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산성 안 아늑한 도량,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남한산성 장경사를 돌아보며



장경사 주변인 남한산성 동쪽 성벽 모습


유난히 추웠던 그 해, 남한산성

남한산성의 계절은 늘 겨울에 닿아있었다. 영화와 소설로 대중에 노출된 남한산성의 이미지는 춥고 둔중하다. 살을 에는 추위 속의 격전과 설전, 끝내 패전으로 이어진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 남한산성의 겨울은 실로 그러했을 것이다. 상상을 보탠 영상과 글이 아닌 오직 역사 기록만으로도 가슴이 시리다.

1636년 12월 4일 청의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들이닥쳤고 인조는 같은 달 14일 도성을 벗어나 남한산성으로 들어섰다. 성은 견고하고 탄탄했고 조선군은 공격과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고 군사의 식량이 떨어진 상황에서 결국 인조는 청에 항복했다. 이듬해 1월 30일, 산성행 47일 만에 산성 서문 밖을 빠져나간 인조는 현재의 석촌동 부근인 삼전나루터에서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당했다. 오늘날, 삼전나루터 표지석이 세워진 자리 옆에는 고개를 높이 쳐들어야 최상층이 보이는 국내 최고층 빌딩 롯데월드타워가 자리한다.

병자호란 이후 겨울은 더욱 매서웠다. 기근과 전염병으로 봄이 오고 여름이 와도 나라는 빈곤했고 김상헌의 시구처럼 하 수상한 시절이 이어졌다. 김상헌은 인조 때 예조판서를 지니며 청나라와의 타협을 거부했던 이다. 그러니 남한산성을 떠올릴 때 초록의 무성함은 없고 오직 차갑고 쓸쓸한 계절만이 성벽과 함께 영원할 것 같던 것이다.



장경사 주변인 남한산성 동쪽 성벽 모습


5월의 남한산성은 초록으로 무성하고

남한산성은 해발 480m 이상의 산세를 따라 12.4km의 성벽으로 축조되었다. 통일신라시대 때 당나라의 공격을 대비해 쌓은 토성 주장성이 남한산성의 기원이다. 정유재란으로 조선 선조 때부터 수축론이 대두되며 개보수되다가 1626년 인조 4년 때 개축을 완료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에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임금이 피난하고 적에 맞서 싸우는 임시수도 역할을 하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비록 그 끝에는 굴욕이 있었으나 남한산성만큼은 1천 년이 넘는 성곽 발달사와 수도를 지키는 요새의 가치를 톺아볼 수 있는 위용을 간직하고 있다. 2014년에는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5월의 남한산성은 겨울이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울울창창하다. 정확히는 해발 522m 남한산이 푸르고 울창하다 해야 할 것이다. 성벽은 푸르른 잎사귀들에 가려져 겨울만큼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진 않으나 광주에서든 성남, 하남에서든 어느 방면으로나 일단 산성 안으로 들어서면 그 동선은 자연히 성벽을 따라 가게 되어 있다.



장경사 도량 입구의 은행나무


산성 보수와 관리에 동원되었던 조선 승려들의 본진

남한산성 동문(좌익문)으로 들어선 필자는 성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우측으로 꺾어 오르막길을 올랐다. 장경사 가는 길이다. 목적지는 장경사인데 남한산성과 한 몸이나 다름없는 사찰이라 서론이 길었다. 북한산성에 중흥사가 있다면 남한산성에는 장경사가 있다. 성안에 있는 사찰이라 쉽게 추측할 수 있듯 승군이 주둔했던 승영사찰이다. 동문에서 약 900m쯤 차도를 따라 오르면 일주문이 보이고 사찰 주차장을 담장처럼 두른 남한산성 흰 성벽이 눈에 들어온다. 나름 산골짜기 깊은 절이지만 도로가 잘 나 있어 자동차로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장경사 대웅전과 범종각


사찰이 세워졌을 때는 1638년 인조 16년으로 병자호란 이후다. 인조는 일찍이 1624년 남한산성을 고쳐 쌓을 때 전국 팔도의 승려들을 번갈아 징집해 성을 쌓게 했다. 당시 공사 총책임자가 승려 벽암 각성대사였다. 불교가 배척받던 시기에 노역에 동원되고 전쟁이 나면 승군으로 칼과 죽창을 들고 나섰으니, 당시 승려들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수도자 생활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전후 무너진 산성의 보수와 증축에 승려들이 동원되었다. 이때 이들의 숙식을 위해 장경사를 포함해 개원사, 한흥사, 국청사 등 7개의 사찰이 지어졌다. 숙종 때에 이르러 산성 안 사찰은 10곳에 이르렀으나 세월이 흘러 대부분 폐사되었다. 특히 1907년 일제가 군대 해산령으로 성내 사찰의 무기고와 화약고를 폭파하면서 남아 있던 사찰 여러 곳이 무너졌다. 현재는 장경사와 망월사, 개원사가 명맥을 잇고 있으며 이중 장경사가 창건 당시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장경사 팔각구층석탑과 요사채, 무심당


