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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의 진산(鎭山)을 밝히는 불, 석성산 봉수
경기학광장Vol.5 _ Research & Study
< 용인의 진산(鎭山)을 밝히는 불, 석성산 봉수 >
- 경기학광장Vol.5 _ Research & Stud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진산(鎭山)이란 국가, 도읍 또는 각 고을을 뒤에서 진호(鎭護)하는 큰 산을 일컫지만 일반적으로 고을의 중심이 되는 산을 말한다. 용인의 진산은 포곡읍과 동백동에 걸쳐 있는 해발 471m의 석성산(石城山)이다.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에 보개산(寶蓋山)으로도 기록되어 있지만, 석성이 있었던 까닭에 석성산으로 불렸다. 조선전기 진산은 대부분 읍기(邑基) 배후 산으로 치소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용인현의 치소가 마북동·언남동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석성산은 용인현의 주산(主山)이자 진산(鎭山)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아마도 조선전기까지 석성산에서 매년 산신제가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되나 아쉽게도 현재 그 흔적은 찾을 수 없다.
▲ [지도 1] 석성산 봉수(○) 및 주변지역 (『廣輿圖』편집, 18세기, 서울대학교 규장각
▲ [지도 2] 석성산 봉수(○) 및 주변지역 (『靑邱圖』편집, 1834年, 국립중앙도서관)
진산은 대부분 치소 인근이라는 점에서 인문지리적 중요성이 주목된다. 석성산 역시 마찬가지인데, 서쪽으로는 수원과 오산, 동쪽으로는 용인 일대, 즉 치소가 한 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또한 석성산은 경기도 광주에서 용인을 거쳐 안산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구릉대지에 속해있다. 용인과 광주 사이는 경안천이 남-북 방향으로 흐르는데, 용인에서 북쪽으로 광주, 하남, 송파까지 연결되는 교통로가 된다. 그리고 석성산은 서쪽의 서해부터 펼쳐지는 평야지대와 동쪽의 경안천, 남으로는 황구지천과 안성천으로 진입하는 관문에 해당하는 내륙교통의 중심지이다. 따라서 석성산에 축조된 석성산성과 북쪽으로 마주하고 있는 할미산성은 통일신라시대부터 매우 중요한 군사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처럼 주변 일대에 대한 경계와 감제가 용이한 석성산은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정상에 봉수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성산 봉수는 석성산성 운영이 철폐되는 시점에 설봉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423년 조선 봉수체제가 확립되었을 무렵으로 보인다. 석성산 봉수의 존재는 조선시대 『廣輿圖』, 『大東輿地圖』 등 고지도에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후기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운영시기와 폐봉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내용은 없다. 다만,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석성산 봉수가 화성 흥천산 봉수와 응하고 있어 18세기 화성 봉돈 설립 이후 신설된 봉수체계에 석성산 봉수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봉수제는 고려의 봉수제를 근간으로 하여 설치되었으나 보다 완전한 형태의 모습으로 정리된 것은 세종 대에 이르러서이다. 세종 5년(1423) 목멱산 봉수가 설치되면서 중앙의 경봉수로 최종 집결하는 5거제의 노선이 확립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전대를 아울러 이 5거제는 큰 변화 없이 조선후기까지 이어진다. 이에 의하면 평상시에는 1거(一炬), 적이 출현하면 2거(二炬), 정세가 긴급하면 3거(三炬), 적이 국경에 침입하면 4거(四炬), 적군과 교전하면 5거(五炬)를 올리도록 하였다. 석성산 봉수는 당시 봉수제에서 ‘夜火’지역에 해당한다.
5거제 봉수 노선을 살펴보면, 제1거 노선은 양주·아차산 봉수와 연결되어 함길도·강원도에서 봉화를 받으며, 제2거 노선은 광주 천천현봉화(穿川峴烽火, 천림산봉화)와 마주보며 경상도 봉수를 수신한다. 제3거 노선은 평안도 강계 봉수를, 제4거 노선은 평안도, 황해도 봉화를 수신하며, 제5거 노선은 충청도·전라도 봉화수를 수신한다. 용인 석성산 봉수는 제2거 직봉의 43번째 내지봉수에 해당한다. 석성산 봉수는 부산 다대포 응봉 봉수에서 시작한 봉화 신호를 건지산에서 받아 성남 천림산 봉수로 전달하며, 이후 천림산 봉수로 이어지는 봉화 신호는 한양주변의 경봉수(京烽燧)까지 전달된다.
