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옆집에 사는 예술가

알 듯 모를 듯한 세계를 쌓고 허물기

화성_전경선 작가의 작업실





화성 출생. 성신여자대학교와 스페인 바르셀로나대학교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2002년 서경갤러리에서 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부티크 모나코 미술관, 고도갤러리 등지에서 8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서울, 뉴욕, 홍콩, 싱가포르 등 국내외 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경기대학교, 스페인 바르셀로나 Caixa Terrassa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돌아서면 그곳에는


전경선 작가의 작품 세계는 “이차원과 삼차원 사이의 유영(遊泳)”으로 압축 가능하다. 정확한 드로잉에서부터 치밀한 측량을 통한 나무로의 전이, 분방한 작업의 시작에서 섬세한 목조 조각의 마무리가 특징이며, 이는 흡사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를 연상시킨다. 압축은 이와 같은데 자꾸 돌아보게 된다. 처음 작업실을 찾은 날에도 그곳을 돌아 나오며 혹시 놓친 건 없는지 더듬게 되고 불쑥 솟아오르는 의구심은 오픈스튜디오를 마치고서도 다시금 작업실을 찾게 만들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돌아보게 된다. 무엇을 빠뜨렸을까. 생각은 거대한 물길처럼 유유하지 못하고 자꾸만 튀고 역류한다. 좀처럼 겪지 못하던 산란이다. 어디서부터 되짚어야 할지 촉수가 곤두서고 만다.


물론 전초가 있었다. 프리뷰의 서두는 “전경선 작가의 조각은 무언가 이상하다. 다르다.”였다. 이상하고 다름은 처음부터 감지했다. 여전히 이 이상함과 다름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는 생각은 부담이지만 한편 감사하다. 결코 수렴될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말과 글은 얼마나 단정 짓고 오해해 왔을까. 여전히 간질간질한 호기심을 품게 하는 작품과의 대면은 즐거움이자 선 긋고 돌아서고야 마는 관행에 대한 자각이다. 참 오랜만에 지금의 판단을 숙고하게 만드는 작품과의 만남, 작가와의 만남은 내 안의 미성숙과 한참 만나게 만든다. 아마도 이 글은 쌓고 허무는 건축처럼 이루어질 듯하다. 여러 방위에서 최초의 앎을 재고하고 초려하는 반복적 작업이 되지 않을까 짐작한다.





마지막으로 작업실을 찾은 날, 무르익은 가을을 오후 해로 느끼며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이날은 누그러들지 않는 산란을 해소해 보고자 《옆집에 사는 예술가》를 함께 기획하는 이정화 선생님과 동행했다. 돌아보게 되는 마음이 있되 그 이유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조심스레 도움을 요청했고 선뜻 받아들여 주어서 마련된 자리였다. 나는 되도록 경청자가 되고 싶었다. 앞서 세 번의 만남이 있었고 으레 내 역할은 질문자이기도 했다. 내 질문이 훑지 못한 거기가 어디일까 듣고 싶고 알고 싶었다. 몸을 공처럼 웅크리고 되도록 가만히 들어 보았다. 대화는 큰 원을 그리며 일렁였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가 전편보다 훨씬 좋았다는 평과 〈인터스텔라(Interstella)〉에서 담은 시선의 문제에 대해 즐겁게 담소했다. 파올로 소렌티노(Paolo Sorrentino)의 영화 〈유스(Youth)〉와 미니시리즈 〈영 포프(The Young Pope)〉에 대한 이야기와 추천이 등장했다. 클레어 드니(Claire Denis)의 〈돌이킬 수 없는(Les Salauds, Bastards)〉에서의 폭력, 이 폭력의 정도와 배태의 논리에 대해 토론했다.





이야기는 전경선 작가와 이정화 선생님의 랠리로 이어졌다. 영화와 음악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사이 귀동냥만으로도 즐거웠고 시각적 주제들은 이르게 켜 놓은 히터의 주홍 불빛 정도의 공감각이 되어 방을 채웠다. 말하자면 SF와 지독한 현실의 큰 보폭에서 이건 SF, 이건 현실이라는 낙차가 거의 없이 모든 이야기가 숨을 쉬는 경험을 공유하며 뒤늦은 깨달음은 내가 전경선 작가의 작업을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 너무 일찍 일으켜 세웠을지도 모른다였다. 스케치가 조각이 되는 작업의 공정을 섣불리 물화(物化)한 건 아니었을까. 작업의 결과인 목조각의 형태에 갇혀서 그 이전까지의 흐름을 혹시 단편화하지는 않았을까. 결과로 빠르게 편입시켜 버려 미처 빛내지 못한 조각조각을 다시 더듬어 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일찍 답을 내리려 했던 눈이 늦게 트인 귀로부터 빚진 셈이다. 문을 활짝 열어 공기의 순환을 순식간에 만들어 준 이정화 선생님께 감사했고, 늘 솔직하고 상냥한 전경선 작가로부터 더욱 풍부한 음영을 찾은 날로 네 번째 만남을 기억한다.





