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 양성면 미산호수

미리내성지로 향하는 길목에는 미산저수지라는 작은 호수가 하나 있다. 규모가 작아서 달리는 길에 관심 있게 옆을 봐야 보이고 제대로 보려면 저수지 둘레길을 걸어야 한다. 미산저수지는 시궁산과 쌍령산의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미리천을 둑으로 가두어 1984년에 축조한 관개시설이다. 느릿느릿, 한 시간이면 걷는 둘레길은 솔뫼길이라는 이름이 따로 있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당진의 솔뫼성지에서 따온 이름이다. 근처에 매운탕집, 카페도 있고 무엇보다 미리내성지가 가까워서 그곳의 방문자들이 솔뫼길 산책자가 되곤 한다. 저수지를 바로 눈앞에 두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한 카페는 이 일대 명소가 되었다. 나도 여러 번 친구, 가족과 그 카페를 찾아 호숫가 커피를 즐겼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안성도 저수지를 ‘호수’로 바꿔 부르며 관광 자원화하려는 움직임을 수년 전부터 본격화했다. 이른바 ‘안성시 호수관광 종합 발전계획’인데 관광 자원화할 만한 환경이 갖춰진 관내 12개 저수지를 각각의 특성을 살려 휴식과 여가의 공간으로 개발, 정비하겠다는 것이다. 미산저수지도 그중 하나다.  

안성시 원곡면 칠곡호수

내가 어린 시절 살았던 죽산면 두현리 집 앞에도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네다섯 살 때였나. 엄마를 따라 수문 위를 걸어 방죽에 갔던 적이 있다. 난간 없이 간격이 좁은 콘크리트 수문 위를 무서워하며 건넜던 희미한 기억이다. 애당초 사람 건너라고 만든 구조물이 아니었으므로 꽤 위험했는데 굳이 둑 위에서 놀고 싶어 그곳을 건넜던 것 같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체로 사람들은 물가를 좋아하는 것 같다. 지금 그 저수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흙으로 메워진 지 오래고 논밭이었던 주변은 여러 동의 대형 물류센터가 들어섰다. 작은 저수지들은 이렇게 많이 사라졌을 것이다.  

전국에는 1만 7천 개에 달하는 저수지가 있다. 이중 한국농어촌공사가 관리하는 저수지는 3,400여 개인데 대부분 규모가 큰 저수지들이다. 우리나라 저수지는 가뭄 때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왔지만 많은 근대식 저수지가 일제강점기 때 산미증식계획 아래 만들어졌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도 정부는 쌀 증산을 위해 농업용수 개발에 집중적인 투자를 계속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저수지가 축조되었다. 안성에는 현재 65개의 저수지가 남아 있다. 저수지의 개수가 무려 1천 개가 넘는다는 경북 영천에 비하면 작은 숫자지만 경기도에서는 가장 많다. 한국농어촌공사가 관리하는 경기도 내 저수지 96개 중 18개가 안성시에 속해 있다. 저수용량 또한 도내에서 두 번째로 저수지가 많은 포천시의 5배에 이른다.  

안성시 서운면 청룡호수

일상적인 대화에서 ‘내 고향은 저수지가 많다’는 사실은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쓸모없는 자랑이다. 실제로 나는 안성에 저수지가 많은 줄도 몰랐고 저수지 자체에 관심도 없었다. 귀향 후에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저수지 주변에 카페가 많이 생겼다는 점을 인지했다. 그리고 얼마 뒤 무려 ‘호수의 고장’이라는 안성시 홍보와 ‘호수관광화사업’이라는 창대한 계획을 접한 것이다. 일단 내 머릿속에 호수의 고장은 호반의 도시 춘천뿐이었다.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 호수가 안성에 있었나? 어쩌다 그 많은 저수지가 호수로 개명한 것일까? 