▲ [지도 3] 조선후기 봉수 노선도(『大東輿地圖』 필자 편집)
▲ 석성산 봉수터 원경(북→남)
봉수는 성격에 따라 경봉수, 연변봉수, 내지봉수로 구분된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로 각처 모든 봉수의 최종 집결처였다. 봉수제가 완전히 정례화된 고려시대부터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한양의 목멱산에 5개소의 경봉수가 있다고 전해진다. 연변봉수는 국경과 해안가 및 도서 등지에 설치된 봉수로 국경의 위협을 1차적으로 확인하고 신호를 보내는 역할을 한다. 연변봉수는 변경에 설치된 위치적인 특징상 외적의 위협과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되며, 규모가 크고 튼튼하게 축조하여 방어에 유리한 요새와 같이 만드는 경우가 많다. 내지봉수는 변경지역의 연변봉수에서 받은 신호를 경봉수로 연결한다. 내지봉수 역시 군사시설로 방어와 관련된 시설도 조성하였으나 그보다는 봉수시설과 함께 깃발, 신포 등을 구비하여 신호전달을 위한 역할이 강조되었다. 용인 석성산 봉수는 내지봉수에 해당한다.
용인 석성산 봉수는 그동안 광역지표조사 등에 의해 존재는 알려졌으나 연조 대부분이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용인시에서 석성산 봉수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가 이뤄진 것은 2017년도이다. 2017년~2018년 실시한 석성산 봉수터 1․2차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내지봉수로서 그 역할을 수행했던 용인 석성산 봉수의 전모가 드러났다. 봉수를 구성하는 거화시설은 연대와 연조가 있다. 하지만 내지봉수는 보통 연변봉수와 달리 연대를 축조하지 않고 연조만을 조성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위급상황에 따른 단계별 신호 송수신을 위해 연조의 수량은 대부분 5기이나 후대의 인위적인 훼손, 혹은 정밀조사의 미 실시로 5기 미만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많다. 석성산 봉수 외에 현재까지 내지봉수에서 연조가 확인된 사례는 약 20기 내이며, 평균직경은 3.2m 연조간 평균 간격은 약 5.4m이다. 형태는 원형과 외방내원형으로 구분되는데, 하단이 가장 넓고 위로 갈수록 점차 좁아진다. 천정부에서 만나는 불룩한 사각추형 혹은 원추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천장에는 기와를 이용하거나 옹기의 바닥을 깨어 연통(굴뚝)을 만들었다. 석성산 봉수에서도 연대는 만들지 않았으며, 연조만으로 거화하여 신호를 보냈던 것으로 판단된다. 2009년, 2014년 지표조사에서는 연조의 흔적만 확인했을 뿐 구체적 양상을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5기의 연조 위치 및 형태, 구조를 명확히 확인하였다. 현재까지 경기도에서 발굴된 봉수 유적 중 5기의 연조가 모두 확인된 사례는 고양 독산 봉수, 성남 천림산 봉수에 이어 3번째이다.
