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구리에는 왜 광개토대왕 동상이 있을까?

국내 최소 면적 도시의 이름난 홍보모델


구리를 품고 있는 자연은 그냥 자연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왕도와 선비문화와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이 도처에 숨 쉬고 있는 기품 있는 자연이다.

그 좋은 기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옮아 붙어

그 애들이 훌륭한 인재로 자라리라는 축복의 말을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박완서, 『노란집』, 열림원, 2013


박완서 작가는 1998년부터 타계한 2011년까지 구리시 아치울마을(아천동)에 거주했다. 33.33㎢. 기억하기 좋은 구리시 면적이다. 구리시민들이라면 면적 얘긴 이제 지겨울 테고 거주자가 아니어도 구리시 면적 언급은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리시에 대한 별다른 정보가 없는 이들에게 ‘국내 시‧군 중 가장 작은 면적’이라는 사실은 흥미를 끌기에 더 없이 좋은 소재다. 구리시와 이웃한 서울시 송파구의 면적이 33.88㎢로 구리시와 비슷한 규모다. 게다가 서울과 붙어 있다 보니 ‘서울인 듯 서울 아닌 서울 같은’ 경기도 소도시다. 한편 경기도에서 가장 넓은 지방자치단체인 양평군은 877.69㎢으로 구리시보다 26배가 크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거짓은 아닌 말로 ‘구리 안에서는 차로 어딜 가든 10분을 넘지 않고 택시 요금은 1만 원 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어쩌다 구리는 이렇게 작은 도시가 되었을까?

사실 시市의 역사는 아직 청년이나 다름없다. 간단하게 역사를 짚어보면 고려와 조선시대 때는 주로 양주목 안에 포함되어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현 명칭인 구리九里라는 이름을 처음 얻었다. 양주군 구지면의 ‘구九’자와 망우리의 ‘리里’자를 따서 구리면이라 한 것으로 이후 1980년까지 내내 양주군 관할이었다. 이후 잠시 남양주군으로 소속되었다가 구리읍의 인구 증가로 1986년 남양주에서 분리되어 시로 승격되었다. 과거 남양주시와의 통합 논의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렇다 할 진전 없이 흐지부지 끝났다.



구리시 광개토태왕광장의 광개토태왕 동상


그러나 구리시는 지난 세월 꾸준하게 인구가 증가해왔고 상권을 확대하면서 ‘작지만 강한 지자체’로 도시 기반을 다져 왔다.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지도를 만들 일이 없는 이상 여행자에게 도시 면적이 작다고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진 않다. 도시가 커도 명소들이 촘촘히 붙어 있는 경우가 있고 도시가 작아도 명소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 반드시 차를 이용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리는 서울의 최측근 도시라 대중교통의 이용 또한 수월해서 ‘작은 면적’이라는 정보는 그저 알아두면 흥미로운 상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면적을 강조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구리 여행의 키워드가 ‘고구려’이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어떤 국가인가. 한반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누볐던 고대왕국이다. 광개토대왕, 장수왕이 집권하던 5세기는 고구려의 전성기로 고구려는 한반도 중북부 전역과 오늘날의 만주, 요동반도, 연해주에 이르는 드넓은 영토를 차지했다.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동위에게 밀리면서 북방의 영토 대부분을 잃고 말았지만 고구려의 기백과 강력한 군사력은 역사에 길이 남았다. 사실 고구려는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신라와 백제에 비해 가장 덜 친숙한 고대 국가다. 유적이 온통 북한과 중국에 있어 고구려의 흔적을 가까이 접할 기회가 없어서다.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해 여러 고구려 유적이 분포해 있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는 합법적으로 갈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물론 남의 나라에 가서 우리의 옛 역사를 확인한다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평양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과 평양성, 대성산성을 대한민국 국민이 직접 방문해 구경할 날은 언제 올까.



구리시 아차산 고구려대장간마을 전경


구리시 아차산의 명소, 고구려대장간마을에서 아차산로를 따라 구리시내 방향으로 3km만 가면 구리의 수문장 같은 높이 4m의 커다란 청동입상을 만날 수 있다. 구리경찰서 맞은편 작은 광장에 선 인물은 광개토대왕이다. 광개토대왕하면 갑옷을 걸친 장수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데 동상은 관복을 입고 관모를 쓴 인자한 왕의 모습이다. 오른손에 든 작은 구球는 태양을 상징하는 세발까마귀, ‘삼족오’가 새겨진 알이다. 삼족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고대 국가에서 두루 쓰여 왔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 각저총 등에 그려져 있어 고구려의 상징적인 문양으로 각인되어 왔다. 동상은 2002년에 세워졌다. 우리나라의 첫 광개토대왕 동상이다. 국내 최소 면적 지자체의 ‘홍보모델’이 무려 한반도 최대 영토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이라니.

