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율곡이이 묘는 왜 신사임당 묘 보다 높은 자리에 있을까

파주 이이 유적을 돌아보며


파주에는 율곡리라는 마을이 있다. 화석정이 율곡리에 자리한다. 율곡 이이의 고향이라서 선생의 사후 붙여진 이름인가 싶었는데 그전부터 밤나무가 많이 난다해서 율곡리, 즉 ‘밤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이는 얼마나 애향심이 깊었기에 고향 마을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을까.


신사임당의 고향인 강릉 오죽헌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자연스레 율곡 이이의 고향도 강릉이라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오죽헌은 율곡 이이의 출생지로 율곡은 6세 때까지 외가 강릉에서 자랐다. 이후 벼슬길에 들어선 아버지를 따라 부계 집안이 있는 파주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런데 강릉은 신사임당, 파주는 율곡 이이라고 지자체끼리 약속이라도 했는지 책이든 인터넷이든 기념관이든 대부분의 율곡 이이 소개글에서 출생지와 고향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율곡 이이가 자주 찾아 시상을 떠올렸고 임진왜란 때 어두운 밤길을 걷던 선조를 위해 불태웠다는 화석정  


율곡이 어린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주 찾았던 임진강변 정자 화석정에서  9km 떨어진 파주 동문리에 ‘파주 이이 유적’이 있다. 이곳에는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자운서원과 율곡기념관, 율곡 이이 가족묘가 공원 형태로 한 자리에 모여 있다. 유적이 조성된 야트막한 언덕은 옛날에 자운산이라 불렸다. 자운서원의 이름이 산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이는 자운산에서 어머니 신사임당의 장사를 지내고 무덤 옆에서 삼년상을 치렀다. 이때 그의 나이 16세. 요즘으로 치면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기에 어머니를 잃은 셈이다. 수명이 짧았던 과거에는 흔한 일이었겠으나 아버지와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의지를 많이 했던 이이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삼년상을 마치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도를 익혔다. 불교로 삶과 죽음의 해답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율곡 이이의 영특함에 금강산 승려들은 ‘생불이 나타났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율곡 이이와 부인의 묘는 전후합장묘로 이이의 묘가 앞에, 부인의 묘가 뒤에 위치한다. 


이이가 슬퍼했을 자리, 그리고 그 자신도 묻힌 자리를 찾아 유적 공원의 가장 안쪽으로 향했다. 경사를 따라 산소가 계단식으로 들어선 율곡 이이의 가족묘다. 담장으로 둘러진 묘역으로 들어서기 전, 묘의 위치와 주인을 표기한 안내판을 훑어보는데 뜻밖의 사실을 접했다. 율곡 이이 부부와 율곡 이이의 맏형 부부 묘가 그들의 부모 산소보다 높은 자리에 조성된 것이다. 율곡 이이와 부인 곡산 노씨의 묘는 묘역의 맨 꼭대기에 자리한다. 이른바 ‘역장묘逆葬墓’다.



율곡 이이의 묘는 그의 부모 신사임당, 이원수의 묘보다 높은 자리에 위치한 역장묘다 


안내판 설명에 따르면 자식이 현달하거나 입신양명했을 경우 부모보다 높은 자리에 묘를 쓰는 당시 풍습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또 다른 자료들을 보면 당시 풍수지리에서는 혈자리를 우선해 묏자리를 보았기 때문에 역장을 크게 개의치 않았고, 역장이 금기시된 것은 17세기 이후 유교 질서가 확립된 후이기 때문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또한 율곡의 제자로 예학 사상가인 사계 김장생의 묘도 모친의 묘 윗자리에 있어 율곡 이이의 묘가 아주 예외적인 사례는 아니다.


이와 더불어 신사임당과 그의 남편 이원수가 묻힌 무덤을 ‘이이의 부모’라고 표기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작은 글씨로 부모의 이름이 병기되긴 했지만 신사임당이 아들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더 유명한 인물인 까닭에 한낱(?) 이이의 부모로만 지칭되는 점이 흥미롭다. 



이이 유적에 서 있는 율곡  이이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동상


이이의 맏아들 묘부터 이이의 부모, 이이의 맏형 부부, 이이와 부인 곡산 노씨의 묘까지 계단을 오르며 차례로 들른다. 모두 부부합장묘인데 이이와 부인 곡산 노씨의 묘는 그 형태가 다르다. 이른바 전후합장묘라 하는데 이이의 묘가 앞에, 부인의 묘가 그 뒤에 자리한다. 봉분이 하나가 되지 못한 사연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부인 노씨는 피난마저 단념하고 남편의 신주를 들고 몸종과 함께 이이의 묘소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왜군을 맞닥뜨렸다. 노씨는 왜군에게 “여기가 어디라고 침범하느냐”며 꾸짖었고 결국 왜군의 손에 죽는다. 노씨와 몸종의 시신은 한참 뒤에나 발견되어 구분이 어려웠고 이에 이이의 묘와 합장할 수 없었다. 죽은 이이의 입장에선 이런 참극이 없다. 그렇게 국방에 힘쓰자 주장했건만 결국 국력이 약해져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전쟁으로 인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자가 불탔으며 자신의 무덤을 지키려던 아내마저 적에게 살해당했으니 지하에서 통곡했을 것이다.



