그들이 호응 하여 합세할 기대까지 내비친다. 마지막으로 친위대인 금군(禁軍)을 강화하고 창덕궁 후원의 담을 헐어 기병의 활터로 사용하게 했다. 심지어 제주도에 표류되어 온 하멜(Hamel)을 훈련도 감에 배속시켜 조총을 만들게도 했으니, ‘전쟁준비’라 할 만하다.

송시열은, ‘구체적으로 북벌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 라고 묻는 효종에게 북벌의 전제로 “전하께서 덕을 잘 쌓으시고 학문을 익히시라...” 답한다.

그가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의 한 대목이다.

“정치를 바르게 닦아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사실은 공자가 「춘추(春秋)」에서 대일통(大一統)의 의리로 천하 후세에 밝힌 바이므로...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추하게 여겨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 또 주자는 인(仁)은 부자(父子)보다 큰 것이 없고 의(義)는 군신보다 큰 것이 없으니 이것이 삼강(三綱)의 요점이요, 군부(君父)의 원수와는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습니다.”


북벌에 나서자는 것인지 말자는 것인지... 송시열의 진심을 알 수 없는 흐릿한 대목이다.


1658년(효종 9) 12월 10일 효종은 송시열과 대화하며 북벌사업에 동참할 의사가 있는지 떠 보았다. 그러나 송시열은 “공을 세우기는 쉬워도 지극히 은미한 본심은 보존하기는 어려우며, 중원의 오랑캐를 물리치기는 쉬우나 자기 한 몸의 사의를 제거하기는 어려운 법이니, 이것은 주자(朱子)가 당시 인군에게 말씀한 지론입니다.” 라며 효종방식의 북벌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효종은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이 나의 책무이다. 나와 함께 이 일을 수행할 자는 경(卿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라며 송시열을 달래고 있다.

효종은 송시열을 은밀히 불러들이면서 승지와 사관과 내시 등을 내치고 만난다. 이처럼 임금과 신하 단 둘이 만나는 것을 독대(獨對)라 하는데, 경국대전에 임금은 어떤 경우라도 독대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다. 효종은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독대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 있었던 대화 내용을 송시열이 기록하여 남긴 것이 <악대설화(握對說話)>이다.

효종은 그에게 친히 담비의 털과 가죽으로 만든 군복까지 하사하며 자신의 북벌 의지를 내비치고 특별한 기대를 갖기도 한다. 그는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1659년) 봄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수포(水泡)로 돌아간다. 송시열의 뜻이 정녕 효종과 같았다면 그리 되지 않았으리라.

결국, 북벌(北伐)이란 슬로건은 같았으되, 효종은 실천하려 하였고 송시열의 것은 명분(名分)만을 앞세운 허망한 것이었다. 같은 듯 크게 다르다.

‘북벌’과 ‘大학자으로 칭송되고 찬양받는 송시열의 위명(威名)은, 포장되고 가공됐다는 의심이 짙다. 북벌은 허망한 것이었으며 그의 학문적 성취는 노론이라는 당파적 이해에 기반을 둔 협량(狹量)한 것이었다.

송시열이 벼슬한 기간은 길지 않다. 그러나 83세에 사약을 받고 죽기까지 현실정치인으로 한평생을 군림하며 그가 쌓은 결과는 반대파를 몰아붙여 비난하고 귀양 보내고 살육한 것 말고 찾기 어 렵다. 학문적으로 경직되고 정치적으로 ‘노론’이라는 당파적 이해에 갇혀 치졸한 행태로 가득한 일생이었다.

그가 권력을 쥐고 휘두른 세월이 답답하여, 다른 세상이 궁금해졌다.

‘르네상스’, 문예부흥기의 유럽은 예술문명의 꽃을 활짝 피우던 시기였다. 송시열과 비슷한 시기를 살다간 아이작 뉴턴은 미적분 법을 만들고 중력을 확인하고 증명하여 인류의 발전에 공헌했다.

비교된다. 송시열 학문의 지향은 무엇이었으며 그가 꿈꾸던 나라는 어떤 것이었나.

선악(善惡)이 개오사(皆吾師)라.

잘났건 못났건 모두 스승이기에 제사를 지내고 음복(飮福) 하는 걸 허물하는 건 야박하다 할 수 있겠으나, 지난 날 왕정(王政) 치하(治下) 정조의 대접은 모르겠으되 공화정(共和政)을 사는 오늘의 요란한 제사현수막은 지나치다.



조선의 현군(賢君) 정조는, 그의 증조할아버지 숙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은 송시열의 사당을 세워 직접 비문(碑文)을 짓고 적어 그를 추앙했다. 그와 군신(君臣)이었으며 평생의 동지이자 사제지간이었던 효종의 영릉(寧陵)을 바라보며 마주하는 경기도 여주 남한강가에. 그의 사당이 경기도 여주에 있는 이유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호.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과 사우를 부수고 철거할 때 전국에 송시 열을 제향하던 서원 및 사우가 44개소나 되던 것이 모두 헐렸으나 오직 이 대로사 만은 ‘강한사(江漢司’로 이름을 바꾸어 남았다.


인간 송시열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깍듯이 대하였고, 사람을 만날 때는 누구에게나 열린 자세로 대하였다. 신분에 구애됨 없이 누구에게나 편견 없고, 사심 없이 대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이나 주자, 공자와 맹자를 비판하거나 유교사상을 부정하는 자는 원수로 여기고 거침없이 공격하고 규탄하였다.

그는 예의와 염치, 인간의 도리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고, 이를 평생 신념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배움, 교육이 중요했고, 그 길이 성리학에 있다고 봤다.

