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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광주관아와 선정비

경기학광장Vol.5 _ Research & Study

< 광주관아와 선정비 >


- 경기학광장Vol.5 _ Research & Stu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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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아(官衙)가 소재했던 근처에는 수령들의 선정비를 모아둔 비석거리 또는 비선거리라 불리는 곳이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광주군 중 대면이었던 송파구 가락동에도 광주목사, 부윤, 성주 등의 선정비들이 서 있었다. 광주관아는 조선 초기에는 동부면에 위치하였고, 후기에는 남한산성에 있었는데 왜 관아와 관련이 없던 중대면에 이들의 선정비들이 서 있었을까?

가락동의 수령 선정비(善政碑)

조선 고종 대 전국 곳곳에는 선정비, 송덕비, 불망비 등으로 불리는 비석들이 산재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관아(官衙)가 소재했던 근처에는 수령들의 선정비를 모아둔 비석거리 또는 비선거리라 불리는 곳이 형성되어 있었다. 서울시 송파구 가락 본동 비석거리 공원에도 광주목사, 부윤, 성주 등의 선정비들이 11기가 서 있는데, 이 비석들은 부근이 개발되면서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 서울로 편입되기 전까지는 이곳이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中臺面)이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가락동 비석거리 공원에 있는 선정비

가락동 비석들의 연대는 이른 것은 1631년(인조 9)부터 시작하여 가장 늦은 것은 1656년(효종 7) 이후까지이다. 역시 광주 관아(廣州官衙)가 있던 남한산성 내에도 35기의 부윤, 수어사, 유수겸수어사의 선정비들이 세워져 있다. 남한산성의 선정비는 가락동 이후인 1705년부터 1905년까지 200년간의 비석들이다. 결국 이것은 병자호란이 있기 전인 1631년(인조 9)부터 1656년(효종 7) 경까지는 송파에 선정비를 세우다가 1705년 (숙종 31)부터 1905년까지는 남한산성 성내에 세웠다는 것이 된다.
원래 조선 초기에는 광주관아가 광주군 동부면(현재 하남시 춘궁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동부면(東部面)에 위치했던 광주 관아는 1626년(인조 4) 병자호란에 대비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후 동부면에 있던 광주관아는 각종 지지류(地誌類)와 고지도에 고읍(古邑)으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이들 지지류와 고지도는 동부면에 광주관아가 위치했던 것과 남한산성으로 옮겨간 사실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주고 있지만, 광주관아가 언제부터 동부면에 설치되었는지에 대해서 는 알려주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이들 지지류가 광주관아가 남한산성으로 옮겨간 이후인 조선 후기에 작성되었고, 그 이전 시기에 관해서는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지도 역시 남한산성을 위주로 그려져 있고, 고읍과 그 터 일부에 옮겨진 광주향교만 개략적으로 표시되어 있을 뿐, 광주관아의 위치도 정확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심지어 동부면의 읍치는 당연히 고대 한성백제의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으로부터 조선 인조 때 남한산성으로 옮겨갈 때까지 계속 존속했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그런데 가락동에 선정비가 세워졌던 1631년(인조 9)부터 1656년(효종 7) 이후는 광주관아가 남한산성 성내에 있을 때이다. 광주관아가 남한산성 성내에 있었기 때문에 남한산성에 선정비가 세워져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광주관아가 위치한 적이 없는 가락동 부근에 선정비가 세워져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일까? 최근 서울역사편찬원에서 발간된 책(서울 동 (洞)의 역사 『송파구』 제1권)에는 송파나루터 근처에 송파장 터가 있고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라 그곳에 선정비를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도 나루터나 장터에 선정비를 세운 사례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1917년에 작성된 조선총독부의 『조선고적조사보고』의 내용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남한산의 서쪽 중대면에 고광주(古廣州)의 땅이 있으며, 지금의 고읍(古邑)보다 훨씬 이전의 고읍이다. … 『병자록』 등의 책에는 조선시대 인조가 청군에게 항복하고 나서 남한산성의 서문으로부 터 나와 고광주를 거쳐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광주는 지금의 동부면 고읍 외에 중대면에 있는 것이 된다. 또한 중대면의 고광주는 동부면 고읍에 주치(州治)하기 이전의 치소(治所)가 된다. 이것은 백제의 도성과 신라 한산주의 위치를 고찰하는데 매우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만, 다른 지지류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연구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중대면의 광주관아(廣州官衙)

