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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닭이 알을 품은 마을, 엄미리를 지키는 장승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엄미리 미라울 장승 -

경기학광장Vol.5 _ Research & Study

< 금닭이 알을 품은 마을, 엄미리를 지키는 장승 >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엄미리 미라울 장승 -


- 경기학광장Vol.5 _ Research & Stud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공간이 택지되고 마을이 들어서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다 있다. 드넓은 농지가 없는 곳이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마을이 들어선다. 더러는 교통에 따른 길목에 자리 잡고, 때로는 풍수적 해석을 덧붙여 마을의 공간성을 확보한다.

금계포란형의 마을, 엄미리를 다시 찾다

경기도 광주군 남한산성면 엄미리는 농지가 거의 없는 산촌이다. 남한산성 동쪽 뒤편에 자리잡은 데다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디작은 마을이다. 미라울, 벽수골, 새말로 세분되는 공간에서 미라울은 금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는 자부심의 근거가 되고, 이는 곧 마을공간의 중심성을 이루는 당위가 된다.
최초로 누가 입향했고, 마을이 언제 세워졌는가는 전하는 바가 없다. 그러나 병자호란을 근거로 한 장승의 유래담이 전승되고 있고, 옛 모습에 가깝게 장승이 현존하는, 어느 마을보다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필자가 처음 엄미리의 장승을 만난 것은 1982년이었고, 장승제를 처음 참관한 것은 1984년이었다. 짧지 않은 세월이지만 여전히 장승을 지속시키고 있다. 필자를 지도한 고 김태곤 교수와 함께 『한국의 산촌민속 2』(교문사)라는 마을지를 쓴 곳인데, 그동안 애써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나름의 빚이 있기도 한 마을이다. 특히 당시의 제보자였던 고 공덕천 옹의 도움을 잊을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엄미리 장승은 학술적으로도 워낙 유명한 곳이라 장승의 대략만을 소개해도 좋을 성싶다. 엄미리의 장승제는 2년에 한 번 하는데, 음력 이월 초하루부터 초닷새 내의 날을 잡아 행한다. 산에 올라 장승목으로 나무의 밑동이 20~30㎝가 되는 오리나무 두 그루를 골라 베고, 이를 옮겨 장승을 깎는다. 한 그루의 나무를 상하로 2분하여 남녀 장승 한 쌍씩 만든다. 이른바 자웅동체(雌雄同體)인 셈인데, 밑 부분을 남자로 하고, 위 부분을 여자로 하되 나무를 거꾸로 하여 장승을 만든다. 밑동의 굵기가 위 부분보다 크기 마련인데, 이를 거꾸로 세우는 것은 나무 굵기의 체감율을 활용하여 장승의 비례감을 맞추려는 의도에서다.


미라울 입구, 1967년 고 장주근 교수 촬영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하늘에서 본 미라울, 2020년 4월 13일 문덕관 작가 촬영

남자는 사모관대를 얹고 여자는 민머리 형태로 하여 남녀를 구분한다. 얼굴에 황토칠을 하고 몸체에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묵서(墨書)하여 자연물인 나무를 신격을 지닌 장승으로 의인화시킨다. 그리고 ‘서울 七十里 水原 七十里 利川 七十里’와 같은 이정표로 적어 엄미리가 위치한 지리적 공간성을 재확인한다. 남자의 경우 턱 밑에 ‘지매털풀’을 붙여 남성 신격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장승 두 쌍을 완성한 다음 한 쌍은 미라울 어구에, 다른 한 쌍은 새말 어구에 세운다. 그리고 기러기대ㆍ오릿대라 불리는 솟대를 만들어 장승 뒤에 세운 다음 간단한 제사를 지낸다. 흔히 말하는 장승제사이다.


‘지하대장군’이 묵서된 여장승, 1967년 고 장주근 교수 촬영(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지하대장군’이 묵서된 여장승, 1972년 고 김태곤 교수 촬영