유교적 이념사회에서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 남자(남편) 를 여자(아내)의 상위에 두었고, 부부관계도 군신관계, 주종관계와 같은 수직적인 관계로 해석했다. 따라서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여성들에게도 인간답게 살게 해야 되고, 인간답게 살려면 자기의 몫을 다해야 되며, 예의와 염치와 도리를 알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우암은 여성들에게도 같이 문자(천자문)를 가르치고, 효와 충과 신의를 강조하였으며, 사자소학에서부터 사서 육경을 가르쳤다. 배움이 짧아서 혹은 오래 한학을 교육받지 못하여 한문의 어려운 뜻을 해석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배려한 그는 사서 육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책을 만들어 여성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뜻밖이고 놀랍기까지 한 대목이다. 고루한 ‘꼰대’의 면모와는 사뭇 다르다.

배움이건 정책이건 끝없이 토론하고 치열하게 논쟁했던 송시열이다.

동양 철학의 본류인 유학의 시조인 공자와 유학을 새롭게 해석한 주자를 계승하여 조선 유학을 집대성했음은 물론 심오한 동양 철학의 체계를 최종적으로 정립한 역사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여 송자(宋子)로 불렸다. 그러나 그의 또 다른 실체는, 주자의 학문과 사상은 일점일획도 어긋남이 없고 고칠 수 없는 지고(至高)의 것이라 고집하며 그와 다른 생각을 배척하고 짓밟았다. 편벽하고 완고한 천재가 두고두고 나라를 망가뜨린 예(例).

지금의 눈으로 지난날을 들여다보는 건, 한계가 있겠으나... 지은 죄보다 벌이 크면 억울하겠다.

그런가하면, 받는 상이 공적(功績)보다 크면 그것도 민망한 노릇.

게다가, 성인(聖人)의 이름으로까지 대접한 이름이기에 대로사의 곳곳을 살피며 그를 떠올렸다.


송시열의 학문의 깊이를 다 알지 못하고, 그 논쟁적 삶의 이면에 또 어떤 뜻이 깃들어 있는지 모른다. 대로사를 찾은 볕 좋은 가을날 사당 마루에 올라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조는 그를 송자(宋子)라 드높여 권력질서의 한 축(軸)인 노론의 환심을 사려했던 건 아니었을까? 탕평책의 일환으로 선대(先代) 숙종 때 사약 받고 죽은 송시열의 명예를 회복시켜 거대당파인 노론의 도움을 받아 국가경영의 한 수단으로 삼은 것은 아닐까.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성리학의 대가로서의 송시열의 예송논쟁 당시의 면모는 구차하다.

남인(南人)의 거두였던 윤휴(尹鑴)는 광해군 때부터의 오랜 동무였으나, 그가 3년복을 주장하자, 송시열은 윤휴를 참적(讒 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 부르며 맹렬히 공격했고, 소년기의 우정은 증오와 경멸로 변하였다. 토론과 설득은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학문이 높고 식견이 넓으면 이해하고 포용의 폭도 크련만 참으로 완고하고 편벽했다.


어제가 있기에 오늘을 살고 어제의 말씀이 오늘 삶의 밑천이 되기도 한다.

송시열이 살고 간 세월, 송시열이 머리맡에 이고 살았던 주자학, 그가 우두머리였던 당파의 철학과 사상적 배경은 지금의 우리 삶에도 드리워져 있다. 누구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지만... 어쩌면 지금도 우리 생각과 마음 속에 공맹(孔孟)은 살아 숨쉰다. 심지어 조직폭력배 사이에도 의리와 장유유서(長幼有序) 질서는 강조된다.


그는 당대(當代)의 거인이었다. 대학자였고 항시 당파싸움의 중심이었다. 정조의 대접은 극진하여, 그를 일러 송자(宋子)라 했으니...

그의 권세와 명망은 너무 크고 높았다. 그 영향력이 컸기에 조선사회 전반(全般)에 그의 그늘을 드리웠고 후세에까지 미친다. 명분만을 앞세운 나머지 실리를 외면했고 잘 먹고 잘사는 나라건설에 무식했다. 힘세고 큰 권력의 송시열은-당시로서는-너무 오래 살며 정정했다.

한 점 오류도 없다며 주자를 따르던 송시열이다. 그를 좇으며 공자의 정명(正明)을 떠올린다. 명칭을 실제에 맞게 바로잡으려는 게 정명일지니.

개 이름에 ‘시열’을 붙인 것은 온당치 않다. 그와 대립관계였거나 실제 박해를 당한 후손들의 짓이리라. 지나치나 이해 못할 바 아니다.

누구는 그를 일러 ‘수구꼴통’이라 한다, 그 또한 맞다.

그는 조선을 망하게 한 원인제공자였다.

그는 송子인가 송者인가.

여주 대로사를 둘러보며 두고두고 생각했다.



송시열의 옛 집터에 새겨있는 암각 ‘증주벽립(曾朱壁立)’


강한사를 뒤로하고 돌아선 후 그가 내내 궁금하여 서울 명륜동에 있는 그의 옛 집터를 찾았다.

집은 사라지고 그가 평생을 두고 한 생각은 남았다.

증주벽립(曾朱壁立)!

정자와 주자를 새겨 집 바깥벽에 세웠다.

오로지 주자학.

이쯤 되면 도그마(dogma)를 넘어 종교(宗敎)다.


그렇게 살다 간 송시열이다.


그의 제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오늘도 나부낀다.

대로사(大老司), ‘큰 어른을 모시는 사당’이라고?

정조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글 유성철

자유기고자 ‘뭐가 진짜인가’하는 것이 항상 궁금하다. 인쇄업에 종사하며 경기도 곳곳의 인물과 유적을 찾아 글로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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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학광장 Vol.4 _ 2020 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3.30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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