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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문화자산 6. 지평현의 향교와 관아터

경기도 문화자산

6. 지평현의 향교와 관아터 



글과 사진 김준기(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는 조선시대 지평군의 읍치였던 곳입니다. 읍치는 군·현을 다스렸던 관아를 비롯하여 객사, 향청, 작청 등의 관공서와 향교라는 지방교육기관이 자리잡고 있었던 고을의 중심지를 말하지요.


지금의 양평군은 조선시대 양근과 지평이라는 두 고을이 합져진 곳입니다. 1908년 이 두 고을이 병합되며 양근의 ‘양’ 자와 지평의 ‘평’ 자를 한 글자식 취하여 양평이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일제가 전국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한 것이 1914년의 일이었는데, 양평은 그 6년 전 통감부 시절에 이미 통폐합이 되었지요. 이 뿐만 아니라 지평군의 읍치가 있던 중심지와 그 인근 지역은 신라 경덕왕(747년) 때부터 사용되었던 지평이라는 이름도 잃어버리고 지제면(砥堤面)이라는 정체불명의 이름이 붙게 됩니다. 물론 지제면 내에는 지평리라는 리의 이름은 남아 있었지만 일제가 의도적으로 지평군의 역사를 지우려 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품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에 지평군이 최초의 항일의병이 봉기하였던 고장인 까닭에 일제가 의도적으로 지평이라는 지명에 담긴 민족적 반일 감정을 지우고자 일부러 지명을 변경하였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통폐합 과정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지평이라는 명칭은 2006년에 와서야 되찾게 됩니다. 2006년 8월 7일 행정자치부의 ‘행정구역 명칭정비 추진계획’이 시행되었는데, 이때 주민들의 의견을 조사한 결과 면내에 거주하는 세대 중 82.8%에 해당하는 2050세대가 면의 명칭 변경에 찬성함으로써 지제면에서 지평면이라는 옛 이름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참고영상: 경기옛길 평해길 제7길(지평향교 구간) 출처: 경기옛길 유튜브 


하지만 지평이라는 지명을 되찾은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고장의 얼과 역사가 살아있는 읍치시절의 모습 역시 재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지평면에서도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일은 지평향교가 아직 남아 있으니 이 향교를 바탕으로 사라진 관아와 객사를 복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요.


지평향교는 지평면 지평리의 지평로 333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관아와 객사가 면사무소 등의 공공건물로 사용되면서 개축되거나 사라지는 경우가 많지만 대개 향교는 남아 있는 사례가 많습니다. 일제도 차마 전통 교육기관까지 건드릴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왼쪽부터) 지평향교 대성전과 명륜당 


지평향교는 조선 초에 건립되었고, 숙종 10년(1684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1982년 향교 건물의 중수공사를 할 때 발견된 명륜당 상량문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지요. 1983년에는 경기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된 바 있고요. 현존하는 향교 건물은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과 동재·서재, 내삼문, 외삼문이고, 대성전의 부속건물인 동무·서무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인데 장식이 없고 간결한 모양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평향교는 다른 지역에 남아 있는 향교와 마찬가지로 현재 교육의 기능은 사라지고 제향의 기능만 유지되고 있습니다. 매년 음력 2월 초정일과 8월 초정일에 지평면 유지들이 참석하여 공자 등 성현에게 제향하고 있지요. 향교 건물은 평소에 개방하지 않지만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두 차례 문을 여니 이때에 맞춰 방문하시면 향교의 내부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참, 지평 향교를 기반으로 옛 읍치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다고 앞서 말했는데,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아볼까요? 󰡔여지도서󰡕나 󰡔지평군읍지여지도󰡕에는 향교가 고을로부터 서쪽으로 2리 떨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고을은 관아가 있던 곳을 뜻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기록을 참고해서 향교를 기준으로 하여 동쪽으로 2리 정도 떨어진 장소를 뒤져보면 관아터가 나오겠지요. 또한 1872년 󰡔지평현여지도󰡕를 보면 봉미산 아래쪽, 학교(鶴橋)가 놓인 하천 위쪽으로 관청의 건물들이 밀집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현재 면사무소가 있는 중심지보다 조금 위쪽 위치에 관공서들이 들어서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듯 문헌고증을 거쳐서 나온 결론은 현재 지평교회 부근인 관교길 33-6에 관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민들의 제보와도 일치할 뿐더러 특히 이 일대에서는 조선후기 건물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 자기 등이 많이 발견되어 신빙성이 더 커졌지요.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지평면에서는 관아터를 탐색, 조사하였고 이곳에서 주춧돌과 말구유 등 상당수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는 관아가 복원되지는 못했지만 현재 관아터는 공원으로 조성되었고, 표지석과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좌) 지평관아지 표석과 관아터에서 발견된 석물들 (우) 지평객사터로 추정되는 곳


이제 남은 문제는 객사터를 찾는 것이지요. 객사는 여행하는 관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장소인 동시에 왕을 상징하는 물건인 궐패를 모셔놓고 고을의 수령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예를 갖추기도 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여지도서󰡕에는 ‘학교(鶴橋)는 객사의 앞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학교와 객사가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지만 지평천 주변에 위치했다는 것만은 분명하지요. 게다가 객사는 관아터 주변에 있었을 터이니 범위를 더욱 좁힐 수 있습니다. 주민들의 제보에 따르면 객사 앞에 있었던 학교 자리에는 지금 돌다리가 놓여 있고, 이 다리를 통해 월하마을로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객사의 위치가 지평교회 아래인 지평리 238번지 일대라는 것이 확실해지지요. 또한 238번지 주택의 북쪽 일대에서 백자편과 다양한 기와편과 같은 증거들이 발견되어 이 일대에 기와 건물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평현 객사의 모습은 󰡔지평현객사중영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요. 가운데에 대청, 좌우에 동헌과 서헌이 있었고, 서헌의 동서쪽에 아방(兒房)이 있었으며, 태청은 남쪽을 행했는데, 좌우에 윗방이 있었답니다. 그리고 좌우에는 긴 행랑이 들어서 아전들이 머무는 작청과 연결되어 있었고요.


기왕에 지평군의 관아와 객사의 위치가 확인되었다면 일제에 의해 사라졌던 지평군의 위상을 되살리고,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도 이 건물들을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요?


세부정보

  • 지평향교 / 경기도문화재자료 제20호(1983.9.19 지정)

    주소 / 경기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33

    대표번호 / 031-774-1530

    / 경기옛길 평해길 제7길 지평향교길

    / 경기옛길 누리집 ggc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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