안성시 공도읍 만수호수

저수지를 호수로 부르는 추세는 안성만이 아닌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는 호수와 저수지의 차이는 간단하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구경 가면 호수, 구경을 안 가면 저수지다. 한국수자원공사는 저수지를 ‘필요할 때 물을 쓸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둑을 쌓아 물을 모아두는 못’으로 정의하고 호수를 ‘지각활동이나 화산작용처럼 자연 활동을 통해 움푹 파인 지형에 물이 고여 만들어진 것’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인공적으로 호수를 만들기도 해서 이를 인공호라고 하는데 이는 저수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라 결과적으로는 호수가 저수지보다 좀 더 큰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된단다. 그러니까 명칭 변경을 한다고 문제 될 것은 없고 굳이 바꾸는 이유는 대부분 사람이 나와 다르지 않은 호수, 저수지 간 인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권과 인접한 전국의 많은 저수지가 농업용 용수에서 관람용‧레저용 담수로 그 쓸모의 비중이 옮겨지고 있으니 당연하다. 물론 사람들의 인식에서 저수지가 호수로 바뀌는 데는 돈과 시간이 많이 든다.  

전문가들은 낙후된 저수지를 예쁘게 꾸미는 것도 좋지만 치수기능, 즉 홍수를 막는 기능의 개선이 먼저라고 말한다. 농업용 저수지는 보통 물을 공급하는 이수 기능에 치중되어 있고 홍수재해에는 매우 취약하기에 기후변화가 점점 더 극심해지는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 맞는 말이다. 수년 전 안성시 죽산면에 집중호우가 퍼부었을 때 상점가 일부가 물에 잠겼는데 가까운 용설저수지의 물이 범람해 피해가 컸다. 저수지의 제방 둑을 높이고 준설을 하는 등 치수기능을 높이고 일률적인 저수용량의 기준을 확대 적용해야 한다.  

안성시 공도읍 만수호수

안성시 저수지들이 치수기능을 갖추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주요 저수지들은 대부분 둘레길을 조성하고 공원, 야영장, 분수 등을 갖춰 휴양 및 관광 기능을 보강했다는 점이다. 미산저수지에서 남쪽으로 15분 정도 차로 이동하면 만나는 고삼저수지는 안성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저수지다. 1962년 축조된 저수지로 여의도 면적과 비슷한 85만 평 규모로 20만 명이 1년간 사용할 수 있는 1,500만 톤을 담수할 수 있다. 이곳에서 매년 봄이면 풍년을 기원하며 수문 일부를 개방하는 ‘통수식’이 열린다. 고삼저수지의 담수는 안성은 물론 용인, 평택, 천안 일부 지역까지 공급된다. 농업용수 공급원으로 그 역할을 현재까지 충실히 하는 중이다. 그런 고삼저수지도 최근에 가보니 수문 쪽에는 하늘로 치솟는 물기둥 분수가 방문자를 맞이하고 인라인스케이트장도 보인다. 저수지 둘레로 농로와 마을길은 있는데 도보전용 둘레길은 아직 계획 중이다. 규모가 커서 저수지 전체를 조망하긴 어렵고 여름이면 수변을 뒤덮는 연잎과 분홍빛 연꽃이 아름다운 향림마을에 들르거나 한적한 낚시터 주변에서 잠시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는 일이 고삼저수지를 ‘감상’하는 방법이다. 원래 향림마을은 저수지가 축조되면서 물에 잠겼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타지로 이사하거나 수몰지구를 벗어난 고지대인 현재의 향림마을로 이동했다. 실향민이 먼 데 없다. 그러나 이제는 저수지 이전의 마을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머지않은 날에 기록만이 남을 것이다.  

안성시 고삼면 고삼호수 수문 앞 분수

고삼저수지의 규모와 분위기, 수몰의 역사 등은 가까운 용인시 이동저수지와 닮았다. 이동저수지는 최근 몇 년 그 주변에 대형 카페들이 많이 들어섰다. 넋 놓고 물 구경하기 좋은 카페들이다. 고삼저수지는 어떻게 호수화되어갈까.   지난여름에 향림마을 건너편, 꽃뫼마을의 작은 카페에서 사람 얼굴 두 배만 한 크기의 연잎에 담아주는 우유빙수를 먹었다. 빙수 위에 연잎가루도 조금 뿌려져 있었다. 빙수를 먹고 연밭을 돌아보고 시에서 만든 저수지 전망대에서 저수지 중앙의 비석섬, 팔자섬 등을 바라보다가 집에 돌아왔다. 꽤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은 저수지에서의 여름날이었다. 적고 보니 이미 내게는 고삼호수가 되었나 보다. 여하간 안성시에서 ‘호수’로 명명했으니 익숙하진 않지만 이제 저수지 대신 호수라는 이름으로 불러야겠다. 

