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여주 사람은 시장에, 임금님은 지갑에

여주한글시장, 여주두지를 돌아보며





여주에는 여강길이 있다. 여강을 중심으로 총길이 118.8km, 11코스로 구성된 걷는 길이다. 여강길을 걸어 신륵사, 영녕릉을 비롯해 파사성, 이포나루터, 강천섬 등 여주의 대부분 명소를 다 돌아보며 이 고을의 역사, 자연, 문화를 두루 경험할 수 있다. 여주시는 코스마다 방향 지시 팻말과 코스 안내판이 곳곳에 비치하고 여강길 도보 여행자를 위한 전용 애플리케이션도 이용할 수 있게 해 초행자를 배려했다. 시에서 주관하는 단체 답사 프로그램도 많다. 기껏 예산을 들여 정비했지만 걷는 사람이 없어 진정한 길이 되지 못한 여타의 도보 코스와 다르게 홍보와 활성화가 이루어진 길이다.




여강길 4코스는 신륵사에서 원도심을 거쳐 세종대왕릉과 세종대왕역까지를 잇는 길로 ‘오일장터길’로 일컫는다. 총거리 13km의 내내 평탄한 길로 여러 길 중에서도 여주라는 곳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모든 코스의 축약본 같은 길이라 할 수 있다. 해서 신륵사 다음으로 찾아갈 여주 오일장은 여강길 4코스를 걸어 닿기로 한다. 신륵사를 출발해 연인교(옛 여주대교)를 건너 여주시청과 여주초등학교를 지난다. 여주초등학교는 여주관아의 부속건물인 청심루가 있던 자리다. 고색창연한 누정의 모습이었다는데 1945년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는 터만 남았다. 여주초등학교 교문에서 길을 건너면 바로 시장이다.




여주 오일장은 매 5일과 10일에 서는데 장이 열리지 않는 날에도 상설시장인 ‘여주한글시장’은 늘 운영되고 있다. 시장은 길 건너 제일시장과 이어져 꽤 큰 규모다. 어차피 한 구역 내에 있는 시장인데도 굳이 이름을 달리 부르는 이유는 여주한글시장의 콘셉트 때문이다. 시장 곳곳에 세종대왕, 한글을 테마로 한 조형물과 벽화가 있고 시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갤러리, 공방, 도서관 등의 문화예술공간이 곳곳에 자리한다. 본래 공산품 가게들이 모여 있던 중앙통거리를 2016년 문화관광형시장육성사업을 통해 ‘여주한글시장’이라는 새 간판을 걸고 정비했다. 한글시장답게 모든 간판은 한글로 적혀있다. 노브랜드, 비와이씨, 배스킨라빈스 등 원래 영어 상호의 간판을 거는 체인 가게들도 한글 간판을 걸었다. 간판의 한글화는 서울 인사동을 비롯해 전국 곳곳의 전통 거리에서 행하고 있어 새로운 시도는 아니지만 한글시장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 있게 느껴진다.




여주한글시장에서 꼭 들러볼 만한 장소가 있다. ‘여주두지’라는 생활문화전시관이다. 두지는 쌀을 보관하는 뒤주를 한자로 표기한 말로, 여주두지는 ‘여주 사람들의 소중한 이야기를 보관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2016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채록·채집한 여주 14개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와 물건을 소개하고 있다. ‘여주 시민의 100년 희로애락’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전시로 20세기 여주 촌락 사람들의 일상이 주제다. 실제로 사용했던 이발 의자를 그대로 옮겨온 변태한 할아버지의 ‘유쾌한 이발관’, 이제는 할머니가 된 18세 색시의 꽃가마, 평생을 수집해온 LP판과 카세트테이프, 할머니의 눈물겨웠던 일생을 투박한 그림으로 그려낸 그림책, 오래된 벼 타작기, 고기잡이 그물에 이르기까지 낡고 손때 묻은 소품들이 전시관을 채우고 있다. 전쟁의 후유증과 가난 속에서도 담담하고 성실하게 살아갔던 수많은 개인들을 상징하는 물건들이다.





죽을 만큼 힘이 드는 하루와 그래도 살만한 하루가 번갈아 지나가는 보통의 하루들이 한 해 두 해 더해져 일생이 되고, 그 일생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더해져 시대의 지층을 이룬다. 실은 어마어마한 개인의 삶을 우리는 잘 지각하지 못한다. ‘생활’이라는 게 그러하다. 그래서 여주 집배원 김수환 씨, 양촌리 참전용사 경인선 씨의 삶은 모르고 수백 년 전에 죽어 기록으로, 구전으로 이름난 왕과 문신, 무인, 승려들의 행적만을 겨우 짚어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장이란 공간에 주민이 주체가 된 전시를 꾸린 ‘여주두지’가 반짝반짝 빛나는 기획으로 느껴진다.

여주시장에 가서 만나는 사람이 세종대왕인가. 아니, 여주사람이다. 사족이지만 요즘은 시장 안 노점상도 현금을 강요하지 않는다. 현금 강요 때문에 사람들이 전통시장을 꺼리는 이유도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카드결제도 가능, 모바일 이체도 가능한 곳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만원 권의 ‘세종대왕’님 용안을 뵙기가 힘들어졌다. 그래도 한글시장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소년 세종의 동상은 무척 귀여우니 기념사진은 한 장 찍고 가기로 한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1권 『우리들의 캠퍼스- 경기 남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여주시 : 왕과 강>에서 발췌했습니다.


세부정보

  • 생활문화전시관 여주두지

    주소/ 경기 여주시 여흥로105번길 18 2층

    관람시간/ 화~토 10:00~17:00(12:00~13:00 휴게시간), 일,월 휴관

    문의/ 031-886-7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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