마을 신앙의 지속과 변화

장승제의 구조로 본다면 매우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의례가 이런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의 간소화를 겪으면서 다른 의례가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 남은 것은 오늘날의 장승제이다. 본래의 엄미리 마을 신앙은 장승제와 산제가 짝을 이루는 상당(上堂)과 하당(下堂)의 이중 구조이다. 마을의 신격 중에서 상위 신격이라 할 산제사는 산신을 위하는 제사인데, 마을 뒷산이라 할 고창산의 고창재에서 장승제를 지내기에 앞서 행했다. 이는 장승보다 산신이 상위의 신격이라는 뜻이다. 산제사와 장승제가 끝나면 마무리로 ‘어드니굿’을 행했다.
마을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을 가려 제관을 뽑는데, 당주(堂主)와 화주(化主), 축관 등 3인이다. 당주는 산제를 주관하고 화주는 제수를 마련하는데, 축관과 함께 당주, 화주만의 주관으로 산제를 거행한다. 여성은 물론 다른 남성도 참석할 수 없는 폐쇄된 의례이다. 이는 물론 엄미리만의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산제사를 마치고 나면 마을 주민 전체가 참여하여 마을어구에서 장승제를 지낸다. 일반적으로 ‘거릿제’라 불리는 다른 지역의 의례와 마찬가지 양상이다. 장승제를 마치고 나서는 미라울 남녀 장승이 위치한 숲속 공터에서 ‘어드니굿’을 하고 난장을 벌였다 한다. 어드니굿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경기도의 도당굿 뒷전에 등장하는 ‘정업이’와 관련이 있는 말인 것 같다. 뒷전에 짚인형을 등장시켜 재담을 하고 깨낌[씨름]을 한 다음 쓰러뜨려 불에 태우는 연행을 한다. 이때의 인형을 ‘정업이’라 하는데, 더러는 이를 ‘어딍이’라 한다.
어드니굿을 할 때 얼굴에 회칠을 하고 삿갓을 쓴 ‘깍쟁이’가 등장하여 무당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증언을 참고할 때, 어드니굿은 바로 이 어딍이 역할을 한 깍쟁이를 내세워 연행하게 한 데서 생긴 말로 추정된다. 이를테면 어딍이가 등장하여 굿을 한다는 뜻에서 ‘어딍이굿’이라 했고 이것이 ‘어드니굿’으로 고착된 것이 아닌가 한다.
뒷전은 굿을 할 때 따라 온 잡귀와 잡신을 풀어먹이는 거리이다. 뒷전의 의미가 마을의 안녕과 기복을 비는 데 있다는 점에서 어드니굿은 산신제, 장승제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절차로 읽힌다. 엄미리 도당굿이라 부름직한 신앙의 흔적이 아닌가 한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볼거리였기에 근동의 사람 100여 명이 구경을 올 정도였고, 여느 축제에서 보듯 장사꾼과 도박꾼이 함께하는 난장이 섰다 한다. 이 모두가 1920년의 일이라 하니 어드니굿은 이미 기억에도 희미한 추억일 뿐이다. 이는 고 공덕천 옹이 증언한 내용이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 인정이 변하는 법이다. 1975년 보고에 의하면 산제와 장승제로 축소되었고, 1984년 현지 참관에 의하면 장승제에서 산제로 순서가 바뀌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장승제의 위계가 달라진 셈이다. 어쩌면 이 마을을 드나들던 인류학자, 민속학자들의 장승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빚은 일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1991년부터 산제사와 장승제는 중단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을제사가 끝나면 당주 집에 모여 음복과 결산을 하는 ‘종계닦음’을 한다. 일종의 마을계를 마무리하는 모임이다. 그런데 당시의 당주 부인이 닭요리 음식점을 하고 있어서 다른 주민의 집에서 종계닦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집 부인이 날삼재 부정이 끼었고, 이 때문에 화주 부인이 신벌을 받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마을주민들이 당주나 화주를 기피하게 되자 논의 끝에 산신제와 장승제를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4년이 지난 뒤인 2005년에 이르러 장승제만을 복원하였다. 결국 현재는 장승제만 지내는 실정이니, 산제사는 이미 마을주민의 기억 속에 저장됨으로써 마을주민의 연대감을 소환하는 요소로 작동할 뿐이다.


천하대장군, 2020년 4월 13일 문덕관 작가 촬영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작지만 중요한 요소들

이처럼 엄미리의 마을 신앙은 축소를 통한 지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이다. 마지막 남은 장승제는 1991년 중단되었다가 2005년부터 복원하여 지속되는 형편이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변화된 것도 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지만 변화의 시대적 추세와 맞물려 있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옛 것을 그대로 잇고 있는 것은 장승목을 오리나무로 선별하고, 얼굴에 황토를 칠하며 수염을 붙이고 있고, 몸체에 장승의 이름을 묵서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국의 사례로 볼 때 오리나무를 장승목으로 쓰는 사례는 흔한 일은 아니다. 소나무나 참나무를 즐겨 쓰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엄미리는 여전히 오리나무를 고수한다. 오리나무는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인데, ‘십리 절반 오리나무’라는 말처럼 옛날에는 거리를 나타내기 위해 오리마다 나무를 심었다 하여 ‘오리(五里)나무’라 불렀다는 나무다. 화학비료가 없던 시절에는 오리나무를 가늘게 썰어 논에 비료로 썼다고도 한다. 산기슭 개울가나 논둑에 많이 자란다. 이런 나무를 애써 쓰는 데에 대해 오리나무가 깎을 때에는 물러서 좋고 마른 다음에는 견고해서 쉽게 썩지 않기 때문이란다.
얼굴에 황토를 칠하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이를 ‘황토 화장’이라 하는데, 눈을 그릴 안면 부분에 물에 갠 황토를 바른다. 붉은 황토가 악귀를 쫓아준다는 일반적인 믿음이 반영된 때문이기도 하지만 황토 바른 다음 눈을 그릴 때 확연하게 드러나는 실제적 효과와 함께 나무가 썩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반영된 관습으로 보인다. 엄미리는 이를 꾸준히 실천하고 있고, 이것을 자신들만의 전통으로 인식하고 있다.


