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눈부신 봄날, 그들은 교회당에 모였다

4월 15일 일어난 일제의 대학살

눈부신 봄날이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웠을 작은 교회당이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던 때는 1919년 4월 15일. 따스했던 봄 어느 화요일이었다. 일본군은 제암리 주민 30명을 교회 안으로 몰아넣은 후 문에 못질해 탈출을 막고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교회에 불을 지르고 주변 민가까지 불태워 무고한 양민 39명을 학살했다. 문장만으로도 참혹하다. 국권을 강탈당한 35년의 일제강점기는 그 모든 시간이 비극이지만 제암리 학살 사건은 그중 가장 잔인했던 일제의 만행이었다.


격렬했던 화성의 독립운동

일본군은 1919년 3월, 제암리를 비롯한 화성시 전역에서 일어났던 주민들의 거국적인 독립운동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화성의 만세운동은 격렬했다. 일제가 화성에서 탈취한 논과 염전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독점과 폭리를 취하는 일본인 관리들에게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상황이었다. 반일감정과 기독교적 자유사상은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고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고 운집했다. 화성의 3‧1 만세운동은 3월 26일 송산 사강 장터 만세 시위, 3월 30일 향남 발안장터 만세 시위, 4월 3일 장안 우정 만세 시위로 등 전 지역으로 번졌다. 순사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이 파괴되었고 일본인 간부가 죽는 등 일본인이 일하는 곳의 업무가 마비되었다. 일본인들은 이 시위를 주도한 이들을 제암리의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라고 판단했고 복수하겠다는 광기로 교회에 찾아가 대학살을 벌인 것이었다. 교회에서 참극을 벌인 이들은 이웃 동네인 고주리의 천도교 일가에도 찾아가 교인들을 학살하고 시신에 불을 질렀다. 어린아이마저 찔러 죽인 일본인들의 광기 서린 학살은 당시 현장을 사진으로 남긴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프랑크 윌리엄 스코필드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외국인 눈에 비친 제암리 참상

캐나다에서 수의대를 졸업한 후 1916년 한국에 온 프랑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하는 선교사였다. ‘석호필’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가졌고 우리말을 배워 조선 생활에 무르익어 가던 그는 해외 정세를 파악하는 역할로 조선인들의 3‧1운동 준비를 도왔다. 1919년 3월 1일 일어난 탑골공원에서의 만세 시위를 사진과 글로 기록해 해외에 알렸던 그는 4월에 수원으로 이동해 제암리 학살사건 현장에 방문했다. 잿더미가 된 현장과 시름에 잠긴 마을 사람들을 만난 그는 이를 〈제암리, 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로 작성했고 이듬해에는 3·1운동 견문록 『끌 수 없는 불꽃』을 펴냈다. 그가 캐나다와 미국에 전달한 사건 보고서는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고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이에 일본에 대한 해외 여론이 악화하자 일제는 제암리 학살의 주범인 일본 아리타 도시오 중위를 군법회의에 넘겨 여론을 무마하려 했으나 끝내는 형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 선고를 내렸다.

수원역에서 화성 제암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려...

공원 입구에는 스코필드가 사진을 찍는 모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동상이 앉은 바위에는 자전거도 기대어 있는데, 스코필드는 일본군의 눈을 피하려고 수원역에서 제암리까지 먼 거리를 자전거로 이동했다고 한다. 소아마비를 앓아 불편한 다리로 페달을 굴렸다. 그는 죽기 전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1970년, 외국인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기념할 수 있나

희생자들의 추모비는 학살이 일어난 지 40년이나 지난 1959년에 세워졌다. 1969년에는 일본 기독교인들이 사죄하는 의미로 제암교회를 지었다. 2002년에는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이 건립되었고 이때 교회를 증축해 하나의 건물로 이었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1982년에서야 발굴되어 새로 조성한 순국 합동묘지에 모셨고 그들의 옷가지와 교회의 잔해는 기념관 내 전시실로 옮겼다. 제암리 주민들이 목숨을 잃고 백 번이 넘는 봄이 지났고 대한민국은 해방되었으나 그들의 희생이 세월에 무마되진 않을 것이다. 무참하게 막을 내린 개인의 역사, 살아서 경험하지 못한 독립은 깊은 한으로 서렸으리라. 나라가 지켜주지 못했던 사람들, 예수님이 돌봐주지 못했던 사람들이 처절하게 죽은 땅 위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념’할 수 있을까.

학살의 광기, 평화의 공기

그 자리에서 필자는 감히 감사 인사는 꺼내지 못했다. 비록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얼굴 모를 옛 제암리 순국자들을 추모하고 싶었다. 내가 공원을 빠져나올 때, 마침 견학하러 온 어린이 무리가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고요했던 잔디밭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떠들썩해졌다. 학살과 같은 끔찍한 단어는 스르륵 사라지고 잔디밭 위를 펄럭이는 태극기들처럼, 그렇게 평화가 봄바람에 나부꼈다. 눈부신 봄날이었다.



글‧사진 유승혜 여행작가 

세부정보

  •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2023년 4월 17일~2024년 4월까지 장기 휴관

    누리집/ www.jeam.or.kr

    문의/ 031-366-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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