『조선고적조사보고』의 핵심은 중대면에 고광주가 있다는 것이고, 중대면의 고광주는 동부면의 고읍보다 훨씬 이전 고읍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광주’, ‘고읍’은 모두 옛 광주관아라는 뜻이다. 그리고 『조선고적조사보고』는 그 출처를 『병자록(丙子錄)』이라고 하였다. 『병자록』은 대개 병자호란 당시 나만갑이 작성한 『병자록』을 떠올린다. 이 책은 1636년(인조 14) 12월 12일 청나라 군대가 우리나라에 침입했다는 도원수 김자점의 장계(狀啓)를 받은 날로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2월 8일 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심양으로 떠나간 날까지 57일 동안의 일기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나만갑의 『병자록』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없다. 즉 나만갑의 『병자록』은 실제로 인조가 출성을 하는 날인 1월 30일에도 “전하와 세자께서는 남융복을 입으시고 서문으로 하여 성을 나가셨다. 칸(汗)은 일찍이 삼전포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남쪽에 9층의 단을 만들어 누런 장막을 치고 누런 일산(日傘)을 세우고 군사로 위엄을 베풀어 놓았다”고 하여 단지 서문으로 성을 나갔다고만 했지, 고광주를 거쳐 삼전도로 갔다는 말은 아예 없다.
즉 『조선고적조사보고』의 출처인 『병자록』은 나만갑의 『병자록』이 아니었던 것이다. 병자호란을 기록한 『병자록』은 여러 종류가 있었던 것이다. 나만갑의 『병자록』에 보이지 않던 내용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또 다른 『병자록』 (간행자, 연대 미상)에는 “인조가 ‘고광주’ 앞을 거쳐 비석 앞에서 멀리 바라보니 청 황제가 마전포에 단을 설치하고 있었다.”는 내용을 수록하고 있고, 1636년에 쓰여진 『남한일기』 와 1928년 조선박문사에서 발간한 『임진급병자록(壬辰及丙子 錄)』에도 역시 ‘고광주’ 앞을 지나갔다는 마찬가지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세 가지 기록이 모두 나만갑의 『병자록』 보다 내용이 상세하다.


고광주 원고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남한일기』는 석지형이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하여 남한산성에 위협을 가하던 시기로부터 시작하여 45일간의 방어사실과 피침상황(被侵狀況) 등을 서술한 책이다. 석지형은 병자호란 당시 자신이 직접 남한산성에 들어가 전란 방어책과 용전, 격퇴 상황 등을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또한 청나라가 조선에 침입하였을 때 청군의 군비 상황과 부대 배치, 적장의 인적사항 등을 담고 있어 병자호란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귀한 자료이다. 『남한일기』는 그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가 1753 년(영조 29)에 당시 유수인 이기진(李箕鎭)이 이를 발견하고 인쇄, 배포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관찬사료인 『인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도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오던 1637년(인조 15) 1월 30일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인조실록』에는 ‘고광주’의 내용이 없으나 『승정원 일기』에는 ‘고광주(故廣州)’ 앞을 거쳐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이 뒤따라 나아가 옛 광주(故廣州) 앞에 이르자, 용골대가 시신(侍臣)들을 뒤에 떨어뜨려 두었으므로 상은 다만 삼공, 오경, 육승지, 한림과 주서 각 한 사람만을 거느리고, 왕세자는 시강원과 익위사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비석 앞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니 황제가 마전포(麻田浦)에 단을 설치하고서 위에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주 차림에 궁검을 찬 자가 각각 방진(方陣)을 치고 옹립하였으며, 깃발과 창검이 사방에 빽빼이 늘어서 있고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하였는데, 대략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용골 대 등이 말에서 내리니, 상 또한 말에서 내려 비석 아래에 앉았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간행자, 연대미상의 『병자록』과 『남한일기』, 『임진급병자록』의 세 책과 『승정원일기』 1월 30일자 기사가 같은 것으로 보아, 『조선고적조사보고』에서 인용한 『병자록』은 나만갑의 『병자록』에 『승정원일기』 또는 『남한일기』의 내용을 추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동국전란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청나라 수백 명이 앞에서 인도하여 옛 광주읍에 도착하자, 인조는 시종신을 모두 물리치고 다만 3공과 5경만을 거느리고 비석 앞에 도착하였다”고 쓰고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광주관아가 어느 시기에 중대면에도 위치 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얘기가 되는데, 이는 지금까지 구전이나 기록 등을 통해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다면 왜 이들 기록의 고광주가 동부면이 아니라 중대면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즉 『승정원일기』와 『병자록』, 『남한일기』 등에 인조가 청군에게 항복할 때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고광주를 거쳐 삼전도에 갔다고 했으므로 이 고광주는 중대면의 어느 길목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인조가 북문으로 나왔다면 몰라도 서문을 나와서는 동부면 고읍을 지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조 일행이 수항단으로 나아가는 방향도 동부면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대해 『병자호란사』에는 인조의 행렬이 마천리, 오금리, 가락리, 송파리를 거쳐 수항단이 설치되어 있는 삼전도로 나아갔으며, 조선국왕 일행이 수항단 동쪽 5리 지점인 송파리에 당도하자 청장 용골대와 마부대가 이를 영접하여 수항단 1리 지점까지 인도한 후 그 행렬을 정지시켰다고 하였다. 『승정원일기』에도 용골대가 인조를 영접해 가다가 고광주 앞에 이르렀고, 다시 비석 앞에 이르러 바라보니 칸(汗)이 황옥 (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서 옹립하였다. 용골대 등이 말에서 내리자 인조도 역시 말에서 내려 비석 아래에 앉았다고 한다. 위의 두 가지 내용을 비교해보면 용골대가 인조를 영접한 곳이 수항단 5리 지점인 송파이고, 다음이 고광주 앞, 그 다음이 비석 앞이므로, 결국 고광주는 송파에서 삼전도(비석) 사이가 된다.


