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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김포의 민통선 마을 용강리

- 경기학광장 9호(2021 여름호) -

김포의 민통선 마을 용강리


김준기


용강리는 서해로 흘러드는 한강의 끝자락과 접해 있는, 김포시 서북단에 위 치한 마을이다. 한강이 물길로 이용됐을 때는 강령포라는 상업포구가 있었고, 아랫말과 용림말 주위로는 드넓은 전답이 펼쳐져 있어서 일 년 내내 장작불로 쌀밥을 지어 먹었다는 부유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6.25 동란 이후 군사분계선 이 한강 복판을 통과하며 강령포는 소개되었고, 대부분의 지역이 민통선 안쪽 에 포함되면서 한적한 농촌 마을이 되고 말았다. 최근 군사보호구역에 대한 제 약이 완화되면서 용강리는 전원주택지와 생태테마마을의 조성 등으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지만 아직은 극복해야 될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용연리와 강령포가 합쳐진 마을, 용강리

구한말까지 통진군 보구곶면에 속해 있던 별개 의 두 마을 용연리1 와 강령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병합되며 김포군 월곶면 용강리가 된다. 용강리라는 마을명은 용연리의 ‘용(龍)’ 자와 강령 포의 ‘강(康)’ 자를 취한 것이다. 

1916년에 측도된 지도에는 병합 당시 용강리의 모습이 잘 나 타나 있다. 한강변에 강령포가 있고, 용연리라고 표시된 지역은 두 군데의 자연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이곳 토박이 어른의 제보 에 의하면 한국동란 이전까지 용강리는 강령포, 아랫말, 용림말 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랫말과 용림말이 옛 용 연리에 해당하며, 이러한 마을 구성은 적어도 일제강점기부터 한국동란 이전까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행정구역상으로는 병합되었다고 해도 강령포 주민들 은 한강을 배경으로 어업과 상업에 종사한 반면, 용연리 주민들 은 문수산 자락에 펼쳐진 전답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으니 생활 환경과 생업에 따른 두 마을 간의 문화적 차이가 워낙 심해서 끝 내 하나의 마을공동체로 융합되지는 못했을 것이라 판단된다.

일제강점기 용강리 지도(1916년 측도)

용강리의 중심이 된 먼지락 마을
한국동란 이전의 용강리와 달리 현재의 용강리는 먼지락, 새 마을, 용림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민통선 바깥쪽으로는 ‘잉 글랜드 타운’, ‘생명의 숲’ 등의 전원주택단지가 있으나 어디까 지나 외지인들에 의해 새로 형성된 마을일뿐이다. 이곳을 지나 민통선 검문소를 통과해야지만 본토박이들이 살고 있는 용강리 의 먼지락 마을이 나오는 것이다. 먼지락은 옛 용연리의 중심인 용림말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 며,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일 터이다.
먼지락은 원래 서너 집밖에 살지 않던 외진 곳이었는데 한국동란 후 아랫말이 소개되자, 그곳 주민들이 집단이주하여 지금의 모 습을 갖추게 되었다. 농사를 짓고 살던 아랫말 주민들은 구태여 정든 농지를 버리고 외지로 나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먼지락은 30여 호의 규모로 늘어나 마을회관과 노인정이 위치 한 용강리의 중심 마을이 되었다.

민통선 안에 들어선 양옥집 단지, 새마을
먼지락에서 용림말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왼편에는 이십여 채 의 양옥집이 골목길을 따라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이 마을이 1980년에 조성된 새마을인데, 민통선 안의 농촌마을로는 걸맞 지 않은 모습이다. 마을을 조성한 사람도, 입주한 사람들도 이곳 주민들이었다 하며, 지금도 몇몇 외지인을 제외하면 대부분 토 박이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은 주변 지역보다 지대가 높아서 북한에서 바라보인다 는 ‘적가시지역(敵可視地域)’이었기 때문에 건물들을 고급스럽 게 지어 일종의 선전 마을을 만들었던 것이다. 새마을을 조성할 당시에는 문수산도 북한의 산과 마찬가지로 민둥산이었기 때문 에 북쪽에서 이 마을이 보였지만 문수산이 숲으로 울창해진 뒤 로는 보일 리가 없으니 선전 마을로서의 역할은 상실한 셈이다. 얼핏 한적지고 평화로운 마을처럼 보일지라도 주변에는 적의 침공에 대비한 방공호들이 눈에 띄어 이곳이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평화 속에 위험이 공존하고 있는 지역임을 실감할 수 있다.
1980년에 선전마을로 조성된 새마을
매화미르마을로 변신한 용림말