▲ 석성산 봉수터 발굴조사 전경(2018년)
석성산 봉수의 연조는 봉수의 장축방향과 같은 방향인 남-북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인접한 연조3과 연조4를 제외하면 약 4~5m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연조1은 봉수터의 최북단에 위치한다. 이곳은 지반이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어 할석을 쌓아 축조하는 방법으로는 연조 조성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암반을 굴착하는 방식으로 조영하였다. 암반을 단면‘L’자형으로 굴착하여 홈을 만든 후 내부공간을 만들었으며, 개방된 양측벽은 30~40㎝의 할석을 이용하여 벽을 쌓았는데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방형에 가깝다. 이와 같이 암반을 굴착하여 연조를 만드는 방식은 일반적인 연조 축조방식이 아니며, 이러한 형식의 연조는 매우 희귀한 사례로 지금까지 조사된 내지봉수 중에서는 최초로 확인된 것이다. 연조2는 기반층인 암반을 그대로 활용하였으며, 암반 상부에 할석을 쌓아 올리는 방법으로 조성하였다. 25~65㎝의 크기가 큰 할석을 평면 원형의 형태로 둘렀으며, 연조 외곽에는 30㎝ 내외의 할석으로 보강하였다. 전체 직경은 약 180㎝ 내부의 직경은 약 85㎝, 잔존높이는 30㎝이다. 연조의 북쪽 일부 구간만 할석으로 시설되지 않았는데, 이곳은 연료를 투입하는 아궁이로 추정된다. 연조3은 봉수터 중앙에 위치한다. 연조3은 연조 동쪽에 석축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당초 동쪽이 아궁이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연조 서쪽에 50~70㎝ 크기의 넓적한 할석을 여러 겹 쌓고 할석 위 양 측벽에 길이 약 50㎝, 너비 30㎝의 긴 할석을 쌓아 축부를 조성한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아궁이는 서쪽에 조성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아궁이는 지면에 붙어있지 않고 약 60㎝ 높이에 있게 되며, 봉수군이 서있는 상태에서도 연료를 연조에 넣을 수 있는 구조가 된다. 연조4는 암반을 기반으로 바닥면을 조성하고 그 위로 20~40㎝ 크기의 할석을 쌓아 원통형의 벽을 조성하였다. 동쪽벽은 암반을 그대로 활용하였다. 전체 직경은 약 170㎝이고 내부 직경은 95~102㎝이다. 잔존높이는 약 50㎝이다. 아궁이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동쪽 벽이 암반을 활용한 것으로 보아 반대편인 서쪽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연조5는 암석 기반 위에 원통형 구조의 벽을 쌓았다. 우선 기반층인 자연 암반을 굴착하여 단면 ‘ㄴ’의 형태로 평탄화하였으며, 개방된 남·동·북쪽에 30~60㎝의 크기의 할석으로 원을 그리면서 쌓았다. 서쪽은 굴착된 암반을 그대로 벽으로 사용하고, 북서쪽 모서리 쪽에는 40~70㎝의 비교적 크고, 직육면체에 가깝게 다듬은 할석으로 벽을 세웠다.
봉수 주위를 두르는 방호벽은 조선시대 내지봉수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데, 산 정상에 위치한 봉수를 야생동물로부터 보호하고 화재가 발생할 경우 외부로 번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 내지봉수의 입지가 대부분 산 정상에 위치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봉수를 보호하기 위한 방호벽은 봉수를 구성하는 중요시설임을 알 수 있다. 용인 석성산 봉수 방호벽의 특징은 주변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되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상당 부분은 자연암반을 활용하였으며, 경사가 급한 곳은 돌을 채워 넣은 방식으로 조성하였고, 경사가 완만한 부분은 할석으로 단을 맞추어 쌓았다. 이처럼 자연 지형을 활용한 까닭에 석성산 봉수의 전체 형태는 타원형 또는 방형과 같은 정형성을 보이지 않고 부정형을 이루고 있다. 석성산 봉수에서는 두 곳에서 출입 시설이 확인되었는데, 방호벽 동쪽은 의도적으로 단절시켜 개구식 혹은 경사식 출입시설로 활용한 것으로 보이며, 남서쪽에서는 계단식 출입시설이 확인되었다. 동쪽의 개구식 출입시설 주변으로 거화에 필요한 연료를 보관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창고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아마도 연료를 옮기기 용이하도록 경사식으로 조성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석성산 봉수 연조1~5 현황
▲ 연조1
▲ 연조2
▲ 연조3
▲ 연조4
▲ 연조5