세 번째 만남은 오픈스튜디오 당일이었다. 마당의 강아지 복돌이는 녀석에게는 처음일 그 많은 인파를 예측하지 못했을 테다. 말끔한 성격이신 전경선 작가는 《옆집에 사는 예술가》 작업실 중 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공간을 정리하였고 가장 적절하게 작품을 보여 줄 위치를 찾아서 수차례 고심한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관객이 전경선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건 당연하다. 철들며 어느 날 멈춰 버린 상상의 세계가 이 작품들에서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기로 꿈꾸던 상상의 세계가 삼차원에서 납작하게 눌린 상태로 둥실 서 있기에 작품 전체를 감상하기 위해 한 바퀴 원을 그리며 도는 관습적인 접근법은 전경선 작가의 작품에서는 직접 대입이 어렵다. 온전한 원과 반원 사이의 미묘한 걸음으로 동선을 잡게 되는 상황에서 적당한 시점을 타진하는 망설임 가득한 발길을 훔쳐보게 된다. 무릇 나무라면 짐작하는 무게를 작가는 흘러내리는 듯한 형태 처리를 통해 중력을 잠시 잊게 만든다. 사람이 있고 나뭇잎이 있고 새가 있고 녹아내리는 액체의 포착이 있는 이 작품들은 물론 정교하게 만들어진 그 능력만으로도 찬탄을 자아낸다. 목조에 대한 친연성은 작가가 일찍 습득하였기에 이제는 집중력 있게 작업에 임하면 대형 작품도 혼자서 한두 달이면 너끈히 완성해 낸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감탄에서 이 감탄의 당연함에 홈을 내고 싶은 마음에 조급함을 느꼈다. 그날 미처 틔우지 못한 물길은 무엇이었을까.




숨은그림찾기처럼 관객이 스케치와 작품의 조응을 찾기를 바라고 이 스케치가 작품이 되는 과정에 대한 정보를 통해 작업 과정을 유추하게 만드는 안내는 쉽다. 작가와의 대화에서 재채기가 터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순간은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수순으로 생각했던 많은 것들에 대한 역행이었는지 모르겠다. 행위의 수순, 차원의 수순과는 무관하거나 비논리적일 수도 있을 물음을 나조차 미처 묻지 못했기에 남은 아쉬움이 있다. 눈치챈 분들도 있겠지만 이 글은 거슬러 오르는 구성이다. 유행하는 타임 슬립이나 영화적 장치가 현재의 아쉬움을 과거로 회귀하여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시간 여행은 현재를 더 풍성하게 만들 단서들을 수집하기에 그토록 끈질기고 반복적으로 갈망하는지 모른다.




                                                        〈선물〉, 450×150×100㎝, Painting on Almaciga Wood, 2012



둘 하나


처음 전경선 작가의 작업을 보고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를 대입해 보았다. 움직이지 않는 물체에 영혼을 불어넣는다는 의미의 애니미즘에서 유래한 애니메이션의 기원을 생각했고 구체적인 형상으로 솟아오른 이 조각들에 퍽 적합한 대입이라 여겼다. 행위의 수순과 차원의 수순에서는 적절한 발견인데, 그런데 왜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를 썼을까. 이 책은 2만여 행에 달하는 총 15권으로 구성된 그리스 로마 신화집이다. 신들, 반신들, 인간, 동물, 식물, 돌들, 별들로 서로 변형하는 이야기인데 ‘변신’이란 형식을 제외하면 전체를 관통하는 통일된 플롯도, 사건의 중심에 있는 영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연구된 바 있다. 1) 따라서 『변신 이야기』는 무엇으로부터 무엇으로의 변신의 나열이면서도 현재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만물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그 연원을 밝혀주는 은유적 길잡이다. 그런데 이 은유적 인과를 관조하는 태도에서 변신의 계기에 주목해 보면 변신에는 강렬한 기제가 작동한다. 단장(斷腸)할 기도, 돌이킬 수 없는 모욕, 추락한 명예의 복권과 같은 그 무엇이 없이는 변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물 유전이라는 해탈은 도저히 어쩔 도리 없는 아득한 깨달음인데 이 깨달음을 쌓았을 수많은 변화의 순간들은 떠올릴수록 생생하여 눈을 감고만 싶어진다.



