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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향토사 연구에 일생을 바치다 구리시 박명섭

경기학광장Vol.5 _ People & Life

< 향토사 연구에 일생을 바치다 구리시 박명섭 >


- 경기학광장Vol.5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된 동구릉, 국가사적 제 455호로 등재된 아차산 보루와 그 일대 문화유적, 갈매동 도당굿 등 구리시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문화유산의 발굴과 조사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박명섭 구리시 향토문화연구소장이다. 그를 만나러 동구릉 앞 주차장에 가니 자그마한 체구에 백발의 신사 한 분이 웃으면서 서 계셨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함께 문화원으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구리시에는 언제부터 정착하셨으며, 학창시절의 얘기를 해주세요.”

“저는 밀성 박씨, 또는 밀양 박씨라고도 하는데 박혁거세 71세손 할아버지께서 토평리 벌말에 할아버지 처가가 있었던 관계로 이곳에 자리를 잡았어요. 그때가 아마 1925년인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구리를 떠나본 적이 없어요. 그 전에는 59세손 할아버지께서 1626년에 투미재(지금의 왕숙천 인근으로 추정)에 거주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 집안이 구리와는 꽤 인연이 깊군요.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서울에 있는 청량중학교와 중동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중학교 1학년 때가 1953년도인데 그때 휴전회담 반대 데모가 한창 일어났어요. 우리들도 참여해서 청량리에서 출발해서 동대문을 돌아오는데, 그때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와서는 우리 앞에 서더니 우리를 포함해서 고등학생들에게 “야! 저 녀석들 모두 트럭에 태워서 전쟁터로 다 보내. 전쟁이 어떤 것인지 똑바로 보여주게”하는 거예요. 아마 전쟁의 참혹함을 모르는 우리가 철부지로 보였나 봐요. (웃음)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2시간 정도가 걸려요. 그러니 아침에 아버님이 쇠죽을 끓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별이 제자리에 왔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러면 후딱 일어나 어머니가 해주시는 아침밥을 먹고 새벽별을 보면서 또래 동네친구들과 함께 부지런히 걸어 학교를 가는 거예요. 그 이후에 지금의 구리파출소 자리에 버스정류장이 처음 생겨 버스가 서울까지 왕래하였죠. ”

현재 박소장은 향토사연구소장으로 일하며 구리시 문화유산과 관련하여 누구보다 폭 넓은 활동과 명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처음부터 이와 관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지질학과를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박소장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고모부께서 서울역 근처에 양화점을 차리는데 부족한 자금을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는 바람에 7남매의 장남인 아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준비해 두신 땅을 파시면서 “내가 40대만 되어도 너를 대학에 보내겠지만, 지금 내 나이가 50을 넘었으니 도저히 너를 대학에 보내줄 수가 없구나”라고 하셨다. 그동안 대학 진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그는 한동안 좌절하여 두문불출 하였다. 그러다가 군대 징집영장을 받고 강원도 화천에 있는 육군 155밀리 곡사포 부대에 가게 된다. 군대를 간 후 첫 휴가를 보내고 귀대를 하는 날 5·16 군사혁명이 터졌다. 당시 그는 군대가 정권을 잡았으니 잘하겠지 라는 한 가닥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35개월 16일을 복무하고 1963년 8월에 제대를 한 후, 보험회사 외무사원 모집 공고를 보고 응모를 하여 서울 남대문에 본사가 있는 보험회사에 취직하면서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하게 된다. 당시 회사에 취직을 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신원보증이 필요하였는데 그를 위해 당시 국회의원인 전00과 중앙병원 윤00 원장이 흔쾌히 보증을 서주었다고 한다. 당시 보험은 주로 교육보험으로 다른 것보다 자식들의 교육을 최우선시 하였다고 한다. 보험사원으로 1년 6개월을 근무하던 중 자신을 짝사랑하던 한 여성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는 이후 구리농협의 설립과 관련한 업무를 보면서 서기로 근무하였다. 하지만 조합장의 비리를 목격한 그는 더 이상 근무하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 일을 그만두고 지금의 남양주에 있었던 한국 유일의 인견사 생산 공장인 원진레이온에 취직을 하고 1975년 1월에 퇴사를 한다.
원진레이온은 1964년 화신그룹의 총수 박흥식이 일본 동양레이온(지금의 도레이) 중고기계를 들여와 1966년에 흥한화학섬유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공장이다. 하지만 이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신경독가스의 원료로 쓰이는 치명적인 유해물질인 이황화탄소와 황화수소가스에 노출되어 중독증세를 보이는 등 노동자를 보호하는 안전설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결국 1993년에 폐업되었다. 그에 따르면 아침에 주머니에 있던 100원짜리 동전이 퇴근할 때쯤이면 새까맣게 변색이 될 정도로 인체에 치명적인 황화수소가스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고 한다. 눈이 너무 아프고 소화가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부와 사측에서는 이를 은폐하기에 급급하고 피해 노동자들에 대한 직업병 판정과 보상 요구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과 무시로 일관하였다. 이에 1988년 ‘원진 레이온 직업병 피해자 가족협의회’가 결성되고 공해연구소와 노동, 보건, 의료계 관계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정치권에서도 진상조사를 하기에 이른다. 결국 회사 측은 여론에 굴복하여 협상을 개시하여 1989년 1차로 29명, 1993년 2차로 257명이 직업병 판정을 받았다. 그는 1999년 3월10일자로 뇌경색과 고혈압으로 직업병 판정을 받았다.
원진레이온을 그만두기 직전 그는 교문리에 얼음공장을 차린다. 당시 얼음은 일명 아이스케끼를 만들거나 막걸리에 넣어두는 등 사용처가 매우 다양하여 사업이 그런대로 잘 굴러갔다. 하지만 1979년 냉장고가 보급되면서 얼음공장에서 얼음을 사다 쓰는 곳이 급격하게 줄어들었으며, 기껏해야 해상얼음으로 팔려나갔는데, 이는 배달 하기가 어렵고, 수지가 맞지 않아 얼음공장도 그만두었다. 이후 주문진에 있는 한 호텔에서 사업을 하는 등 지금의 일과 전혀 다른 영역에서 일을 하였다.
처음 구리문화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소개로 이루어진다. 1991년 구리문화원이 처음 설립하고,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서 구리시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에 처음에는 완곡하게 거절하였으나 거듭된 권유에 승낙을 하게 된다. 이때 그는 벌써 50이 넘었을 때였다.