지하여장군, 2020년 4월 13일 문덕관 작가 촬영

장승의 몸체는 장승의 이름과 거리를 나타내는 글씨를 묵서한다. 남자 장승의 경우, ‘天下大將軍’을, 여자의 경우 ‘地下女將軍’을 적으며, 여백에는 서울과 수원의 거리를 묵서한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지하여장군’이다. 1967년 고 장주근 교수의 조사와 1975년 고 김태곤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여자 장승의 명칭이 ‘地下女將軍’이 아니라 ‘地下大將軍’이다. ‘천하’와 ‘지하’로 공간적 위계를 나누되 성(性)의 분화 없이 ‘대장군’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상하의 위계를 지닌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은 굳이 남녀를 가리지 않아도 말 그대로 남녀의 장승임을 구별하는 표지이다. 다른 사례를 든다면 상원대장군(남 장승)과 하원대장군(여 장승)과 같은 말이다. 사정이 이러한대 1982년부터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으로 남녀를 명시하여 구별하고 있다. 무엇의 영향인지는 모르나 학자들의 학문적 권위에 기대어 생긴 자발적 변화가 아닌가 한다.

거리를 표시하는 데도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1967년 사진에는 “서울 七十里 水原 七十里 利川 七十里 京安 二十里”와 같이 4곳의 지명과 거리가 쓰여 있다. 최근에는 ‘서울 七十里 水原 七十里’ 또는 ‘서울 七十里 利川 七十里’ 등 2곳 정도만 쓴다. 무엇이 작은 변화를 이끌었을까? 특히 ‘京安 二十里’가 사라진 것은 오래된 일이다. 경안은 경안면 소재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원래는 慶安(경안)이었으나 1932년 7월 5일 경안면을 광주면으로 부르게 되었을 때 ‘京安里(경안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렇듯 경안은 엄미리를 관할하는 지역의 거점이고 생활권역의 중심이었다. 이러한 ‘경안’이 사라졌다는 것은 교통의 발달에 따른 공간의 확장과 교통로의 변화 등이 작동한 탓일 수 있다. 이에 반해 서울 또는 이천, 수원은 여전히 공간적 관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천하대장군의 턱 밑에는 수염을 붙인다. 다른 지역은 수염을 그리거나 새기기도 하는데, 엄미리는 턱 밑에 수염구멍을 뚫고 ‘지매털풀’을 꽂아 ‘수염을 붙인다’. 겉모양으로 볼 때, 그럴싸한 수염마냥 남장승의 위엄을 드러내는 데 제격이다. ‘지매털풀’은 표준어로 ‘김의털’이다. 달리 ‘산거웃’이라 하는데, ‘산거울’이 변한 말이다. 거웃은 수염의 우리말이니 ‘산에 나는 수염’이라는 뜻이다. 결국 산에 나는 수염을 장승의 수염으로 쓴 셈이다.
김의털을 지매털풀이라 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길’을 ‘질’이라 하는 것처럼 ‘김의’가 ‘짐의’를 거쳐 ‘지매’가 되고(‘지매털’), 여기에 ‘풀’을 덧붙여 만든 말이기 때문이다. 나름의 논리성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언어학적 현장어다. 마른 김의털을 잘라 장승에 붙이면 마른 줄기가 마치 수염처럼 장엄되고, 장승의 수염을 삶아 국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신을 피하기라도 하면 오래도록 수염 역할을 하는 풀이다. 엄미리 주민의 이 풀을 장승의 수염으로 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성싶다.

오래된 상징, 장승이 지키는 길목

길목 오른쪽을 지키는 남장승, 2020년 4월 13일 문덕관 작가 촬영

이제 엄미리에는 어드니굿도, 난장도 사라지고, 산제도 소멸되었다. 2005년 사라질 뻔한 장승제를 버겁게 복원시켜 마을 주민들의 연대와 자존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오래된 과거가 현재의 상징으로 서 있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바뀌듯 통시적 변화가 가져온 결과를 담고 있다. 이것 역시 엄미리의 작은 역사이고 생활사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안과 밖을 구별하여 마을어구를 지키고, 작은 길을 따라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의 희미한 이정표로서 눈길을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82년 엄고개에서 버스를 내려 마을길을 따라 걷고 걸었던 답사길이 지금도 생생하다. 공간적 변화가 크지 않고 여전히 엄미리 장승은 그 모습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88년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더더욱 섬처럼 외로운 산촌마을이 되었다. 하지만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을경관이 크게 변하지 않고 마을어구조차 1967년 사진의 풍광과 이미지를 그대로 지속시키고 있는 것은 퍽이나 다행한 일이다.

글 장장식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 풍수설화의 연구>로 문학박사를 취득하고, 몽골국립대학교 외국어문대학 객원교수, 국립민속박물관 학예관을 역임하면서 고려대·경희대·단국대·동국대 대학원 등에서 민속학을 강의하였다. 한국의 무형문화에 대한 민속학적 연구 및 한국과 몽골의 민속문화 비교연구에 관심을 집중하여 논문 100여 편과 20여 권의 공편저를 출간하였다. 현재 길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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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5 _ 2020 여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6.30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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