옛 용연리의 으뜸마을은 용림말이었다. 용강리에 전하는 아 랫말, 웃말, 건너말, 넘말, 먼지락 등의 지명들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용연 곧 용못이 있는 용림말을 중심으로 북쪽인 강변쪽으로 아랫말이, 남쪽인 산쪽으로는 윗말이 자리했고, 다시 이 마을들 주변으로 인가가 들어서며 용연리를 이루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용림말은 연기현감을 지낸 윤성이 입향한 이래 10대 에 걸쳐 파평윤씨가 세거해오던 집성촌이었지만 현재는 2가구 용강리 먼지락 마을 1980년에 선전마을로 조성된 새마을 밖에 남아있지 않다.

한때 30여 호가 넘게 살았다는 용림말은 한동안 군사보호지 역이라는 폐쇄적 환경 속에서 11호에 불과한 마을로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용림말은 2000년대 중반부터 생태테마마을로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2008년에 결실을 맺었다. ‘매화미르마을’이라는 농촌체험마을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매화미르라는 이름은 매화마름의 ‘매화’와 용을 뜻하는 고유어 ‘미르’를 합성한 것이다. 매화마름은 1998년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된 식물 인데, 용강리 강변에 있는 논과 주변 습지에 매화마름 군락지가 펼쳐져 있다. 규모로 치면 국내 최대인 이 군락지에 5월 말 경 매화마름의 흰색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모습은 가히 장관 이 아닐 수 없다.

용못은 전통적으로 용림말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였다. 고려 초 어느 날 천둥 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더니 갑자기 못이 넓어지고 그 안에서 커다란 용이 출현하며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통진부사가 가뭄이 들면 이 연 못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여지도서(1760년)』 통진부 편 지도에 이 연못이 표시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용 못은 용림말 주민들에게 풍부한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를 제공해 준다. 이에 주민들은 해마다 음력 3월 중 택일을 하여 용못고사 를 지내고, 공원을 조성하는 등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니 매화미르는 용림말이 자랑하는 두 관광 상품을 홍보 하는 적절한 이름임이 분명하다. 생태테마마을로 거듭난 용림 말에는 단체 탐방객들이 이용할 수 있는 체험관 건물이 들어섰고, 용못 주변에는 캠핑장도 마련되었다. 또한 봄에는 전통농법 체험·매화마름 및 야생화 관찰·유도 철새 관찰, 여름철에는 삼림욕과 감자 수확 체험, 가을철에는 벼베기와 탈곡 등 농사체험, 겨울철에는 썰매타기·연날리기·짚풀공예 등 사계절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노력과 투자에 비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보기는 힘들 듯하다.


(왼)공원조성 직후의 용못 전경 (오)현재  방치상태에 있는 용못과 체험관 

사라진 포구마을 강령포

철책선이 둘려져 있는 용강리의 강변에는 조강의 대표적 포 구인 강령포가 있었다. 김포의 북단을 지나다 서해로 흘러드는 한강하류를 조강(祖江)이라고 부른다. 조강은 조선시대 경상, 전 라, 충청 등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세곡선들이 진입하던 강길이 었고, 장삿배와 어선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어서 일찍이 상업 포구가 발달했다. 17세기 초 신유한(申維翰)이 지은 <조강행(祖江 行)>3 에는 물류와 교통의 요충지로 장관을 이루었던 조강의 풍 경이 잘 나타나 있다.

조강은 일명 ‘삼기하’라 하니 세 강이 바다로 함께 조회 하기 때문이지요.

