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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교차하고 엮이며, 다시 서로를 향하는 우리

아트스페이스 광교 《하-하-하 하우스》

글, 사진 김지연 미술비평가


'가족', 너무나도 흔한 단어지만, 소리 내어 읽어볼 때 이것만큼 마음에 울리는 무게와 진동하는 폭이 제각각인 단어도 없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개개인이 맺는 관계의 형태와 느끼는 감정은 백이면 백 모두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것은 사실 한 꺼풀만 벗기면 수많은 형태의 관계와 그 곱절쯤 되는 다양한 감정이 뒤엉킨 전쟁터지만, 우리는 이것이 이상적인 하나의 모습으로 수렴하길 바란다. 적나라한 살갗을 마주하기 두렵고 그저 평화롭게 지내고 싶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정상 가족 신화’다.



김승희_호랑이와 소_컬러, 사운드, 8분18초_2019



코로나19로 거리두기 상황이 길어지면서 사회관계의 폭이 좁아졌고, 가족과 더 오랜 시간 부대끼며 많은 일상을 공유하게 되었다. 막연히 더 가까워질 기회를 획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무언가를 너무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오히려 작은 요철이 두드러져 보인다. 평온한 일상을 뚫고 툭 불거져 나온 관계의 요철은, 가족이라는 두 글자 안에 다시 꼭꼭 욱여넣으려고 해도 돌아가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이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아볼 수밖에 없다.



김허앵_전시 전경


가족의 시작

《하-하-하 하우스》는 바로 이 가족에 관한 전시다. 제목의 ‘하-’는 웃음과 한숨을 동시에 의미하며, 가족이라는 존재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하-하-하 하우스’는 이런 복합적인 감정이 담긴 공간으로서의 집을 의미한다. 전시는 8팀의 작가들과 함께 가족이라는 관계와 공동체의 의미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전시장 입구에는 김희라 작가의 <양복 한 벌, 드레스>가 자리하고 있다. 신랑과 신부, 흔히들 말하는 가족의 시작이다. 이어지는 이선민 작가의 사진들은 가족의 일상을 포착한다.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부자, 혹은 모녀의 모습,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모습, 우리 주변에 흔해진 다문화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윤진초&알렉산더 루쓰는 동화 속 일러스트 같은 이미지나 포근한 인형의 모습으로 고대 신화와 예술 속 어머니의 생명력과 창조력을 표현한다. 분명 가족은 이렇게 특별한 단어다. 그러나 그 단어의 표면을 들추면 더 특별한 것들이 드러난다. 특별하지만 안온하지는 않은 것, 그래서 편히 바라보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김허앵 작가는 아이를 돌보는 자전적인 이미지를 통해 일상을 버텨내는 엄마라는 존재를 그린다. 녹아내리는 듯한 모습의 그림 속 캐릭터처럼 엄마라는 역할을 해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녹이고 무너뜨리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작가의 작품 속에서 경쾌한 터치가 엿보이듯이 사소한 즐거움도 동시에 존재한다. 관계란 이토록 양면적이다.


한편, 김승희 작가는 <호랑이와 소>라는 애니메이션 작품을 통해 모녀 가정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사람들은 그런 차별이 아직도 있느냐고 묻지만, 그러면 지금껏 엄마와 내가 겪은 불안과 불편은 대체 무엇이었느냐고 또렷하게 되묻는다.



김희라_양복 한 벌, 드레스_오브제_가변크기_2018


보이지 않는 것, 혹은 보지 않는 것

전시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조금 더 적나라한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조영주 작가의 <입술 위의 깃털>에서 격렬하게 엎치락뒤치락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돌봄 노동을 상징한다. ‘돌봄’이라는 단어는 따스하고 편안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어린아이, 노약자를 돌보는 몸짓은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다. 가정 내에 환자가 있을 땐 더하다. 하지만 이 고통은 ‘가족’이라는 단어 바깥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정문경 작가의 <창백한 유령>은 그런 모습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커튼은 유령의 형상을 한 채 공중에 떠 있고, 그 사이를 걸으면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바닥의 대야에는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비어 있다. 시각과 청각이 불일치하며 낯섦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다. 우리는 익숙함에 감추어진 어떤 것들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빈 대야 앞에서 귀를 기울이면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감각을 열면 새로운 차원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니까, 가족 안에서 우리가 보지 않았던 것들, 들리는데 보지 못한 것, 혹은 보이는데 듣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서로를 향한 의지

무언가를 인정하지 않으면, 존재하는 것도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된다. 하나의 가족을 정상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그 틀을 벗어난 모든 가족은 정상이 아니게 된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나와 나를 둘러싼 가족, 우리가 서로를 향해 사랑으로 노력하고 애쓰는 개별 관계가 정상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정상이란 말인가.


전시장 초입에 위치한 김희라 작가의 작품 속 턱시도와 드레스는, 언뜻 이상적인 조합처럼 보이지만 사실 옷의 일부분이 가위로 잘려져 있다. 이어지는 작품들 역시 다양한 옷들이 잘리고 흩어진 채 전시되어 있다. 마치 이렇게 정해진 역할이 해체된 것이 바로 현대의 가족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현대의 가족은 분명 과거의 가족과는 다르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가족의 틀 안에 우리의 관계를 가둘 수 없다. 옷을 수십, 수백 가닥의 실처럼 잘라냈듯이 우리는 이렇게 낱낱이 흩어졌지만, 해체된 것은 다시 가능성을 가진다. 흩어진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교차하고 엮이며 새로운 관계로 재탄생할 수 있다.


윤진초,알렉산더 루쓰_전시 전경


관계는 두 벌의 옷을 나란히 두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못한다. 꼭 가족이 아니더라도, 관계는 각자의 세계가 해체되어 다시 엮이는 과정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서로를 향한 사랑이다. 가족의 사랑을 다룬 영화 <패밀리 맨>에서는 이런 대사가 있었다. “그 삶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둘이 같이 있잖아. 난 우리를 택할래." 흔히 혈연에 의해 원치 않은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 끈을 놓지 않은 것도 서로를 선택한 의지가 아닐까. 혈연에 의한 가족이 아니라면 더더욱 서로를 선택한 것일 테다.



정문경_창백한 유령_낡은 레이스커튼, LED조명, 혼합재료, 사운드스피커, 가변크기_2018



전시의 중간 즈음에 등장한 윤주희 작가의 작품 <의지의 의지의 의지>를 떠올려본다. 자신의 뼈와 관절을 모티브로 실내 암벽장을 오르는 마음은 보통의 의지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택한 관계, 특히나 가족이라고 이름 붙인 관계는 그렇게 아프면서도 간절한 마음이다. 이토록 어긋나고 흔들리고 부서지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와 상황에서든 당신과 같이 있어 보겠다고 굳게 선택한, 나의 애타는 의지다.


참고 아트스페이스광교 누리집 



김지연 미술비평가, 작가. 예술과 도시에 깃든 사람의 마음, 서로 엮이고 변화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범위를 한정 짓지 않는 글을 쓴다.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미술무크지 『그래비티 이펙트』, 기타 여러 매체에 기고하며, 저서로는 퍼포먼스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삶과 예술에 관한 책 『마리나의 눈』, 보통 사람을 위한 현대미술 에세이 『보통의 감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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