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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문화자산 3. 양주조씨의 묘역이 된 석실서원


경기도 문화자산 

3. 양주조씨의 묘역이 된 석실서원


글과 사진 김준기(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 




고산자로를 따라 남양주시 수석동을 지나다 보면 석실마을 표지석이 눈에 띕니다. 조선시대 안동김씨 세력의 온상이자 내로라하는 선비들을 다수 배출했던 석실서원이 있던 곳이지요. 석실서원은 병자호란 때의 충신인 김상용과 김상헌의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에 설립된 사립 교육기관으로 지금의 사립 중·고등학교에 해당한다고 보시면 되지만 교육뿐만 아니라, 유학의 성현들을 추모하며 제향을 지내기도 하는 곳이었습니다. 석실서원에 모셔진 김상용(1561년 ~ 1637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세자빈과 원손 등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에 건너갔으나 적병이 강화성으로 쳐들어와서 함락당하게 되자, 문루에 화약을 쌓고 불을 붙여 자분(自焚) 순절한 분입니다. 그의 아우인 김상헌(1570년~1652년)은 병자, 정묘호란 때 결사 항전을 주장했던 척화대신으로 유명합니다. 1636년 예조판서로 재임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한 바 있으며,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지요. 하지만 전세가 기울어 항복하자는 쪽으로 대세가 굳어지고 결국 인조가 항복하자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김상헌은 1640년 청나라의 거듭된 요구로 심양으로 압송되었고 6년간 옥고를 치르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하였지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인조와의 관계로 인해 벼슬을 단념하고 이곳 석실마을로 낙향하여 은거 생활을 하게 되지요. ‘석실산인(石室山人)’이라는 그의 호는 이때 붙은 것이겠지요.



                            (좌) 조말생 묘 아래에 숨어있는 듯 자리잡고 있는 석실서원지 표석 (우) 조말생묘 



석실서원은 병자호란 때의 충신인 김상용과 김상헌의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에 설립된 사립 교육기관으로 지금의 사립 중·고등학교에 해당한다고 보시면 되지만 교육뿐만 아니라, 유학의 성현들을 추모하며 제향을 지내기도 하는 곳이었습니다. 석실서원에 모셔진 김상용(1561년 ~ 1637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세자빈과 원손 등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에 건너갔으나 적병이 강화성으로 쳐들어와서 함락당하게 되자, 문루에 화약을 쌓고 불을 붙여 자분(自焚) 순절한 분입니다. 그의 아우인 김상헌(1570년~1652년)은 병자, 정묘호란 때 결사 항전을 주장했던 척화대신으로 유명합니다. 1636년 예조판서로 재임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한 바 있으며,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지요. 하지만 전세가 기울어 항복하자는 쪽으로 대세가 굳어지고 결국 인조가 항복하자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김상헌은 1640년 청나라의 거듭된 요구로 심양으로 압송되었고 6년간 옥고를 치르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하였지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인조와의 관계로 인해 벼슬을 단념하고 이곳 석실마을로 낙향하여 은거 생활을 하게 되지요. ‘석실산인(石室山人)’이라는 그의 호는 이때 붙은 것이겠지요.


김상헌은 조선후기 안동김씨 세도가의 직계 선조로도 유명합니다. 그의 후손 중에서 13명의 재상과 수십 명의 판서, 참판이 배출되었고,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왕비 3명과,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배출되었다고 하니 그 세력이 어마어마했을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아무튼 석실마을에는 1656년(효종 7)에 지방유림들이 뜻을 모아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의 위패를 모셨고, 1663년(현종 4)에는 ‘석실(石室)’이라는 현판이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하게 되지요. 이후 석실서원은 서인 노론계의 학자와 관리들을 다수 배출하며 명문 사립학교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하지만 고종이 즉위하고 타도 안동김씨를 벼르던 흥선대원군이 집정한 후 이 서원을 가만 놔둘 리 없었겠죠? 결국 석실서원은 1868년(고종 5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맙니다.



석실서원터에서 바라본 석실마을과 미호



석실서원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 유지(遺趾)는 남아있겠지 하는 기대감에 석실마을로 들어서면 석실서원터는 찾을 수 없고 조말생의 묘역을 알리는 표지판만 눈에 띕니다. 조말생(1370~1447)은 조선 초기의 문신입니다. 세종 즉위 후에는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고, 함길도관찰사로 부임해서는 여진족 방어에 힘쓴 인물이지요. 그런데 조선전기 인물의 묘가 왜 조선후기 석실서원이 있던 자리에 있을까요? 당연히 다른 곳에 있던 묘를 이곳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조말생의 묘는 원래 남양주시 금곡동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이 들어섰기 때문이지요. 조말생의 묘가 이장된 후 양주조씨들이 지속적으로 이곳에 묘를 썼으므로 석실마을에는 양주조씨의 묘역이 조성되었고, 재실인 영모재도 건립되면서 석실마을은 마치 양주조씨의 세거지인 양 마을의 정체성마저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이제 이 마을에서 석실서원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은 석실서원지를 알리는 표지석과 석실이라는 마을 이름뿐입니다. 아무튼 석실서원이 있던 곳, 즉 현재 조말생의 묘가 있는 언덕에 올라서면 한강이 내려다 보입니다. 한강에는 예로부터 풍광이 좋은 명소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명소마다 그 특징에 알맞은 별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지금의 남양주시 수석동 석실마을 구간을 흐르는 한강은 미호(渼湖)라고 불렀지요. 이곳의 한강은 넓고 잔잔해서 마치 호수 같아 보인다고 하여 이런 별명이 붙은 것입니다.



겸재 정선의 ‘미호’. 언덕에 보이는 기와집이 석실서원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은 미호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서 그림을 한 폭 남겼습니다. 보기에도 한적한 강마을의 풍경이 느껴지지요. 가운데 불숙 솟아 있는 언덕 위로 기와집이 보이네요. 이 기와집이 바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온상이었던 석실서원입니다. 그 아래쪽으로 초가집이 여러 채 들어선 마을은 서원의 살림을 도맡아 하던 서원마을이겠지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석실마을의 옛날 풍경을 겸재의 산수화를 통해 떠올리면서 미호변을 걷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아무래도 미호의 진면목을 확인하시려면 옛 석실서원 자리인 조말생의 묘까지 올라가 한강을 굽어보는 것을 권해드리고 싶네요. 예나 지금이나 미호의 경치는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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