〈투명한 것에 대하여(About the Things That Are Transparent)〉, 270×280×200㎝, Wood, 2010



나뭇가지가 되고 빗물이 되고 촛농이 되는 이 ‘되다.’의 과정은 나뭇가지이고 빗물이고 촛농인 존재 상황보다 비록 미세하지만 단층처럼 자리할 매 순간의 매끄럽지 못할 이접의 집산이다. 전경선 작가가 제시하는 전이(轉移)는 사물의 상태 변화나 장소나 위치를 옮기기, 의학적으로 종양 세포가 다른 장소로 이행하거나 에너지의 옮겨 감을 뜻하는 물리적 의미라기보다 어쩌면 정신분석학에서 다루는 개념에 가까운 것이지 않을까. 정신분석학에서 전이는 초기에 발생한 미해결되고 무의식적인 경험이 현재의 관계성에 부가된 감정적(정서적) 반응으로, 내담자가 치료 과정에서 자신이 유년기에 갈등을 겪었던 대상과의 경험을 상담자에게 옮겨서 재경험함을 의미한다. 억측일지도 모르겠지만 작가는 스스로 내담자가 되었다가 또 스스로 상담자가 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조각하는 일련의 과정은 언제 해결될지 모를 상처를 매만지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전경선 작가의 작품 앞에서 쉽게 치유와 위안과 꿈에 대해 말하지 못하겠다. 최종의 것들이란 물리적인 현재를 드러낼 뿐 겹치며 부딪힌 ‘되기’의 순간들은 이 현재에서 찾기 요원하다.



〈기억-10월 비오는 오후에(The Memory In the Late Afternoon in April)〉, 350×300×400㎝, Wood, 2006



되돌아서면 그곳에는


예상했으나 더 묻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다. 더 묻는 순간 깨져 버릴 것만 같아서 전경선 작가에게 집요하지 못했다. 나는 사실 작가에게 많이 묻는 편이 아니었다. 미술은 시각적 결과물로 갈음해 온 습관이 있다. 그런데 전경선 작가에게는 더 물었어야만 했다는 후회도 있다. 심연에 자리한 변신의 계기를 감내해 내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다만 단정 짓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한 돌아보기로 미안한 마음을 덜어 본다. 그리고 그녀의 전이의 행위에 조용하게 응원을 덧대고 싶다. 적어도 그 ‘되기’의 결심과 기도를 헤아리며 다른 이들에게도 짚어 주는 이 글쓰기가 그녀에게 전해지기를 바라 본다.


『변신 이야기』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찾아보다 오비디우스의 추방에 대한 글을 접했다. 로마 문학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오비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갑작스런 추방을 당한다. 그는 자신의 추방 원인을 시(carmen)와 과오(cupla)라고 밝혔다. 추방의 원인은 절대 누설되어서는 안 되며 그와 함께 사라져야 했다고 언급했다. 그가 ‘본’ 과오에 대해서 보았다는 의미를 ‘깨달음’의 은유로 해석2) 하는 글을 읽으며 본다는 행위가 수반해야 할 깨달음에 대해 생각의 고리를 이어 나간다. 보기는 직설이 아니라 은유이구나. 내가 보았다는 증언은 단순히 봄을 넘어서 알고 이해하려는, 혹은 오해하려는 적극적인 행동도 수반한다. 본 사람은 증언하는 자인데 지금 나는 그녀의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지 반추해 본다. 이상하고 다르다고 했던 첫 느낌에서 조금은 움직였을까. 더불어 시인이 본 것을 전경선 작가에게 투사해 본다. 그녀가 깨달은 세계에서 바로 이 깨달음, 그 배움을 감히 생각해 보면서 오래전부터 마음에 새겨 둔 구절을 떠올린다. “배움은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같은 것이라고, 시인 이성복이 던진 배움이다.


“결국 모래성 같은 글이라서 미안해요. 여전히 의구심을 거두지는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채우지 못한 물음이 남아서 다행입니다.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만듦이 작품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즈넉한 산중턱의 작업실이 다시 작품으로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다섯 번째 그리고 그 이후의 만남도 기약해 봅니다. 부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글_김현주(독립기획, 미술비평)







글쓴이
옆집에 사는 예술가
자기소개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창작공간이자 때로는 도전적이고 개방적인 실험의 장으로서 끊임없이 진화해 온 창조적인 장소, ‘예술가의 작업실’에 가 보신 적이 있나요? 《옆집에 사는 예술가》는 지역사회의 중요한 문화 자산인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예술가의 일상을 공유하는 대중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활동해 온 경기지역 예술가들을 만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