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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민심을 먼저 생각하는 학자, 허목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 인물'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경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민심을 먼저 생각하는 학자, 허목


사간원의 말단 관원, 재상 송시열과 예학 논쟁하다

북벌을 반대하며 민심 수습을 우선한 학자



허목은 병자호란 이후 거세게 일었던 북벌에 반대하며 북벌보다는 민생을 챙기라고 주창했다. 명·청 교체기 이후 북벌의 틈은 없었고 북벌을 빌미로 양란 이후 더욱 힘든 백성들을 더욱 착취할 명분을 차단하려는 노력이었다.


▲ 허목의 초상.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御眞畵師) 이명기가 그렸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기호남인계 종장으로 추앙받은 허목은 조선이 국력이 약하고, 자연조건이 공격에 불리하다는 점과 함께 북벌론이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고 백성을 괴롭히며 집권층의 치부수단이 될 수 있다고 경계했다.


허목은 군비확장을 반대하면서 허목은 군영을 혁파해 병력을 줄임으로써 국가 재정과 민생을 회복하는 데 주력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군영의 증설로 군비가 비대화되고 이것이 권신세가들의 사병화길을 터놓았으며, 상무의식을 조장해서 문치를 위축시킴으로써 사회절서의 안정을 저해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군비의 증강이 백성을 고통으로 빠뜨린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또 허목은 군둔전이나 호포론 등도 이 같은 맥락에서 반대했다. 군둔전은 설치가 필요하다는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군둔전이 권세가들의 범법행위에 이용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또 호포론은 모든 사람들이 역을 담당하면서 이로 인해 의리가 훼손될 것을 경계했다고 한다.


17세기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복잡다단한 시기였다. 명청교체기의 국제정세 속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쳤다. 조정에서는 서인과 남인의 정권 경쟁이 격화됐다. 두 차례의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효종이 죽었을 때 계모인 자의대비가 몇 년 상복을 입어야 하냐는 1차 기해예송과 현종의 어마니 인선왕후가 사망했을 때 자의대비가 시어머니로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냐는 갑인예송을 묶어 예송논쟁이라고 한다. 상복을 몇 년 입느냐의 싸움이지만 유교 사회에서 왕의 정통성을 거론하는 것이기 때문에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과 남인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여기서 송시열과 논쟁하며 왕의 정통성을 보호한 인물이 허목이다.


▲ 『허목수고본(許穆手稿本)』. 허목이 쓴 수필 원고본 (사진 = 국가문화유산포털)


허목이 관직에 나간 것은 56세 때다. 1650년 1월 정릉참봉에 제수됐다.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간 이유는 인조가 자신의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것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인조는 이 일로 허목의 과거 시험 응시자격을 박탈했다. 이후 인조가 과거시험을 응시할 수 있도록 했지만 허목은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만 열을 올렸다. 56세 때 능참봉에 제수된 것은 인조가 아니라 효종 때의 일이다.


이처럼 늦은 나이게 벼슬길에 나가는 것에 대해 부인이 부정적이자 허목은 “벼슬하지 않음은 의가 없는 짓”이라고 일축했다. 이후 허목은 당시 재상이었던 송시열의 예론에 반발해 예송논쟁을 발단을 만든다. 사헌부, 사간원의 말단이 재상의 반열에 있던 송시열에게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결국 허목은 1차 예송논쟁에 패배하면서 삼척부사로 좌천됐다.


허목과 송시열이 극한 대립을 한 것처럼 보이나 전해지는 야사에서는 그렇지 않다. 송시열이 병에 걸리자 허목에게 청해 약을 받았고 그 약에 비상이나 독약이 같이 처방돼 있음에도 송시열이 이를 먹고 병을 나았다고 한다. 정치적이나 학문적으로 갈등이 있었지만 그 갈등의 골이 깊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허목의 학문은 한강 정구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또 선대의 영향으로 북인 계통의 남명 조식이나 화담 서경덕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또 외할아버지인 임제로부터 도가 사상을 배우기도 했다. 때문에 허목의 학문은 서인들이 집중하는 주자서나 사서에 비중을 두지 않고, 원시 유학인 육경학에 중심을 뒀다. 허목은 주자서에 얽매이지 않는 학문적인 태도로 제자백가, 천문, 지리, 노장학 등 다양한 범주의 학문을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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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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