“처음 저에게 추천이 왔을 때 그동안 내가 하던 일과 전혀 생소한 분야이기에 거절을 했어요. 그런데 어찌하다 하게 되었는데 하다 보니 점점 이 일에 빠져드는 거예요. 구리시는 다른 시에 비해 문화유산들이 많이 있어요. 서울과 가까워서 그럴 수 있겠지만.... 하나 둘씩 배우면서 일을 하다 보니 점점 문화유산과 유적들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리고 점점 욕심도 생기고 그리고 이런 훌륭한 유산과 자료들을 후세에 남겨줘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도 생겨요. 목표가 생기니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몰라요.”
이렇게 시작된 문화원 시절. 그는 수많은 문화유적 발굴과 조사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가 지금껏 해온 일들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아차산 고구려 유적 발굴과 복원사업’이 가장 인상 깊어요. 발굴 당시만 하여도 서울과 경기 지역에 백제 관련 유적과 유물들은 많았지만 고구려와 관련한 유적이나 유물은 있을 것이라고 누구도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1994년 『구리시지』를 편찬하고자 이달호 상임위원에게 의뢰를 하니 이곳은 지역이 너무 좁아 자료가 너무 없으니 우선 지표조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셔서 강진갑 교수를 단장으로 심광주 박사가 조사반장으로 지표조사를 하였는데, 그 해 6월이 다가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한 날은 심광주 박사에게서 연락이 와 박사의 13평 아파트를 방문하였더니, 방안 가득 아차산에서 발굴한 고구려 토기와 유물들이 가득한 거예요. 그래서 같이 간 사진작가와 비디오 촬영기사에게 이것 모두 촬영하라고 했죠. 그리고 심광주 박사가 그곳에는 엄청난 고구려 유물들이 많이 있으니 본격적으로 발굴을 하라고 해서 1996년 9월에 고려대 최종택 교수에게 발굴을 의뢰하여 그 이듬해 1997년에 5,000만원의 비용으로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시작해서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계속하여 수많은 유물을 발견하고 급기야는 당시 kbs 역사스페셜에서 직접 촬영을 나와 방송도 하였죠. 아마 2회일 거예요. 그리고 갈매동 도당굿의 시연 전 과정을 기록하고 촬영하여 1995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 19호로 지정되게 하기도 하였죠.”




이 외에도 『망우 묘역에서 만난 근·현대 역사인물』 출판에 기여를 하고 , 『동구릉 이야기』 책자를 직접 저술하는 등 구리시 문화유산의 발굴과 조사 그리고 알리는 작업에 솔선수범하고 있다. 지금도 8순을 넘긴 연세에도 불구하고 매주 동구릉에 나와 일반인들을 상대로 동구릉 문화해설사로 자원봉사를 계속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 일을 계속하고 계시는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이 일은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 제가 더 많은 것을 얻고 배우며 하루하루 발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람도 있어요. 처음에는 일이 힘들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그만 두려고 했던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옛 것을 통해 옛 사람들의 생활을 자세히 알게 되고, 그것을 일반인들에게 알려줄 때 무한한 보람과 자긍심을 느낍니다. 이것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귀중한 경험입니다. 이런 보람과 자긍심이 지금의 내가 있도록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원을 나서니 눈이 부시게 햇살이 비친다. 문 앞까지 마중 나오신 박명섭 소장 아니 청년 박명섭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건강을 기원 드리며, 다음 기회에 다시 한 번 뵙게 되기를 부탁해 본다.


글 고영창

영남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 4년 전부터 파주 전통마을 기록화 사업에 공동 참여 중이며, 경기도의 역사·문화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조사·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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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5 _ 2020 여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6.30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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