장경사, 요새 안의 요새

일주문을 지나면 수호목으로 도량 입구에 선 커다란 은행나무와 익살스레 웃는 포대화상이 이방인을 맞이한다. 산성의 보수와 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승군 사찰이기에 그 입지는 평탄하지 못하고 외곽에 치우쳤다고 하나, 절의 규모가 작고 여기저기 매만진 노력 덕분인지 도량은 평지 사찰 못지않게 안정감이 느껴진다.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해 절마당에는 오색연등이 걸려 있고 도량 곳곳 꽃이 피지 않은 자리가 없었다. 산성 안으로는 한참 전에 들어왔음에도 이곳 장경사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요새’에 안착한 기분이었다. 그 아늑함과 온화함이 좋아 절마당을 느릿느릿 누볐더니 우연히 마주친 스님이 점심공양을 권했고 조금 지나 보살님 한 분이 또 한 번 점심공양을 권했다. 탐방객들이 숱하게 드나드는 절에서 부러 공양을 권하는 일도 드물어서 절의 푸근한 첫인상이 단순히 외관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삼성각 앞에서 바라본 장경사 도량


다소곳한 대웅전, 다정한 한글 주련

사찰이 옛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는 하나 주요 건물들은 비교적 최근에 다시 지었다. 1975년 원인 모를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대웅전을 비롯한 현재의 전각들은 1958년에 찍은 장경사 전경 사진을 토대로 복구했다.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의 대웅전은 도량 중심의 주불전이지만 화려하거나 웅장하기보단 다소곳한 인상이다. 대웅전이 있는 석축 위로 정성스레 꾸민 꽃밭 덕분에 더욱 참하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의 주련이 모두 한글인 점도 인상적이다. 주련이 부처의 말씀을 함축적으로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면 오늘날에는 한자보다 한글이 더 유효할 테다. 덕분에 필자도 시구를 읽듯 기둥의 한 줄 한 줄을 읊고 또 머금었다.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장경사 동종 _ 사진출처: 문화재청


비록 전각은 오래되지 않았어도 대웅전 안에는 장경사의 역사를 증명하는 오래된 동종이 보존되어 있다. 높이 82.5cm, 하단 지름 53cm로 1682년에 제작된 동종은 일제강점기 때 서울 봉은사로 옮겨졌다가 100여 년만인 지난 2014년 제자리로 돌아왔다. 네발로 천판을 딛고 있는 괴수 모양의 용뉴와 음통 전체를 휘감은 용의 몸체가 돋보이는 종으로 6‧25전쟁 때 생긴 총탄 자국이 여러 군데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조선 후기의 전통적 양식을 띄고 있으며 표면에는 정2~3품에 해당하는 고위직 인사들의 이름이 시주명단으로 적혀 있다. 당시 장경사의 입지가 컸음을 시사한다.



승영사찰이었던 영향으로 대웅전보다 규모가 큰 요사채 모습


매년 의승군 추모하는 수륙재 열어

대웅전을 등지고 왼편에 보이는 홀처마에 맞배지붕 건물은 요사채다. 툇마루가 있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 양식의 요사채인데 단청 없이 청빈한 자태다. 승군이 주둔했던 승영사찰답게 대웅전보다 덩치가 커서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요사채에는 장경사라 쓴 현판 걸려 있다.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사찰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장경사는 2012년부터 남한산성을 쌓고 지켰던 의승군을 추모하는 수륙재(수륙무차평등대재)를 매년 봉행해왔다. 의승군문화제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열어 수륙재를 중심으로 의승군의 호국정신을 기린다. 쉬이 잊혀간 승군의 활약과 남한산성 내 불교문화가 장경사를 중심으로 다시금 조명되고 있음이 반갑다.



장경사 삼성각과 기도를 올리는 불자


대웅전 뒤쪽 계단을 오르면 삼성각이다. 여름이라 우거진 수풀에 숨은 듯 가려져 있다. 그 길목에는 티베트 사원에서 볼 수 있는 마니차(경통)가 설치되어 있다. 불자들에게는 윤장대처럼 마니차를 돌리면 불경 전부를 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믿음이 있다. 대웅전이든 삼성각이든 도량을 조망할 수 있는 전각 앞에 서면 시선이 먼저 가닿는 것은 마당 가운데 높이 선 팔각구층석탑이다. 1995년 조성한 탑으로 주목할만한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는 아직 없지만 이 아담한 절을 한층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 한몫한다. 세월이 한참 흐르면 장명사의 랜드마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행궁, 성곽 탐방로, 수어장대…. 둘러볼 곳 많은 남한산성

다시 사찰을 빠져나와 성안 구석구석을 돌아본다. 남한산성에 들어오면 산성옛길 등 탐방로 트레킹이 아니더라도 볼거리가 많고 먹고 쉴 데도 많다. 세계유산 등재 이후 기존의 유원지 같은 이미지는 많이 희석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남한산성에 식사나 커피를 즐기러 방문하는 이들이 많다. 남한산성 백숙거리는 복날이 아니더라도 사철 붐비고 매년 늘고 있는 대형 카페들은 자연 속에서 커피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로 만석이다.



남한산성 행궁 한남문 전경


산성 안에서 먹고 쉬는 것도 좋지만 남한산성 행궁은 꼭 들러 볼만하다. 경기도민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행궁은 임금이 도성을 떠나 행차하면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다. 1625년 준공한 70여 칸의 남한산성 행궁은 인조가 47일간 머물렀고 이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이 여주 영릉과 서울 헌릉, 인릉으로 향하는 길에 머물렀다. 이후 일제에 의해 훼손되고 1925년 대홍수로 파괴된 행궁을 2002년부터 순차적으로 복원해 현재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행궁 가운데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두었으며 통일신라시대 건물지도 볼 수 있다. 그밖에 남한산성의 웅장한 누각인 수어장대, 성벽 곳곳에 숨어있는 암문 등을 짧게는 2.9km, 길게는 7.7km에 이르는 여러 갈래의 산성 탐방로를 통해 돌아볼 만하다.


글‧사진=여행작가 유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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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장경사

    위치/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676

    문의/ 031-743-6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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