해동여지도(출처, 서울대 규장각)

삼전도의 비석(碑石)

그런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고광주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비석 앞에 이르러 바라보니’, ‘인조가 말에서 내려 비석 아래에 앉았다’는 등 계속 비석 이야기가 등장한다. 누구 또는 어떤 비석이란 설명도 없다. 누구, 어떤 비석이라는 표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비석이라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다 아는 바와 같이 삼전도에서 그럴만한 비석은 『삼전도비(청태종공덕비)』 밖에 없다. 『중정남한지』『진도(津渡)』에는 이 비석에 대한 설명이 있다. “언덕 위에 청나라 사람의 비석이 있는데, 인조 정축년(1637, 인조 15)에 청나라 사람이 승전비를 삼전도 에 세웠던 것이다. 채색한 각을 짓고 높다란 비석을 그 가운데 세웠으며 담장으로 둘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온 것은 1637년(인조 15) 1월 30일이고, 『삼전도비』는 1639년(인조 17)에 세웠으므로 인조가 수항단으로 향할 당시에는 이 비석이 없었다. 이 기록의 출처인 나만갑의 『병자록』은 1642년(인조 20)에 탈고된 것으로 추정되고, 더구나 간행자 미상의 『병자록』은 그보다 뒤에 쓰여진 기록이기 때문에 모두 『삼전도청태종공덕비』가 세워진 이후에 쓰여진 책이다. 따라서 『병자록』의 필자가 장소를 서술하면서 당시에는 없었던 『삼전도청태종공덕비』를 넣어 비석 앞이라고 표현했을 수는 있으나 『승정원일기』의 ‘비석’은 어떻게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광주관아가 중대면에 위치한 적이 있었다면, 그 시기가 조선시대 이전이라 하더라도 가락동의 선정비는 아무 이유 없는 곳에 세워진 것은 아니다. 인조가 산성을 나와 이곳을 지나갈 때에는 가락동의 선정비 11기 중 1631년(인조 9)에 건립된 이시방(李時昉)의 선정비와 1635년(인조 13)에 건립된 이석달(李碩達)의 선정비 2기 정도만 서 있었을 것이고, 나머지 9기는 모두 그 이후의 것이다.


글 김세민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원대, 건 국대, 이화여대, 공주대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하남역사박물관 관장 및 세종대 학교 역사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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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5 _ 2020 여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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