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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세계 최초 태교전문서의 저자, 이사주당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 인물'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세계 최초 태교전문서를 지은 조선시대 4남매의 어머니


태교전문서 『태교신기』의 저자, 이사주당



문명의 이기라고는 없는 용인의 두메산골에서 과학문명이 발달한 서양보다 앞서서 태교책이 만들어졌다. 당시 서양에서는 태교는커녕 태아의 중요성조차 모르던 때이다.


이사주당은 1800년 세계에서 최초로 태교전문서 『태교신기』를 완성했다. 이사주당의 나이 62세 때이다. 이사주당이 4남매를 낳고 키운 경험과 그의 학문이 말년이 돼서야 완성됐다. 이사주당은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태교신기』를 제외한 다른 책을 불사르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한 사람의 일생을 대표할 만큼 자신 있게 지은 책이다.


▲ 이사주당의 책 『태교신기』 (사진 = 한국학 중앙연구원)


경기문화재단이 펴낸 책 『경기도의 여성인물)』(2019년 간행)은 이사주당의 태교신기에 대해 “당시 동양에서는 태교와 관련해서 열녀전 등에 어머니의 몸가짐 등에 대한 단편적 내용이 전해지고는 있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인성과 건강과 총명함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다룬 태교 전문서 사례는 없었기에 당연히 태교신기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조차 없는 독창적이고 실증적인 인문서이면서 과학서”라고 평가했다.


이사주당은 태교신기 첫머리에서 책을 쓴 포부를 밝혔다. 이사주당은 “내가 일찍 두서너 아기를 가져 낳아 기름에 시험한 바를 기록하여 모든 딸에게 보인다. 감히 멋대로 스스로 글을 지어 남의 눈에 자랑함이 아니라, 오히려 ‘예기의 내칙’에 빠진 점을 보완해야 하기에 ‘태교신기’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쓰고 있다. 유학을 숭상하던 시절 경전에 빠진 분을 더하기 위해 책을 썼다는 포부도 대단해 보인다.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스스로 경험하고 실험한 것을 책으로 묶었다는 점이다.


책의 내용을 살펴봐도 전혀 비과학적이거나 고루하다고 평가할 부분이 없다. 이사주당은 태교신기를 통해 태교가 아이 교육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개인 수양 ‘수신(修身)’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사주당은 『태교신기』 4장 14절에서 “태아와 어머니는 혈맥이 이어져 있어 어머니의 성품과 건강함과 총명함이 모두 태아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어머니는 매사 삼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이사주당은 “음악소리와 맛있는 음식은 예로써 절제해야 하는데, 군자는 그 가르침을 미리 해야 하기 때문이다(제3장 1절)”라고 썼다. 스스로 절제하며 수양하는 ‘수신’의 태교가 필요함을 강조한 말이다.


특히 이사주당은 태교신기에서 남편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사주당은 1장 첫머리에서 “스승이 10년 가르침이 어미가 잉태하여 열 달 기름만 같지 못하고, 어미 열 달 기름이 아비 하루 낳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기록했다. 또 이사주당은 “어머니의 열 달 기름이 아버지의 정심만 같지 못하다”면서 부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태교가 여성만의 일이라는 편견을 깨고 부부와 가족이 함께 하는 일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했다. 조선 중기를 넘어가는 시기에 남성의 태교를 강조한 것은 이사주당이 시대를 뛰어넘은 식견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사주당의 『태교신기』는 1800년 한문으로 쓰였지만 이듬해 아들 유희가 한글로 풀어섰다. 유희가 풀어쓴 한글 『태교신기』가 전해져오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 1936년 정인보가 이를 발굴하면서부터다. 정인보는 태교신기에 대해 “자기에게 실험하여 몸소 징험하신 것으로서 헛되이 이치에만 의존해 이론을 내세워 말하는 것과 다르다”고 평가했다.


아들 유희는 역시 한글로 옮겨 쓴 『태교신기』 발문에서 “일찍이 시험 삼아 너희 네 자녀를 임신했을 때 태교를 해보았더니 결과적으로 너희들의 형체와 기질이 크게 어그러짐이 없었다. 이 책을 집안에 전함이 어찌 태교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라는 어머니 이사주당의 말을 전했다.


▲ 이사주당의 아들인 국학자 유희의 언문지 (사진 = 실학박물관)


『태교신기』를 쓴 이사주당은 평탄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이사주당은 태종의 서자인 경녕군의 11대손으로 부친 이창식과 어머니 강씨 사이에서 7남매 중 6째로 태어났으나 조부와 부친이 벼슬을 하지 못했고 남자 형제들조차 모두 벼슬을 하지 못해 곤궁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사주당은 어린 시절 이름날 정도로 길쌈과 바느질을 잘 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인간으로 태어나 길쌈과 바느질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는 자각을 통해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 후 사서삼경 등 경서를 섭렵해 이씨 문중의 남자들 중에서 이사주당을 능가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사주당이라는 호 역시 주희를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이사주당은 25세 때 21살이나 연상인 유한규와 결혼해 용인으로 왔다. 유한규는 3명의 부인과 사별한 후 4번째 부인으로 이사주당을 맞아들였다. 이 결혼생활도 20여 년 만에 남편을 사별하면서 끝이 났다. 그녀는 전처의 아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며 어린 4남매를 데리고 분가했다. 아들 유희는 실학자이자 음운학자로 성장하여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의 문집 『문통』에 취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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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 여성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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