남쪽으로는 호남, 서쪽으로는 낙랑(평양)으로 통하여 잇닿은 배들이 베틀의 북과 같았고

고기·소금·과일·베·쌀이 산같이 쌓일 땐 하루에도 이천 척이 오갔다오.
강령포는 조선 초에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양녕대군이 참전 하여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유서 깊은 포구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수산지(1911)』에 의하면 강령 포는 강기슭에 인가가 점재한 곳으로 총 93호에 350여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그러나 근안(近岸)에서 농어, 숭어, 새우, 기타 잡 어를 잡는 등 어업에 종사하는 자는 세 집에 불과했고, 그 대신 주막과 보행객주가 많아 연안 일대가 성황을 이루는 곳이었다. 즉 강령포는 어촌보다는 상업포구로서의 성격이 짙었다는 뜻이 다. 강령포에서는 석빙고도 있었다. 계숫개라는 계곡의 물을 겨 울에 얼려 이 석빙고에 보관했다가 5월에 연평도로 향하는 어 선들이 싣고 가서 잡은 조기를 보관하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이 곳의 물은 한두 달 두고 먹어도 이끼가 끼지 않았기 때문에 뱃 사람들이 먹을 물로 가져가곤 하였다.

강령포는 개성으로 건너다니던 나룻배가 운행되던 나루이기 도 했다. 고려 말 개성에서 이계월이란 기생이 이곳에 와서 활동하였는데 그녀의 명성이 서울까지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강령포를 ‘이계월촌’이라 불렀다는 일화도 전한다. 이는 강령포가 유흥의 명소였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옛 강령포 마을의 당재산 

이렇듯 번영했던 강령포는 한국동란 후 강변을 둘러 철책선이 생기며 폐쇄되었고, 마을은 소개되었다. 어업과 상업에 종사 하던 이곳 주민들은 농사지을 농토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서 울, 인천, 김포 등지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같은 시기에 소개되었던 아랫말 주민들이 먼지락으로 이주를 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강령포를 떠나 외지로 이주를 했던 주민들은 정든 고향을 못 잊어 매년 이곳을 찾아와 당제산 정상에서 조강을 향해 제사를 지냈고, 음력 4월 8일에는 강령포축제를 열어 친목을 도모하였다고 한다. 포구가 있던 갯벌 지역이 논으로 개간되어 마을의 자취는 찾아볼 수조차 없다 해도 강령포에 대한 원주민들의 자부심이 남아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용강리의 역사·문화로 다시 채워나가야 할 매화미르마을

용강리는 그동안 개발행위가 제한되어 영농활동에서조차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반면 자연·생태환경이 되살아나 매화미르마을이 조성되며 각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용강리는 다시 민통선안의 고립된 마을로 빠르게 환원 되고 있는 실정이다.

용림말의 체험관과 용못공원이 방치된 상태로 버려져 있는 것을 보면 생태테마마을 사업도 의욕을 상실한 듯하다. 이러한 상황이 인근에 본다빈치아트김포캠핑파크 등 경쟁시설들이 들어섰다거나,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탐방객들의 발걸음이 끊긴 때문이라고 볼 수 만은 없다. 현재 용강리에는 상점과 식당이 전무하며, 그 흔한 슈퍼 하나 없는데, 이러한 현상은 이곳을 찾는 외지인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방증하며, 단 시간 내에 생겨난 결과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용강리가 생태테마마을, 농촌체험마을로서 최적격지인 것만은 확실하니, 그간 미흡했던 문제점들을 보완하여 다시 활성화시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 야 할 사항은 매화미르마을에 대한 운영 주체가 용림말 뿐만 아니라 먼지락과 새마을까지 확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볼거리와 놀거리 외에 용강리 특산품을 이용하여 살거리와 먹거리를 개발한다면 전체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또한 용강리는 강령포의 포구문화, 용연리의 농촌문화가 융합된 곳이다. 따라서 스토리텔링을 통하여 이러 한 용강리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고, 이를 다양한 역사·문화 체험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 아무쪼록 매화미르마을이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다른 민통선 마을에서도 참고할 수 있는 생태테마마을 사업의 모범적 사례로 자리 잡아 주기를 기대한다.


김준기는 동국대학교에서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대학원에서 구비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민속학연구소에 근무하며 마을조사를 다니면서 살아있는 민속현상과 그 안에 담겨있는 전통문화의 가치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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