이이가 죽고 31년 뒤에 세워진 사액서원 자운서원


묘소에서 자운서원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율곡 이이가 죽고 31년 뒤인 1615년(광해군 7년)에 지방 유림들에 의해 세워진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란 왕에게 편액,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이다. 율곡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자운서원은 1713년(숙종 39년)에 그의 후학인 사계 김장생과 현석 박세채의 신주를 추가로 모시며 선현을 추모하고 지방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헐렸고 터에서 간신히 제사만 지내왔다. 그러다 1969년 후손들의 기금과 국비보조로 복원했고 이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다. 서원 내 가장 높은 자리에 율곡 이이의 위패를 모셔진 사당이 자리한다. 이이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도 봉안되어 있다.



자운서원 내 문성사에 모셔진 율곡이이의 위패와 영정


율곡 이이가 죽어서도 오랜 세월 영향력을 떨쳤던 까닭은 서인들이 그를 종주로 받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이 자신은 평생을 붕당 대립 해소를 위해 노력했다. 동인과 서인 모두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는 양시양비론을 주장했으며, 1575년(선조 8년)에는 양당의 당쟁 조짐이 일자 그의 주도하에 정쟁의 주요 발단이 된 김효원과 심의겸을 지방관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른바 을해당론乙亥黨論이다. 당대 집권층이었던 동인은 이이를 맹렬하게 규탄했고 이는 나중에 이이의 제자들로 형성된 서인들이 이이를 추종하는 상황을 만든다.



이이 유적 내에 전시관으로 마련된 율곡기념관


이이의 철학과 사상은 그의 우주관에 녹아 있다. 이이는 음과 양의 조화를 강조했다. 사람의 마음이 곧 하늘과 땅의 마음이므로 천지에서 일어나는 자연현상을 자연 탓으로 돌리면 안 되고 사람은 덕을 닦아 자연이 정상적으로 운행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했다. 이는 그의 이기론理氣論과도 궤가 닿는다. 그는 이의 가치와 기의 가치는 함께 중요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이와 기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理는 어떤 것이 그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치, 본성을 가리킨다. 기氣는 어떤 것의 이치가 실현될 수 있는 재료이자 실현가능한 힘이다. 즉 이가 우주의 원리라면 기는 우주를 이루고 있는 에너지다. 이를 바탕으로 이이는 윤리와 경제, 이상과 현실, 정신과 물질은 조화되어야 하고 두 가치 모두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와 기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는 생각, 가만 보면 이이가 한때 심취했던 불교 철학과도 닮아 있다. 이는 조선 성리학에서 율곡 이이와 쌍벽을 이루는 학자 퇴계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배치되는 것으로 퇴계는 이가 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경제보다는 윤리, 현실보다는 이상, 물질보다 정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인간을 보는 데 있어서도 도덕적 이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이가 8세에 지었다는 시를 새긴 비석이 화석정 옆에 세워져 있다.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고 어려운 듯하면서도 쉬워 보인다. 그러니 허구한 날 내가 맞네, 네가 틀리네 싸우다 훗날 예송논쟁으로까지 이어졌으리라. 하다못해 현대에 와서도 붕당정치와 성리학을 공부하다 ‘멘붕’을 경험하는 학생들이 수두룩하다.


이이는 조선이 조화롭게 발전하고 또 강해지길 염원했던 인물이다. 세금, 교육, 국방, 정치를 두루 개혁하길 원했고 그랬으므로 한 가지 이론을 주창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현실 변화를 좇았다. 그의 기본 신념은 ‘정신과 물질의 조화’이기 때문이다. 오천원권 화폐를 꺼내들 때마다 율곡 이이의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그의 생애는 물론 사상과 신념은 모르쇠로 살아왔다. 현실에서 내게 중요한 것은 오천 원으로 교환할 수 있는 재화였기 때문이다. 물질에 치우치면 정신이 혼탁해진다. 새삼 율곡 이이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자운서원과 율곡 이이의 가족묘를 둘러보며 그의 진심을 읽는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33권 『50만 살의 청춘- 경기 북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파주시 : 그리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에서 발췌했습니다.


세부정보

  • 파주 이이 유적

    주소/ 경기 파주시 법원읍 자운서원로 204

    문의/ 031-958-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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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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