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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왕조를 재건한 삼조의 영의정, 이원익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 인물'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경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혼란을 수습하고 왕조를 재건한 삼조의 영의정, 이원익


“이원익은 차마 속일 수 없다” 오리 이원익



오리 이원익은 선조와 광해군, 인조에 이르기까지 삼조의 영의정으로 임진왜란과 왜란 이후 혼란을 극복한 재상이자 청백리다.


“영남사람들이 이원익과 류성룡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원익은 속일 수 있으나 차마 속일 수 없고, 류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 없다’라고 한다.”


남구만의 아들 남학명은 이원익을 자신의 문집 『회은집』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차마 속일 수 없다’는 말에 그가 얼마나 존경을 받는 위인이었는지 알 수 있다. 생애 전반이 인자무적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인물이 이원익이다.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80호 이원익 선생 영정 (사진 =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이원익의 졸기에는 ‘이원익은 강명하고 정직한 위인이고, 몸가짐은 청빈하였다. 여러 고을 수령을 역임하면 치적이 가장 훌륭하였다. 평안도에 두 번 부임하여 백성들이 공경하고 애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쓰고 있다.


경기문화재단이 펴낸 책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은 이원익에 대해 “관료형 신하이면서도 산림처럼 강직하였고, 관직 생활을 오래 했으면서도 늘 가난함을 탓하지 않았다. 생사당(生祠堂)을 지을 만큼 살아생전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상하 백성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로 남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 이원익을 기리는 오리서원 (사진 = 경기도 관광포털)


이원익은 17세기를 전후한 격변기를 살았다. 선조 대에는 임진왜란을 겪었으며, 광해군 연간에는 북인정권 아래서 폐모론과 맞섰고, 인조 대에는 후금을 침략을 목도하기도 했다. 그 격변의 시기 정승으로 조선왕조를 이끌었다. 이원익 성과는 대동법으로 남겨져 왜란과 호란으로 무너진 조선왕조를 다시 세우는 역할을 했다.


이원익은 태종을 8번째 아들 익령군의 4대손이다. 아버지 때까지 종친으로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고 한다. 18세에 진사가 돼 성균관에 입학했고 23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안주목사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안주는 평안병영이 위치한 곳으로 북쪽 오랑캐를 방비하는 중요한 방어 거점이었다. 안주목사로 이원익이 천거된 배경에는 오랑캐와 맞닿은 땅을 모두 꺼렸기 때문이다. 안주목사는 6번이나 추천됐지만 적임자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이원익은 4년간 안주목사를 지냈다. 이원익은 안주목사에 제수될 당시 기근이 발생한 안주지역의 구휼을 위해 환곡 1만석을 평안감사에 청해 얻어 종자로 나눠주어 경작하게 했다고 한다. 그해 풍년이 들어 환곡을 모두 갚고도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찼다고 한다. 또 매년 4교대 방식의 군제를 6교대 방식으로 개혁해 농민들의 군역의 부담을 줄였다. 4년간의 임기를 마쳤을 때 당시 상관인 평안감사 윤두수가 이원익의 활동을 높이 평가해 조정에 보고했고, 그 결과 이원은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이원익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했고 류성룡의 추천으로 우의정에 임명되면서는 하삼도 도체찰사를 지냈다. 하사도 도체찰사 시절 이순신 장군을 한산도에서 만나기도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조정에서 대신들이 이순신을 못 미더워할 때 적극적으로 옹호했고, 이순신이 모함으로 백의종군할 때도 이순신을 지원했다. 심지어 류성룡도 이순신에 대한 모함을 막을 수 없어 외면할 때도 이원익만이 유일하게 이순신을 대변했다. 임진왜란 이후 이원익은 선조로부터 영의정에 임명된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북인들이 정권을 주도할 때도 남인으로 분류되는 이원익은 영의정에 임명됐다. 당색이 달라도 대내외의 신뢰가 깊었기 때문에 영의정으로 임명됐다는 평가다. 하지만 이원익은 광해군의 형제인 임해군 옥사 때 이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다 사직했다. 또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대두됐을 때 이를 반대하며 상소문을 올리자 광해군은 이원익을 홍천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후 인조반정 후 이원익은 반정 세력에 의해 다시 영의정에 임명됐다. 선조, 광해군, 인조에 걸린 삼조의 영의정이 된 것이다. 다시 영의정이 됐을 때 이원익은 대동법 시행을 주장했다. 백성들의 무거운 공물부담을 덜고, 피폐한 민생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은 경기도메모리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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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

    원문 서비스/ 경기도메모리(memory.librar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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