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실크로드의 길목, 평택호에서 만난 신라 노마드

“이제 배만 타면 출국이라네”


평택호관광지의 수변길을 걷다가 흥미로운 비석을 발견했다. 평택시가 2009년 세운 혜초기념비다. 당시 평택호관광단지에서 국내외 학자들이 모인 ‘UN실크로드 메이어스 평택포럼’이 열렸는데 이를 계기로 실크로드를 걸었던 혜초스님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실크로드포럼이 열린 것도 혜초스님의 덕이었다. 혜초스님이 순례를 떠나기 위해 당나라로 향한 출항지가 오늘날 평택‧당진항 인근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평택호예술공원 수변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쓴 신라의 고승 혜초스님(704∼787)은 16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공부하던 중 인도와 서역의 불교 성지를 4년 동안 순례한다. 갈 때는 말레이반도를 도는 바닷길을, 올 때는 톈산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는 육로를 이용했다. 실크로드를 걸어 순례를 마친 스님이 적어 내려간 인도기행문, 왕오천축국전은 그로부터 천 년 이상 흐른 1900년, 중국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됐다. 1908년 중국을 찾은 프랑스인 폴 펠리오는 막고굴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골라 고국으로 가져갔는데 그중에는 왕오천축국전이 있었다. 앞뒤가 훼손된 채 남은 3.6m의 두루마리 책은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평택호예술공원 옛 선박 모양의 관람대


혜초스님뿐만 아니라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도 불법을 찾아 평택 바닷가로 왔다. 오랜 옛날부터 평택, 당진 앞바다는 중부권에서 중국을 단거리로 갈 수 있는 뱃길의 출발지였다. 즉 로마에서 경주를 잇는 실크로드에서 한반도로 들어서는 첫 기항지는 평택, 당진이었다. 평택이면 평택이고 당진이면 당진이지 왜 두 도시 모두를 언급하냐 묻는다면 또다시 아산호냐 평택호냐의 논쟁과 비슷한 얘기를 꺼내야 한다. 평택은 어쩌다 이렇게 시명市名으로 갈등하는 지형지물이 많은지 모르겠다.

아산만 일대에는 조선시대까지 대진大津으로 불려온 큰 항구가 있었는데 현재로선 그 위치가 정확히 평택 쪽인지 당진 쪽인지 특정하기 어렵다. 옛 지도들과 사료들에 명시된 대진의 위치가 제각기 달라서다. 평택시는 포승읍 만호리 일대를, 당진시는 소악읍 한진포구 일대를 대진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만호리와 한진포구 모두 나룻배들이 오갔던 포구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 일대가 모두 대진으로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



서해와 만나는 평택호 전경


그런데 이미 당진唐津이라는 지명 자체가 ‘당나라로 가는 나루’라는 뜻이고 당진보다 북쪽에 있는 화성시 남양읍의 옛 이름이 ‘당항唐項’, 즉 당나라로 가는 길목이어서 이런 지명들로 볼 때 평택 만호리보다는 당진 한진포구가 당나라행 배의 출항지였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나 싶다. 사실 평택‧당진항은 오랫동안 평택항으로 불리다가 당진시의 오랜 노력과 설득으로 2004년 법정항명이 바뀐 결과다. 그래도 평택시는 법정항명보다는 평택항이라는 명칭을 대내외적으로 쓰고 있다. 이름 때문에 억울한 쪽의 손을 들라면 이 논란에 있어선 아무래도 당진 쪽이 아닐까 싶다.



평택항홍보관 전경


평택시는 실크로드 기항지로서의 이미지를 굳히기 위해 발 빠르게 ‘원효대사’를 영입했다. 영입했다는 표현이 부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은 이상 먼저 스토리텔링을 먼저 하는 곳이 임자일 터. 해서 평택섶길에는 평택호관광지 혜초비에서 팽성읍 신대리까지 이어지는 13km의 ‘비단길’ 코스가 있고, 혜초비에서 ‘원효대사 오도성지’라 불리는 수도사까지 이어지는 21km의 ‘원효길’ 코스가 있다. 원효길은 원효와 의상이 불법을 찾아 걸었던 길이라는 부제가 걸려 있다. 서라벌에서부터 먼 길을 걸어온 원효대사가 이윽고 대진에 닿았을 때는 퍽 의미심장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미 한 차례 고구려 국경을 넘다 간첩으로 오해받고 유학이 불발된 경험이 있던 원효에겐 꼭 당으로 가야 한다는 절실함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원효대사의 당나라 유학은 이뤄지지 않았다. 출국을 눈앞에 두고 잠을 청했던 그날 밤, 갈증을 느낀 원효는 어둠 속에서 물 한 바가지를 마신다. 다음날 그 물이 해골에 고인 물임을 알게 된 그는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마음이 생기면 우주 만물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 물과 깨끗한 물이 서로 다르지 않으니 세상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먹기에 달렸구나!’ 그리하여 동행했던 도반, 의상대사만이 당나라로 향하고 원효대사는 다시 서라벌로 돌아갔다.




