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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짐승도 감동시킨 신의, 이경석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 인물'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경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짐승도 감동시킨 신의 , 이경석


치욕의 삼전도비문을 지어 오명을 자처한

이경석의 책임정치 ‘모두 내 책임’



한강의 상류인 삼전도에 청나라 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삼전도비가 있다. 삼전도비의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라고 한다.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한 사실과 청태종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비석의 비문을 지은 이가 이경석이다.


▲ 삼전도비 (사전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이경석은 인조의 지시를 받고 “군주의 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 몸을 돌아보고 아낄 겨를 없다”면서 기꺼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국왕의 상징인 곤룡포도 입지 못하고 정문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청태종 앞에 나아가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 전쟁이 끝 난지 2달로 채 되지 않았을 때 청나라는 항복한 자리에 청태종의 ‘공덕비’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조선사대부 가운데 어느 누구도 비문을 쓰려 하지 않았다. 당시 문장가들에게 국왕이 굴욕적인 항복을 한 청나라의 태종을 찬양하는 공덕비문을 짓는다는 것은 죽는 일보다 싫은 일이기 때문이다.


인조가 사양하는 상소를 물리치고 글을 올리게 하자 장유, 조희일, 이경석 세 명의 글이 올라왔다. 청나라로 글을 보냈고 결국 이경석의 글이 수정을 전제로 채택됐다. 인조는 이경석에게 글의 수정을 요구하며 “이 문제로 나라의 존망이 결정된다. 뒷날에 자강하는 일은 오직 내게 있으니, 다만 문자는 그들 뜻에 힘써 맞추게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명예를 목숨보다 더 중요시 했던 사대부인 이경석이 병자호란 직후 혼란한 나라를 위해 자신의 뜻을 꺾고 영원히 남겨지는 오명을 감수한 ‘책임 정치’를 펼친 셈이다. 실제로 당시 송시열은 이경석의 천거로 관직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삼전도비의 제문을 문제 삼아 이경석을 비난하기도 했다.


▲ 이경석 궤장 및 사궤장 연희도 화첩 (사진=문화재청)


이러한 어려움에도 이경석의 ‘책임지는 정치’는 끝나지 않았다. 조선의 임금이 인조에서 효종으로 바뀐 첫해 왜군의 침입을 명목으로 성곽을 보수했다. 병자호란 직후 조선은 청과의 맺은 협약에 따라 성곽을 보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청나라의 노여움을 샀다. 청은 조사관을 파견하고 성곽수리의 책임을 물으려 했다. 이 때 이경석은 국정을 총괄하는 영의정으로 청의 사신 앞에서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고 강변했다. 조정의 대신들이 자신의 목숨을 위해 말을 아끼고 몸을 사릴 때 이경석만이 스스로 목숨을 내건 일을 자초한 것이다. 청나라 사신이 머문 객관에서 장시간의 심문이 이어졌지만 이경석은 자신의 소신을 바꾸지 않았다. 이에 오히려 청나라 시신들도 이경석에 감복했는지 “동국에는 오직 이 정승 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치켜세웠다고 한다. 이 때의 일로 이경석은 극형에 내몰릴 수도 있었지만 효종과 다른 신하들의 구명운동으로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되는 것으로 끝났다.


이경석의 죽은 후 박세당은 신도비문을 썼다. 이 신도비문에서 박세당은 이경석에 대해 “세 조정에서 원로였고 한 세대의 충신이었다. 오직 나라만을 위하였고, 자신의 집은 잊었도다. 오직 임금만을 위하였고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았다. (중략) 지극한 신의는 돈어(범과 비슷한 작은 짐승) 같은 동물도 감동시켰다”고 평가했다.


▲ 성남의 위치한 이경석의 묘 (사진=경기도)


이경석은 조선 2대 정종의 11남 덕천군의 6대손이다. 어려서 가난해 끼니가 여의치 않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경석은 아침에 나가 배고픔을 참고 견디다 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보니 어머니가 밥상을 대하고 앉아 있자, 이경석은 어머니 앞에 바로 나타나지 않고 몸을 숨기도 있다 상을 물린 뒤에야 집을 들어갔다고 한다. 끼니를 거를 어머니를 생각해서다.


이경석은 형 이경직에게 학문을 배우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과거 급제 후 검열, 봉교, 이조좌랑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인사를 담당하는 요직인 이조좌랑·이조정랑을 지내면서 당색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하는 데 앞장섰다고 한다. 후일 삼전도비를 두고 이경석을 비난했던 송시열도 이때 추천돼 등용됐고, 송준길, 이유태 등 대표적인 학자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송시열은 삼전도비를 문제를 삼아 이경석을 비난했을 뿐 아니라, 이경석이 현종에서 ‘궤장’을 하사받을 때도 이를 훼방하기도 했다. 궤장은 국가에 공헌한 나이가 많은 공신에게 임금이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를 말한다. 당시 관료에게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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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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