석성산 봉수에서 가장 주목되는 유구는 방형 석렬유구로 봉수터 중앙에 위치한다. 평면 형태는 정방형에 가까우며, 한 변의 길이는 약 200㎝의 규모이고 현재 1단만이 잔존한다. 내부에서는 상부구조로 사용되었던 할석과 함께 백자 잔, 백자 잔대, 백자향로 및 향로 뚜껑과 같은 제기가 출토되었다. 제기들은 원형을 거의 유지한 채 출토된 것으로 볼 때 봉수운영과 관련된 의식적인 행위가 이루어진 일종의 제의적인 성격을 가진 유구일 가능성이 높다. 봉수에서 제기가 출토된 사례는 석성산 봉수가 최초이다. 상시 거화를 준비해야 하는 연조에서 제기와 잔대 등의 유물을 넣은 채로 거화 하였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는 연조가 폐기되는 시점에 매립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연조의 폐기와 함께 제기가 매립되었다는 것은 봉수의 폐기와 관련된 제의 행위가 이루어지고 그 마지막 과정으로 인한 결과로 판단된다. 어쩌면 마지막 봉수군이 폐봉을 앞두고 석성산 봉수에 대한 예를 갖추는 제의를 지냈던 것은 아닐까. 당시의 상황에 대해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쨋든 출토된 백자제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석성산 봉수는 조선 초 조선의 봉수제가 정립될 때부터 갑오개혁으로 1895년 전국의 봉수가 폐봉될 때까지 운영되었으며, 폐봉과 관련한 제의가 이루어질 정도로 주변 봉수를 대표하는 위상을 지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석성산 봉수 방형 석렬유구
▲ 방형 석렬유구 내 출토 백자 제기 일괄
석성산 봉수에 이어 봉수의 부속 시설에 대한 발굴조사는 2019년~2020년에 실시되었다. 석성산 봉수 부속 건물지는 봉수에서 남동쪽으로 약 50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기존 지표조사에서 우물지(약수터), 추정 초석 등이 남아 있어 봉수를 관리하던 봉수군(烽燧軍)이 거주하였던 건물이 있을 것으로 이미 추정되었다. 정밀발굴조사한 결과 평탄지를 조성한 축대, 구들시설 건물지 등 건물지 3동, 우물 2기가 확인되었다.
봉수군이 근무를 하면서 풍우를 피하고 취사를 하기 위한 건물은 봉수군의 생활시설 중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조선후기 각종 지지서의 기록을 통해 기와집(瓦家)·초가집(草家)·임시가옥(假家) 외에 곶집(庫舍)·장대기와집(將臺瓦家) 등의 가옥시설이 문헌기록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는 봉수는 오늘날 경상지역 내 위천·금성산·부로산·남목·고성산·소산 등 6개의 봉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들 6개소의 봉수 중 실제로 경남 양산시 위천봉수 건물지는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 건물로 추정된 바 있다. 한편, 산 정상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식수 공급이 중요하다. 석성산 봉수 부속 건물지 주변에서는 2기의 우물이 확인되었는데, 1기는 수량이 많지 않아 추가로 1기를 더 조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수량이 비교적 풍부한 2호 우물은 최근까지도 식수로 이용되었으나, 현재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렇듯 석성산 봉수 부속 건물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생활에 필요한 용수 공급이 가능하며, 구들시설, 석렬유구, 초석 등으로 보아 다른 봉수의 건물과 비슷한 규모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석성산 봉수 부속 건물지 조사 중 전경
석성산 봉수 부속 건물지 우물 현황
▲ 1호 우물 조사전경
▲ 2호 우물 조사전경
지금까지 발굴조사 성과를 종합하면, 용인 석성산 봉수는 경기남부에서 광주와 성남, 하남, 송파로 이어지는 교통로로 진입하기 위한 교통의 중심지로 역사·지리적으로 의의가 있는 곳이며, 한양으로 이어지는 봉수 노선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화성 흥천산 봉수와도 응하고 있어 화성 봉돈 축성 이후의 봉수 체계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연조1의 암반 굴착 조성 방식은 내지봉수에서는 최초의 사례이며, 연조 2·3·5 역시 국내 최초로 거화시설이 확인되어 특수성과 희소성이 큰 유적이다. 방형 석렬유구에서 출토된 백자 제기 역시 이곳에서 중요한 제의 행위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희귀 사례이다. 또한 부속 건물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봉수군의 생활상까지 보여주고 있어 조선시대 봉수의 운영과 관리체계, 봉수군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완벽한 세트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석성산 봉수는 이러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0년 5월 경기도 기념물 문화재 지정 예비 심의에서 가결되어 문화재적 가치를 입증하였다. 향후 석성산 봉수의 복원·정비가 제대로 이뤄진다면 백만 용인시민이 찾는 석성산에서 제일 사랑받는 유적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글 이서현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불교미술사를 전공(문학박사)하였다. 현재 용인시 학예연구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지역 문화재 발굴과 활용에 관심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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