남양호를 바라보는 수도사


원효길의 시작점이자 끝점 수도사는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오도悟道성지라고 주장하는 사찰이다. 661년, 그러니까 1360년 전에 두 스님이 하룻밤을 묵은 무덤가 혹은 토굴이 정확히 어딘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당시의 경로를 통해 대략의 위치를 추정해볼 수는 있다. 신라시대, 서라벌에서 당나라로 향하는 경로를 짚어보면 크게 경주-상주-보은-청주-목천-천안-평택을 거쳐 팽성의 경양포나 곤지진에서 배를 타고 현재의 아산 둔포면이나 계두진에 내렸다. 그다음 앞서 언급한 만호리 혹은 한진포구로 가서 최종적으로 당나라행 배를 타는 코스가 대중적이었다고 전한다. 그 길 위에 수도사가 자리했다는 점에서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물론 스님들이 다른 경로를 따랐을 수도 있고 수도사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묵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오도처일 확률이 높은 장소 중에서 원효의 업적과 깨달음의 내용을 알리는 전시관을 운영하고, 주변 관광지와 연계해 천 년 전 구도의 길을 되살린 곳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장소다.



원효대사의 오도성지라 주장하는 수도사 내 원효대사깨달음체험관


사실 전국에 ‘원효’와 관련된 사찰을 무수히 많다. 원효가 수행했다거나 나무를 심었다거나, 불법을 했다거나 하는 식이다. 경기도 내 여주 신륵사, 의정부 원효사, 안양 염불사, 고양 아미타사 등이다.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유명한 고승이자 사상가로서 원효대사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고찰도 드물다. 그 명성을 생각하면 그간 원효대사 관련 기념관이나 박물관이 오랫동안 부재했음이 의문스럽다. 수도사에는 지난 2017년 정부예산지원으로 건립한 원효대사깨달음체험관이 자리한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원효대사를 조명하고 깨달음의 순간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토굴체험실이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묵었던 토굴 재현실로 들어서면 짧은 애니메이션이 상영된다. 영상 속 원효대사 캐릭터가 해골물을 보고 깨우치는 순간, 관람객이 서 있는 바닥 내부에도 조명이 켜지면서 해골 모형이 드러난다. 왜 이곳이 기념관이나 박물관이 아닌 ‘체험관’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수도사 대숲 안에 마련된 해탈수관


체험관 뒤로 가면 가람을 내려다볼 수 있는 숲길이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멀리 포승읍 남양호가 보이고 대웅전 뒤편을 지나면 대나무가 우거진 작은 숲이 이어진다. 숲길에는 해탈수(解脫水)라 명패를 건 사각의 반듯한 벽돌건물이 있다. 원효대사가 마신 해골물을 해탈수라고 표현한 것인데 건물 내에는 이 해탈수를 상징하는 작은 인공못이 조성되어 있다. 해탈수 옆에는 특이한 식수 공간이 있다. 페달을 밟으면 해골 모형의 한 귀퉁이에서 물이 흘러나온다. 정수된 물로 안심하고 마실 수 있다지만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



평택항 서해대교 전경


해외 유학의 간절함을 찰나에 뒤집은 원효 마음속 깨달음의 실체를 오늘을 사는 중생이 헤아리긴 어렵다. 그저 말로 전해 듣고 머리로 이해할 뿐이다. 다만 그가 걸었던 원효길을 걸으며 천년을 거쳐 회자하는 어느 ‘자유인’의 모습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원효길은 하루 만에 종주하기에는 20km가 넘는 장거리라서 보통 평택호예술공원에서 평택‧당진항까지 1구간, 평택‧당진항에서 수도사까지 2구간으로 나누어 걷는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1권 『우리들의 캠퍼스- 경기 남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평택시 : 정주, 이주, 유랑의 광장>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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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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