안성시 금광면 금광호수 산책로 

안성시에서 제법 호수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저수지는 금광일 듯하다. 금광저수지, 아니 금광호수는 고삼호수 다음으로 큰 호수다. 1961년 완공될 때만 해도 전국 최대 크기의 저수지였다고 한다. 안성 원도심에서 차로 10분 거리라 나름 ‘도심권 호수’로 불린다. 안성에서 호수둘레길 하면 금광인데 호수 전체 둘레를 다 잇진 않았고 호수 동쪽 일부 구간을 ‘박두진문학길’이라 명명해 걷게 좋게 정비해놨다. 안성은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고향이고 그의 집필실이 금광호수 근처에 있어 박두진 문학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문학관도 수변에 있었으면 더 좋았으련만 차로 15분쯤 떨어진 안성맞춤랜드 내에 위치한다. 여러 요인을 고려한 결과일 것이다. 총거리 2.7km의 박두진문학길은 그 어떤 어수선함 없이 걷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아름다운 호숫가 길이다. 물 위에 세워놓은 수변데크길과 소나무가 울창한 수변 언덕길이 조화롭게 이어져 있어서 걷는 내내 지루함 없이 청량하다. 1시간 정도 혼자 생각하며 걷기에도,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걷기에도 참 좋은 길이다.

길 중간중간에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도 많다. 금광호수도 수변에 카페와 식당, 숙박업소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다. 그래서 안성시민들은 이따금 호숫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다음 ‘조금 걸을까?’ 해서 박두진문학길을 걷는다. 사실 타지에서 굳이 금광호수를 구경하려고 오진 않는다. 나도 딱히 누군가에게 추천할 만큼 시각적, 경험적 자극이 큰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간의 작은 변화들에 힘입어 가까운 곳에 사는 시민들에게는 서너 시간 쉬었다 가는 곳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안성시 공도읍 만수호수 

최근에 나는 공도읍의 만수호수를 가보고 퍽 마음에 들었다. 만수호수도 얼마 전 둘레길 정비를 마쳐서 호숫가 산책이 편하다. 수변에는 야자매트길이, 수면 위로는 나무데크길이 만들어졌고 곳곳에 새로 심은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주변은 논밭이고 멀찍이 아파트들이 보인다. 너무 고요해서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머문 월든 호숫가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택지지구, 번화가와는 거리가 있어서 오가다 가볍게 들를 수 없고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 둘레길이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숨어 있다시피 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호수라서 공도에 사는 사람들조차 잘 모른다.  

안성시 죽산면 용설호수

그런데 안성시가 관광개발하려는 대부분 관내 호수들의 사정이 만수호수와 다르지 않다. 외부인들을 끌어올 수 있을 만큼의 관광적 요소는 떨어지고 시민들의 여가와 휴식을 위해 존재하기에는 도보권에 있지 않다. 처음부터 관광적인 요소를 염두하고 지은 시설이 아니니 당연하다. 그래서 시에서도 개발을 주력하는 호수들을 대상으로 나름의 차별성 있는 콘텐츠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호수 근처에 야영장을 만들어 캠핑족을 받고 수변에서 주말 노천시장, 공연회 등 행사를 여는 용설호수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른바 ‘캠핑호수’다.     

그렇다고 큰 예산을 들여 출렁다리나 전망타워 등 개성 없고 지역 특색을 살리지 못하는 시설을 만드는 계획은 최악이다. 돈을 덜 들이고 호수를 홍보하는 현실적인 방향은 호수와 주변 관광지를 연계하는 것이다. 미산호수와 미리내성지를 한 코스로, 청룡사와 서운산, 청룡호수를 한 코스로 잇듯 말이다. 그러나 안성시가 기대하는 호수관광화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는 아마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나는 나대로 만수호수도 한 바퀴, 고삼호수도 한 바퀴 그렇게 이따금 콧바람이나 쐬려고 한다. 저수지의 고장, 아니 호수의 고장에서.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1권 『우리들의 캠퍼스- 경기 남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안성시 : 광대와 미륵>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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