이게 다 아차산성과 아차산 보루군 덕분이다. 아차산성은 서울 관할이고 보루군은 눈에 확 띄는 랜드마크급 문화재가 아니다보니 광개토대왕을 시의 얼굴로 내세우긴 살짝 무리가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또 475년, 한강 유역의 한성백제를 완전히 점령해 지배 영역으로 만든 인물이 장수왕이다 보니 ‘이름값’ 때문에 너무 아버지만 띄워주는 게 아닌가 오해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광개토대왕이 396년에 아차산성(아단성)을 점령하고 아신왕을 굴복시켜 백제의 방어거점을 무너뜨린 공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세종대왕과 더불어 ‘대왕’ 칭호로 후세에 길이 명성을 떨치는 광개토대왕을 시의 상징 인물로 세운 구리시의 결단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광개토태왕 동상 뒷모습


이쯤에서 잊을 만하면 간간히 미디어에 노출되는 광개토대왕의 호칭 논란을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동상을 받치는 돌탑에는 ‘광개토태왕’이라 새겨져 있고 동상이 세워진 광장의 정식명칭도 광개토태왕 광장이다. 사실 우리에겐 광개토대왕이 익숙하고 가장 널리 쓰이는 표기다. 이는 『삼국사기』에 표기된 ‘광개토왕’에 업적을 존경하는 의미로 ‘대왕’이라 높여 부르기 시작한 것이 현대에 굳혀졌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책이라는 점, ‘태왕’이란 칭호가 여러 사료에 등장하는 점 등에서 광개토대왕이 아닌 광개토태왕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

가장 강력하고 정확한 증거는 광개토대왕릉비다. 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영락태왕永樂太王’ 등으로 표기했다. 경주 노서리 호우총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청동제 그릇 바닥에도 정확하게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 새겨져 있으니 광개토태왕이라 부름이 맞다. 사실 광개토대왕을 태왕으로 맞게 부르려면 고려 광종도 황제라고 칭해야 하며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등 신라 초기 왕들의 칭호도 엄격하게 지켜 써야 한다. 사실상 편의를 위해 ‘왕’으로 통일해 부르는 것인데 광개토왕이 광개토대왕이라는 고유명사로 굳혀지자 ‘대왕’이 아니라 ‘태왕’이라고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늘 나오는 것이다.

이 칭호 문제가 단순하지만은 않다. 태왕 아래 왕을 둘 수 있는 고구려의 정치구조 때문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부분에는 고구려 대주류왕이 백성 1만여 명을 이끌고 투항해온 동부여 대소왕의 친족을 왕으로 책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왕이 자기 밑에 또 다른 왕을 두었음을 의미한다. 이때 ‘태왕’은 그 아래 왕과 구분 지을 수 있는 최상위 군주의 칭호가 된다. 우리나라는 위계질서의 전통이 유구한 탓에 오늘날까지도 호칭 문제로 왈가왈부하는 일이 많은데 역사 속 왕들마저 호칭 정리가 쉽지 않다. 이 글에서는 그간 익숙했던 ‘광개토대왕’의 칭호를 쓰고자 한다.



광개토태왕동상과 광개토태왕비 복제비


동상 옆에는 높이 6.39m의 광개토대왕비 복제비가 세워져 있다. 전술했듯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서 실물을 볼 수 있는 비석인데 2008년, 사학자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실제 비석과 같게 만들어 광장에 세웠다. 비석은 왕릉 앞에 있던 묘비냐 아니냐를 놓고 의견이 갈리는데 일단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는 태왕릉, 장군총과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고 비문의 내용 또한 광개토대왕의 신상보다 고구려의 건국과정과 시조에 대한 내용을 먼저 소개한 점 등이 그 쟁점이다. 어쨌든 광개토대왕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414년(장수왕 3년)에 아버지의 업적을 찬양하고 추모하기 위해 능묘 곁에 세운 비석이라는 점이 중론이고 이 비석 덕분에 우리는 고구려 역사의 실체에 좀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었다. 비석 앞에는 ‘중국 현지에 가지 않더라도 누구나 쉽게 견학할 수 있도록 구리시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건립했다’는 건립 배경이 쓰여 있다.

광개토대왕비 복제비는 구리뿐만 아니라 연천 호로고루, 천안 독립기념관 등에서도 실물 크기로 볼 수 있지만 고구려의 도시 구리에서 광개토대왕 동상과 나란히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광장에 일부러 들러 동상과 비석을 꼼꼼히 살피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저 아담한 시민공원이라서 소개하는 입장에서도 반드시 들러 보라고 추천할 만한 장소가 아니다. 그저 구리 시내를 오가다 동상을 보게 될 때 그 주인공이 광개토대왕이라는 것만 알아도 충분하다. 구리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광개토대왕 동상이 왜 구리에 세워졌을까?’라는 궁금증으로 구리를 돌아봐도 흥미로울 여행이 될 것 같다.


구리시의 유명맛집인 묘향만두의 평양식 만둣국. 구리에 방문하면 한번 들러봄직하다. 

                                                                    구리시 여행 영상 보기 | 출처 유튜브 채널 TravelBoss_돼지보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33권 『50만 살의 청춘- 경기 북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구리시 : 보루와 뿌리>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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