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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국사에 몸을 바친 외척, 김석주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 인물'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경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붕당 몰아내고 ‘왕권 강화’ 위해 자처한 악역

국사에 몸을 바친 외척, 김석주



김석주는 효종 때 경세가인 김육의 손자이다. 김육은 효종의 신임을 얻어 자신의 둘째 아들 김우명의 딸을 후일 현종이 되는 왕세자의 세자빈 자리에 앉혔다. 왕실의 외척이 되면 장인은 국구라 하여 최고 명예를 부여하지만 현직에 나갈 수 없었다. 김석주 역시 왕세빈과 4촌 오빠로 외척이 된다.


김석주는 현종이 즉위하고 3년째 되는 해인 1662년 과거에 급제하지만 권력과는 거리가 먼 직책을 연연했다. 이른바 주요 관직에는 나갈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김수항은 효종 2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3년이 지난 1954년 이조 좌랑에 제수됐다. 반면 김석주는 과거에 급제해서도 성균관 전적이나 사간원 정언 등에 있으면서도 이조에 쉽사리 입성할 수 없었다. 김석주가 이조에 나간 것은 현종 11년으로 급제한지 8년 만이다.


▲ 실학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김석주 초상 (사진 = 실학박물관)


당시 이조는 문신의 인사를 주관하는 부서로 이조 좌랑은 그중에서 관원을 천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직책으로 권력의 핵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조 정랑과 좌랑 자리를 함께 부르는 이조전랑 자리는 항상 당쟁의 핵심이 된다. 모 중앙일간지는 당시의 이조전랑의 자리를 ‘청와대 인사비서관’ 자리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자리는 폐단이 많아 영·정조에 이르러서 폐지된다.


김석주가 이조라는 핵심 자리에 나갈 수 없었던 것은 외척이라는 이유뿐 아니라 당시 정치 구도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산당’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지니고 있었다. 김석주는 같은 서인이기는 하나 할아버지 김육이 ‘한당’으로 영수격인 인물이어서 자연스레 한당으로 구분됐다. 효종 말년에 다시 정권을 쥔 송시열과 산당 세력은 현종 때까지도 유지됐다.


김석주는 송시열의 산당세력과 악연도 있었다. 김석주의 할아버지 김육은 사후에 장례를 치르면서 묘에 수도(遂道)를 만들었는데 이를 두고 송시열과 그 일파가 정치적 공세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수도는 묘를 조성하면서 관이 있는 곳까지 굴을 뚫고 문을 달아서 출입하게 하는 길을 말한다. 송시열 등은 신하의 무덤에는 수도를 둘 수 없다며 김육의 묘를 개장하라고 요구했다. 현종의 비호로 개장까지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양 세력의 앙금을 대표하는 사건이 됐다.


이러한 앙금이 있는 상황에서 두 번째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송시열은 인조계비 장령왕후 조씨의 상복을 두고 일어난 논쟁이다. 조정에서는 상복을 1년을 입는 게 옳다는 의견을 냈다가 다시 9개월로 조정했다. 이를 두고 대구 유생 도신징이 문제제기를 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논쟁이 발발했다. 이 논쟁에서 김석주는 당시 조정에 진출해 있던 남인 세력과 결합해 서인정권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다. 한편 현종 말년 남인 허적이 영의정에 오르면서 남인의 정계진출이 본격화 됐다.


하지만 숙중이 즉위한 후 남인은 탁남과 청남으로 나뉘어 정쟁을 이어가갔다. 당시 김석주는 숙종의 모후인 명성황후의 사촌 오빠라는 특수성으로 권력의 핵심에 자리잡았다. 숙종 재위 직후 김석주는 승정원 도승지, 즉 현재 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그는 당시 남인의 영수라고 할 수 있었던 허적과 남인들을 몰아내는 경신환국을 획책했다. 또 김석주는 남인 허견이 복창군을 옹립하려 군사를 모은다며 허견과 남인 일파를 모두 조정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김석주의 행위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도 많다. 소론 측에서 주도한 『숙종실록보궐정오』는 김석주에 대해 “김석주가 처음에는 비록 흉당을 제거하는 데 급급하여 한 결 같이 정도로 나가지 못하였다 (중략) 도리어 자기 공을 과대하여 조정의 권한을 장악하고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는 길과 밀고하는 문을 만들어 농간을 부리는 것이 이미 익수해졌고 (하략)”라고 평가했다. 남인을 축출하는 과정을 정도가 아니라는 비판이다. 하지만 정작 숙종은 김석주가 사망했을 때 교지를 내려 위태로웠던 종사를 다시 편안하게 하였고 세상을 덮는 공과 해를 꿰뚫는 충정은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공을 높이 평가했다. 책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은 김석주를 “악역을 자초하며 국사를 위해 몸을 바친 ‘국궁진췌(鞠躬盡瘁, 국사를 위해 몸을 바침)’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은 경기도메모리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가기]


세부정보

  •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

    원문 서비스/ 경기도메모리(memory.librar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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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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